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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가지 않게.hwp![](//i1.daumcdn.net/deco/contents/emoticon/things_15.gif?v=2)
문시원
이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꼭 쥐고 온 기억들을 여기에 두고, 기억할 거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기억하자’ 하고 생각했던 순간. 무대 밖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때다. 뮤지컬 때 수아가 파랑새를 부르고 있다. 핀 조명인지 뭔지 밝은 조명이 수아를 향해 나에게까지 오고 있다. 그 조명을 받으며 혼자 노래를 부른다. 수아 너머 있는 관객은 수아를 보고 있고, 나도, 내 옆에 있는 10기도 수아를 보고 있다. 수아를 보고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야 하는데 나는 이게 지루해야 하는데 그냥 딱 그 순간이 너무 예뻐서 기억하자고, 기억해야 한다고 잊으면 안 된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였다. 화창하고 맑은 날에 바람만 엄청나게 부는 그런 날씨. 날이 좋아서 그런지 다들 데크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만든 교실과 데크를 잇는 계단에 앉아 있다. 항상 있는 과자가 오늘은 없었다. 오늘은 아무도 매점에 안 갔나 보다. 과자 대신 다들 공책이나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민이와 유지는 논문을 하고 있었고, 나는 오늘 할 일을 챙기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계단에 앉거나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나만 볼 수 있는 시선이다. 내가 앉아있는 위치에서 느껴야 하는 애들의 표정, 날씨, 냄새, 소리였다.
끝까지 안 지고 싸운 거다. 내가 너무 슬퍼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이미 진 것 같아서, ‘맨날 싸우는 애’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한심한 애랑 싸우는 한심한 애가 되기 싫어서, 말이 안 통해서, 눈물이 나와서, 따돌림당할 것 같아서, 무서워서 싸우다 말았다. 화가 난 만큼의 반의반의반의반의반도 안 냈지만, 처음으로 끝까지 싸웠다. 감정을 추스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지만 무서워서 피하지는 않았다. 애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은서가 옆 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도, 내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아도 화를 내고 싶어서 냈다. 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참으면 호구가 되는 거였다.
10기가 너무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나 말고도 다른 애들도 기억하는 순간. 필리핀 시퀴홀에서 타잔스윙 끝나고 지프니에 탔다. 어쩌다 보니 남자 차, 여자 차 나눠서 타게 되었다. 해연쌤의 스피커를 남자애들이 가져가서 우리가 다시 뺏어왔다. 중간에 해연쌤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사이에 김민석인가 서정원인가 어쨌는 남자애가 쌤 스피커를 다시 훔쳐 갔다. 출발하고 알럽야를 틀고 우리한테 뻑큐를 날리면서 갔는데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늘이 온통 주황색이었다. 노을이 지는 지프니에서 애들이 알럽야 부르면서 지나쳐 가는 게 따뜻해졌다.
처음으로 못 자고 2시간을 넘겼다. 너무 힘들었다. 뭐가 힘든지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힘들어서 여유가 없었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안 왔다. 잠이 안 오니까 평소에는 잘만 잤던 침대가, 우리 방이 너무 무서웠다. 한나네 1층 2번방에서 지낸 게 몇 달인데 이불 밖으로 발도 못 꺼냈다. 뭐가 올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가 오면 볼 수 있게 얼굴은 이불밖에 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굳이 안 좋은 상상을 한다. 좋은 상상이 안 된다. 나 혼자 이 힘듦을 이겨낼 수 있지도 않으면서 또 내가 힘들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다. 근데 누군가는 안아줬으면 좋겠다.
졸업여행 바로 다음 날 이었다. 망했다. 시계를 보니 35분이다. 논문도 끝이고 일찍 일어나서 어제 고른 옷을 입고 화장하고 진짜 예쁘게 가려고 했는데 씻지도 못할 것 같다. 양치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했다. 양치하고 세수만 하고 나왔는데 벌써 오분이나 지났다. 1번 방에 가서 옷을 빌려서 후다닥 갈아입은 다음 양말을 챙겨서 나갔다. 으악 양말 안 신고 나왔더니 발이 너무 시렸다. 어젯밤 새지도 않았는데 이런 거지꼴로 학교에 가는 게 웃겼다. 고등식당에 도착해서 양말을 신으려다 보니까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현아 나 여기 빵꾸 뚫렸다?” 하니까 다현이가 왕 큰 구멍을 보여주면서 “나는 구멍 안 뚫린 양말이 없어” 하면서 웃었다. 식탁에 앉으니까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귀찮게 왜 앉고 나서 생각나는지 내일부터는 자리로 가기 전에 물 떠와야지. 내 주변에는 아무리 봐도 물 떠온 애는 없었다. 물 뜨러 가는 애 없나 생각하다가 내 옆에 수아가 방금 떠 온 것 보고 포기했다. 오늘은 물 마실 팔자가 아닌가 보다.
논문발표 날. 내가 고른 토이스토리4 OST 가 나온다. 논문이 원래 이렇게 준비 안 된 채로 나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이 내 등짝으로 보고 있겠지. 허리 펴야겠다. 무대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다른 생각 하다가 인사를 하고 나서야 진짜 발표라는 걸 느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진다. 새삼 안경 안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노래가 시작했다.
아직은 금산에서 수원 직행버스가 있었을 때. 다현이와 내가 나란히 3, 4번에 앉아서 여러 번 봤던 다현이의 갤러리를 본다. 애기 다현이가 동상을 만지고 있는 사진, 청소년증에 붙어있는 커다란 모자 쓰고 찍은 사진, 그리고 유니콘,,, 저녁 먹고 늦은 집간디라 밖은 어둡고 옆에는 안현준과 김민석이 이어폰을 끼고 자고 있다. 민이는 오늘도 엄마 차 타고 집에 간다. 도보 얘기를 하다가 어쩌다 어쩌다 다른 친구 뒷얘기도 하고 일요일 몇 시에 학교 들어올 건지 얘기하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면 잠을 잤다.
여기 내 기억을 남겼으니까 잊을 걱정은 하지 않고 또 다른 소중한 기억을 기억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