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그리고 불교 문화
영주는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비중이
높은 유물·유적 등의 문화재가 수없이 산재해
있다. 경주가 경북 제 1일의 고적도시라면 영주
지방은 경북 제2의 고적지로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소재한 부석사(浮石寺)는 소수서원(紹修書院)과
더불어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한국
유불문화(儒彿文化)의 거적(巨蹟)을 이루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적이다.
불교문화
한국인의 2대 정신적 지주를 꼽는다면 불교와
유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개인적으로는
안심입명(安心立命)과 국가적으로 왕실의
융성과 호국을 위한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면, 유교는 한국인의 정치사상과
윤리도덕과 가정과 사회질서를 위한
현실사회사상으로서 그 영향력을 각기 발휘하여
왔다. 불교는 실로 삼국시대 이래 고려말까지 일
천년 동안 우리나라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하여
왔다. 불교는 한국인의 최초의 고등종교로서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철학과 사상을 가르쳐
주었고 문화와 예술의 발달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불교는 인도문화, 중국문화, 간다라문화를
함께 전해 주었으며, 특히 불상, 탑, 건축, 조각,
인쇄술 등을 발전시켜 우리나라의 고대와
중세문화 발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담하였던
것이다.
의상대사와
화엄종
이러한 한국불교사에서,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의상대사가 그의 위대한 종교적 체계를 우리
고장에 부석사를 세워 펼쳤다는 것은 우리
고장의 영광이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부석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해동화엄종주 의상대사가(625-702)가 신라
문무왕이 당군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바로 그 해인 문무왕 16년(676)에 신라5교
중 화엄종의 근본 도장으로서 창건된 고찰이다.
이는 경주 불국사 보다 75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으로서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지나는 동안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면서 상금도 한국
10대찰의 하나로서 한국불교문화의 성지(聖地)가
되고 있다. 의상대사는 당(唐)에서 귀국하여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5년
동안이나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며 찾아
창건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부석사다.
그 당시 국가와 왕실의 지극한 애호와 존신을
받았던 그가 화엄종의 근본도장을 궁벽한
이곳에다 창건했던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교종의 대부분의
중심도장이 당시 수도였던 경주가 아니면 경주
부근에 자리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당시
화엄종과 경쟁적이었던 태현의 법성종은 그
중심도장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였으며, 원효의
법상종은 경주의 분황사였으며, 자장(煮醬)의
계율종(戒律宗)은 양산 통도사였던 것이다.
왜 변방에 절을
세웠을까?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옛부터 소백산과 죽령이
신라, 고구려간의 중요한 국경지대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진산이었기 때문에 부석사를
이곳에다 창건함으로써 나라를 지키려는
의상대사의 호국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기성 종파와의 불필요한 마찰이나 대립보다는
순수한 종교의 세계를 찾고자 하는 그이 참
구도자(求道者)의 일면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사실 당시 경주에 있었던 교종의 근본
도장이었던 용장사, 분황사는 오늘날은 전쟁과
병화로 모두 파괴되고 그 옛 보습을 다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부석사는 동양 최고 목조건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불화(佛畵)등 빛나는 문화재들이 잘 보존돼
있으니 의상대사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태백산 봉황산
부석사
부석사를
옛부터 태백산 봉황산 부석사라 하는데 그것은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이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100여리를 내려 오면서 각화산과 백병산에
연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 봉황산은 태백산맥의
종맥(縱脈)으로 이 산의 서편 낮은 목이 마아령(馬兒嶺)이라고
하는데 이 고개 아래로는 소백산(小白山)에
속한다.
태백산맥을 박넝쿨에 비하면 봉황산은 넝쿨에
달린 박으로서 뿌리와 넝쿨의 모든 힘이 박으로
모이는 것처럼 태백산 정기는 이 봉황산으로
집결되어 명산 대지인 것이다.
봉황산의 주룡(主龍)이 준수하기도 하지만
전면의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동편으로는 문수산에서 남의 학가산의 맥이
휘어 돌고 서편으로는 소백산맥이 도솔봉을
거쳐 명봉산에 이르기까지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형성한 그 가운데 펼쳐져 있는 뭇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봉황산을 항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은 지리설로 설명한다면 천하 명산
봉황산이요, 다시 없는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봉황산 부석사에서 빛나는 역사와
숱한 전설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의 주류인
화엄종이 꽃피었던 것이다.
부석사의 고승
이곳에서 의상은 3천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삼국유사에도 기록하고 있는 당시 아성이라
불리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勳), 능인(能仁),
진정(眞正), 진장(眞贓), 도융(道融), 양도(良圖),
상원(相源), 의적(義賊) 등의 10대 제자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의상 이후에도
부석사에서는 국사급 고승만해도 다섯이나
배출되었다. 즉 혜철국사(785-861), 무염국사(800-888),
징효대사(826-895), 원융국사(964-1053), 원응국사(1307-1382)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의상의 그 유명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백화도장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등의 저술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부터는 우리
고장의 불교문화가 융성 발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 고장의 불교가 가장 융성하였을
때는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는 5백여
개의 대소사찰, 암자가 모여 있어 커다란
불교문화권을 이루었던 것이다. 빈번한 전란과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불사들이 파괴되고 사라졌지만 아직도 이
지방에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 많은 사찰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명 산명에도 불교식이 많이
남아 있다. 산명은 소백산의 비로봉(毘盧峯),
연화봉(蓮花峰), 도솔봉, 지명으로는 부석면,
문수면, 대사부락 등이 그러하다. 부석사의
창건은 실로 궁벽한 우리고장의 문화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의상대사의 창건은 우리 고장발전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석사의
변천과정
부석은 창건된 후 나말(羅末) 여초(麗初)의 병화(兵禍)로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피해
원인과 피해 정도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무량수전 동편 언덕 위에 원융국사 비문에
의하면, 원융국사는 고려 정종때 고승(高僧)으로
정종 9년(1043)에 부석사에 있으면서 부석사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사당(祖師堂)
연기문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 2년 (1376년)에
중건이란 기록이 있는 바 이 두 년대 차이는 333년
차이다.
부석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개연(改椽), 개금(改金),
보수(補修) 등이 허다하나 그 중 조선 영조시
중수공사와 일제 초기 1918년 조사당의 해체복원,
무량수전 개연번와 공사가 가장 최근인 1978∼1979년
사이 박대통령 배려로 부석사의 전건물 번와
보수 및 취현담의 향각 해체복원, 천왕문·
일주문·요사복원 등으로 일신 되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 숨쉬는 부석사
우리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지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해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작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서기
699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율·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
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나라 명산을 찾아 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 255호로 보존되고 있는 화강석으로
건조한 당간지주는 천왕문 밖 오른편에
위치하며 총 높이 4.28미터로 하부기단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차차 체감되어 단아하고 경쾌한
양상은 아름다운 미를 보인다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
이 지주는 화엄종찰을 표시하는 깃발을 다는
깃대를 세우는 지주이다. 이 지주에 세우는
깃대는 지주의 규모로 보아 대단히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의 건조 연대는 부석사 창건 연대와
동일하다.
부석사의 석축(石築)
이것은
부석사의 장관의 하나인 창건 당시 축조(築造)한
대석축이다. 불국사의 청운교 석단은 곱고
정제한데 반하여 부석사의 석축은 크고 작은
돌을 전면석만 다듬어 정교하고 또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불국사의 석축을 미모의
여성이라고 한다면 부석사의 석축은 무던하고
은은한 정을 줄 수 있는 남성에 비할 수 있다.
이 석축은 경사 처리를 위해서만 쌓은 것이
아니고 큰 석축 3에 삼삼씩 모두 9단으로 축조한
바 이는 이 절의 주존불을 모신 무량수전을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의 9품연화대를
상징하고 천왕문(天王門)에서 안양문(安養門)에
이르기까지 108개의 석계단(石階段)은 108번뇌(煩惱)를
제도(濟渡) 한다는 뜻을 표현하였으며, 경내
건물 배치는 화엄종찰(華嚴宗刹)이란 것을
표현하며 빛날 뜻을 표현하였으나, 경내 건물
배치는 화엄종찰(華嚴宗刹)이란 것을 표현하여
빛날화(華)자 형으로 배치한 점 등은 국내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영(造營)이다.
구품 만다라
부석사에 한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하는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부석사 범종루(梵鍾樓)
이
누각은 이 절의 본존 불상을 봉안한 무량수전에
들어가는 중문이다.
이 누각에는 큰 북과 목어 운판 경석 등 불기(佛器)를
장치한 곳이다.
이 건물은 남북으로 길게 전면 4남북 5열로 20개의
밑기둥을 세운 뒤에 귀틀 마루를 만들고 남북 4간
전면 3간형으로 기둥을 배열하고 주심포식 5량으로
천장을 구성하고 지붕 남쪽은 팔작 지붕을 하고
북쪽은 맞배 지붕을 구성하였으며 석가래부에는
부연을 부접한 조선 영조시 건축한 목조 건물로
중후하면서도 선의 미를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영조 임금의 대비가 원당으로 하고자 <지금의
원각전 당시는 축화전>인 법당을 건축할 때
영춘(永春) 현감의 협조로 죽화전과 범종루
보수에 소요되는 기둥과 도리 등 중제를 강원도
영월 영춘에서 마아령을 통하여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자인당의 동편에 위치한 응진전
범종루 앞 동서 양편에 있는 취현암의 향각,
주지, 별관, 요사, 천왕문, 일주문 등 최근에
보수 복원한 목조 건물이 있다.
범종루앞 쌍석탑(雙石塔)
이 석탑은 1962년 동방사 구기로부터 옮겨온
것으로 3층 석탑 2기는 쌍석탑으로 형태가 꼭
같다. 3성 기단 위에 3층으로 조성된 탑들은
기단부에서부터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완전한 것으로서 현지로 옮겨옴에 따라
부석사의 경관이 한층 더 어울려 돋보인다.
안양루(安養樓)
이 누문은 무량수전 앞의 최상단의 석축 위를
걸쳐서 건축한 누각이고 밑은 누문으로
구성하였다.
이 누문을 안양문이라 함은 서방 극락세계의
상징이며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필수 통문이다.이 건물은 14개의 단주(短柱)위에
귀틀 마루를 조립하고 누마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다포식 팔작 지붕으로 구성하였다. 기둥
위에 포를 얹고 중방을 걸친 다음 5중의 공포를
조립한 다음 상방을 얹어 연목을 받게 하였다.
중도리와 상도리 사이에 조립된 십자형 두공의
공간은 불상형으로 보임이 흥미롭다.이 건물은
중후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의 다포양식이며
이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바닷물에서 진을 뽑은
매우 정제된 재료이다.
부석사의 석등(石燈)
국보
제 17호로 보존되고 있는 석등은 부석사 본당인
무량수전 앞에 위치하고 이 석등의 조각
수법이나 조형미에 있어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현재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최고의
조각물로 지칭되고 있다.
이 석등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맨 처음에
지복석(地伏石)을 놓은 위에 방형(方形) 기단석(基壇石)을
놓고 그 위에 8각 복연석(伏蓮石)에 각마다 연엽(蓮葉)과
귀꽃 연봉을 부각(浮刻)하여 복연을 더욱
돋보이게 한 다음 8각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활짝 핀 양연석을 받친 위에 8각 화사(火舍)석을
얹고 화사석 8면 중 4면에 화창(火窓)을 두고 4면은
보살 공양상을 부각하였다. 각 보살상은 연화대
위에 고요한 자세로 서서 공양구를 든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화사석 위의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지붕선을 높이고 지붕 끝 부분이 위로 약간
반전하여 쳐든 듯 지붕의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로 장식을 조화롭게 조성한 신라
석등의 수작으로, 보는 사람들의 격찬을 받는다.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 18호로 보존되고 있는 부석사의 종주(宗主)
건물인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목조 건물로서
가장 우수한 동양 최고의 것으로 한국의
자랑이다.
이 건물은 원융국사 비문에 의하면 고려 정종(靖宗)
9년 계미 1043년 원융국사 부석사 중건이라 하여
지금부터 약 900년 전으로 되고 무량수전
개연기문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 2년(1376년)에
부석사 무량수전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615년 전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의
양상에 의하면 신라 유구(遺構)가 잔존한 고려
중기의 사원(寺院) 건축의 표본으로서 목조예술(木造藝術)의
정화(精華)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이라고 하겠다.
이 불전(佛典)은 전체가 극히 경쾌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국 년대 및 가구 양상 등이 우리나라
사원 건물의 대표적이며 동양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이 건물은 외형적으로 보아 높은 지대 위에
남향으로 화강석으로 면석과 갑석을 정연하게
축대를 쌓고 전면 세 곳에 오르내리는 돌계단을
둔 대지에 주초돌은 기둥 크기에 맞추고 기둥
자리를 원형으로 4cm 높게 하여 기둥뿌리에
침수를 방지하였으며 주초와 주초 사이를
연결한 하방대석도 하방목의 크기에 맞추어 4m
높이로 석방을 깔아 방목에 침수를 방지하였다.
전면
5간 총길이 18.75m 측면 3간 11.56m 240평방미터 건축
면적 외부에 20개의 기둥과 내부 8개의 기둥으로
구성하였다.기둥은 자체 무게를 덜기 위함과
건축미를 생각하여 우리말로 배흘림식(천축식
앤타시스)를 취하여 주말이 가늘고 중간부를
크게 제작하였다.
기둥 위에는 기둥보다 더 넓은 방형포를 얹고
창방을 얹고 일정한 간격으로 공침을 끼운 다음
중방을 얹고 그 위에 두공(斗供)과 포공(砲供)을
위로 차츰 벌려 3중포로 조립하여 도리(圖理)의
중력을 기둥부로 끌어들인 역학적 원리를
인용하면서 다포식(多包式)보다 간편하면서
경쾌하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건물이다. 천장 내부는 7량식으로
조립하였는데 4개의 월간(越間) 보(褓)를
설치하고 보의 4분의 1점에 대공 받침에 중량을
얹고 두 중량 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보의
중심점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우고 그 위에
겹대랑을 얹는 7량식으로 조립하였다.
지붕은 팔작식에 연목 끝 윗부분에 부연을 이어
지붕 끝이 약간 치켜드는 듯한 느낌을 주고 지붕
중간부에 연목을 이어 중간선을 잡게 하여 한국
목조 건물의 부드러운 선의 아름다운 미를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이 무량수전 건물을 총평한다면 건물은 고려
중기의 건물이라도 신라 건물의 유구가
상존하고 순수한 한국 양식에서 탈피한 이국적
양상으로 즉 서역(西域) 천축식의 풍이 다분히
풍기고 있다고 하겠다.
무량수전에서 꼭
봐야 할 부분
○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 째로 오래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의 유구이지만
건물 규모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墨書)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에
원응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와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內陣) 사방에 한 칸의
외진(外陣)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담녀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架構式)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 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法式)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錯視)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벽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 준다.
○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훌림이 심하다.
○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柱心包系)이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정형적인 북방(北方) 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內反)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 공포 사이 포벽에 뜬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곳의 특징이다.
○ 깨끗하고 명쾌한 주심포
○ 전면의 창호는 살대를 격자로 넣은
분합문이다. 중앙칸에는 퇴칸과 달리 문설주를
반들 어 가운데 2짝만 분합문으로 하고 그
좌우의 것은 광창(光窓)으로 들어올릴 수 있게
하였다. 고려 말의 중수 때 바뀐 것인 듯하지만
구성 방식과 비례가 후대의 건물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 후면에 위치한 신방목을 가진 문틀의 널판문
○ 살창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하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列柱)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루미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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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 45호로 보존되고 있는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은 부석사의
주존불상으로서 무량수전에 동향하여
봉안되어있다.앉은 키 2.78m, 무릎넓이 2.06m, 후면
광배(光背) 높이 3.80m로 거대한 불상이다.
이 불상의 체격이나 당당한 풍모나 의문선 등의
조상(造像) 수법은 석굴암의 아미타(阿彌陀)
불상 조각 양식과 흡사하나 다만 다른 점은 석굴
불상보다 규모가 조금 작은 점과 목부가 조금
짧고 목부에 도선문이 후박한 점이다.신라
불상의 형태에 가까우나 면상과 미목(眉目)의
풍만함과 긴 귀, 잘룩한 목의 넓은 도선(道線)으로
조성 연대를 무량수전 중건 연대와 동일하게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의 배후에 부착된 목조 광배는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둥글게 표현하고 원형 외선에 불꽃
문양을 통각(通刻)하여 입체석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이 광배의 조각 양상과 조형미가
화려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불상 조성
연대보다 앞선 듯하여 후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듯하다.
신라 후기 조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부석사
역년사 참조)
불상 머리 위 공간에 장치된 다포집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립되었는데 인도식 기둥 마골주(麻骨柱)와
조립양식이 인도의 불탑풍을 간직하고 있어
봉정사 극락전 닫집과 비교한 바 차이점을 찾기
어려워 목조 광배와 관련성이 있지 않나
의심된다.
무량수전
본존인 아미타 부처님은 좌향이 무량수전 건물
좌향과 다른 점에 대한 생각이다. 법당은
남향으로 하고 부처님은 동향으로 정좌하였다.
이 동향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는 바 그 하나는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서방 정토
극락세계라 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해동불제자가 서향경배를 올림하고
동쪽 불제자를 향하여 동향한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이 부처님은 정동향한 것이 아니고 동남
15도 각도로 앉으셨다고 하고 호국의
부처님이시기에 동해 감은사 앞 바다 문무왕
해중능을 향해 있다는 이 두설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할 여지가 있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떠할까 한다.
먼저 이 부석사는 왕명에 의하여 호국사찰로
세운 절이다. 다음 이 절을 세울 때 내외 정세가
대단히 불안한 시기이다. 안으로는 삼국 통일을
하였다고는 하나 고구려.백제양국의 유민
일부가 통일을 거부하고 전조의 국권 회복의
획책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고 또 하나는
외적으로, 통일 전쟁은 끝났으나 당나라군사는
철군할 생각 없이 백제 공주와 고구려 평양에
도호부를 두고 고구려 백제 양국 유민에 대하여
학대가 극심하였다. 이제 주권국가인 신라는
당군의 철군을 강력히 주장하자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나.당 전쟁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의 창건주인 의상조사가 당나라가 신라에
대한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당초 계획을
바꾸어 일년 앞당겨 귀국하여 문무왕께
고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무력으로서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한편 부처님의 원력으로 국가 안보를
기원하도록 하기 위해 의상 조사로 하여금 호국
사찰을 세우고 화엄학 전교와 아울러 호국을
위해 부처님께 기원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상 조사가 귀국 후 첫 번째로 세운
절이 이 부석사이며 곧 부석사는 호국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절로서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 부처님은 동남 15도 각도로 정좌하였는바
이 방향은 경주 월성궁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으로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이끌어 졌고 당이
공주, 평양등에 두었던 도호부도 모두 철거
하였으며 신라는 명실 공히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삼부석과 석룡
무량수전
서편에 세 개의 바위가 포개어 있다. 이 바위가
부석사란 절의 이름을 낳은 이름 있는 바위다.
또한 이 바위가 부석사 기지를 마련하는데 한
힘이 되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우기 전에 이곳에 이미 차지하고
있는 이교도가 있었는데 의상조사의 절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항거하면서 물러나지 않았다고
하며 이교도를 축출하기 위하여 이 절의
수호신이 된 선묘의 힘으로 뇌성 벽력과
소나기를 내리게 한 다음 이 바위를 공중에 세
번 떠서 들게 하는 것을 본 이교도들은 크게
겁을 먹고 도주케하고 바위는 본 위치로
돌아오고 선묘는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
지하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받들고 있다고 하여
선묘 처녀를 부석사 수호신으로 무량수전
동북편의 선묘각에 모시고 있다.
부석사 3층 석탑
보물 제 249호로 보존 되고 있는 이 석탑은
무량수전 동편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다. 이
탑은 무량수전 안에 동향하고 있는 서방정토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의 정면에 세운 보체이다.
탑의 총 높이 5.62m 기단 폭 3.56m로 비교적
안정감을 주고 있다.
3성 기단 위에 이 탑의 구조는 지반석 위에
기단석을 설치하였는데 기단 4면에 면마다
우주를 포함 4개의 기둥을 두어 각면에 3간식을
형성하고 간마다 안상을 두었으며 3층 기단에는
3개의 기둥을 두어 각면 2간씩 구성한 위에 기단
갑석을 얹은 다음 초층 탑신에는 우주만
부각하여 단간으로 형성 하였다. 3층 모두가
같은 양상에서 체감 되었을 뿐 각층 옥개받침은
5단으로 구성하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양화 보주
등으로 장식하였으나 조금 중후한 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창건 당시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창건 당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
이
조사당은 무량수전의 동북방 약 100m 언덕의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의 탱화와
석상(席上)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제된
석축 위에 전면 3간 측면 단간에 주심포 계통에
따라 두 공포를 조립하고 내부 천장은 5량식으로
짜고 지붕은 맛배식 지붕으로 건축된 고려
후반기 건축이다.
1916년 이 건물을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건축한 순수한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서 국보 제 19호로
보존되고 있는 부석사의 제2의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나즈막하면서 간결하고 단아한 풍미를
보여줄 뿐 아니라 고려시대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조사당벽화
국보 제46호로 보존되고 있는 조사당 벽화는
서기 1377년경에 그린 것으로 사천왕상과
보살상으로 이들 벽화는 고려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벽면
전체를 분리하여 나무곽 유리장에 안전 장치를
하여 유물전시관 안에 소장하고 있지만 세월이
갈수록 색채가 퇴화되어 가는 듯하여 다시
복사하여 보존함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조사당의 선비화(禪扉花)나무
조사당 앞 석단 위에 선비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의상 조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서 조사가 천축으로 갈 때 짚었던
지팡이를 석단 위에 꽂으면서 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설화가 있는 나무이다. 그리하여
영험있는 나무라고 애를 못 낳는 부인들이 이
나무를 달여 먹으면 잉태 한다고 하여 꺾어
감으로 지금은 철책으로 보호하고 있다.
사액서원의 효시..소수서원
영남은 옛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알려져
왔으며 우리나라 인재배출의 요람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는 인재반재영남(人材半在嶺南)이란
말이 있었는데 그 중심지가 우리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 고장이 추로지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선시대
인재배출과 교육문화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담했던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바로
소수서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자랑스럽고
빛나는 문화유산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의 모든
서원의 기원이 되는 최고의 서원인 것이다. 조선
중종(中宗) 37년(1542)당시 성리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성리학의 전수자인 여말(麗末)의 명신학자 안향(安珦)의
고향인 순흥에다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서원이 발생한
이유
안향은
한국 역사상 근 600년간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성리학을 전수함으로써 성리학의 도통(道統)은
그를 시발로 하여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그
후학들에 의해 영남사림파(嶺南士林波)가 형성
계승되었으니. 그를 추모하는 존모의 정은 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존모의 정은 그에게
춘추로 드리는 제향(祭享)과 그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강학(講學)을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창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당시 서원발생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볼 때,
서원의 발생은 조선 중기의 잦은 사화(士禍)로
난세실학(亂世失學)하였던 무교(無敎)의 시대에
있어서 사림(士林)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지방의 관학인
향교는 날로 쇠퇴하여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으므로 새로운 교육기관의
창설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시대의 추이에 따라 그 성격은 변천을
가져왔으나 근본 목적은 청년자제를 모아
학문과 지행을 연마하여 향당(鄕黨)의 문화와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현존숭(先賢尊崇)과
후진교육에 있었으니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교육체제 속에서 서원교육은 우리나라
사학발달에 있어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서원은 지방문화 발전의 중심지가
되고, 향촌 사회윤리를 정화시키는 양심의
감시탑이 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역할
역사적으로 볼 때 서원은 붕당의 중심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고 학문적인 논란과 대립으로
다소의 무리한 상호간의 갈등과 마찰이
있었다고는 하나,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적
동류의식으로 결속하여 하나의 면면한 학파를
형성하였던 것은 실로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일이었다.
여하간 서원은 과거준비교육기관으로서 명목만
간신히 지켜왔던 향교를 비롯한 관학(官學)이
극도로 쇠퇴하게 된 후 당시 교육부재의 풍토
위에서 착실한 성장을 하여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교육 본래의 사명을 홀로
지켰으며, 또한 조선조의 명맥을 그런대로
유지시켜온 선비정신의 배양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한국서원교육제도의 효시가 소수서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소수서원은 국가로부터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소수서원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국왕이 친필로
쓴 액자인 어필사액(御筆賜額)과 함께 서적,
전답, 노비를 하사하여 격려하고 인정하여
주었으며, 지방 관아에서도 간섭이나
통제보다도 오히려 적극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또한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려 600여
개 중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을 때도
소수서원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사적지(史蹟池)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자유당 시대와 공화당
시대에도 크게 보수 정화하였으며, 특히 제5공화국에
와서는 이 지역의 숙원사업으로 건의된
소수서원 성역화 작업이 1982년부터 연차적으로
유물전시관을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보수
정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현재 소수서원에는 국보가 1점 보물이 3점이
있어 우리나라의 유학사 및 교육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 미술사 등에서 차지하는 바 그 가치가
어느 사적지 못지않게 크다고 하겠다.
그러면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순흥은 어떤
곳인가? 불교사원이 그러하듯이 소수서원도
풍광(風光)이 명미(明眉)하고 수려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향
순흥은 태백산에서 백리를 연이어 튼튼하면서도
비틀비틀 구불구불 서남으로 뻗어 구름사이에
꽂힌 듯 구름 밑에 깔린 능선과 구름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와 함께 한 폭의 그림같이 대지에
펼쳐진 하늘의 작품이다. 마치 귀신의 장난처럼
아끼면서도 파고 훑어서 만 가지의 계곡과 천
개의 봉우리와 계곡마다 흐르는 맑은 물과
봉우리마다 철 따라 피는 꽃, 이를 일러
산자수명의 소백산이라 하겠다. 바로 이산이
신라 호국명산이며 영남의 주산이요 작은 산이
영구산, 북동남을 감도는 맑은 죽계수, 이런
것을 천하 명당(明堂)이라고 할 것이다. 이곳은
옛 신라의 숙수사란 큰 절이 있었고 이 절에서
공부하신 고려명신(高麗名臣) 회헌 안향 그의
아들 손자 삼대와 회헌의 삼종손되는 안축(安軸)
삼형제분 모두 여섯 분의 명현이 배출된 곳이다.
특히 어려서 부터 이곳 숙수사에서 공부하여
십팔세 때에 대과에 급제한 회헌은 등과 후
검의중찬(檢議中贊)의 관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주자학(성리학, 송학
도학이라고도 함)과 유교 풍물을 도입하고 그
흥학책을 세우고 그 추진에 고심 전력하여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으니 순흥은 주자학의 전수지요
메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건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그 이념이 되었으므로
조선조의 중종, 명종, 선조대의 거유 이 퇴계, 이
율곡과 같은 명신학자의 학문의 연원이
주자학에 있었으니 안향에 대한 존모의 도는
지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상기한 바와
같이 조선 중종때 풍기 군수로 부임한 신제
주세붕이 주자학의 조종(祖宗)인 회헌 안향의
고향이고 공부하였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전국 각지의 젊은 유생을 모아
공부하도록 한 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인
것이다.
창원과정과 변천과정을 좀더 자세히 보면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중동 36년에 제수하고
이듬해인 1542년 8월 15일 사당과 서원을 기공한지
1년 만에 준공하고 문성공 회헌 안향의 영정(影幀)을
봉안함과 아울러 서원을 개원하였다.
2년 후인 중종39년(1544년) 9월 11일 문정공 안축(文貞公安軸)과
문경공 안보(文敬公安輔)를 배향한 후 90년 후인
인조(仁祖) 11년(1633년) 9월 11일에 문민공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여 지금에 이르다.
서원의 규모는 문성공묘를 비롯하여 명륜당
직방재(直方齋),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서장각(書藏閣), 주사, 전사청(典祀廳), 탁연지(濯硯池),
신제서당 지금의 경염정(景 亭)등으로
구성되어 서원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중국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뜻을 따라
백운동서원이라 이름하였고 묘 위에 제향(祭享)을
위한 제전(祭田)과 수학하는 유생들의
학비보조를 위한 학전(學田)이 마련되었다.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고친
것은 창원 후 7년 만인 명종(明宗) 5년(1550년)
퇴계 이 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
서원을 세우게 된 내력과 서원 이름을 새로할
것을 경상관찰사에 보고 하였던 바 심통원
관찰사는 이를 명종 임금에게 상소함과 아울러
서원 명호사액(名號賜額)을 조정에 계청(啓請)
하였다.
이 소청(疏請)을 받은 명종 임금께서는 신광한
대제학(大提學)에 명하여 서원명으르 짓게
하였다. 명을 받은 신대제학은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地)라 이름 지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께서는 소수서원(紹修書院)
넉자를 금자(金字)로 써서 하사함으로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것이다.
소수서원의 유물
먼저
국보 제 11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회헌 영정(影幀)은
고려 충숙왕께서 안향을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몰후(歿後) 12년만인 충숙왕 5년(1318)에
궁중화가인 원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원본에
따라 묘사한 것을 안향의 종가에 하사했다.
이것을 훈흥향교 서무(西 )에 모시어 오던 중
세조 3년(1457년)단종사화 때 다시 종가 사묘로
옮겨 모시었다가 중종 38년(1543년)에 백운동
서원의 문성공묘로 옮겨 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영정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첫째, 이 영정이 우리나라 회화 가운데 그린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둘째, 그린 수법에 있어서 불교 화풍이나 유교
화풍도 아닌 부각적 화법으로 원본에 의한
묘사이기 때문에 진상에 가까운 것이며,
셋째, 그림에 사용한 물감 원료는 곤충에서
채집된 것으로 그린 후 700년 가까웠으나 조금도
변색되지 않는 특유한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 회화 사상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 485호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는
공자를 상위로 하고 제자 72현과 제후(諸侯)가
차례로 앉은 그림이다.
한편 보물 제 59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는 사원
입구 오른편 송림 속에 있는데 숙수사 창건
초기에 속하는 7세기 즉 신라 통일 초기에
건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건조수법이 정교하고 모양이 아담할 뿐
아니라 숙수사 유적의 하나로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서원을 세운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한 폭과 영상(領相) 오리 이원익의(梧里 李元翌)의
영정 한 폭이 소장되어 있고 미수허목(眉 許穆)의
진상(眞像)이 직방재에 소장 되었으나 후손에
의하여 철거 되었다.
서장각에는 1,000여권의 고본 서책이 소장되어
오던 중 해방 후 관리 부실로 산질(散帙)되고
현재 500여권과 죽계지(竹 誌) 목판이 보존되고
있다.
취한대 암벽(岩壁) 각자(刻字)는 주신제와
이퇴계가 각하였다고 한다. 「경자」는
주신제가 쓴 것인데 그 전설을 보면 밤마다
귀신의 울음 소리로 서원 고직이가 견디지
못하고 밤이면 마을로 피신하였다가 날이 새면
돌아 온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제는 지신(地神)
혹은 숙수사의 잔귀(殘鬼)를 다루는 방법으로,
또 역법(易法)에 의한 위혼의 뜻으로 공경 경 (敬)자를
암벽에 각자 하였다. 그 후로는 귀신의 울음
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경자 위의 백운동(白雲洞)이란 각자는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고친 후
본래 백운동 서원이란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각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제집에
의하면 백운동을 찬양한 시가 있는데
「백일백운생백석(白日白雲生白石)
태수빈래애백운(太守頻來愛白雲)
백두여설안벽남(白頭如雪眼碧藍)」이라 했는데,
해도 희고 구름도 희니 또한 돌도 희다. 태수가
자주 와서 흰구름을 사랑하더라. 머리는 눈처럼
희나 눈은 남같이 푸르다는 뜻이다.
취한대 암벽 위에는 명종 5년(1550년) 퇴계 이황이
여덟 그루의 백송을 심었는데 그 중 네 그루는
고사(古事)하고 나머지 네 그루만이 살아 있어,
옛 선현들의 숨결을 지금도 느끼게 하고 있다.
新 국토기행 -
경북 봉화 ... 한국일보에서 퍼옴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했다. 풍경도 건물도
사람도 영하로 곤두박질친 기온 속에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읍내를 관통하는 하천의
돌돌 대는 소리마저 허공 속에 멈춰 버렸다.
기상청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1991년부터
10년간 평균 최저기온 영하 18.95도)으로
발표한 곳, 그리고 10월 3일 올해 들어
서리가 가장 빨리 내린 곳, 전국 최고의
오지 경북 봉화(奉化) 군이다.
중앙고속도로 영주IC에서 28번, 36번 국도를
갈아타고 도착한 봉화. 태백산(1,567㎙)
구운산(1,314㎙) 금산(1,245㎙) 선달산(1,236㎙)의
높다란 산등성이를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60)의 말이 맞았다.
‘안동에서 북쪽 200리쯤 되는 곳에
태백산이 있고, 산 밑에 내성 춘양 소천
재산의 네 마을이 있다. 모두 깊은 두메인데,
두메 백성들이 모여 산다. 병란과 세상을
피해 살 만한 곳이다.’ (택리지)
봉화는 정말 두메였다. 봉화는 전체 면적의
82.8%가 산이다. 그것도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싼 산이다. 건설교통부가 7월 발표한
개별공시지가에 따르면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임야는 평당 119원으로 전국 최저. ‘껌
값’ 보다 싸다. 해안 마을 특유의
간척사업이나 선착장의 활기, 내륙의
번듯한 도회지 풍경은 아예 처음부터
찾아볼 수 없는 ‘경북의 시베리아’였다.
이런 봉화에 과연 사람이 살고 있을까.
봉화읍에서 비티재를 넘어 철교 밑으로
좌회전해서 닿은 닭실마을(유곡리酉谷里).
풍수지리상 암수 닭 두 마리가 날개를 펴
알을 감싸 안은 형국(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닭실마을이다.
‘닭실 한과 부녀회’라는 허름한 간판이
걸린 한옥에 들어가보니 인상 푸근한
할머니 10여 명이 약과 강정 등 한과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450년 이라는 전국
최고(最古) 역사와 연간 4,000만~1억원
판매량을 자랑하는 전통 유과의 산실이다.
그런데 평균 연령 60대 중반인 할머니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영 이상하다. “새댁!”
“왜요? 할머니!”
안동에서 22세 때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는
이임형(71)씨의 설명이다. “ 이분들 모두
안동 권씨 며느리들이야. 이곳 닭실마을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집성촌이거든. 내가
충재(권 벌1478~1548) 할배의 36세손 며느리,
저기 앉은 사람이 39세손 며느리야.” ‘충재
할배’의 불천위 제사 때부터 만들어왔다는
이 유과는 “바삭바삭하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 조금 씩 전국에 소문이 나” 1990년부터
일반 판매를 하고 있다.
평생 비녀를 뽑아본 적이 없다는 이
할머니의 말처럼, 그리고 봉화군청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유교문화권 관광자원화
사업’일 정도로 봉화는 오랜 전통과, 그
전통을 묵묵히 이어오는 사람들의
고장이었다.
한과마을에서 3㎞ 정도 북쪽에 위치한
청암정(靑岩亭)도 ‘병란과 세상을 피해’
이곳에 정착한 옛 사람들의 정취와 유물이
가득한 곳.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된 조선
중기 문신 충재 권벌이 16세기 초 거북
모양의 바위 위 에 세운 정자로, 인근
충재유물관에는 교지와 도첩 등 무려 487점의
국가 지정문화재(보물)가 빽빽하다.
충재 선생의 19세손 권종목(60)씨는 유곡리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렸을 적에는 비 올 때
추녀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안 맞을
정도였지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집 밖에서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나면 ‘ 할배요?’,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가 나면 ‘할매요?’ 했을 만큼 모든
주민이 한 친척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120가구만이
안동 권씨 일가입니다. 점점 대도시로
빠져나가기 때문이죠.”
닭실마을을 괴롭히는 ‘인구감소’ 현상은
봉화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 봉화군
면적은 서울의 2배이지만 인구는 고작 4만
2,000여 명. 하도 출생률이 낮다 보니 명호면
기관단체장 모임인 청량회는 최근 ‘명호면
인구 3,000명 유지를 위한 대책모임’을 갖고
명호면 태생 신생아에게 축하금 10만원을
지급키로 했을 정도다.
일할 만한 산업체는 거의 없고
명문중고교도 전무하다 보니 인구를 늘려야
할 젊은 부부들이 인근 영주나 안동 대구로
빠져나간 탓이다. 눈앞에 보이는 학교
건물이 좀 스산하다 싶으면 백발백중
폐교란다.
“해방 전만 해도 풀무질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수백 명 이곳 봉화에 머물렀어.
먹여만 주면 고맙다며 일을 배우려 들었지.
그런데 지금은 돈을 줘도 방짜유기 만드는
일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사변 전까지
30곳이나 됐던 유기공방은 이제 2곳 뿐이야.
젊은 사람 다 떠나면 이 유기도 곧 끝장 날
거야.” 봉화읍에서 50년 가까이 방짜유기를
만들어 온 김선익(67)씨의 하소연이다.
군정 현안 1순위로 꼽히는 것도 인구 증가다.
우수교사를 유치해 봉화고와 봉화여고를
남녀공학으로 통합하고, 인근 문수산에
민자 유치로 대규모 스키장을 세우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인희 봉화군수는 “지난해 봉화사랑
카드를 발행해 적립금으로 2005년 20억원의
교육발전기금을 마련키로 한 것도 명문고를
키워 인구를 늘리기 위한 고육책”이라며
“스키장과 연수원 건설 등 관광산업
개발을 통해 중 학교만 졸업하면 타지로
나가는 젊은 층이 계속 봉화에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산업체라곤 농공단지 내 농산물가공
인조섬유 화학제품 등을 생산하는 14개
중소업체와 삼육식품, 석포면
영풍석포제련소가 전부인 봉화. 이 탓에
지난해 재정자립도는 9.9%를 기록, 전남 장흥(9.3%)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오죽하면 매해 8월 읍내의 내성천에
낙동강 은어를 풀어서까지 은어축제를
열겠어요? 관광객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여 하룻밤 묵어가 달라는 것이죠.”
동행한 군청 직원의 푸념이다.
그나마 봉화를 먹여 살리는 것은 매년 80톤이
생산되는 송이 버섯. “봉화에는 한 집 건너
송이전골집과 송이돌솥밥집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송이가 지천이다. 맛과
향이 뛰어나 연간 40억원의 농가소득은 물론
매년 9월 송이축제를 통해 관광객도
끌어들이는 효자 상품이지만, 재배가
불가능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
당귀 천궁 작약 등 약초를 먹여 키운 한약우(牛)를
브랜드화해 봉화의 대표 상품으로 만들
계획도 있지만 전국적 판매로까지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 친환경 개발로 먹고 살려는
대다수 시골 지자체가 풀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다.
그래도 봉화에는 희망이 있다. 바로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맘껏 뛰어 놀며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이다. 물야면 오록리
물야초등학교. 지난해 산림청이 ‘아름다운
학교 숲’으로 단독 지정한 아담한
교정이다. 200~300년 생소나무 80여 그루와
50~150년 생 소나무 110여 그루, 느티나무와
향나무 520여 그루가 어우러진 모양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는 10여
명의 아이들. “한 학년이 한 반, 한 반이
10~20명”이란다.
차주헌(10 4년)군이 들려주는 이곳 아이들의
일상은 그대로 동화다. “ 여름에 저 숲속에
들어가면 산딸기가 정말 많아요. 뱀딸기도
많지만 맛은 없어요. 수업이 끝나면 동네
형들과 축구나 숨바꼭질을 하며 놀아요.
선생님도 아주 친절해요.”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이 아이가 대도시
못지않은 교육혜택을 받으며 영원히
봉화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봉화 어른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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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북지리 마애불..국보
201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퍼옴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 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삼존불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닭실마을
영남의 대표적 집성촌의 하나인 경북 봉화의
닭실마을은 예로부터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로 꼽힌
명당 중의 명당. 안동 하회마을이 물위에 뜬
연꽃 모양을 한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의
길지라면, 이곳은 마치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이라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다. 마을 이름조차 이를 빗대어 닭실마을,
한자로 '유곡(酉谷)'이라 부른다.
기와집이 늘어선 마을 초입에 서면 비록 옛
영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는 않다지만,
처음 찾는 외지 사람의 눈에도 예사 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다 보면 왼쪽에 넓은 들을 끼고 오른편에
위치한 솟을대문이 독특한 고택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명재상이었던 충재 권벌(沖齋 權 ;1478∼1548년)의
종갓집이다.
닭실마을의 안동 권씨(닭실마을에 사는 안동
권씨를 가리켜 닭실 권씨라 부르기도 한다)
종갓집 입구에는 월궁에 들어선다는 의미에서
대문 위아래에 반원형의 나무 장식이 덧대어
있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자 깨끗이 정돈된
잔디가 내방객을 반갑게 맞아 준다.
2000여 평의 대지에 18대 종손인 권종목씨 부부가
윗대 종손 내외를 모시고 아들 삼형제와 더불어
종가를 지키고 있었다. 당당한 풍채에 호탕한
성품의 종손 권종목 씨는 사재를 털어
충재유물전시관을 짓고 조상의 유품을 후손에
제대로 전해 주고자 힘쓰고 있다.
닭실마을 내의 충재 유적과 더불어 사적 및
명승지 제3호로 지정된 이 집은 가족들이
거주하는 사랑채와 안채, 서재인 충재(沖齋)와
연못 위에 지어 놓은 아름다운 정자인 청암정(靑巖亭),
파란 단청칠이 눈에 띄는 우뚝 선 사당 등
전형적인 양반댁의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협문
너머에 조성되어 있는 서재와 정자 공간은
단풍나무, 철쭉, 나리꽃 등 갖가지 야생화와
수백 년 된 느티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에
둘러싸여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청암정의 유래
청암정은 충정공 충재 권벌이 공부하며 놀던
정자인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세워졌다. 처음
지을 때에는 온돌방으로 하였는데 그 온돌방에
불을 넣으니 바위가 울었다. 그러던 중 한
노승이 지나다가 말하기를 이는 거북 등에다
불을 지르는 것이니 마루방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마루방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온돌방에 불을 땐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조선조 명종 때 건립된 것인데 주위는
향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못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인즉 거북은 물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논에 물이 말라도 이 못에는
항상 물을 대었다 한다. 지금도 청암정 못에는
물이 고이고 있다.
닭실마을 유과
닭실마을, 정확하게 말해 안동 권씨 종가에서
유과가 처음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중종 때 사화를 입어 이곳에 내려온 충재 선생이
그 후 선조 대에 이르러 복권되고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유교 관례에서 벗어나 영원히
제사를 받들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위(不遷位)'에
오른 후부터다. 종손 권종목 씨에 따르면 수
백년 동안 제수용으로 쓰여 온 유과는 권씨
종갓집 며느리들이 불천위 제사 때 모여 음식을
마련하는 풍습에서 시작된 것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예로부터 한과는 제사 음식 중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깃들여 있으며, 솜씨를 부리는
것으로, 그 밖의 집안 대소사에서 가문의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로도 여겨졌다. 이 댁에서 만드는
한과는 모두 세 종류. 치자, 흑임자(검은깨),
자하초, 껍질 벗긴 깨 등으로 곱게 물들인 오색
강정, 넓적하게 튀겨 만든 산과 및 약과가
그것이다.
정성스레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오색강정은
제수용품으로 뿐 아니라 집을 찾는 손님상에
오르면 명문대가의 기품을 흠씬 풍기며
손님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고 노종부
류한규 할머니(79세)는 회상한다.
권씨 종가댁 제례에 올라가는 한과는 특히 여러
사람의 손이 들어가는 그야말로 정성의
결정체로, 현재 아랫대 종부 손숙 씨(55세)가
마을 부녀회 회원들(평균 연령이 60대 중반)과
함께 내림음식의 비법을 전승하고 있다. 지난
1992년부터는 종가댁과 마을 부녀회에서 협의,
닭실마을 유과를 소량이나마 주문생산해 농가
소득에도 적게나마 보탬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유과 판매로 인한 소득 자체는 크지 않지만,
닭실마을 부녀자들의 단합을 일궈 내는 '두레'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조상의 음덕이 후손에
내렸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닐지.
수백 년 전의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닭실마을 종갓집 유과는 맛도 맛이지만, 그
독특하고 아름다운 멋이 보는 이의 입맛을
자극한다. 오색강정 위에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고운 꽃을 장식하는 손길에는 수백 년 전통의
유과에 후손의 정성이 담뿍 배어 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전통의 꽃무늬. 그 모양새 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성이 돋보인다.
단양적성비 (국보
198호)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 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적성산성
적성산성(사적 제265호)은 석축성으로, 해발 382m에
자리해 있다. 성의 길이는 923m가 되지만,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협축한
부분의 안쪽벽 높이 2~3m, 폭1m의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삼국시대의 산성으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보는데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유적이다.
동쪽은 험준한 죽령고개와 1,314m의 두솔봉723m의
두악산이 적성산성과 연계되어, 신라와 가장
가까운 죽령을 끼고, 죽령산성에서 흘러내린
물이 죽령천을 이루어 산성을 안고 돌아
남한강에 흘러든다.서쪽으로는 1,015m의 금수산,
가은암성이 우뚝 솟아 남한강을 경계로 하여,
상중하선암의 맑은 물이 단양천을 이루어 또
다시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남쪽은 소이산 봉수대를 남한강이 감싸 돌고
있으며, 삼국시대 때 한강수로 장악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던 시기라 단양천 죽령 남한강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감싸고, 또 합류되는
곳이라 지형적으로 요충지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북쪽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동강, 서강이 정선,
평창,주천,임계에서부터 흘러 영월에서 합류해
단종의 애닳은 사연을 남한강물에 싣고, 고구려
전초기지인 영춘면의 온달산성을 휘감아 돌아
도담삼봉 신단양 시가지를 지나서 적성산성
아래로 흘러, 명산대천의 맑은 물이
적성산성에서 모두가 합류된다.
물뿐 아니라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온달산성,
가은암성, 독낙산성, 죽령산성, 공문성 등 많은
산성이 있음으로 보아 물, 산, 성이 모인
지역으로 이곳은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한 후
전초기지로 사용했음을 지형지세로 보아 알 수
있다. 해발 323m밖에 되지 않지만, 적성산성은
신라 땅인 영주 쪽에서 오자면 죽령을 넘어
한강을 도하하기 바로 직전의 첫번째 강
언덕이며, 성재산 정상 부분에 축성한 것은
지세에서 보는 것처럼, 지리적으로 천험하고
전략적으로 높지는 않지만 현과 가깝고
오른쪽은 단양천, 왼쪽은 죽령천, 전면은 한강
뒤쪽은 두악산 두솔봉이 있어 사방을 골고루
정찰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158년 3월에 죽령길을 개척하고 북방
경로을 개척하여, 고구려를 공략하고자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구축했다. 구전에 의하면,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북쪽은 고구려가 진을 치고 남쪽으로는
신라에서 수자리를 살았다고 한다. 성문이
북쪽에는 없고 남쪽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신라의 석성이다. 성의 기초는 별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토석으로 다지고, 외벽을
할석 및 자연석으로 축조했다. 성벽 외면은 높지
않고, 인마가 상부로 다닐 수 있는 평평한
방식은 삼국 중 신라와 백제가 흔히 사용했던
축성 방법이다.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삼국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 고려시대의
토기 청자편 기와조각이 출토되기도 한다.
단양군은 소백산맥의 북쪽에 있어서 산맥에
의하여 경상문화권 또는 신라문화권과도
격리되었기 때문에 신라 쪽에 기울고 있지만,
파편 중에 타봉의 사무문이나 격자문이 시문된
곳이 있어 백제토기와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이는 단양을 통한 신라문화보다는
충주를 통해서 서해안으로 백제지방과
지리적으로 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곳에서
출토된 '회색 경질토기편'이 그 근거라고 하며,
이와 같은 파편이 부여지방 백제문화권에
출토된 것과 같다는 것으로 볼 때, 삼국의
문화가 단양지방에 두루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마지(摩旨):부처에게 올리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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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감사드려요..염치없이 매번 기다려집니다...헤헤...따로 자료집란을 만들어야겠어요..
자세한 설명과 사진,,정말 잘 보았습니다.흙피리 연주곡과 더불어 그 시대 속으로 여행을 하고 있느듯...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