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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 |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802) 10월 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광복후 1946년 해인사 선원의 선객중심으로 가야총림을 발족하였는데, 조실에 이효봉대종사(李曉峰大宗師), 주지에 임환경, 강주에 강고봉화상(姜高峰和尙)이었다.
그러나 발족 5년만인 1950년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다수 인민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시 주지 최범술은 사중에 있질 못했다. 1967년 7월 제32회 중앙종회에서 다시 해인사에 방장체재의 해인총림 설치를 결의하고 초대방장에 전 종정(宗正) 퇴옹 성철대종사(退翁性撤大宗師)를 추대하고 주지에 지월병안(指月炳安), 1970년 10월부터 당시 고암 상언대종사(古岩大宗師)가 부임하고 주지에 가산지관(伽山智冠), 1971년 11월 3대에 다시 퇴옹 성철종사(退翁性撤大宗師)가 재추대되고, 4대에 혜암대종사, 5대에 법전대종사를 추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울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러져 연출하는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그 중에서 특히 해인사 장경각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찰로 대적광전을 비롯, 승가대학, 심검당을 두고 있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빼어난 산세로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절경이다. 특히 매표소에서부터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의 풍치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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