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108.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등 )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돌아보시며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군중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데 왜 따라오느냐?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따라오느냐?
그런데 네가 진정 내 제자가 되려면
너 자신과 네 가족을 미워해야 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만 한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생각도 말고,
나를 따라오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이 말씀을 하시니 군중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고 아버지께 가시는 것이니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그저 성지 순례나 단풍놀이 가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을 성지 순례나 단풍놀이 인솔자로 따라간다면
자신과 가족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가족과 함께 희희낙락하며 가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로 가고, 하느님께 가고, 하늘나라로 가기에
이 세상을 애착하는 나와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가족을 미워해야 하는 거지요.
몇 차례 얘기한 바 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거지’ 하며 생각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도 않고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이것이 힘들고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더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고,
죽어도 하느님 사랑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있을 거라는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 두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11월 위령 성월이 이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게 하는 성월이 되도록 한 달을 거룩히 살아야겠습니다.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 ‘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족보다 중요하며 온갖 인간적인 권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제자들의 삶은 인간적인 욕망, 삶에 대한 자연적 갈망,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의 껍질을 벗어야 하듯 사람도 새로운 존재,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합니다. 우왕좌왕,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야말로 잔머리 굴립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의 출가의 삶은 관심이 부족합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신이나 자녀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사 후 복사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면서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불러 줍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복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대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사도, 제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언젠가 생각하겠지요?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데는 어떠한 합리적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을 갈망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삶이 끊임없는 ‘출가’이기를 희망하며 자녀들에게도 큰 뜻을 품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출가의 삶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천상의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국에서 지내던 사제들은 한국에 들르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저도 지난번 휴가 때,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교구청엘 갔습니다. 교구청 마당엘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저는 교구청에 8년을 살았습니다. 마당의 나무, 성당의 감실, 복도에 있는 그림도 반가웠습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사목국에서 근무했습니다. 20년 전이니 젊은 날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교육담당’이었습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했습니다. 남성, 여성 총구역장을 위한 피정을 준비했습니다. 사목국에는 사제들이 10명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띤 토론을 했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2004년 의정부 교구가 분할되면서 몇몇 신부님들은 의정부 교구를 선택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성소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제’라는 제목으로 3부작 다큐를 제작하였습니다. 본당 성소후원회 방문을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를 맡아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8년을 지냈던 곳이라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어달리기’처럼 이젠 다른 신부님들이 교구청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주교님과 면담을 한 후에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온지도 어느덧 5년이 되어갑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맡았습니다. 신문홍보를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본사에서 오는 자료를 다운 받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직원미사, 수요일에는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과 팬데믹의 여파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주최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교님께서 ‘바쁘게 사네.’라고 하셨습니다.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를 3년 동안 하였습니다. 주말 체험도 있었고, 피정도 하였습니다. 가을이면 소풍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동북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남성 제42차 꾸르실료 교육에 함께 하였습니다. 퀸즈 성당의 평일미사를 도와주고 있고, 부르클린 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린 것’은 아니지만 나름 바쁘고 분주하게 지낸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언젠가 다시 뉴욕으로 온다면 그때도 ‘감회가 새롭다.’라고 느낄 것 같습니다. 신문사, 성당, 엠이, 꾸르실료는 저의 뉴욕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사제들은 저의 뉴욕 생활에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구청에서 지냈던 것도, 뉴욕의 신문사에서 지내는 것도 제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어디에서 지내든지 필요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감사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심오한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가시방석’과 같을 것입니다.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품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배반했을지라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랑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의 또 다른 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십자가는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다면 그곳이 어디이든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자기 소유를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그 첫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무엇을 결정하든지 내 가족, 친척,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은 강론의 결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론을 끝내면 얼마나 싱거울까요.
모든 강아지가 그런 것을 아니지만 이런 강아지들이 있습니다. 밥이나, 고기를 주었다가 다시 가져가려 하면 강아지는 주인이라도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립니다. 그 고기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기 것이지요. 누가 준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듯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돈, 집, 명예, 또한 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나약한 몸부림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가족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라고 합니다.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려 할 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손에서 힘을 뺐을 때 주님께서 맡겨주신 온전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얌체 공
지금도 문방구에서 파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무로만 만든 작은 공
이름하여 ‘얌체 공’
이 공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통통 잘 튀는데 얼마나 튈지도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얌체처럼 굴어서 재미있습니다.
분명 내 손을 떠난 공인데 내 맘대로 안되는 공
그 공에 사람들은 ‘얌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가만 보면 얌체 공은 우리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잡고 싶어도 잘 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우리 인생 말입니다.
‘얌체 인생’
그래서 우리 인생이 재미있는 것 아닐까요?
잡고 싶어도 잘 잡히지 않아서….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행동주의 심리학자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는 손잡이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스키너 상자’ 안에 쥐를 가두고 네 가지 조건 중 어떤 조건에서 쥐가 손잡이를 더 많이 누르는지 실험했습니다.
1)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2)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불규칙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3)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
4) 손잡이를 누르면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온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손잡이 누르는 횟수는 4, 3, 2, 1의 순서였습니다. 즉, 손잡이를 누르는 것은 먹이가 나오는 것과 관계있을 때 더 많이 눌렀습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올 때보다는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올 때 더 많이 눌러댔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도박처럼 불확실한 보상이 탐닉을 유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보상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착한 일 한 번에 한 번의 좋은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불공평하다며 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악행에 대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왜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보상은 불확실한 보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부족한 인간의 존재에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늘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보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말씀하시지요.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미워하라고 하실까요? 하느님 사랑을 첫째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뒤로 돌리다’, ‘이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됩니다.
---------------------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괴테).
---------------------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버림, 따름, 사랑-
“삶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Life is a gift! God loves us!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지난 12월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세계 84개국에서 7500명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청소년들을 향해 외친 오늘날 주님의 참 제자, 88세 노령의 영원한 젊음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간명하면서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본질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인지요!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는 말씀도 멋집니다.
“젊은이들이여! 언제나 기억하라! 삶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함께하고, 소통하고, 나누고, 주는 놀라운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기도하자. 우리 성모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다. 언제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하자!”
참으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교황님인지 깨닫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만나고 일하는 분이 세계의 영적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교황님 모습이 늘 감동입니다.
요즘 강풍이 불고 간간히 비가 오고 나니 단풍잎들은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들 본질로 남아 있는 겨울나무들을 통해 푸른 하늘이, 불암산이 훤히 드러나니 참 좋습니다. 문득 예전 써놨던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겨울나무들입니다. 가난한 듯 하나 참으로 주님을 배경한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주님만을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버리고 따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 내용을 나눕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말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누구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용법상 이렇게 번역하지만 제대로의 뜻은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주님보다 선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신에게 까지 집착에서의 이탈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이처럼 삶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할 때 사람들에 대한 아가페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눈밝은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우선적인 주님 사랑없이 눈먼 맹목적 집착의 사랑이라면 모두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늘 기억하는 위령성월 11월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참으로 죽음을 늘 기억한다면,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산다면, 비로소 겨울나무처럼 모든 인간 집착을 떨쳐버리고 주님만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어지는 망대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입니다. 무모하게 주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잘 점검하며 자기 정도에 맞게 순리대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람 숫자만큼 십자가 양상도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호오好惡나 우열愚劣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무지의 소치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골인 지점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보다는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자기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참으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참사람이요 구원입니다. 다 버려도 제 십자가만은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루하루 날마다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면서 참으로 소유하되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 바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투명한 삶입니다.
세명령 앞에는 “누구든지” 말마디가 붙습니다. 예외없이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본질적 세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명령은 단번이 아니 평생현재진행형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늘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노력해야 할 기본적 수행입니다.
참으로 온전히 자유로운 삶이 주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으면 불완전합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까?”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한 자유입니다. 순수한 이웃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된 이웃사랑을 통해 주님의 참 제자임이 입증됩니다. 참제자의 검증 잣대가 이웃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을 빚지고 있는 사랑의 빚쟁이들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해도 이 사랑의 빚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의 자유는 이런 사랑의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로울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참사랑과 참자유는 함께 갑니다. 물론 무집착과 무욕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1.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2.아몰 파티(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
3,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다시 한 번 라틴어 세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로서, 버림-따름-사랑의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231108.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제자>
자신의 길을
내지 않으며
스승의 길을
따를 뿐이니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리고
스승의 것을
지닐 수밖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