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8 주일 저녁예배 / 신민석 목사
말씀 : 욥기 23:8-10
제목 : 순금이 아니어도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
살아계신 하나님,
이 저녁에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셔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게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이 시간 말씀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셔서 순금이신 주님이면 충분함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 주님을 품고 복음의 빛을 비추는 선교적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감사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예물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여 주옵소서.
물질로 인해 어려움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삶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일이 또 한글날이라, 빨간 날이라 쉬는 날이기 때문에 더 좋다라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이 저녁에 이렇게 말씀을 나누게 되어서 참 좋습니다.
내일 부평성전 새벽기도회 담당자도 저이고, 설교를 제가 합니다.
설교를 이렇게 연달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하구요..
제가 말씀을 나누기 전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또 제가 예전에 다른 교회에서 사역할 때 말씀을 나누기 전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나눌 때, 핸드폰을 잠시 꺼 두셔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핸드폰이 아니라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그 뒤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습니다.
"말씀을 나눌 때 핸드폰이 울려서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 사역을 방해하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단 70세가 넘으셔서 은퇴하신 분은 우리 모두 이해해 드립시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다 핸드폰을 꺼내서 다 확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동으로 바꾸시거나 꺼두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을 나누기 시작하는데, 그러던 중에 또 하필이면
참 희안한 것은 그때 꼭 누가 기다린 것처럼 핸드폰이 크게 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핸드폰 소리의 주인은 깜짝 놀라서 그 핸드폰을 가방에서 막 찾아서 꺼내려고 막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시죠? 그런 때 꼭 가방이 잘 안 열립니다.
참 가방을 열려고 애쓰고 하셔서 한참을 열어 핸드폰을 끄셨습니다.
저도 그분에게 눈길이 가서 이렇게 쳐다봤더니, 제가 잘 아는 60대 후반의 어떤 권사님이셨습니다.
권사님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셨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때 설교를 계속 하게 되니까, 설교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눈빛을 맞추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권사님이 희안하게 자꾸 제스쳐를 취하셨습니다.
딱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자꾸 (동작) 이러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권사님이 쭈뼛쭈뼛 제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신천지 아닙니다.'
권사님은 자신의 핸드폰이 울려서 자신이 주목된 것보다
자신이 신천지가 아니고 결백하다는 사실을 제게 꼭 얘기해 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권사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제게 더 덧붙이셨습니다.
'목사님, 제 호적상 나이가 그래서 그렇지 원래 전 70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권사님께 '권사님, 권사님 절대 신천지 아니십니다. 제가 다 알아요!'
그렇게 얘기하고 그렇게 웃음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신 주안의 성도 여러분, 핸드폰은 잠시 꺼 두셔도 좋습니다.
아마도 그 권사님께서는 자신의 이 억울함을 알아주길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절대 이단이 아니고, 실수로 울린 것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줘도
앞에서 얘기했던 이 목사만큼은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길 바랬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보면,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마주하는 욥에게 그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떠나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세 명의 친구가 찾아옵니다.
그 세 친구에 대해서 욥기 2장 11절에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아멘!
- 이 세 친구가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욥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세 명 중에 단 한 명도 욥의 억울함과 무죄함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 한 친구만이라도 욥이 토로하는 그 무죄함을 이해해 줬더라면,
그의 심정을 알아 줬더라면, 그는 얼마나 마음이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런데, 엘리바스와 빌닷은 세 번이나 그리고 소발이라는 친구는 두 번이나 욥을 정죄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욥기 23장 바로 전인 22장에서도 보면,
데만 사람이었던 친구 엘리바스가 세번째로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너를 책망하시며 심문하셨겠냐?"라는 것입니다.
욥이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겸손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 22:21절에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라고 욥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이 답답함,
그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엘리바스에게 욥기 23장과 24장에 걸쳐 자신의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깨달음을 주시고자 함인지 이 시간 잠시 나누길 소망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에 대해 나누기 전에,
먼저 그 반대의 상황을 우리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항상 먼저 말씀하고 계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 위임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부흥회를 통해서,
때로는 장로님들이나 교구 목사님들, 때로는 구역장님이나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난이 다가오면, 이미 다 주님 말씀해 주셨는데, 이미 하나님은 다 얘기를 끝내시고 응답해 주셨는데
깨닫지 못하고,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방관하시느냐고 따져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계속 나누고 있는 출애굽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먼저 말씀해 주십니다.
"내 율례와 법도를 지키라"
"나를 의지하여라, 내 말을 듣고 순종하라"
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주안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미 주님께서는 항상 말씀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여러분 자신이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 있지요.
사랑하는 아내가 5월 쯤에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원래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통증이 올해 유난히 좀 심했습니다.
그래서 한의원도 수 개월 다녀 보고, 정형외과에서 도수치료도 받고, 주사치료 등 많은 것들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건강검진을 했더니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라고 진단도 받았습니다.
아내가 치료하고 치료하다가 큰 차도가 없자 속상한 마음에
이제 생일이 다섯 번 지난, 다섯살인 아들 하준이에게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 물었답니다.
'하준아, 엄마 왜 이렇게 안 낫지? 왜 이렇게 아프지?'
그러자, 정말 말 안 듣고, 정말 개구쟁이인 아들이 갑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건 다 이유가 있으신 거야!'
그 얘길 아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약간 충격을 먹었습니다.
그 얘기를 아내에게 전해 들은 후 며칠이 지나서 온 가족이 모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아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물었습니다.
'하준아, 엄마 왜 계속 아프지? 하나님이 왜 계속 안 고쳐 주시지?'
제가 옆에 누워 있는데, 그렇게 개구쟁이인 아들이 갑자기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엄마를 넘어뜨려서 기도자로 세우시려나 봐!'
제가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일어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요즘 학원 다니냐?'
그러고 나서 다시 며칠이 지나 아내가 아들에게 물었답니다. 그때의 상황을...
그런데 아들이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했고 알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아이의 입술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지금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구나!
지금도 여전히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구나! 단지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았구나..'
주안의 성도 여러분,
이미 주님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러분들이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친구 엘리바스는 욥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그 상황을 보면서 욥을 끊임없이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는, '너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욥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고 하나님과 화평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하나님을 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라도 좀 뵈어야, 그 하나님과 화목하고 어떻게 무릎이라도 꿇고
어떻게 잘 말씀이라도 드릴텐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8절과 9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아멘!
-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앞과 뒤로 번역된 이 단어는 동쪽과 서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왼쪽은 북쪽 오른쪽은 남쪽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욥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 둘러봤으나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시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으십니다.
앞과 뒤로 번역된 이 표현은 단순히 사방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눈 앞에만 안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시작된 과거,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현재,
그리고 고통이 계속될 미래에서도 하나님은 묵묵히 방관하고 계신다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욥이 겪는 이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셨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가 아무리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 한 분만 알아주시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찾고 찾는데, 그 하나님이 없으신 겁니다.
대답 없으시며, 부르짖으며 찾아도 숨어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태도에 욥은 너무나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렇게 자신의 심정을 8절과 9절에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부분에서도 잘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문제나 간절한 기도제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구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워낙 과묵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는 겁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시며 방관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낙심합니다. 또한 좌절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왜 내 상황을 지금 보고 계시지 않는지 원망합니다. 왜 침묵하시며 가만히 계시는지 불평한다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할 믿음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단번에 응답하셔야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그것을 수용해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당장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당장 기도제목이 응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침묵이 계속되면,
하나님은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분,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시는 분, 하나님은 안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안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듣고 계시며, 일하고 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86세에 낳았다고 창세기 16장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13년이 지난 99세 때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며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듣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위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힐 때도, 하나님은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39장이 요셉의 가장 비참한 순간 같은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함을 누렸다라고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셨는데, 왜 노예로 팔려가야 하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더니,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듣고 계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실 때, 하나님은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없으신 것처럼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듣고 계시며 일하고 계셨습니다.
주안의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게 안 보인다고, 때로는 내게 안 들린다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안 듣고,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일하시며 듣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을 갖춘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은,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하면서도 끝까지 신뢰하는 삶"입니다.
보이지 않으며 만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인해 탄식하는 욥의 심정이 제가 읽어드린 8절과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욥이었더라면, 이러한 비참한 상황 속에서
보이지도 않고 아무 말씀이 없으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한다면, 정말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나님, 제가 그래도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 저한테 여기까지 하세요?' 이렇게 난리 난리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믿음은 달랐다는 것이지요.
반전이 10절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기 23:10절에 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어디에 있으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신다네.
그분이 아무리 철저히 나를 시험하셔도 나는 영예롭게 그 시험에 합격할 걸세!" 아멘!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 역사를 일으키시는 그때가 아닙니다.
여전히 침묵하시고 말이 없으시며 상황은 변하지 않고 고통은 날마다 더해지는 욥의 상황 가운데 욥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인생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못했어도, 지금은 여전히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신다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무리 단련하셔도, 아무리 철저히 시험하셔도, 순금같이 되어 시험에 합격하겠다라는 결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는 믿음입니다.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해도 끝까지 신뢰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문제는 그대로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는 삶,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삶,
그런 믿음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수용하며 끝까지 신뢰하는 삶을 사는
그 믿음의 사람은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번째로 "순금이 아니어도 주님이면 충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시는 중이야' 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순금과 욥이 고백한 순금이 다르다라는 것이지요.
공동번역 성경에는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처럼 깨끗할 것이다."
그리고, 새번역 성경에서는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 성경에서는, "그분이 아무리 철저히 나를 시험하셔도 나는 영예롭게 그 시험에 합격할 걸세"
즉, 하나님께 단련을 받은 후에 욥이 두 배의 복을 받은 것처럼 더 많은 복을 받고
더 잘 되고, 더 잘 나가서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그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순금을 만드는 제련에 비유합니다.
용광로에 단련시키는 것과 같은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순금처럼 불순물이 없는 영광스러운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엄청난 고난과 시련 뒤에 순금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되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결한 순도 99.9%의 순금처럼, 아니 100%의 삶으로 되어지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합니다.
자신의 삶에 고난이 다가오면, 욥기 23:10절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 있는 자신의 인생길을 '아,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중이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오해한다는 것이지요.
반드시 순금이 될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순금 말입니다.
그래서 내 기준에 순금이 아닌 것 같으면, 그렇게 복을 누린 게 아닌 것 같으면,
하나님께 끊임없이 '하나님, 단련하셨으니까 순금으로 만들어 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순금이 되길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오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순금이 되길 소망합니다.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고요,
사람들 앞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반짝반짝 빛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인생길을 알고 계시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먼지와 같고, 버러지와 같은 그 인생을 그저 단련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이미 반짝반짝 빛을 비추시는 주님이, 순금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꼭 순금이 아니어도 충분한 삶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순금이신 주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까지 꼭 순금이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순금이 아니어도 순금이신 주님과 함께 충분한 삶을 누릴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순금의 삶이 아니라 욥의 고백처럼 주님 앞에 순결한 자로
어떤 시험이 와도 순수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으로
순금이신 주님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그런 복된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찬양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빛이 없이도 이미 반짝 반짝 빛나는 순금이신 주님,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 주시는 그 주님,
그 주님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꽃처럼 향기 나는 그러한 화려한 삶이 아니어도 그저 주님이면 좋은,
그저 주님이면 충분한 삶이 되기 원한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러한 마음을 담아서 이 찬양을 함께 고백하길 소망합니다.
♬ 찬양 :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