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8]정읍동학농민혁명 ‘샘솟길’을 걸어야겠다
어제 새벽, 인터넷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들을 뒤져보다, 문득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아연했다. 또한 동학혁명, 네 글자만 알뿐 관련사실들을 거의 알지 못함에 더 놀랐다. 관련자료들을 뒤진 까닭을 말하자. ‘찬샘별곡Ⅰ-108’에 쓴대로 올 겨울엔 조금은 ‘영양가 있는’ 글을 쓰고자 했는데, 그 프로젝트가 <우천 에세이: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이다. 어느 인터넷신문에 주1회(원고지 평균 50장) 20번 연재하기로 약속했는데, 날짜가 다가오자 겁이 더럭 났다. 지난 5월 18일(마침 광주민주화운동 43주년의 날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낭보朗報가 날아왔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 이 2건이 마침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2017년 이후 6년만의 굿뉴스 중의 굿뉴스이다. 6년 동안은 유네스코 자체 사정(규정 정비, 그 사연을 얘기하자면 길다)으로 미뤄졌던 것. 이로써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물은 모두 18건. 아태亞太지역에서 단연 으뜸이다. 중국은 13건, 일본은 7건에 불과하고, 북한은 2건이다.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은 유엔 산하 유네스코에서 1997년부터 2년마다 각 나라와 기관 등에서 접수를 받은 기록유산들을 엄밀히 심사하여 등재하는데, 지금까지 130개국 9개 국제기구의 기록유산 494건을 등재했다. 독일이 30건으로 세계 최다이고, 영국 24건, 네덜란드 21건, 프랑스 20건에 이어, 우리나라가 폴란드와 함께 18건으로 공동5위이다. 참고로 북한은 2017년 <무예도보통지>가, 올해에는 <혼천전도>가 등재됨으로써 2건이다.
내가 우리의 기록유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5년이던가 경복궁역 구내에서 열린 노무현 전대통령 관련 전시회에서 “기록은 역사입니다”라는 노대통령 친필의 엽서를 본 이후였을 것이다. 당시는 16건이었는데, 나름대로 16건의 내용과 가치 등을 요약정리하여 2016년 3월부터 <어린이조선일보(당시는 소년조선일보)>에 18회(총론+각론 16건+결론) 연재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같다. 중앙 일간지에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을 주제로 칼럼을 몇 편 싣기도 했는데, ‘기록의 나라’는 아마도 내가 처음 쓴 것같다. 기자들이 몇 번 인용하는 것을 보고 ‘저작권이 나에게 있는데’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아무튼,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것이 말목장터(전봉준장군이 처음으로 농민 1000명 앞에서 고부관아를 부수러 가자며 사자후獅子吼를 터트린 곳)의 엄청난 크기의 감나무(그 눈부신 광경을 지켜봤을)가 2000년초 태풍 매미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지금은 후계목이 자리잡고 있다)의 벌거벗겨진 나신裸身이었다. 가장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은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 장군 이하 20명이 사발형식으로 돌려가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혁명을 결의한 문서이다. 돌려쓴 까닭은 누가 주모자인지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모두 잡히면 "내가 주모자"라고 너도나도 나섰을 것이 틀림없다. 그 원본(혁명 당시 동지의 증손자 집 마루 밑에서 1968년 발견됐다)을 보고 숨이 막혔다. 아아- 이것이 그 사발통문이란 말인가? 묵묵히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이니 자유로워 기록물(유물) 한 건 한 건의 설명을 읽어가며 관람할 수 있어 좋았다. 옥에 갇혀 어머니에게 한글편지를 보낸 한달문, 고종의 유서, 전쟁 중인 형이 동생에게 부모와 돈을 부탁하는 편지 등도 인상 깊었다. 하기야 인상적인 유물들이 몽땅이지, 어디 한두 점뿐이겠는가. 유네스코는 그중 185건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 등재해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 또한 반가운 소식은 '직지의 고향' 청주에 <국가기록유산센터>가 지난 11월 1일 개관되었다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유엔산하 국제기구로서, 우리나라가 '기록의 나라'라는 것은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입증받은 의미가 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직지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을까. 대한민국 만세닷!!
이어 ‘농학동민혁명 박물관’을 관람하고, 추운 날씨에 배조차 고파서 밖으로 나왔는데, 2시반쯤 만난 정읍의 형님이 전봉준사당과 동상 그리고 황토현전적비를 보지 않고는 안본 것과 똑같다며 나의 길을 되돌려세웠다. 다시 찾은 기념관 맞은편의 사당이 어찌 전봉준 장군만의 사당이랴. 당시 농민들과 동학의 지도자(손화중, 김개남 등)를 이끌고 앞장서 나가는 녹두장군의 위용을 보라. 진짜 이 조각물을 보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다. 녹두장군의 상투머리에 형형한 눈빛 그리고 짚신을 신은 채 굳게 쥔 두 주먹.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같다. 실감이 났다. 뒷이야기도 재밌다. 친일파 조각가가 전장군의 동상을 만들어 세웠는데, 지자체장이 그 동상을 내리고 공모를 통해 조각가를 선정했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참 잘한 일이다. 동학혁명의 최고의 승전지, 혁명의 불을 당긴, 사당 뒤편 언덕빼기 황토현黃土峴에 올라 전쟁터를 조망하고 승전비를 올려다봤다. 그나마 1963년 박정희 의장때 세운 것이다. 사당 안의 전적비에는 대통령 전두환 이름 석 자가 훼손되어 있었다.
정읍의 형님은 고부군수 조병갑 악정의 상징인 만석보지와 첫 집회가 열렸던 예당마을까지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샘솟길’ 안내판을 유심히 보니, 27km가 되니 아무래도 ‘하루 트래킹’은 무리일 것같다. 조만간 1박2일 일정으로 샘솟길을 걷자고 다짐했다. 역시 역사는 현장이다. 현장을 더터보며 그날의 함성과 아픔을 기억하고 기려야지 않겠는가. 전남도청의 무수한 총알자국을 직접 가서 보아야 하고, 청와대 뒤 숙정문 옆 김신조소나무의 총알자국도 만져보아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나라가 망하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발해 유적지였다.
추모관에는 제주 4.3추모관처럼 유족으로 접수되어 확정된 분들의 명패를 모셔놓았다. 현재도 계속 접수중이다. 나는 그중에 한 분을 친하게 알고 있는데, 당신의 친할아버지가 전봉준 장군의 비서실장이었다. 사발통문에는 할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분(정남기)은 언론인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동학혁명은 그리 멀지 않은 근대의 전대미문, 가장 큰 사건이다. 그 다음이 3.1운동일까. 4.19과 5.18, 6월항쟁과 촛불혁명이 왜 그 뒤를 잇고 있겠는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고종의 친손자가 전주 한옥마을에서 지금도 살고 있듯이. 언젠가 글에서도 썼지만, 동학혁명은 이름부터 120여년 동안 수난의 역사를 걸었다. 심지어 ‘동비東匪’로 매도되기도 했고, ‘동학의 란’으로도 지칭됐다. 이제야 ‘혁명革命’으로 정립된 구한말 그 사건, 전국 90여곳에서 분노한 무지랭이 농민이 쇠스랑 등을 들고 나라를 제대로 세우자고 일어섰다. ‘울림의 기둥’공간에는 집회가 있었던 지역들을 명기한 돌기둥이 90개 세워져 있다.
어쨌든, 나의 연재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장담도 못하거니와 영원한 미지수이기 쉽다. 왜냐하면, 내가 전우용님 같은 역사학자도 아니고, 만물박사 도올 김용옥 님도 아니거니와 문화권력이자 ‘문답사(나의 문화역사답사기)’의 대가 유홍준 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동학혁명, 4,19혁명,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팔만대장경,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 의궤, 어보와 어책, 유교책판 등에 대해 떠벌리며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저 하나만 말한다면, 세밀한 내용까지 일반인들이 모두 세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18건의 대강의 줄거리만이라도 알고난 후 ‘아- 우리나라가 고래로 나라는 작았어도 문화강국 중의 강국(고려는 진짜 세계 최강의 문화강국임)이었고 자랑스러운 기록의 나라였구나’ 정도만 이해해도, 어깨가 으쓱해지고 자부심과 자긍심이 샘물처럼 샘솟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람으로 나의 앞으로의 졸문을 읽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