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9일 (수) 촬영.
인천시립박물관 갤러리 한나루에서
인천시립박물관 - 기타규슈시립대학 교류전시,<식구食口>란 이름의 전시회(2023, 2,24 ~ 4, 2)를 열고 있습니다.
갤러리 한나루의 입구입니다. 음식으로 하나된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 두나라의 젊은이들이 모여
비슷하면서도 다른 음식을 고르고, 공부하고, 전시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그렇게 우리는 식구가 되어갔습니다.
2016~2017
국수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면(麵)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면을 일컫는 말도 비슷합니다. 한국은 '면' 또는 '국수', 일본은 '멘'이라 부릅니다.
한국의 국수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곡물 반죽을 얇게 펴서 자르는 절면 틀에 압력을 가해 가닥을 뽑아낸 압면으로 나뉩니다. 칼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절면입니다.
한편 일본의 소바는
16세기 말 조선의 승려 원진이 메밀에 밀가루 섞는 방법을 도다이지에 알려주어 탄생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중국 중화면을 본따 만들어진 라멘은 19세기부터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됐습니다.
특히 1953년 개발된 닛신 식품의 인스턴트 치킨라멘은 이러한 위상을 더욱 공고화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식량난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만드는 방법을 배워와 삼양라면을 만들었습니다.
2018~2019
명절음식
우리는 같은 계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계절을 즐기는 문화도 비슷합니다.
새해에는 가족을 생각하고 여름에는 병에 걸리지 않길 빌며 가을에는 달을 즐기죠. 그 모든 순간에 떡이 함께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새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긴 떡으로 만든 떡국을, 일본에서는 양력 새해인 정월에 예로부터 신에게 바치던 떡으로 만든 조우니를 먹었습니다.
떡국.
조우니.
병에 걸리기 쉬운 계절 5월, 한국과 일본에서는 단옷날에 재앙을 쫓기 위한 각종 풍습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은 단군 신화의 영향으로 신성하게 여겨지던 쑥을 삶아 맵쌀가루에 넣어 빻은 수리취떡을,
일본은 자손 번영의 의미를 가진 떡갈나무 잎을 감싼 카시와모찌를 먹었습니다.
음력 8월 15일은 달을 보며 수확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날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날을 추석이라 부르며 송편을 먹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중추 혹은 십오야라고 부르고, 동글동글한 달맞이경단을 먹습니다.
송편(한국)과 달맞이경단(일본)
2020년
보존음식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채소를 오랫동안 싱싱하게 먹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시간을 담아 절인 음식들은 한국과 일본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참외, 무 등을 소금에 절이는 '침채,沈菜를 먹었으며, 18세기가 되어서야 고춧가루를 버무린 빨간 김치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채소의 숨을 죽이기 위해 한국의 김치가 배추를 소금에 절인다면, 일본의 누카즈케는 소금과 쌀겨로 만든 반죽을 활용합니다.
2021년
소고기
불교 국가였던 한국과 일본에서는 고기를 먹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몽골의 영향으로 고려말부터 소고기를 먹었지만, 일본은 육식금지령이 있어 1871년 이후부터 소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불고기는 양념한 고기를 굽는 요리로 조선시대에는 너비아니라고 불렸습니다.
최근엔 쌀밥에 국과 반찬을 곁들여 백반으로 많이 팔립니다.
규동은 단 양념에 소고기와 양파를 끓인 덮밥으로 1970년댑터 규동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 설렁탕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근대 지식인들이 육식을 권장랬지만, 오랜 시간 고기를 먹지 않아 사람들의 거부감이 컸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인에게 친숙한 된장과 가쓰오부시로 만든 소고기 전돌 규나베입니다.
2022년
스쿨푸드
하굣길 학생들의 출출한 배를 책임지는 음식이 바로 스쿨푸드입니다.
저렴한 금액, 넉넉한 양으로 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을 소개합니다.
간장, 참기름으로 만든 궁중음식인 떡뽁이는
1953년경 서울 신당동에서 고추장 양념을 추가해 팔면서 우리가 아는 떡볶이가 됐습니다.
일본 오코노미야키도 처음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대부터 밀가루로 만든 간식인 돈돈야키에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으며 오코노미(취향)야키(구이)가 됐습니다.
정치적 갈등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언어의 차이
그 어떤 것도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두 나라 청년들의 마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평화로 가득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문화 교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문채원 군 화이팅.
전시장.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문석인.
옛 수인선을 오가던 기차.
우현 고유섭 선생 동상.
우현 고유섭 선생 동상 건립문, 又玄 高裕燮 先生 銅像 建立文
일찍이 비류(沸流) 임금이 이 곳 미추홀에 터 잡은 이래 仁川은 우리나라 서해안의 추요지지(樞要之地)로서 간난한 민족사의
제단에 빈빈(彬彬)한 인재들을 바쳐왔다. 그러나 오늘날 인천을 돌아보매 그분들이 끼친 향기로운 자취 찾을 길 바이없어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행히 국제적인 해빙(解氷)의 물결속에서 문명의 바다 황해가 살아나면서 오랜 망각의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던 인천도 부활하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새로운 창조는 전통에서 우러나는 법! 인천문화의 재건을 도모함에 그 뿌리를 살피고자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이 한 번 이 의론을 일으키매 뜻있는 시민들이 일거에 호응하여, 인천이 낳은 위대한 고고미술사학자
(考古美術史學者) 우현 고유섭 선생을 제1회 새얼문화상 수상자로 추대하여 오늘 그 동상을 제막하기에 이르니,
이는 우리 인천사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정표(里程標)가 아닐 수 없다.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으로서 뜨거운
환호 속에 우현선생이 귀향하시는 오늘, 선생의 동상을 삼가 인천시민께 정중히 바치는 바이다.
이 뜻 깊은 자리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현선생의 고매한 학덕을 추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선생의 학문적 탁월성에
주목한다. 선생은 경성제대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및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졸업과 함께 1930년 모교 미학연구소의 조수로 발탁되고, 1933년 약관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고려왕조의 유서 깊은 고도로서 강골의 반일정신으로 충만한 개성에서 선생의 학문 활동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싱싱했으니,
도시락을 허리춤에 달고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전국의 유적지를 맨 걸음으로 또는 먼짓길을 덜커덩 굴러 오는 달구지를 타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한 민족주의자의 영혼의 편력은 자강불식(自强不息)했던 것이다.
이처럼 돈독한 학구적 열정으로 황무지와 다름없던 조선미술사 연구를 개척 초인적으로 논문을 발표 하였으니 그 업적은
해방 후 제자들에 의해 속속 책으로 묶여, 조선탑파의 연구(1948)를 비롯하여 10여권에 이른다. 우리는 이 엄청난 업적이 겨우
10여 년 남짓한 학문 생활 속에서 생산되었다는 점에 놀라고
그 업적들이 사계(斯界)에서 독보적 위치를 겸하고 있다는 저점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선생의 30주기를 기념하여 1974년 문무대왕 해중릉이 바라다 보이는 경북 감포와 선생의 고향인 인천에 각각 기념비와
추모비가 서고, 1980년 우현미술상이 제정된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우리는 또한 선생의 개결(介潔)한 삶의 태도에 감동한다. 선생의 학문정신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1939) 한 권에
요약되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항일(抗日) 두 글자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더듬어 감포 앞바다의 문무대왕 해중릉을
발견하고 그 감회를 기록한 이 글에서 화려한 무덤대신에 화장하여 그 골회(骨灰)를 동해에 뿌려주면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막겠다는 유조(遺詔)를 내렸던 문무대왕의 고매한 정신을 선생은 명심했던 것이다.
15세 소년의 몸으로 3,1운동에 독자적으로 참여한 선생의 숙성한 민족의식은 죽는 날까지 굽힘이 없었던 바, 일제시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말년의 훼절로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 쓴 뼈아픈 사태와 대비할 때 더욱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탁월한 학문세계는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고 학문 속에 칩거함으로서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 민족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조국 광복의 뿌리를 지켜 내려는 치열한 고투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이야말로 값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영원한 인천인이었다. 인천문화운동의 씨를 뿌린 경인기차 통학생친목회에 참가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선생은 인천을 소재로 한 적지 않은 양의 시가와 수필을 남겼다. <경인팔경>(1925), <성당>(1925), <해변에 살기>(1925),
<애상의 청춘일기>(1936), <정직한 신의 세계>(1936) 등 어느 글을 보아도 선생의 지극한 인천 사랑이 흠뻑 끼친다.
특히 <애상의 청춘일기>는 황해를 끼고 비류의 고도 능허대와 문학산 일대로 긴 산보에 오르는 선생의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생의 입지(立志)가 바로 역사 속에서 실종된 비류백제에 대한 생생한 호기심에서 말미암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애국적 자세 위에 성취된 선생의 학문적 탁월성의 근본 바탕은 자신의 뿌리인
인천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1944년 6월 마지막 병석에서 조국의 해방이 박두하였다는 말씀을 남긴 채 그토록 열망했던 광복을 일년 앞두고 그토록
사랑했던 인천에 환향하지 못하고 선생은 춘추 41세로 홀연 눈을 감으셨으니 하늘도 무심한건지!
더구나 선생의 유택이 개성에 있으매 두주(斗酒)를 사양하지 않으셨던 선생께 나아가 한 잔 술을 올리지 못함이 슬프다.
오호, 선생이 기세(棄世) 하신지 어언 48년, 선생의 뿌리인 인천에서 선생 의 학덕을 기리고자 함이 어이 그리 늦었던고!
새로이 동트는 황해문명의 거점 도시로서 인천 이 오랜 침체를 뚫고
거듭나기를 온 시민과 함께 다짐하는 것이 선생의 높은 뜻을 잇는 길임을 삼가 새긴다.
1992, 9, 2.
사단법인 새얼 문화재단 건립.
박물관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첫댓글 食口.좋은 글귀입니다.ㅎ
국수.떡.명절음식.
설렁탕.깍두기랑.
침샘 자극합니다.ㅎ
잘 보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