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편견을 떨쳐버리고 5백년간 세상 떠돌며 온갖 처지 경험한 올랜도 성까지 여성으로 변신 “삶의 제약성 공박” ‘구성 제멋대로’ 불구 비교적 대중성 있는 작품…
어떤 이들은 죽었지만,우리들 가운데 걸어다니고,어떤 이들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삶의 형태를 겪고 지나가며,어떤 이들은 서른 여섯 살이라고 하나 수백년의 나이를 먹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To the Lighthouse)가 성공리에 출판된 후 쓰게 된 이 작품을 ‘장난’이자 ‘농담’이며,그 정신은 풍자적이고 그 구조는 제멋대로라고 묘사하였다.
1500년대에 태어난 올랜도라는 인물의 삶을 추적한 이 소설은 1928년 올랜도가 서른 여섯 살이 되는 해에 끝을 맺는 기발한 착상을 가지고 있다.뿐만 아니라,17세기 말에 올랜도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을 한다.이와 같이 장난 같은 착상에다가 울프 자신의 공언도 있고 해서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별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었다.그러나 최근에 이 작품은 양성성의 문제를 다루는 페미니스트들,그리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그러나 꼭 그런 시각에서 보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우리가 고도의 예술성을 지니지만 어렵고 가까이할 수 없는 작가로 알고 있는 울프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1925년에서 1929년까지 울프와 깊은 애정을 나누었던 '비타 색크빌 웨스트'라는 한 귀족 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작품의 몇 군데에 올랜도의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는데,이 사진들은 비타가 직접 올랜도로 분장한 것이며,올랜도 가문의 역사는 비타의 가문을 연상시킨다.
명문가의 자손인 올랜도의 5백년에 이르는 삶 동안 그의 직분과 성(性)은 바뀌지만 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자유로운 사고방식 등 그의 기본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5백년간의 영문학 변천사도 간간이 들여다보고,또한 사회 풍속도의 변화도 들여다볼 수 있다.특히 17세기 말에 일어나는 올랜도의 성적 변신은 여성이라는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정체성 속에 갇힌 올랜도의 자유로운 마음이 겪는 곤혹스러움을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에 올랜도는 십대의 아름다운 소년으로 당시의 문학적 성향에 따라 비극시를 습작하고 있다.그러던 어느 날 올랜도의 저택을 방문한 처녀여왕 엘리자베스는 미소년 올랜도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후일 그를 궁궐로 불러들여 총애한다.그러나 올랜도는 젊은 아가씨들과 사랑의 장난을 하다가 여왕에게 들켜 낙향하게 된다.
시대가 바뀌어 17세기에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선 후 런던에는 혹한이 몰려와 수개월간의 대 결빙기가 온다.이 기간에 올랜도는 '사샤'라는 러시아 공주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소년 같기도 하고 소녀 같기도 하고 문명인 같기도 하고 야만인 같기도 하며 공주다운 고귀함과 틈틈이 탕녀로서의 의혹이 드러나기도 하는,알 수 없는 존재다.결빙기가 끝나던 날 사샤는 말없이 올랜도를 떠난다.사랑의 아픔을 달래며 조상들의 묘소에서 죽음에 대한 상념에 잠기던 올랜도는 문필로써 죽음의 저편까지 전해지는 명성을 얻어보고자 하여 닉 그린이라는 문필가를 초청해 지도를 구하나 그의 배은망덕으로 상처만 입는다.
염세적 은둔생활을 하던 올랜도는 루마니아의 대공비 '해리엣'이라는 괴물 같은 여인의 구애를 피하기 위해 찰스왕에게 콘스탄티노플의 대사로 갈 것을 자청한다.그가 터키에 재임하는 동안 그곳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의 와중에 올랜도는 여성으로 변신하여 깨어난다.평소에 친분이 있던 집시들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한 올랜도는 그들을 따라 평소에 흠모하던 소박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경험한다.그러나 집시들은 실질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자연의 아름다움,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유 등에 탐닉하는 올랜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그들은 올랜도에게 방이 4백개나 되는 집을 소유하는 허영의 부끄러움과 수백년 밖에 안된 가문을 자랑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으나 올랜도는 결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속에서 올랜도는 처음으로 여성으로 변신한 삶의 제약성을 느낀다.정숙함에 대한 요구,의사표시와 언어사용의 제약,행동의 제약,거추장스러운 옷 등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반면 선장이 베푸는 호의의 수혜자가 되기도 하고 여성 육체의 노출이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경험하기도 한다.
올랜도가 돌아온 곳은 대화재로부터 회복되어 근대적 도시로 변한 18세기의 런던이다.포우프나 드라이튼 등 시인들이 당시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커피하우스에서 자신들의 기지를 뽐내고 있었고 올랜도는 시인들과 친교를 맺었으나 그들은 여자인 올랜도를 동등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고 올랜도가 자신들에 대한 여성적 관심과 배려를 게을리하자 화를 내고 가버린다.
다산의 시대와 가정이라는 규범이 모든 사람을 내리누르는 시대,19세기가 도래하자 독신여성 올랜도의 사회적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다행히 '마마듀크 본스롭 셸머딘'이라는 이름의 낭만적 탐험가가 나타나 올랜도는 그와의 결혼이라는 가면 뒤에서 19세기 여성으로서의 삶을 허락받는다.17세기에 올랜도를 모욕했던 그린은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올랜도의 시 ‘참나무’를 호평하며,출판을 도와주고 인세도 받게 해주는 호의적 비평가의 역할을 해 준다.그러나 올랜도는 문인으로서의 명예의 부질없음에 실망한다.남편의 부재중에 아이를 출산한 올랜도는 이제 자동차를 몰고 쇼핑을 다니는 20세기의 주부가 되어 남편의 귀환을 꿈꾸고,환상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남편은 비행기를 타고 귀환한다.
이 작품은 흔히 버지니아 울프가 비타의 양성적 성격 그리고 귀부인의 품격과 집시 같은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의 매력에 대해 바친 애정고백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그러나 이 작품은 비단 양성간의 경계선만이 아니고 동서양의 경계 그리고 시대적 편견의 경계를 초월하기도 한다.이것은 올랜도가 일관성 있게 간직하는 문학적 관심과 함께 이 작품을 시대와 문화의 성적 정체성을 비교적 초월적 안목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작가적 의식의 구현임을 암시한다.
<전수용 이화여대 영문학부 교수>
◎울프의 생애/병약한 몸… 59세때 자살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1월25일 빅토리아 시대의 문필가이며,편집자이자 역사가인 레슬리 스티븐과 그의 아내 줄리아 사이에 태어났다. 울프의 가정은 어머니,아버지가 모두 재혼을 하였으므로 그들의 다른 자녀들도 있는 대가족이었다.오빠 토비와 남동생 에이드리언은 대학에 진학했으나,여자인 울프와 언니 바네사는 당시의 관습대로 집에서 부모에게 교육을 받았다.울프는 부모님과 사별한 후에 바네사,에이드리언과 함께 런던 블룸즈베리 구역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였다.이곳에 그들의 친구들인 작가 포스터,역사가 스트래치,경제학자 케인스,예술평론가인 벨과 프라이 등이 모여 새로운 사상들을 탐색하였다.이들을 소위 블룸즈베리 그룹이라고 칭한다. 1912년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 후 레너드는 울프가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도록 격려하였으며 둘이서 호가스 출판사를 세워 경영하였다.결혼 후에도 여러번 신경쇠약을 일으킨 울프에게 남편은 이해심 많은 지적 동반자였다.그러나 그녀는 이성으로서 남편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그녀가 가장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애정의 대상은 여자친구 비타 색크빌 웨스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 2차 대전 중 남편에게 짐이 될 것을 우려한 울프는 서섹스 집근처에서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