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3
6월26일[연중 제1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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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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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X47F3MOJfk (문재현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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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심판과 단죄는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묵상하다가 유명한 속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오래 오랜 간직해야 할 상대방이 내게 베푼 호의와 은혜는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내게 보인 지극히 작은 소홀함이나 무성의, 상처들은 돌에 새기듯이 마음 깊이 남겨둡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단단히 복수의 칼을 꺼내 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특히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끝없이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잊고 싶은 지난날의 과오도, 어제의 부끄러움도, 깊은 상처도, 미련도 아쉬움도 자꾸만 강물에 실어 떠나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가기 고달프고 힘겨운 우리인데, 이것저것 이고 지고, 안고, 끼고 살아가려면 얼마나 더 고달프겠습니까?
특히 인간관계 안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숱한 상처들, 섭섭함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은 지니고 있을수록 손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 지난날의 죄와 과오를 씻고 새 생명의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심판과 단죄의 삶을 넘어 사랑과 용서의 땅으로 넘어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넘어섬과 건너감의 장소인 은총의 강이 필요합니다. 그 강은 다름 아닌 고백성사요 성체성사입니다. 이 은혜로운 화해와 사랑의 강을 통해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때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예수님은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뒤엎을 충분한 능력을 지니셨지만, 끝까지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신 분,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셨지만, 오직 사랑과 용서의 길만을 걸어가신 분, 한평생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가신 분이셨습니다.
심판과 단죄는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은 그저 예수님의 권고대로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더 자주 용서하는 것,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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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에서 이웃에 관한 판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도 산상설교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집약체입니다. 처음 ‘하늘 나라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행복에 이르려면 ‘사랑의 계명’일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심판하지 않게 될까요? 우선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율법이든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영화 ‘세븐’(1995)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아내를 질투라는 이름으로 죽인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살인범은 ‘칠죄종’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의 죄가 만연해 있음을 경고하려 합니다. 돈만 아는 변호사를 죽이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죽입니다.
범인은 형사와 그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분노’를 느끼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범인은 아내의 머리만 박스에 넣어서 형사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형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법을 어기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판단하며 미워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안 되고 용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렇다면 남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인 들보에 피를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출입문 들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던 파스카 예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넘어서 판단 자체가 되지 않게 하려면 판단을 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죽어 봉헌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다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16)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하는 마음이시지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성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들보에 피가 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주면 돼지 목의 진주처럼 성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음 착한 분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한 자매에 대해 미운 사람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에 나가면 계속 용서하라는 복음만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성체를 영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용서하기 싫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저한테 용서하라고 해도 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니까 저의 이 마음 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 받으시고 예수님이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 자매와 마주쳤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화도 안 나고 분노도 안 생기고 ‘용서해야 하는데’ 하는 분심도 안 생기고 그냥 평화롭고 그 자매가 싫지도 않고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구나!’
예수님 마음은 심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내려놓고 무슨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지니고 심판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이 무슨 용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나의 본래 마음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상 심판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분의 마음을 장착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노력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찾아 나선 양철나무꾼이 저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철나무꾼은 오즈에게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심장이 이미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 우리 마음을 죽이시고 성체로 들어오셔 우리 마음이 되십니다.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판단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고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을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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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산보를 하면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분들을 봅니다. 대부분의 개들은 목줄이 있습니다. 주인은 목줄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목줄이 개를 구속하는 것 같지만 목줄은 개와 주인을 연결시켜주는 도구입니다. 목줄은 지나가는 사람을 개에게서 안전하게 해 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개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다른 위험으로부터 개를 보호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개들은 목줄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목줄이 주인과 연결시켜주는 도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주인이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목줄은 개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개의 목줄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하늘을 나는 연을 연결시켜주는 연줄입니다. 연줄은 연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은 연이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연은 스스로 바람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봅니다. 컴퓨터,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청소기는 모두 전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일지라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무선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주파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이 있어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혈관에 이상이 생기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군대는 계급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사는 직책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제도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이제 ‘신앙’이라는 줄로 연결되었습니다. 신앙의 줄이 연결되어 있으면 고난이 다가와도,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편 23장은 신앙의 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 주시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라.” 아브라함은 조건 없는 믿음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제물로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땅과 후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신앙의 줄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줄을 약하게 하는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판과 험담은 주로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내 신앙의 줄은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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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보다는 지금 있는 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나이였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떠나기보다는 고향에서 친족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아브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원망도 없이, 불평도 없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실천이며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아브람보다는 모든 면에서 여건이 좋았습니다. 나이도 아브람보다 20살이나 더 젊었습니다. 저를 환영해 줄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있었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재정상태도 안정적이었습니다.
뉴욕은 미지의 두렵고 떨리는 곳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센트럴 파크가 있는 곳입니다. 멋진 뮤지컬을 볼 수 있는 문화의 도시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들이 멈추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건강을 주셨고, 백신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한인 사제들과 캠핑을 다니면서 친목을 나누었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저를 이곳 뉴욕으로 보내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책임을 묻고 다시는 그런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언론과 방송은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기업은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묻는 것이 미래를 향한 일이라면 지금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격리된 사람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환자들을 보듬어 주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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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1-2절)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선입견이나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관계 안에 장벽이 쌓이게 되고 사람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했다. 우리는 그 행위가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고유권한이다. 우리가 그 판단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 네 눈에 있는 들보”(3-5절)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선자야”(5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야 한다는 판단은 관심이 아니라, 그를 깔보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가까운 이들을 흠잡고 비난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야말로 들보를 가진 모습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는 들보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웃들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뜻만을 고집한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절)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까지 볼만큼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그렇게 보고 있는가?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하신다. 다른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그다음에 바로 잡아도 된다.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또 작은 잘못 보다는 큰 잘못을 더 쉽게 알아본다. 우리는 그 관심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보여야 한다. 자신을 철저히 성찰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도록 먼저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꾸짖거나 판단을 할 때는, 우선 그와 같은 잘못을 나 자신은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는지, 또 나는 그런 잘못을 이겨냈는지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또한, 그런 잘못이 없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를 올바로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것이 많으므로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형제를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부족하지만 나도 죄인이지만 공동체를 위하여 그를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충고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들보도 꺼내도록 노력하고 이웃의 티끌도 꺼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노력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의 올바른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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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니 남을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그것은 심각하고 중대한 ‘대죄’입니다.
요한복음에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요한 7,32ㄴ)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갔다가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고, 그 설교에 압도당했고,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이 진짜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갔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심판하는 말을 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율법을 모른다는 말은, 성경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경비병들을 심판했고, 멸망을 선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투덜거린 자들도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9,5-7)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할 죄인’, 또는 ‘구원하면 안 되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투덜거렸다.’라는 말은 사실은 ‘비난했다.’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묵으신 일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포함해서, ‘구원하면 안 되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하면 안 되는 죄인은 없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인데, “너희는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 너희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저자가 죄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같은 처지의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회개하자.” 라고 권고할 수는 있어도, “너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이 말씀에 대한 설명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남을 함부로 심판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주님의 구원 사업을 침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형제를 헐뜯거나 자기 형제를 심판하는 자는 법을 헐뜯고 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법을 심판하면, 법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의 심판자가 됩니다. 입법자와 심판자는 한 분뿐이십니다.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그분이십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야고 4,11-12)
이 말도 “형제를 심판하는 말을 하는 것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3절-5절의 ‘눈 속의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너부터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분명히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이고, 우리는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서 일하려면 우선 먼저 교회 내부의 정의부터 실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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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 가운데 으뜸이자 특별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바로 그 시작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 전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하란에 정착하여 오랜 기간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재물과 가축 수도 그곳에서 많이 늘었을 것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렇게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정착 생활에서 벗어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안락함 속에 우리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점점 잊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방랑길에 늘 함께하실 하느님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역동적인 신앙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어느 한곳에만 계속 머무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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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하성용 바오로 신부님]
아브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됩니다. 그 말씀 안에서 “가거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아주 단순하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서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이 끝난 뒤에 이어지는 아브람의 행동을 성경은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고 단순하게 알려 줍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고 반문하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입니다.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면서,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원하거나 이해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야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 복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하느님 축복의 통로요, 믿음의 조상이 되고자 보여 준 행동은 자신의 의지나 뜻이 아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아브람의 모습과 비교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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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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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터넷에서 제가 쓴 글이나 강의했던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며, 또 매일 올리고 있는 새벽 묵상 글은 하루에 몇만 명씩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강의를 나가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신부님 잘 알아요. 매일 새벽 묵상 글을 보고 있거든요.”
반갑게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또 사진도 찍지만, 저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분이십니다. 일방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경우 상대방은 계속 저를 기억하시겠지만, 어디선가 다시 만나도 저는 기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워낙 많은 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당 신자 중에서도 제 글을 매일 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시고 또 성당에서 봉사하시기에 자주 만나서 저도 잘 알게 됩니다. 이 경우 서로 아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까운 친밀감을 느낍니다.
하느님과도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상적이고 일방적인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우리에 대한 앎은 완벽합니다. 여기에 반해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앎은 거의 무지가 아닐까요? 그냥 ‘사랑이신 분, 구원해 주시는 분’ 정도의 추상적인 앎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기도나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대화를 깊이 또 자주 나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친한 벗으로 잘 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뿐 아니라 일상 삶에서도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진짜 벗인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친한 친구 5명을 적어보십시오. 혹시 주님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로만 벗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 깊숙이에는 벗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친한 벗의 관계라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자주 범하는 남을 심판하는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에 대한 험담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남에 대한 험담은 너무나 쉽게 말하곤 합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서는 주님과 진정한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너무하신다면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4)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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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를 보려면>
마태오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너를 보려면>
너를
보려면
너를
볼 때마다
너보다
먼저
너를
보고 있는
나를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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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복덩이, 행복한 사람>
오늘은 관상에 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기 눈의 들보보다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보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래서 볼 거면 행복을 보자고, 볼 거면 악보다 선을 보자고 그래서 행복 관상이란 것을 하자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볼 것이 많고 큰 것도 많은데 왜 남의 눈의 그 작은 티끌을 봅니까? 남의 눈의 티끌을 빼준다고 하니 사랑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악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자꾸 악에 눈이 갑니다. 그 많은 선을 놔두고 굳이 악에 시선이 갑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선을 소유하려다 악을 본다고 하는데 선만 있기를 바라는데 악이 있으니 악이 더 보이는 겁니다.
깨끗한 옷인데 거기에 티 하나 묻으면 그 티가 눈에 거슬리며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오히려 계속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 옷에서 티는 99분의 1도 안 되는데 99는 안 보고 1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100% 선을 욕심내다가 1%의 악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을 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남의 죄와 잘못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나의 죄나 잘못보다 남의 죄와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것이고 그의 것보다 내 것이 작으니 괜찮다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 행복에 조금이라도 유익이 됩니까? 전혀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가벼운 병은 잘도 진단하며 고치라고 하면서 자기의 중병은 괜찮다고 하며 병을 고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으며, 구렁에 있으면서도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나는 행복한지 행복 관상을 하고, 무엇이 나의 행복에 유익하고 해로운지 유익 관상을 해야 합니다.
길흉화복 중에서 길은 보고 흉은 보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화를 멀리하고 복을 가까이 두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이나 길조를 좋아하고 흉과 흉조는 싫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 짓을 곧잘 하는데 곧 길은 안 보고 흉을 봅니다.
한자어에서 길(吉)은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뜻하고, 흉(凶)은 흉측하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싫은 것이고 안 좋은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복을 주는 사람 곧 복덩이가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고, 복을 주는 사람이 행복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또한 복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고, 남에게 복을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줘도 안 받으면 불행한 사람이고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복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이웃에게 줄 줄 아는 사람이어서 복덩이이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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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우리말에 복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말을 자주 썼지만 요즘은 왠지 이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이는 우리집의 복덩이라고 하곤 하였는데 자신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집안이 잘되어 집안에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거지요.
오늘 창세기의 아브람이 바로 복덩이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복덩이는 보통 어린애라는 느낌이 있는데 오늘 아브람은 75세 할아버지입니다. 말하자면 늙은 복덩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얼핏 생각에 아브람이 복덩이입니까? 가족과 재산을 모두 두고 떠나는 것이 복이냐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아브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덩이와는 많이 다른 복덩이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복을 다 포기하고 얻는 복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기서 행복론이 근본적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무신론적인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얻는 행복이기에 하느님이 자기 행복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지니는 행복이기에 그 행복이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복을 받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주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이는 어린애의 행복입니다 어머니 없는 행복이 어린애에겐 있을 수 없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이는 또 프란치스코의 행복입니다. 앞서 봤듯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얻는 가난한 행복이고, 자기가 있던 곳 곧 고향을 떠나고 도달하는 순례자의 행복입니다.
오늘 아브람은 복을 받기 전에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행복이 장소적으로는 자기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곳에 있으며 인격적으로는 자기 친족과 부모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부자 청년을 떠올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에 있지 않았고, 자기의 온 재산과 사랑하는 자기 가족이 있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재산과 가족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봤듯이 부자 청년이 생각하고 원한 행복과 주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행복과 하느님께서 제시하시고 주시겠다는 행복 중에서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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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자기인식의 복(福)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
오늘 제1독서 창세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브라함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압축되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으로 압축된 아브람의 복된 삶입니다. 첫 대목 다음 부분은 늘 읽을 때마다 신선한 감동이자 충격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집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나이 일흔다섯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복덩어리 아브람입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라니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군말없이 떠납니다.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이니 제 나이가 일흔다섯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은 내적순례여정중의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떠남의 열정에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부단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떠남의 내적 여정에 충실할 때 맑은 삶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잘 떠날 때, 떠나야 할 때, 지체없이 떠나는 삶이,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로 남습니다.
마지막 떠남이 죽음입니다. 최고로 복된 떠남이 향기로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아브람처럼 영원한 현역으로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아름답고 향기로운 죽음의 은총이요, 이보다 남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잘 떠나는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떠남의 여정은 홀로가 아닌 “더불어together” 떠남의 여정이었음을 봅니다. 그대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닮았습니다. 주목되는 사실은 아브람이 일단 거주하게 될 때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두 번 나오며 후반부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쪽으로 갔다.’
끊임없는 도상중에 있는 떠남의 사람, 아브람입니다. 도착할 때마다 우선 주님의 제단을 쌓으니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외적으로 떠남의 여정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에 닻을 내려 정주한, ‘정주의 사람’ 아브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아브람은 떠남의 사람이자 주님 말씀을 경청하여 순종한 사람입니다. 이런 떠남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의 사람, 복된 존재인 아브람이 됐음을 봅니다. 아브람의 삶은 우리 정주수도자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아브람처럼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는 막막한 여정과는 달리 우리의 내적순례여정의 궁극 목표는 분명하니 바로 우리의 본향 천상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러니 떠남의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점이 우리에게는 아브람보다 유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도 이런 희망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자들의 영원한 몰모델인 아브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주가 아닌 끊임없는 내적 순례 여정중에 있는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이를 요약한 영성이 제가 즐겨 쓰는 산과 강의 영성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맑은 강”
전번 봄소풍때 삼척, ‘덕항산’속 환선굴에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흡사 강처럼 느껴져 위 시에다 한 대목을 추가했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속의 강”
그대로 우리 정주의 삶에 대한 기막힌 상징입니다. 산같이 정주해도 우리는 내적으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삽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을 하나씩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매일 일과표의 궤도 따라 사는 정주의 삶이 끊임없이 흐르는 강같은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은 결코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기를 몰라서 심판이지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은 일체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랜 정주의 삶중 정화과정의 성숙한 열매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티는 물론 들보를 잘 알기에 자기수련에 전념할 뿐 절대로 겁 없이 무모하게 남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는 만용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오랜 정주의 기도와 회개, 정화과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베네딕도 수도공동체의 정주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대로 베네딕도의 정주의 평화가 됩니다.
보십시오. 오랜 정주생활을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한 우리 수도형제들 절대 누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심판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정말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남을 심판하지,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잘 알기에 절대로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티나 들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아브람처럼 이웃에게는 복이 됩니다. 바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복된 사람들, 바로 참된 정주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눈의 티와 들보를 뽑아주시고 내적 떠남의 순례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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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7,1)
'오늘 복음(마태7,1-5)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나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없다.'고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7,3.5)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8,9)
'그들은 왜 떠나갔을까?'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지요. 여자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의 허물(죄)에 대해 심판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너를 심판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존재 자체이신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일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합시다!
오늘 독서(창세12,1-9)는 아브람의 순종을 통해 '순종의 복'이 얼마나 큰 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12,1-2)
아브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인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섭니다.
우리도 단순하게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복을 많이 받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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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yWW29AEf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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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제대로
믿을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가득찬 들보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그것의 정체는
들보였습니다.
마음의 눈을
멀게 한
들보였습니다.
꺼내고
빼내니
소중한 사람이
가깝게 보입니다.
익숙했던
들보의 삶에서
나와보니
비로소 삶다운
삶을 새로이
만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한꺼풀 벗기니
조각조각 깨어지는
우리의 자아가
있습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니
하느님 자녀다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용기입니다.
거짓은
사랑이 아닙니다.
들보를 빼내서도
내려앉지 않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거품과 위선
거짓과 허위를
빼내니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먼저 나의
들보를 빼내는
하느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눈이
맑아야
마음도 기쁘고
사람도 기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어야 할
맑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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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 하느냐?"(마태 7, 3)
수 많은 판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판단은 소중한
마음과 마음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가 우리가
찾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성찰과
판단 사이에서
판단을 멈추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탄생의 삶입니다.
하늘 아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부족하고
아픈 사람들입니다.
먼저 주님께
나의 들보를
내어 보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와같이
마음의 시력을
회복하듯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먼저 제대로
보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거짓과 착각
위선과 교만의
들보를 빼내어
심판이 아닌
마음의 성찰이길
기도드립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형제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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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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