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0]‘수능 필적확인문구’에 부쳐
어제 수능일이었다고 한다. 지인후배가 보내온 카톡으로 처음 알게 된 <수능 필적확인문구>. ‘아항, 이런 것도 있었구나’싶어 관련기사를 자세히 읽어봤는데, 마음이 다 따뜻해졌다. 수능 필적확인문구가 무엇인가? 2004년 11월에 치러진 2005학년도 수능(수학능력시험)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됐다 하여, 다음해부터 대리시험을 막기 위해 매 과목시험 답안지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제시한 문구를 정자로 직접 따라 적게 만든 것이란다. 올해, 그러니까 2024학년도 수능 필적확인문구가 양광모 시인의 시 구절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였다는데, 이 문구 하나가 과목마다 정자로 답안지에 직접 썼을 수험생 50만명의 마음을 조금은 따습게 해주고, 그 내용이 조금은 위로도 되었을 듯하다.
19번째 선보인 문구들은 대부분 시인의 작품에서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내용의 구절을 골랐을 터. 시 전문은 모르거나 또 읽지 않아도 상관없이, 긴장된 마음을 한순간 녹이는데 한몫했을 듯하다. 2005년 6월 모의고사에서 처음 선보인 문구는 부정행위(커닝)를 경고나 한 듯, 윤동주의 <서시>의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시구詩句였다고 한다. 아후 해마다 지속된 필적확인문구들을 살펴보자.
2006년 정지용의 <향수>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
2007년 정지용의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2008년 윤동주의 <소년>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2009년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2010년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2011년 정채봉의 <첫마음>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2012년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2013년 정한모의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2014년 박정만의 <작은 연가> “꽃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2015년 문태준의 <돌의 배>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2016년 주요한의 <청년이여 노래하라>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2017년 정지용의 <향수>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
2018년 김영랑의 <바다로 가자>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2019년 김남조의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2020년 박두진의 <별밭에 누워>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2021년 나태주의 <들길을 걸으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2022년 이해인의 <작은 노래2>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2023년 한용운의 <나의 꿈>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모아놓고 보니, 제법 그럴 듯하고,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따뜻하게 해주는 것같아 기분이 좋다. 시에는 이런 따뜻한 구절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나의 오랜 지론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시인과 어떤 시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이런 시 구절들을 뽑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같다. 선정하는데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고 한다. 국내 주요 작가의 작품 중에 고를 것. 글자 수는 12-19자 사이로. ‘ꥨ’ ‘ᄚ’등 겹받침과 ‘ㄹ’ ‘ㅁ’ ‘ㅂ’세 자음 중 2개 이상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고른다는 것이다.
이 수능 필적확인문구들을 보면서, 교보빌딩이 계절별로 바꿔가며 걸고 있는 광화문글판이 떠올랐다. 우리를 한번이라도 이유 없이라도 빙긋 웃게 만들거나, 뭔가 골똘히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글귀들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는다는 것이, 날로 달로 거칠어져가는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작지만 큰 기쁨’인지를 알게 하지 않던가. 1991년부터 시작했다하고, 30주년을 맞아 글판모음 책까지 나왔다하니, 그 세월이 어디 보통 세월이던가. 그 글판으로 하여 알게된 좋은 시 구절들, 대뜸 기억나는 구절 한두 개쯤은 있으리라.
이런 구절은 어떠하신가?
“찬 가을 한 자락이/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고마운 일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하다/한 사람의 일생이/오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눈이 오는가/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