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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16차시 합평작(6월 5일 용)
1. 제3기 인생의 꿈 / 금우동
1.흔들리며 살았다.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채로 살았던 적은 없었다. 불합리한 구조와 피폐한 생활 현장을 생계를 위해 참고 견디었다. 마치 정해져 있는 것처럼 길들여진 인생으로 생을 마무리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다. 재능이나 역량과 자원은 특별하지 않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갈증과 목마름은 있다. 삶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2.지금까지는 인생 과업에 쫏기며 살았다. 꿈이 있었나? 상황과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포기하고 묻어 두었던 것은 무엇일까? 뭔가 근거가 될 만한 그루터기가 있어야 비비대고 매달려라도 볼 것이 아닌가? 주어진역할 만으로도 벅차서 곁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던 삶이었다. 새롭게 주어진 시간의 생활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그냥 부대끼면서 살아온 시간처럼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 적어도 새로운 꿈을 꾸려면, 특별한 재능이나 뭔가 남다른 역량이나 자원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꿈까지는 아니어도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대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좋아하고 존경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우선 꿈을 찾아가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강점은 좋아하는 데서 찾아야 하고 그런 맥락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테니까.
3.어떤 희망을 가질까? 어떤 꿈을 꿀까? 어떤 계획과 포부로 살아야 할까? 3기인생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아니, 아직도 희망과 꿈을 꾸고 무슨 계획과 포부로 진로와 장래의 성취하고픈 욕망이 남았을까? 어디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할까? 희망과 꿈, 계획과 포부는 있기나 한 것인가? 당연한 의문인데도 뜬금없는 질문처럼 당혹스럽다. 일상에서 시시콜콜한 잡동사니를 궁금해하고 효용성 없는 호기심에 에너지를 허비한다. 중요한 진로와 장래의 성취하고픈 욕망에 대해서는 이토록 막연하게 무관심할 수 있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일 뿐이다. 자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구조적인 뭔가가 아닐까?
4.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다르고 지극히 불평등하다. 적어도 최소한의 기회가 ‘공평’에 가까워지도록 기본적인 인권의 개념과 그에 맞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무척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나 책임과 무관하게 출발선부터 불공평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선천적인 특징, 후천적인 환경 이 둘의 조합, 이 모든 것이 지극히 독특하다. 개인의 독특한 가치를 인식하고 특별한 가치를 실현 시키는 방법이 유일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그렇지 못한다면 결국 어중간한 실패 인생이 될까 걱정이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확고한 자아를 세우고, 성취와 성과를 축적하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꿈이기만 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를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채울수 없는 허기와 공허함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 다시 그 꿈너머 꿈을 찾아 나선다.
5.“인생은 결국 아직 모르는 재미를 찾아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여행이다.” 모리오 카츠요시가 한 말이다. “생명은 초점을 맞추어 전념하고 단련해야 크게 자랄 수 있다.” 해리 에머슨 포스틱의 가르침이다. 삶의 질을 성숙시키기 위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자기만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6.18년 이상 다니던 직장이었던 신협이 IMF 금융위기와 함께 파산 청산 과정을 4년간 겪게 된 것이 인생의 전 과정에 가장 영향이 컷던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파산관재인 수석보조인 업무를 4년간 하면서 금융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게 된 것, 그 이후 실직과 취업을 반복하면서 직업상담사가 되고 만학으로 청소년복지를 전공하고 준학사가 된 것, 특수재활교육학을 전공하고 학사가 된 것을 통하여 사회복지사, 청소년 지도사, 평생교육사, 장애인 재활상담사, 장애인활동지원사,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등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장애인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의 고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7.환경적 어려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극복해왔던 점, 장애인 가족과 함께하면서 이에 필요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각종 제도적 정책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던 점은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러한 실천 행동은 세상의 각종 기회로부터 소외되는 등 삶의 질에 대한 각종 장애와 불공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통하여 장애와 복지 및 휴먼서비스의 다양한 전문성의 확보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와 동기부여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나의 역량이고 이를 위한 꾸준한 탐색과 고민 그리고 끊임없는 실천과 행동은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8.일 중심 성격이어서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감성적으로 세심하지 못해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데 덜 예민한 편이다. 업무 수행 능력에 집중하다 보니 동료와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살피지 못하는 것이 나의 단점이다. 일할 때 주어진 과업을 잘 수행하는 것이 1순위지만, 업무는 특성상 주변 업무관계자와 교류하여 팀워크를 발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복지와 장애인 관련 휴먼서비스케어에 대한 학업을 전공하면서 듣기의 미학과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냉정하게 성찰하는 자세와 태도로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오랜 직장 경험과 장애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스로 살피고 관계에 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단점 극복의 상당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9.평균수명이 길어졌다. 일반적으로 20~30년 이상은 더 산다. 새롭게 주어진 삶이 과거의 한 세대의 삶이다. 아니, 얼마나 더 길어진 인생을 받아들여야 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피터 라스켓이라는 영국의 사회 철학자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윌리엄 새들러는 인생 주기 4단계론과 새로 출현한 제3기 인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생존이 길어지면서 생활의 영역도 넓어지고 마침내 돌봄의 휴먼 서비스도 한 차원 더 깊이 발전하고 있다. 어쩌면 제3기 인생 세대가 시대의 진로를 결정하고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 참고 : 방 임대유감, 서산, 임신서기석
2. O(영)기도 암이다! - 이호규
1) 퇴직을 얼마 앞둔 어느 해 1월 말이었다. 딸아이 혼사를 마치고 며칠 지나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위내시경을 할 때 수면마취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데 처음 받는 대장내시경 검사라 수면으로 하게 되었다. 내시경 할 때마다 부분 마취를 위해 입에 머금고 있어야 했던 약물의 끈적함이 불편했었는데, 주사 한 방에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검사가 끝나 있었다. 오히려 꿀잠을 자고 난 듯 개운한 기분이었다. 직장에서 격년제로 하는 건강검진을 일상처럼 받았었다.
2) 어느 날 오후였다. 병리과에서 각종 조직검사 결과를 입력하는 여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실장님! 며칠 전에 내시경 검사를 하셨던 모양이지요?”라고 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때 담당하시던 의사 선생님이 다른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처음 하는 대장 검사라 선종이 있어 제거했다는 말은 들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장이 아니고 위장 검사에 약간 이상이 있는 듯하니 외래진료를 빨리 보셔야 할 것 같다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3)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오랜 병원 근무 경험으로 어떤 직감이 왔다. 수면내시경 탓으로 그 당시 의사가 설명은 하였지만 잘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검사 과정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조직 일부를 떼 내어 배양검사를 하는데 그 결과에 이상 반응이 나왔다는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며칠 지나 소화기내과 전문의에게 외래진료를 받았다. 조직검사 결과는 악성 종양이 움을 트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정밀검사를 해서 적합한 수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검사 결과에 대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혼란한 마음 상태였다. 아무리 작은 악성 종양도 암이란 이야기였다.
4) 아! 나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동안 소화 기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맹신했었나 싶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도 그렇게 받는 성격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결과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였지만 몇 날, 며칠 동안 심적 동요를 겪으며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신의료기술을 믿고 평안한 마음을 먹으라고 위로했었지만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5) 몇 가지 추가 정밀검사를 하였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위 점막 얕은 곳에 움트는 악성 세포이기 때문에 최근 개발된 내시경 수술 방법¹⁾으로 간단하게 시술할 수 있다고 했다. 일종의 올가미 수술법으로 내시경으로 위장 병변까지 들어가 내시경 끝부분에 설치된 의료용 올가미로 해당 부분을 옭아매고 고주파 전류를 흘려보내어 조직을 절제하는 신의료기술이었다. 뿌리가 깊으면 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병실을 예약하고 시술을 기다렸다. 수술실이 아닌 외래 내시경센터에서 진행되는 시술 형태였다.
6) 일박이일 입원으로 시술과 안정을 갖고 퇴원했다. 얼마 후 예약된 날짜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암센터 다학제진료실이었다. 해당 질병과 연관되는 여러 과 교수들이 모여서 진료하는 통합진료실이었다. 평소 잘 아는 교수 여러 명을 만나고 보니 왠지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것 같았는데, 같은 시기에 같은 시술을 받은 동료 교직원 두 명도 같이 진료를 받다 보니 동류의식이 생겨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시술은 잘되었다고 하면서 조직검사 결과는 1기도 아닌 O(영)기 정도라고 했다.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지내라고 일러주셨다. 보험공단에는 산정특례자로 등록되었다. 관련 질병으로 받는 모든 진료비는 소액만 부담하는 제도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7) 검사 결과와 시술을 통해 엄청난 내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는 마치 영원할 것처럼 느꼈던 삶에서 유한적 존재로 인식되며 내 삶이 언제까지일지 모른다는 시한부 인생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내용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우선 내 몸을 추스르기 위한 건강식품을 챙기게 되었고, 그동안 바쁜 일상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해외여행에 대해 갈급함이 생겼다. 예전부터 아내가 중국 서안의 진시왕 병마 갱을 보고 싶어 했었는데 병간호의 고마움으로 당장 다녀왔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매년 몇 군데를 정하여 열심히 다니고 있다.
8) 내 몸의 질병은 내 삶의 잘못된 습관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는 내 몸이 던져주는 사전 경고 메시지를 잘 모르고 살 때가 많은 것 같다. 모든 질병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사전 전조증상으로 작은 메시지를 여러 번 던져주었지만 간과하고 살아온 것이다. 나 역시도 위장계통에 대해서는 자만했던 것 같다. 늦은 시간에 배가 고프면 잠이 오지 않아 무엇이라도 먹어야 하는 오랜 생활 습관이 있었다. 소화 기능이 좋다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었던 것 같다. 결국 작은 메시지는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고, 삶을 바라보는 방향성에 대해서 더 큰 변화가 왔다. 결코 내 몸에 대해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 하자!
1) ESD/EMR: 내시경적점막절제술
3. 100송이 꽃이 되신 아버지/김도형
(1) ‘난, 한 줌의 흙이 되기보다 100송이 꽃이 되겠소.’
한 사람의 기증으로 100여명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숭고한 생명 나눔, 인체조직기증원의 홍보 슬로건이다.
몇 해 전 아버지는 안구와 팔· 다리뼈 등 조직기증을 하고 돌아가셨다.
(2) 소방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화재진입과 인명구조에 헌신적이셨다. 장손으로 문중 일에 열정을 다하셨고, 결손가정 후원, 헌혈과 민방위 강의로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등 투철한 봉사정신의 소유자였다. 8~90년대의 열악한 소방장비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솔선하여 화재진압에 참여하면서 유독가스를 많이 흡입하였다.
정년퇴직 후 5년이 지난 65세경에 대학병원에서 ‘특발성 폐섬유증’(폐가 섬유 화되어 밑에서부터 점차 굳어 올라오는 병으로,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고 함) 진단을 받았다.
평소에 운동으로 다져진 강골에 건강체였던 까닭에 10여년을 잘 버티시다가 병이 악화되어 76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3)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자식들에게 장기기증 서약사실을 알렸다.
장기기증센터에 문의한 결과, 대부분의 장기기증은 뇌사 등 생존 시에 가능하고 사후에는 8시간 내에 안구기증만 가능하였다.
“아버지, 사후에는 안구기증만 가능하다는 데, 그래도 하실래요?”
‘끄덕 끄덕’ 아버지는 행동으로 강한 의지를 보이셨다.
사망 당일 오후 2시경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고, 안구기증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7시경에야 첫 수증 자가 나타났다. 늦지 않게 기증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는데, 이어서 들려온 소식은 수증 자가 기증자의 나이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까지 돋보기 없이 신문을 볼 정도로 건강한 눈을 가졌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4) 다음 수증 자를 기다리던 차에 인체조직기증원에서 전화가 왔다.
“사후에도 조직기증은 가능한데, 기증하시겠습니까?”
조직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망설임 없이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폐’ 말고는 온 몸이 건강한데, 폐 때문에 일찍 죽는 것을 억울해 하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구만 기증하는 줄 알고 있던 다른 가족들은 뼈나 인대 등 인체조직을 기증한다고 하니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 끝에 조직기증도 아버지의 유지에 따르는 것으로 모두가 동의해 주었다.
(5) 돌아가신 다음 날, 팔·다리 뼈 대신에 나무를 넣고 듬성듬성 대충 기운 아버지의 몸을 대하니, 가슴이 아리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입관 실에 여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들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화장터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뼈 가루(아버지는 그 양이 조금 더 적었다)로 나오는 것을 보자, 아버지의 험한 마지막 모습을 보고 슬퍼했던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버지 정말 잘 하셨구나!”
화장터에선 누구나 예외 없이 한 줌 뼈 가루로 나온다. 잘 살고 못 살고의 차이도 없었고,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의 구별도 없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뼈 가루는 자연에 뿌려지거나, 묻히거나 봉안될 뿐이었다.
기증된 아버지의 뼈는 골육종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뼈 이식이 필요한 임플란트 시술에, 골절된 뼈의 연결에 값지게 쓰여 진다고 했다. 뼈의 가치가 그 차원을 달리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족들은 인체조직기증 서약에 모두 동참하였다.
(6) 인체조직기증이란 장기를 제외한 뼈·연골·피부·인대·심장판막·혈관 등을 사후에 기증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체조직을 기증하면 100명이 넘는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인체조직기증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필요한 인체조직의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인체조직 기증을 하고 싶다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조직을 기증하겠다는 ‘희망서약’을 하면 된다.
근래에 가끔 길을 가다가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혹시, 100송이 꽃이 된 아버지이신가?’ 생각하며 잠시 걸음을 멈추곤 한다. 아버지의 뼈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 진다.
4. 클래식, 그 은밀한 여정 /김병연
나른한 오후, 의문의 선물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한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휴대전화에 보낸 발신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제 서야 한 여성이 떠올려졌다. 처음 동호인 모임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면 그저 눈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다. 이후 문학 기행으로 마침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취미가 클래식이라 즐겨 듣는다고 했다. 나도 음악으로는 클래식을 좋아한다면서 서로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선물은 바이올린 여성 연주자의 사진이 담긴 동영상 클래식 모음집이었다. 그간 황폐해져 있는 마음에 단비를 흠뻑 맞은 느낌이었다. 청량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천지였다. 그 중 언뜻 눈에 들어오는 곡이 하나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였는데 평소 좋아하던 곡이었다. 감상하기에 따라 현장 못지않은 감흥을 느끼는 묘미가 있었다. 연이어 다섯 곡이나 들었다. 차이콥스키,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슈베르트 등 명 작곡가들의 심포니를 들으며 난 깊은 여정에 빠져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해줘서 점심을 대접했다. 그녀는 식사 후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녀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산 중턱에 이상한 하얀 건물 한 채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지은 지 일 년 남짓 되었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내부 양옆에 대형 오디오 스피커의 웅장함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진정한 클래식 애호가였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 조금씩 클래식에 관심을 가졌다. 용돈을 모아서 클래식 공연장을 쫓아다녔으니 자연히 공부는 관심 밖에 밀려날 정도였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고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결혼한 큰 형님 아파트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 눈에 띄는 것은 전축이었고 옆 진열장 안에는 각종 LP 판이 빼곡했다. 어린 나이에 무척 부러웠다. 나에게 파 엘 벨의 ‘케논’ 지금도 잊지 못하는 불멸의 곡이 되었다.
그 이후 바쁘게 사느라 한동안 클래식은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최근 라디오 음악 방송을 듣기 시작했는데 한 FM 방송 클래식 코너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 차를 타고 청취하면서 듣는 귀를 훈련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 모르게 장롱 깊숙이 숨겨 둔 집 아이들 돌 반지 등 각종 금붙이를 처분하였다. 중고 오디오도 구매하여 방 한 귀퉁이에 각종 장비를 설치해 놓았다. 비로소 소망 하나를 이루어 놓은 것 같아 볼 때마다 뿌듯하다.
음악적 아름다움은 오로지 음악적인 것이라고 했다. 다른 어떤 예술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음과 음의 결합을 통해 나타나는 그 어떤 것, 그것이 음악의 진짜 아름다움 아니던가. 음악 미학자 한슬릭(E Hanslick)의 주장이다. 덧붙여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갈파하였다. '“교황곡”이야말로 예술 중에 가장 강렬한 예술로서 자신이 감지하는 영혼을 완전하게 표현했다.'' 교향곡이 진정한 음악이라고 보았다.
그녀와 두 번째 만남은 라이브 카페였다. 뒤늦게나마 클래식에 눈을 뜨게 해 준 감사의 의미였다. 길옆 도로에는 한 층 만개한 이팝나무의 하얀 꽃잎이 하염없이 봄바람에 곱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서 외모며 옷차림, 말투가 상당히 앳된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음에 속으로 적잖이 놀라움을 감출 길 없었다. 우린 만남을 지속할 것을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헤어졌다.
지금도 눈 감으면 그 여정이 꿈같이 떠오른다. 물론 은밀한 만남이기도 하였지만, 클래식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 큰 자리를 차지했으리라. 은은하게 귓가를 울리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비창'은 내 인생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마치 거대한 콘서트 현장에 있는 듯 착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손수 끓여 준 커피는 분위기를 한층 더 고무시켜 주었고,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깊은 잠에서 일으켜 세운 계기로 부족하지 않았다.
며칠 전, 책 두 권을 주문했다. 클래식 입문에 관한 책으로서 한 권은 그녀를 위함이다. 비발디 '4계'부터 첫 여정을 내딛게 되었다. 오디오를 켜 놓고 계절마다 달리하는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에 내 영혼을 맡겨 본다.
소녀 같은 그녀는 클래식과 함께 여정의 중심에 있다. 책을 주기 위해 만날 날을 기다리는 지금, 나도 모르게 설렌다.
5. 상생 / 조장래
1)오늘 일정은 두 달 전에 일찌감치 스케줄 표에 잡혀진 날이다. 날이 다가오는 사이에 몇몇 계획들이 끼어들었다. 모두들 고만고만한 계획들이었다. 최종결정의 경합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뜻 밖에 잊고 있었던 계획하나가 강력하게 후보로 부상하였다. 처가의 일족들이 꽃놀이 여행도 같은 날에 잡혀진 계획 중의 하나였다. 움츠렸던 결정 장애가 마음을 옥시각신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의 결정도 그렇지만 아내를 설득시키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고민과 협의 끝에 이번 여행은 각각 자유로워지기로 하였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도생하기로 했다. 이럴 땐 각자도생의 길이 상생하는 길이었다.
2)새벽에 출발해야하기에 전날 해거름 녘에 아내가 떠났다. 이미 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던지 아내의 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빠져 나갔다. ‘자유로움’의 필요조건 하나는 이미 갖추어진 셈이다. 아내 없이 맞이한 저녁은 약간 허전했다. 비둘기 집 같은 아파트에 둘만 지낸지가 십년도 넘었다. 두 자녀가 독립하여 떠난 뒤 빈 둥지 가족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었다. 하루 정도는 견딜 만한 허전함이다.
3)오랜만에 아내 없이 지낸 밤 덕인지 맞이한 아침햇살은 더없이 화창했다.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내킨 김에 휘파람도 불어본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휘파람을 불어본 지가거의 오십년은 됨직하다. 나이가 들어 입술이 무뎌진 탓일까. 몇 번의 연습 끝에 간신이 소리는 터졌다. 예전처럼 맑은 소리는 아니었다. 겉옷 소매를 대충 걷어 올려 팔뚝을 노출시켜본다. 입고나갈 옷을 선택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팔뚝에 와 닿은 공기는 상쾌함을 지나 쌀쌀하게 느껴졌다. 바람은 연록의 가지를 춤추게 했으나 바래가는 꽃잎에게 꽃비를 강요했다. 그리고 나에겐 팔을 덮을 긴 셔츠를 요구했다. 만끽하기에는 더없는 맑은 날이지만 아침나절과 저녁나절은 다르다. 반팔의 상쾌함과 겉옷의 따스함으로 몸도 살리고 마음도 살려야 한다.
4)두어 달 전에 날짜만 미리 잡힌 오늘은 한반도 땅 동쪽 끝 호미해안 둘레길을 가는 날이다. 구룡포의 일본인 거리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준비한 간식으로 배는 반쯤 찬 것 같다. 허기가 진 것도 그리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벼락치기 식사였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호미해안의 둘레길 탐방에 들뜬 탓일까. 호랑이 꼬리를 밟게 될 두려움 탓일까. 모두가 들뜨고 허둥대는 기분이다.
5)2004년 이곳 해맞이 광장에 세워져 유명세를 탈 만큼 탄 상생의 손이 반긴다. 오른손은 바다에 있고 왼손은 육지에 자리 잡았다. 두 손은 인류가 화합하고 화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상생의 의미로 만들어진 조각물이다. 오른손은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환원적이며 서구적인 패러다임을, 왼손은 감성과 직관적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적 패러다임을 상징한다. 한 번에 2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떡국을 끓일 수 있는 솥, 그야말로 함께 살고 상생을 상징하는 대단한 솥을 뒤로하고 탐방에 나섰다.
6)절정을 자랑하는 유채꽃과 곧 푸를 준비를 하고 있는 청보리가 장관이다. 춘궁기의 보리떡이 떠오른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방정부의 준비가 벌 나비를 유인하는 꽃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나비가 된 느낌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해안을 따라 설치된 데크로 올라섰다. 여느 해안에서나 볼 수 있는 조성된 데크길이다. 쳐다본 벼랑 위에는 나무들이 위태로이 서 있다. 서 있다기보다는 매달려 있다. 안쓰럽다. 벼랑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바다에 떨어질 것 같다. 태평양의 거친 바람에 할퀴고 그가 몰고 온 파도에 깎인 벼랑이다. 벼랑은 틈새를 내어 나무를 잡아 주고 나무는 가지를 펴 벼랑의 깎임을 막아 주었다. 벼랑에 선 나무는 상생이 빚어낸 걸작들로 가득 찬 전시장 같다.
7)해파랑 바위 벼랑을 따라 선바우도 있고 먹바우도 있다. 하선대도 있고 흰색바위인 힌디기와 검둥바우도 있다. 벼랑에는 세파에 시달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우에 구멍이 있다. 그중에서 힌디기 바우의 구멍에 돌을 던져 넣으면 소원을 들어준단다. 세 개의 돌을 준비하여 던졌으나 허탕이다. 통통 목선을 타고 고기잡이 간 낭군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던 어촌 아낙이 애태우던 벼랑위의 소원바위가 원망스러워진다.
고기잡이 간 낭군의 안전과 만선을 비는 아낙의 마음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기잡이 간 낭군의 노동은 서로를 살리기 위함이리라.
8)라인강의 롤레라이 언덕의 전설이 생각났다. 전해오는 이야기의 쓸쓸함이 서려서일까 연오랑과 세오녀의 테마공원 언덕 4월 바람이 꽤 쌀쌀맞게 맞이한다. 따뜻한 커피가 생각난다. 때마침 그곳에 자리한 카페가 반가웠다. 나의 몸을 녹여준 커피가 더 없이 고맙다. 자리차지로 분주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망중한의 생각에 잠겨본다.
파랗게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먼저 몸을 녹인 사람들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상생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9)벼랑 끝에 선 나무가 우리네 삶 같다. 평평한 땅에서 이웃의 도움 없이도 사는 귀천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금수저 같은 사람이다. 그저 그런 가파르지 않은 견딜만한 비탈에 버티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은수저나 동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가파른 그야말로 직벽 벼랑에 매달려, 살기 위해서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살기 위해서 버둥대는 사람 같다.
10)이웃의 도움이 없이 평지에 사는 사람은 고마움을 모른다. 이웃도 모른다. 자신만을 알며 심지어 물려준 부모의 은덕도 관심 없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잘나서 얻은 자신의 복으로만 여긴다. 비탈에 선 사람은 지지해주는 사람에게 그저 그렇게 고마워 할 것 같다. 벼랑에서 안간 힘을 쓰며 사는 사람은 틈을 내주며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감싸 안은 벼랑 같은 이웃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고마워하며 그들의 은혜를 안다. 벼랑 아래로 기울어져 가는 나무를 세우기 위해 치켜 불어주는 바람과 같이 손잡아 끌어주는 이웃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 것이다.
벼랑 끝의 나무와 같이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고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소망해 본다.
6. 허당 /손정희
날씨가 더워지면 낮 동안 태양에 달궈진 차 안은 그야말로 찜통이 된다. 5월의 어느 날, 퇴근할 때 차 안이 더울 것을 염려하며 주차를 지하에 하려고 했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가 보다. 지하 주차장이 만원이었다. 한산했던 지하주차장이 5월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지하주차장은 주차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옥상 주차장으로 올라가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왔다.
한 주에 한 번 출근하는 월요일, 저녁 수필 수업에 더하여 4시부터 미술 특강이 있어서 3시면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 5월 3시란 시간은 태양이 한창 뜨거울 때다. 퇴근시간 옥상으로 가 차에 올랐다. 아직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차 안은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힌다. 당장 에어컨을 켜고 문학관으로 향했다. 한참을 운전하다 보니 차 안이 시원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날씨가 왜 이렇게 더워졌을까, 에어컨이 고장 난 걸까, 지난달 서비스센터에 갔을 때, 직원이 에어컨 필터 교체하라는 것을 그냥 와버린 일을 생각하며 후회했다. 시내로 가는 동안 온갖 궁리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뿔싸 이런 바보, 에어컨을 난방으로 돌려놓았었지.’ 갑자기 생각났다.
지난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이틀 전 남편과 외출하면서 빗속 쌀쌀한 날씨에 오들오들 떨었다. 에어컨을 난방으로 돌려 가동했다. 에어컨이 아닌 난방으로 돌려놓았던 것을 까맣게 잊었다. 더워서 2칸이나 올려놓고는 한증막같이 숨이 턱 막힐 정도가 되어서야 잘못된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이없는 상황, 나의 무딘 감각을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일 처리가 완벽하다고 한다.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 줄 안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작은 실수를 가끔씩 했고 혼자 수습했다. 하지만 남들은 알지 못한다. 깐깐한 성격에 자신이 실수하지 않아서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금방 쓴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 자동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외출할 때는 현관문을 잠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는 한다. 이처럼 나는 겉보기와는 다른 허당이다.
오래전, 정말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청송으로 귀농하기 전, 자두나무를 심어놓고 대구에서 주말마다 다니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대구로 나오며 삼자현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며 놀다가 집으로 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데 뭔가 허전했다. 가방이 없었다. 차 안을 살펴봐도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땀이 나고 초조해졌다. 회사의 모든 회계업무를 맡고 있었기에 가방에는 회사 업무에 관한 USB, 보안카드와 법인 신용카드는 물론 개인 카드와 현금이 들어있었다. 그날따라 현금도 많이 있었지만 현금은 문제 되지 않았다. 잃어버리면 수습할 복잡한 일들, 아찔했다.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생각해 보니 중간에 휴게소에 내릴 때는 가방을 건드린 일이 없었다. 삼자현 휴게소 테이블에 두고 왔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휴게소로 전화를 했다. 커피를 마시고 가방을 두고 온 것 같다고 잘 살펴봐 달라고 했다. 주인장은 주변을 찾아보았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나를 보고 남편은 침착하라고 했다. 좋게 생각하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하면서 빨리 삼자현 휴게소로 가 자고 했다.
다시 청송으로 출발했다. 어떻게 삼자현까지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갔다. 삼자현 휴게소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급한 마음에 멀리서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보았다.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가슴이 덜컹대려 앉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테이블로 뛰어갔다. 의자에 가방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제야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로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다행이었다.
나의 어이없는 행동에 남편이 큰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함께해 주어서 고마웠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정신을 어디 놓고 그런 실수를 하느냐”라고 다그쳤다면 가방을 찾고도 우리는 서먹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깜빡깜빡 기억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다. 수십 년 전 엄마에게 정신 꼭 붙들어 매라고 당부하던 일을 이제는 딸이 나에게 한다. 그 당부에 답하듯 자주 쓰는 물건도 제자리에 잘 두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려고 한다. 그래도 가끔은 사소한 실수도 좀 하면서 살아야 인간적이지 않을까. 보기와는 달리 허당인, 가끔은 실수도 하는 내가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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