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6
6월29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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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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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mctIdG1stE (문재현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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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역설적이지만 결핍은 은총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오 26, 75)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가 수제자가 되고 나서 기고만장했을 때, 자신은 절대로 죄에 떨어질 리가 없다고 장담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우겼을 때, 사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 앞에 자신의 죄와 인간적 부족함,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할 때, 사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였고, 순수 혈통의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였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의 미래는 장밋빛이었습니다.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 때 당시 그는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신 하느님 손길을 체험한 후에 바오로는 자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고 되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
고되고 힘겨운 오랜 신앙 여정 끝에 마침내 자신의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 두 사도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시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한계, 나약함,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순간 우리는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그토록 우리가 원망하는 우리의 결핍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결핍은 은총입니다. 결핍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우리 삶의 길목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결핍을 체험하게 될 때마다, 뿐만아니라 내 결핍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결핍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결핍은 우리를 성화에로 인도합니다. 결핍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됩니다. 결핍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내게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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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k9VCQvLn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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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이 두렵지 않음이 복음 선포의 시작>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성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기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게 되었고 성 바오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은 복음 선포와 두려움의 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어떤 여자 피아니스트가 세계 최고의 스승이 개인 제자를 뽑는다는 말에 콩쿠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연주했는데 거장의 평가는 박했습니다. 그녀는 실망하여 그날 부로 피아노를 접었습니다.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중 그때의 그 거장이 자신의 도시에서 연주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거장은 그녀를 대번에 그날 연주를 가장 잘했던 학생으로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더욱 화가 나, 그러면 그때 왜 그렇게 박한 평가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거장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을 견뎌내지 못하면 언젠가 다른 어려움이 와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당신이 피아노를 포기한 건 내 탓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련을 이겨낼 준비가 없었던 당신의 탓입니다.”
천재는 수많은 시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련을 끊임없이 이겨낼 에너지를 지니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의 여자 피아니스트는 그 에너지를 위대한 스승에게서 얻으려 하였습니다. 공갈 젖꼭지에서 어떤 에너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공갈 젖꼭지’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엄마의 젖이 부족할 때 그러한 집착과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에너지를 사람들로부터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 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고 하십니다.
우리는 마치 ‘마차’와 같습니다. 다만 이 마차가 저절로 생겨났는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만약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으면 그 마차에 누구를 태울 것인지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가 태운 사람이 차비를 낼지, 안 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내가 만들어졌다고 믿으면 나를 만든 이나 그가 원하는 사람을 태우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느 날 프로이센의 왕 프레데릭은 신하들과 같이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비웃는 농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본질랜드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왕 폐하! 대왕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전쟁에서 대왕을 위하여 서른여덟 번 싸워서 이긴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나이가 들어 머지않아 대왕이 비웃으시는 저의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나 뵈러 가게 됩니다. 저는 대왕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함을 압니다. 폐하, 소신은 이제 물러가려 합니다.” 다들 장군을 즉시 처형하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왕이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본질랜드에게 사과하였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내 마차에 태운다면 다른 이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려움 없음은 주님께서 계심을 드러내는 가장 큰 증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선교할 당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지진이 일어나 쇠사슬이 풀리고 감옥 문이 열린 일이 있었습니다(사도 16,16-40 참조). 그런데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도망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간수가 문이 열려 있는 감옥을 보고 사람들이 도망쳤을 것으로 생각하여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오로는 자신들이 안에 있으니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수는 도망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여전히 감옥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감동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기 가족들이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 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2티모 4,17)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참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나의 마차에 나를 만드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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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는 것이 행복하다>
인도 출신 의사이며 심신 의학의 창시자이고 영신수행 지도자인 디팩 초프라란 사람의 자녀교육 방법은 창조의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공부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초프라는 아들에게 지치지 않고 한 가지만 당부했습니다. “네가 만약 공부를 못해서 실패해도 아빠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넌 한 가지만 생각해라. ‘네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길 바란다.”
아이들은 정말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만을 생각했고, 주위의 모든 친구에게 항상 도움을 주는 소년들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의 모든 친구가 이 아이들을 좋아했고, 선거하면 항상 반장, 학생회장을 하게 되었고, 이들이 내는 안건들은 틀림없이 다 통과가 되었습니다.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더 큰 영역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정원을 돌보는 이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학교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위 이웃들에게서도 큰 사랑을 받고 크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아이들이 잘못 클 수 있을까요? 두 아들 다 장학생으로 졸업하여, 하나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하나는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요 창조의 원리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기능심리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실험한 내용입니다. 윌리엄은 사람이 어떤 순간에 가장 큰 행복을 느낄지를 궁금해하면서 10명씩 10개 그룹으로 나누어서 10주 동안 각자 쇼핑을 하고, 애인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아르바이트하고, 봉사하는 등의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윌리엄은 남자들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것을 가장 행복해하겠고, 여자들은 쇼핑하는 것을 가장 행복해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0주 후의 결과는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장 많은 인원이 ‘봉사’할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다고 쓴 것입니다. [사단법인 자운선가 과학명상센터에서 촬영한 유투브 동영상 참조]
이는 어쩔 수 없는 창조의 법칙입니다. 받는 것이 항상 주는 것보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길거리에서 구걸하여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에게 돈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받기만 하여 모으기만 하는 목적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행복한 자녀를 만들고 싶다면 다 내어줄 수 있는 자녀로 키우십시오. 그리고 줄 것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면 줄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도 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는 100kg의 뚱뚱한 몸매로 ‘오프라 윈프리 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흑인 여성입니다. 그녀의 영향력은 ‘오프라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녀가 추천하는 책은 항상 베스트셀러가 되고, 가난한 보육원을 돕고 싶다고 10초만 말하면 다음 날 수십 억 원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타임지는 2005년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쇼에서 상처받은 자아를 지닌 사람들을 자신의 상처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녀가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았던 경험이 있기에 쇼에 나온 게스트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털어놓게 됩니다.
윈프리는 빈민가의 딸로 가난한 흑인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9살 때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해 14세 때 이혼모가 되었고, 마약 복용으로 수감되었던 전과자입니다. 그녀는 자기 삶의 모델을 모세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과거는 미래를 위해 받은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도 주어야 하는 사명이고, 남보다 아팠다면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며, 꿈이 있다면 그것도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고,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짐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고통까지도 줄 수 있는 사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은 받는 것이고, 그래서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 모범을 보이신 분들 중 대표적인 두 분이 베드로와 바오로이십니다. 받았으니 주는 삶을 사셔서 행복한 분들이셨습니다. 주어야 하는 것은 행복과 구원을 위한 사명입니다. 사도는 주라고 파견받은 이들이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도들인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이 보이셨고 그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만약 사도들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는데,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는데도, 열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당연히 그것을 나누어 줄 것을 믿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 그것이 창조 때부터 행복의 원리이고 구원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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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릴 때입니다. 가요계에서는 ‘남진과 나훈아’는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경쟁자’였습니다. 남진은 멋진 외모와 시원한 입담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가창력과 춤을 따라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남진의 노래는 ‘님과 함께’가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경쾌한 멜로디가 지금도 어깨를 들썩이게 합니다. ‘가슴 아프게,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을 찡하게 했던 노래입니다. 80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아직도 건강한 모습입니다. 나훈아는 독특한 창법과 구수한 입담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한’을 노래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나훈아의 노래는 ‘고향역’이 있습니다. 노래의 도입부에 기차소리가 나면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는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잡초, 무시로, 사랑’과 같은 노래는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는 시대를 풍미했던 경쟁자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어릴 때 정치계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고난 받는 민중을 대표하는 야당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40대 기수론으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떨어졌습니다. 카랑카랑했던 그의 목소리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오랜 시간 투옥과 연금의 시기를 거쳤지만 199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IMF’라는 금융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이겨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으로 대한민국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햇볕정책’은 그의 대표적인 대북정책이며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그 열매였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그의 말대로 그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닭의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탄압받던 야당을 이끌었습니다. ‘삼당합당’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라는 말처럼 1992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무력화 하였으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대통령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대한민국 정치계에는 김대중과 김영상이라는 큰 별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종교계에는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참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깊은 산사에서 한 시대의 ‘죽비’가 되었던 법정스님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소유하려는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을 개원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기꺼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종교는 진리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를 향해가는 경유지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고통 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하였습니다. 법정 스님을 명동성당의 대림특강 강사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김수환 추기경님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진리’ 안에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특유의 저음과 깊은 성찰이 묻어나는 말씀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따뜻하게 하였던 어른들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완벽했던 분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 야단도 맞았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부족하고, 겁이 많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마침내 교회를 빛내는 천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야단을 맞았었고,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더 나쁜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인 확신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고,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3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떠났고,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초대하셨고,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의 허물과 잘못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도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초대교회의 신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허물과 결함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도 부족함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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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가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음: 마태 16,13-19: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라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게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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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간절함과 뜨거움>
사도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분들의 ‘열정’의 위대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그 열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때가 많은데, 사도들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주님의 은총일까? 주님의 은총이라면 우리가 본받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타고난 성격 덕분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들의 열정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나도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서”, 또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가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항상 ‘나의 구원’이 첫 번째입니다. 내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또 “나 자신은 잘하고 있으니 남을 구원하기 위한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선교활동의 첫 번째 목표는 각자 자신들의 구원이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는 그 ‘간절함’이 사도들의 열정의 원인이었고, 이유였습니다.> 또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가 특별히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와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신이 실격자(탈락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 <끝까지 자만하거나 방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소심했기 때문도 아니고, 괜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아무도 “나는 구원받기로 이미 정해져 있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이라도 ‘정말로 위대한 성인들’이었다고 평가되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모습들입니다. 간절함과 뜨거움과 겸손함.
요한 묵시록에 ‘뜨거움’에 관한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미지근한 것은 뜨거운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뜨거움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또는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또 ‘뜨겁게’ 열정적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의 기준’으로는, 대충 적당히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믿음을 본받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인데, ‘믿음’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하기 전에 사도들의 믿음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다음 이야기가 잘 나타냅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7-38)
예수님께서는 노련한 어부들인 제자들을 믿고 편안하게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너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뒤에는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전날 밤, 감옥에 갇혀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베드로 사도는 아무 걱정도 안 하는 모습으로 아주 깊이 자고 있었습니다.(사도 12,6-7)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워야 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믿음이 완전한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초연해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사도 16,25) 믿음으로 두려움과 걱정을 모두 극복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부활’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바로 그 확신 없이 그저 소원이나 빌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우리는 그들의 증언만 듣고서 믿는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믿기로 작정하고 신앙인이 되었다면,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믿음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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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1)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이 사명을 수행하며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감옥살이도 하였고, 매질도 당하였으며, 동족들에게서 모욕과 멸시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에 뒤따르는 약속처럼 —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 — 두 사도의 고된 여정에는 늘 주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오늘의 독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일련의 사건이 주님의 구원 행위였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복음을 선포하며 겪은 여러 위기의 순간에 늘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복음 선포에 대한 두 성인의 열정과 헌신을 기억합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온갖 두려움에서 구하시는 분이시며(시편 34[33],5 참조), 늘 당신의 일꾼과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임마누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유다인들, 이방인들, 그리고 임금과 총독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 활동을 벌여 온 그동안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칠 때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하도록 달려야 할 길을 달려갑시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고 약속하신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우리가 달릴 그 길에 필요한 도움을 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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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하여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한 제자였지만(요한 13,37 참조), 정작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무려 세 차례나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요한 18,15-27 참조) 오늘 복음은 그렇게 단절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지 묻는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나는 아니오.”(요한 18,25)를 외쳤던 베드로, 이제 세 번에 걸쳐 사랑의 여부를 물으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차례의 부인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는 세 차례의 사랑 고백으로 완전히 아물게 됩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되찾고 더 굳건한 사랑으로 무장하여 처음에 호언장담한 그 길, 곧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길을 걷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바리사이 출신이었고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제2독서) 그러하였던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한 뒤(사도행전 9장 참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파괴하던 자가 교회를 건설하는 이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토록 자신이 미워하고 증오하며 박해한 교회를 위하여 미움받고 증오받으며 박해받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며, 예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의 지역에 널리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의 기초를 놓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립니다. 그런데 그 시작에는 그들의 뼈아픈 잘못 또는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 과거를 덮어 버리거나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체험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고, 그분과 진심으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하여 봅시다. 그것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끄는 소중한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듯 우리에게도 화해와 치유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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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변종찬 마태오 신부님]
<겸손한 신앙과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
오늘 우리는 2천 년 교회 역사와 함께하며, 특별히 로마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도 고백하듯,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동안 자신들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진정 교회의 위대한 두 등불이며 굳건한 신앙으로 빛나는 두 사도에게 교회는 오늘 깊은 찬송을 드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의 어부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삶의 터전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인물입니다. 이에 반해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정통한 학자요 스승이었습니다.
또한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그의 겉옷을 갖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로 불리던 그가 어떻게 회개하였는지 잘 알려 줍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통해 완고했던 그의 마음을 땅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사울이 박해한 그리스도교와 자신이 하나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사울이 주님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하나니아스에 의해 선포된 복음과 안수를 통해 비로소 보게 되고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해 주듯, 특별히 이방인들의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는 베드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라고 대답하신 예수님.
이토록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여기에 하느님 생각과 인간 생각의 큰 차이가 드러납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그리스도인을 체포하여 감옥에 넘기는 일에 앞장섰던 바오로의 모습과 이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연약함 혹은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이 보이는 것도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기도에서 말하듯, 모든 일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아 준 그들의 가르침을 이제 교회가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곧 연약하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도 그들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하듯, 주님께서 온갖 두려움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 늘 주님에 대한 찬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 기리자고 권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겸손한 믿음과 바오로가 지닌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은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끝난 후 우리는,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가 하고 있듯, 우리 역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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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영식 바오로 신부님]
<이방인 향한 바오로의 선교 열의 : 서간 통해 하느님 자녀됨을 강조>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 코린토, 에페소, 마케도니아, 그리스, 트로아스, 밀레토스…. 바오로 사도의 열정은 놀랍다. 사도행전 16~20장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활발한 전교 여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군데 빠진 곳이 있다. 바로 로마다. 당시 세계(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선교가 가장 중요했다. 로마를 선교하는 것은 곧 세계를 선교하는 것이었다. 로마를 회개시키면 세계가 회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수 차례 로마로 갈 것을 시도하지만, 풍랑 질병 등 여러 이유로 로마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 뜻밖에 로마로 갈 기회가 생긴다.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성전에서 체포를 당한 것이다.(사도 21, 27~36 참조) 여기서 바오로는 “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다”라고 강변한다. 로마 시민이니까 로마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태어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법정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오로를 재판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로 압송된다. 이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 21~27장까지의 이야기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도 만만찮다. 풍랑을 만나고 배가 부서지고 몰타라는 섬에 표류하는 등(사도 27, 13~44;28, 1~10)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로마에 도착한다. 로마에서 선교하겠다는 바오로 사도의 소원이 풀린 것이다.(사도 28, 17~31 참조)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내용의 끝이다. 사도행전 중반부와 후반부를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과 깊은 하느님 사랑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왕성한 활동은 그의 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약성경의 서간 21편중에서 바오로 서간은 무려 14편에 이른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가 많은 편지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의미다. 이 14편 중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친서가 8편이고,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서간이 6편이다.
바오로 사도 친서들의 집필연도가 대략 50년에서 58년 사이로 보인다. 50년은 바오로 사도가 2차 전도여행 때이고, 58년은 로마서를 쓴 시기다. 1차 2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문제가 생긴 교회에 대해 2차 3차 전도 여행 시에 편지를 쓴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친서는 로마서다. 그래서 로마서가 중요하다. 죽음을 앞두고 세 번의 전도여행을 모두 종합하면서 정리한 종합 논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오로사도의 사상과 경험 모든 것이 다 녹아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이외에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가명 서간은 대략 70년에서 100년경의 것이라고 보면 된다.
친서는 테살로니카 전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티아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로마서다. 그런데 이 친서 중 필리피서와 필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서간이다. 일단 이 친서들로부터 설명을 시작하고자 한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대체로 한편 불편한 심정에서, 다른 한편 연민의 마음에서 썼다고 보면 된다. 바오로 사도는 수차례 전도 여행을 통해 누누이 하느님 자녀로 살라고 이야기했다.
예비신자를 만들고, 공소회장도 세우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정작 사도가 떠나고 나면 각 공동체에 말썽이 생겼다. 애써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가 없으면 공동체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화가 나겠는가 나지 않겠는가. 당연히 바오로 사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선에 대해 연민의 마음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민스러우면서 속상한 심정으로 펜을 들어 편지를 쓴다. 우리는 당연히 편지의 맨 앞부분이 꾸짖고 추궁하는 글이 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항상 은총과 복을 기원하는 축복의 인사로 시작한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2테살 1,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갈라 1, 3~5) 등이 그 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고 나서 침착한 어조로, 각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 지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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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준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교회의 반석이시며, 으뜸 사도이신 성 베드로. 그리고 주님께 대한 뛰어난 열정을 통해 이방 민족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성 바오로. 오늘 교회는 이 두 분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린다.
두 분은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이심은 분명하지만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부터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늘 예수님 곁에서 머무르며 추종하던 분이셨다면, 바오로 사도는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께 선택되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분이시다.
우스갯소리로 말한다면 베드로 사도는 공채로 예수님께 뽑힌 사람이고, 바오로 사도는 특채로 뽑힌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도, 삶의 여정도 달랐지만 한 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두 분 모두 인간적인 약점을 딛고 훌륭한 사도로서 나아가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희망과 교훈을 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 그는 처음부터 주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을 정도로 그 역시 예수님께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크나큰 배신을 저지른다. 바로 최후 만찬 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잡혀가신 예수님을 새벽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가? 그는 열성적이고 신념이 강한 유다인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유다교에 대한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그는 이 일에 누구보다 앞장선 모습을 보였다.
이런 베드로와 바오로가 교회의 최고 사도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몇 번 찾아오지 않은 회개의 순간에 올바로 응답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흘린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다 예수님을 체험한 후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듯’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간 바오로의 결심은, 그들을 새 사람, 후대에 길이 남을 큰 인물로 변화시켜 준 원동력이 아닐까?
오늘 이 대축일을 보내면서, 베드로 사도의 탄탄한 기초와 바오로 사도의 뛰어난 열정을 청해보면 어떨까? 비록 부족함도 많고, 실수와 유혹에 빠지는 우리들이지만 이런 시행착오들을 통해 보다 탄탄한 기초를 마련하고, ‘건전하고 복음적인 열 정’을 통해서 두 분 사도의 정신을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다른 이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를 통해서 우리의 내적 성숙과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라고, 이 힘을 통해 자연스레 복음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첫 발을 힘차게 내딛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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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세례명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서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 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 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 제자로서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복음적 삶을 사는 가운데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밥이 되시고, 영양이 되신 성체를 모시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 주는 성체의 삶을 살 때 천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늘을 갈망하는 만큼 우리 손에 쥐어진 열쇠관리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천상상급을 확신하였듯이 우리도 상급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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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제수품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성경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혼자 힘으로 신부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또한 홀로 서 있기를 바람이 아니니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 많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도구로 삼고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 부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당신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끝까지 당신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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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만약 육상 국가대표가 당신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꽤 큰 액수의 돈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가대표와 달리기 한 번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응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달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내기에 응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지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출발선에 같이 서서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기는 비슷하거나 내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만 응할 것입니다. 만약 전혀 가능성이 없는데도 더군다나 달리기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이 내기에 응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내용의 이상한 동화가 하나 있지요. 바로 이솝 우화에 있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입니다. 결말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요. 쉬지 않고 묵묵히 달려간 거북이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저는 노력보다 거북이의 용기를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만만해서 중간에 잠들어 버린 토끼의 어리석음을 떠나서, 솔직히 거북이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도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용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런 용기를 간직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재면서 아예 출발선에 서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삶은 분명 많은 변수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 출발선에 서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꼭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함으로 그 안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우리의 용기 하나가 위대한 성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용기로 위대한 성공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솔직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두렵지 않았을까요? 복음을 선포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변할까요? 더군다나 너무나도 두려운 죽음의 공포는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열정을 쏟고 주님을 향해 헌신합니다. 분명히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쏟아부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안 되는 이유만을 내놓습니다. 출발선에 아예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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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담은 적게, 사랑으로 크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없으면 안 되는가? 두 분 없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건가?
그럴 리 없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없어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다른 사도를 쓰실 겁니다.
오늘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신다고. 그러나 당신 교회를 세우실 때 베드로를 반석 삼으시겠다고.
그렇긴 하지만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역할을 할 사람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은 꼭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아닌 우리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역할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기초 역할, 교회의 기초 역할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두 사도에 대해 “교회의 기초를 놓아준 그들”이라고 하고, 오늘 감사송은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된 베드로와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준 바오로”라고 하며 그 역할에 대해 칭송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 친히 당신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신 바 있으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도를 대표하여 주님의 신원 곧 주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아시다시피 그 반대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극구 반대하여 박해에 앞장서던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그를 반대자에서 복음의 선포자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꿔주셨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와 달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하고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거듭 말하지만, 주님 친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어도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일꾼 삼으실 수 있고 기초 삼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될 수 있고, 지금 우리 교회에 소 베드로와 소 바오로가 필요한데, 관건은 주님이 우리를 당신 교회의 기초 삼으시려 할 때 우리가 응답하느냐입니다.
요즘 본당 단체장이나 재속프란치스코회 평의원 선출 때 수락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이 교회의 기초 삼으시려는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의 기초 되는 것이 싫고, 그래서 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으면 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한때는 싫었고 그래서 배신자와 반대자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또한 돌아서는 자였고 회개자였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축일을 지내며 주님 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처럼 큰 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것이 아니니 작은 교회의 소 베드로와 소 바오로가 되겠다는 겸손한 마음이면 됩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먹는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격려를 받습니다.
화이팅!
부담은 적게,
사랑은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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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
-기도, 고백, 유언-
어제는 몸살 감기에 심한 열로 꼼짝 못하고 수도원을 찾은 여러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만 드리고 많이 누워서 지낸 날입니다. 마침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고 마침 외출하는 수녀님의 친절한 도움으로 수녀님의 차로 병원앞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고 잘 처방받아 다시 회복되어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사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라 믿습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믿는 이들의 눈에는 모두가 은총의 섭리요 하루하루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날마다 제 나름대론 온힘을 다해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 강론에 대한 어느 자매의 답글이 참 반가웠습니다.
“시들고 사라지는 자연의 변화 안에서 저는 삶의 허무와 슬픔을 느끼는데, 신부님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를 생각하시며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으세요. 글 감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의 제목입니다. 오늘처럼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다 보면 절실한 물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양대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저절로 떠오르는 성가 291장 일부를 나눕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착하신 목자 성 베드로여 천국문 여는 으뜸 사도로 주님께 소명받으셨으니 우리의 도움되어 주소서.
간택된 사도 성바오로는 주님의 사랑 사로잡히어 온세상 두루 다니시면서 부활한 주님 전하셨도다.”
위 가사에서 보다시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도로 전혀 다릅니다. 서로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보완하면서 일치임을 우리 역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체험합니다. 참으로 서로 같아서가 일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며 살아갈 때 다양성의 조화요 일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주님과 함께 힘껏 책임을 다하며 사는 이들이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제 주변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이 힘든 세상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니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격려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기도, 고백, 유언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성인들은 교회의 사람이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하니 교회 공동체에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점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일치합니다. 언제나 강론 끝부분에서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꼭 당부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두분 사도의 품이자 뿌리내린 기름진 밭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감옥에 갇혀있던 베드로의 생환과정에서 교회공동체의 기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즉시 기도는 응답되어 주님의 천사의 개입으로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둘째,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의 언어입니다. 참된 언어가 고백의 언어입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진실한 사람,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말이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삶의 꼴을 형성하는데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은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요!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주님, 당신을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도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을 통해 자기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며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물음이 “예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구구한 답들이 많습니다만 이에 만족치 못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답이 정확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감격한 주님은 이런 고백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며 고백 역시 은총임을, 은총의 고백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은총의 고백이요 고백의 축복입니다. 이어서 축복과 더불어 하늘 나라의 열쇠라는 엄청난 책임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셋째, 유언입니다.
임종어가 유언이요 평생 좌우명이 또 묘비명이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임종어를 예상하여 평소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임종어가 좌우명이 나의 모습을 주님을 닮은 참나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모해 갈 것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저에겐 사도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전력투구, 최선을 다해 살아온 주님의 전사, 복음의 전사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고백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요! 평생 지침으로 삼고 하루하루 이렇게 살 때 그대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일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평생 좌우명이자 묘비명은 다음 두 말마디일 것이라 제 나름대로 추측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늘 기도하는 것이며, 늘 고백하는 것이며, 늘 유언을 좌우명으로 삼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렇게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저의 유언이자 좌우명이요 묘비명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동안 많이 인용했지만 저에겐 늘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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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고백하고 살자!>
오늘은 '교회의 큰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으뜸 사도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초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복음을 전한 분이십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 기도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는 신앙고백의 모범이셨고,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마태16,13-19)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16,14)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완전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체험 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도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후에는 복음 선포자로 대변신하여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십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
교회의 큰 기둥이신 두 사도의 열정을 본받아, 우리도 멋지게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고백의 내용을 삶으로 살아냅시다!
오늘 많은 영명 축일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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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xR28stUW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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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들판의 벼가
마음같이
푸르게
자라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그 여정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제 사랑을
반성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타들어가는
열정과
솟구치는
회개의 은총이
바로
사랑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사랑밖에 없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두 분 사도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순명으로 만나고
회개로 닮아갑니다.
징금돌이 되시어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은총도
더욱 큽니다.
십자가에서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넘치는 은총
빛나는 십자가의
상처입니다.
빛날수록 아프고
아플수록 아름다운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앙은
자아를 태우는
여정입니다.
내어주는
여정이
사랑입니다.
삶이 뜨거워
지는 여정이
그리스도인의
여정입니다.
무엇이 사랑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여행입니다.
사랑하고
봉사하며
하늘과 땅 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떠났기에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너지고
깨어진 자리를
하느님 사랑이
가득 채웁니다.
사라질 것이
아닌 참된
사랑을 위해
노 저어
나아가는
뜨거운 봉헌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되는
복음의 길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
가야 할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히
끝까지 걸어가신
두 분 사도의
눈물과 땀
기도와 십자가를
진심으로 만납니다.
사랑은
자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쁜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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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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