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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비밀 2 -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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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륭, 태조 왕건의 아버지로서 왕건이 등극한 이후 세조로 추존되는 사람이다. 이들의 조상은
고려사의 기록이 미진하여 확연치는 않다. 다만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이고 왕륭의 선대는
작제건이며, 그 윗대는 당귀인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당귀인이란 당나라의 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왕건의 조상이 당나라에서 건너왔으며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재당신라인, 즉 한반도의
후예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난민들이
당나라로 건너갔었다. 그들은 주로 해상무역업에 종사했는데 훗날 신라로 돌아오니 그 대표적인
예가 장보고이다. 당귀인이란 왕건의 조상은 아마도 장보고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옛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1>에 “오토건간”이라는 수중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자자
빙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수중세계 왕궁인 용궁이 등장하는 작제건 설화는 용궁이 등장하는
《삼국유사》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수로부인이 임해정(臨海亭)에 해룡에게
납치되었다가 귀화하여 해중(海中)의 일을 말하는 가운데 칠보궁전이 있었고 음식이 맛있고
향기로웠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고려사》고려세계(高麗世系)에 기재된〈작제건 설화(作帝建說話)〉에 용녀가 개성으로 나와
작제건과 함께 살면서 침실 밖에 한 우물을 파고 이 우물을 통하여 서해용궁을 내왕하였다.
작제건은 용녀의 부탁을 저버리고 몰래 훔쳐 보았다가 용녀가 황룡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용녀를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진성여대왕 거타지조
(眞聖女大王居陀知條)에 이미 기재되어 있는데 구비설화 중 〈욕신금기설화(浴身禁忌說話)〉에도
용녀취처(龍女娶妻)의 화소가 등장한다. 이들 원전들이 바로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개찬된
것으로 보아 그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지적한대로 「삼국사기」는 동서에 “궁예는 병사와 함께 기쁨과 고통, 일하고 쉬는
것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고 하는데 있어서도 공적으로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라고 한 궁예를 폄하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 “일찍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여 흥주의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신라왕의 초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칼을 빼어 이를 쳤는데, 그 칼로 쳤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한
대목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왕실의 정통성을 위해 바로 윗대를 흠집 낸 명백한 역사왜곡이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것뿐인가? 복초 최인의 제자 김종권씨는 삼국사기는 반역정권 이성계에 의해 김부식의 고려국
시대의 것을 한 권도 찾아볼 수 없도록 해버렸고, 이성계 시절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개찬된
진의귀, 김거두의 삼국사기는 무엇이 모자랐는지 다시 없애버렸으며, 중종 7년만에 이계복에게
세 번째 간행하게 한 책을 일본 도꾜 대학과 조선사학회 등에서 복사하여 일제시대에 내놓은
것이 오늘날 이병도 역주본과 김종권의 완역본 삼국사기라 했다.
김부식이 쓴 책은 원명이 「삼국사」이고 역모와 반역과 사대주의와 왜식 식민사학자에 의해
임의로 생략되고 왜곡되며 수 차례 고쳐져 변신되었다는 얘기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오늘날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실전 된 김부식의 삼국사를 정도전이 주도해 이본(異本)으로 개찬,
복구해 놓았다가 다시 세종 때 춘추관에서 대폭 손보았으나 많은 문제점이 있어 반포(頒布)하지
않았던 것을 양성지가 대폭 손질한 위서다. 그나마 양성지의 삼국사기는 실전되어 중종 때 다시
개찬 간행되었다가 상기 김종권씨가 지적한 대로 일제의 기기사관으로 변조된 문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엄밀히 말하면 그 모태는 김부식이면서도 김부식의
작품이 아닌 위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김부식의 입김이 완전히 배제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원죄가 면제될 수도 없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책은 송나라 휘종 때의 서긍이란 사람이 고려인종 원년 1123년에 고려
송도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들은 것을 존 중화주의 입장에 서서 고려를 폄하해 기록한 일종의
견문보고서다. 그런데 전 40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보면 기존의 일제 식민지 사관의
연장선상인 반도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기절초풍할 내용이 간간이 나온다.
고려를 향해 자신들이 출항하고 있는 지금의 절강성 항주부근 명주도 매잠이 고려 땅이라고
서술하고 있는가 하면 고려 동쪽의 경계가 금나라라 하여 연경(북경)을 포함한 하북성이 고려라
하고 있고 (반도사관의 금은 고려의 서북지방) 고려의 왕성인 수도가 소림사로 유명한 하남성
등봉현에 있는 숭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 가령 동서 권 35는 자신을 포함한 고려사신 서긍
일행이 절강성 해안을 지나면서 해도의 정경과 느낌을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배를 탄
자신들이 지나가는 곳에 협계산이 있는데 이 산은 중화와 동이를 구분하는 경계라서 협계산이라
명명 했다는 것이며 그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어 쌍계산이라고도 한다 했다. 또 협계산
근처에 다섯 개 섬으로 이루어진 오서(五嶼:큰 섬크기순으로 각기 도(島), 서(嶼), 섬(섬), 초(礁)라
함 )가 있는데 정해현 동북쪽 소주의 큰 바다 가운데 군산과 마도에도 오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항주만의 소흥현 동북해안가 마산지역 마도에도 오서가 있으나 여기서는 주산(舟山)
군도(群島) 즉 군산지역 섬산무리의 하나를 말한다. 또 절강성 임해시 동남쪽 해안에 있는 백산
가까이 흑산이 있는데 흑산은 옛날 여행중이던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으로 관사가 아직 남아
있으며 고려의 죄인들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동서 권 33을 보면 고려 땅
군산(郡山)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사신이 고려 땅 군산에 들어가니 순시선 10 여 척이 있는데 모두 돛대 위에 표시를 밝히는 기를
꽂고 있다. 뱃사공과 순시병졸은 푸른 옷을 입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징을 치고 다가오는데 돛대
위의 작은 깃발에는 홍주도순(洪州都巡: 홍주를 순시하는 배), 영신도순(永新都巡), 공주순검 (公州巡檢), 보령(保寧), 회인(懷仁), 안흥(安興), 기천(曁川), 양성(陽城), 경원(慶源)이라는 글씨를
쓰고 펄럭거린다.
여기서 홍주는 강서성 파양호지역과 남창시 주변이며, 영신은 강서성 서남부 영신현(영신강이
길안을 거쳐 파양호를 흘러든다), 공주는 강서성 중앙부 낙안현 지역의 공계로 옛날 공파라 한
지역이며, 보령은 사천성 문천현지역, 회인은 당송때는 해주라 한 곳으로 산동성 덕평현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강소성 공유현지역으로 흡수된 지역이며, 안흥은 호북성 강릉현 동쪽 30리
지점의 현이며 기천은 강소성 강음현 지역이며,양성은 1)하남성 등봉현 지역 2)강서성 영풍현
지역이며, 경원은 광서성 의산현 지역으로 송대의 광남서로지역이다.
동서 「고려도경」권 30 편에 고려에 박산로라는 향로가 있는데 박산은 하남성 석산현 동쪽에
있는 박산을 말한다. 동서 권 24를 보면 토산품을 설명하면서 고려의 광주(廣州), 양주(楊州),
영주(永州) 등 3주에는 소나무가 많고 나주도(羅州道)에도 역시 있으나 3주의 풍부함만 못하다 한
구절이 있다. 그런데 고려도경의 역자 정용석, 김종윤 양씨는 광주를 광동성 불산시 지역으로
지금의 광주 특별시를 포함하는 광동, 광서지역으로, 양주를 양자강 구강시, 진강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강서성, 절강성 북부지역과 강소성, 안휘성 남부지역으로, 영주를 영수, 영산이
있는 호남성 남부지역 영릉현 지역으로 각기 비정하고 있다.
또 동서 권 22에 고려는 나라안에 밀이 적어 나라안의 모든 장사꾼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밀가루를 사온다고 했는데 경동도를 북송의 서울 변경(개봉) 동쪽인 하남성의 동쪽지역과 산동성
서부지역 및 안휘성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북송 사신인 서긍 스스로
절강성의 전단강 유역을 고려땅이라 고백하고 있듯이 「고려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성항은
임진강 위의 예성강을 말함이 아니라 예성항과 벽란은 같은 지역에 있었으며 벽란 지역은 지금의
절강성 오흥 지역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정,김 양씨의 해설에 의하면 북송사신이 고려를 가기 위해 항해한 해도를 따라가 보면
예성항에 정박하기 전, 급수문을 지났다고 하고 있는데 이 급수문은 지금의 홍콩과 주애 사이의
만 입구 호문(虎門)에 있으며 예성항은 곧 광동성 광주시 지역 근처의 만 주변의 한 항구라
비정할 수 있으며 바로 이곳에 오문(마카오)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움직이는 책 刊정 용석,김 종윤 역)
이쪽 계통의 책으로 오재성의 <조선족의 뿌리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한민족문화사>
<우리 역사는 黎(리)민족사: 黎(리)민족사 연구회 刊>
한국 상고사학회 회장 이중재의 <한민족사: 평화사 刊> <새로 밝혀진 새 고려사 :명문당 刊>의
일독을 권한다.
아직은 처음 실마리를 잡아나가는 단계라 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학자들을 동원해 가칭
『고대사 재정립연구회』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본격적인 학술연구와 대대적인 역사바로잡기 정책을
펴야하리라 본다. 해방이후 우리는 한번도 역사정립 정책을 수행한 적이 없는 연고로 상고사
추적과 재정립은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공산국가라 역설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철저하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예산을 투입해 조직적으로 중국 전역의 도서관, 박물관 등을
뒤지며 학술탐사에 착수하면 모종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 본다.
참고로 「십팔사략」을 볼 것 같으면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수도 변경(개봉)이 함락된 뒤,
금으로 끌려가 죽는 소위 정강의 변의 주인공으로 북송을 마무리 한다. 이때 북송은 고려의
원조를 받아 금을 치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금으로부터도 요와 같이 교빙하자고 사신을
보내와서 중립을 지킨다. 흠종의 아우 강왕이 남경에서 고종으로 즉위하니 이때부터 소위 남 송
시대인데 도읍을 절강성 임안(항주)으로 옮겼다. 또한 원래 금(아골타)과 송(휘종)은 서로 약조하되
요의 중경(몽골의 대정府)을 금이 취하고 북경인 연경을 송이 취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상 금이
연경을 취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언급되고 있는 고려의
국경은 당시 연경을 제외한 하북성 이동지방의 금과 좌측의 요를 제외하면 한반도를 포함해
발해만 주위의 북송 아래는 모두 고려가 된다는 점이다.
오재성과 이중재씨는 사료고증을 통해 신라, 백제가 기존의 왜곡된 반도사관이 말하는 것처럼
한반도 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장개석이 대륙전체가 조선땅이라 말한 것처럼
중국대륙내부에 (말이 대륙내부지 사실상 대륙 거의 전체) 드넓은 대륙내 신라, 백제가 있었다고
조목조목 사료고증을 해가며 주장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위, 촉, 오 유비, 조조, 손권이 쟁패했던
삼국시절 역시 백제의 품안에서 일개 제후국의 입장에서 싸웠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고려도경」에 보이고 있는 하북성 북쪽과 몽고 실크로드에서 활동하던 북방계 동이인이었던
선비 모용외의 아들 황(皝)이 백제와 싸웠다는 놀라운 기사를 예로 들고 고려가 처음 개국한 곳이
중국의 내륙지방인 사천성이라 말한다.
그런데 한국 고고학회 회장인 한양대 김범모 교수는 허왕옥의 출자에 대해 아유타국과 쌍어문에
관한 여러 가지 답사와 사료고증을 통해 허왕옥이 온 아유타국은 인도가 아닌 사천성이라
결론내리고 있다. 필자는 8 년전 SBS에서 주최한 일본 고대사 탐방단에 합류했을 때 요즘
백제사에 대한 연구로 개가를 올리며 중진 사학자로 자리잡고 있는 이도학 교수와 예의 김병모
교수와 함께 답사를 하며 김병모 교수로부터 이에 대해 직접 들은 바 있고 또한 답사 팀에게
일본 고대사의 실체에 대해 대신 가이드 겸 강의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한국사 연구는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인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복 하면 조선 한복만 알았지 고려한복을 모르는 세상이 지금 아닌가. 그런 면에서
늦은 감이 있지만 식민사학자 이병도 학파인 이기백의 제자 서강대 이 종욱 교수가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를 통해 한국의 고대사 연구가 식민지 사관을 못 벗어났다고
실증사학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제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신호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재명명덕하고 재지어지선 함이 큰 학문함의 목적인 바에야 더욱 더 용기 있게
기존의 잘못된 학설을 과감하게 뒤집어엎는 용기가 학자에겐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재지어지선인 홍익인간이며 민족정기를 곧추세우는 가장 실사구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백암 박은식 선생이 왜 나라는 망해도 겨레는 망하지 말아야 하며 또 겨레가 망하지 않기 위해선
역사를 잃지 말아야한다고 했겠는가. 즉, 학자의 목적인 큰 학문의 목적은 밝은 덕을 밝히고
지극한 선에 이르는 것이다. 학문이 공도(公道)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학문이며
죽은 학문을 하는 자는 죽은 학자일 수밖에 없다. 민족 사혼의 중추를 부러뜨리고 민족정기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병도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평생 부정해온 단군의 실체를 비로소 인정한 바
있지 않은가.
「고려도경」에 의하면 모용외 아들 황이 백제에게 망한 뒤 모용보가 고구려 변방인 요령성 열하
지방 평주에서 고구려 제후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과 백제 17대
아신왕 때로 패수에서 서로 큰 전쟁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중재는 서안에서 낙양을 거쳐
개봉까지의 강을 패하, 패수라 하고 강이 너무 커서 일명 대동강이라 했다고 하여 국내 패수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순제(한국 고대사문제연구소 소장)는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
1.연(燕)나라가 가장 강했을 시기는 소왕(昭王:기원전311-279년) 때로 진개가 공격하여 빼앗은
땅이 조선으로부터 천리, 동호로부터 천리를 빼앗은 것이다. 연나라는 빼앗은 땅을 보호하기 위해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그 땅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한 것이다.
2.「사기(史記)」「몽염열전(蒙恬列傳)」에『진시황 26년에 몽염이란 장수로 30만을 거느리고 북쪽의
융적(匈奴)을 쫓아버리고 하남(河南:Ordos)의 땅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의 험함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만여 리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경주, 회남자, 여씨춘추, 설원, 염철론 등에서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끝을
요동, 갈석산, 요수에 달했다고 하였는데, 특히 갈석산(碣石山)은 진시황과 그 아들 호해가 다녀간
곳으로 요동(遼東)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근처의 흑산두(黑山頭) 부근에서 1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장방형의 궁전의 초석, 석비를 세웠던 터를 발굴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진나라
당시의 반와당, 공심전, 명문와, 우물터 등이 나오고 있어 이곳이 갈석궁(碣石宮)임을 증명하였다.
그런데도 이병도는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좇아
중국의 어떤 학자가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그린 지도를 작성하는 해프닝을 벌인적도 있다.
3.일제하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현 사학계의 이병도는 만번한에서 문현을 대동강,
번한현을 평북 박천, 패수를 청천강, 왕검성을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다.
천관우는 문현을 요녕성의 개현, 번한현을 평북 박천, 패수를 압록강, 왕검성을 평양으로 보았다.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인 신채호는 만번한은 개평과 해성 부근, 패수를 헌난수, 왕검성은
개평으로 비정 하였다.
정인보는 패수를 고려하, 요동고새를 산해관, 요수를 난하, 상하장은 산해관에서 고려하 사이로
보았다.
문정창은 패수를 난하, 왕검성은 북진으로 보았다. 최동은 패수를 고려하, 만번한은 산해관에서
소능하 사이, 요동고색은 창여지방, 왕검성은 해성으로 비정하였다.
최근에 윤내현 교수가 패수를 난하, 만번한은 난하 부근, 위만조선의 수도를 북진으로 보았다.
한편 북한(北韓)의 이지린은 패수를 대능하, 왕검성을 개평으로 비정하였다.
4.연나라 당시 만번한인 상하장은 육주하(六州河)와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 사이로 현재도
그 안에는 황지(荒池)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것은 후일 공손강가 둔유의 남쪽 황지로 대방군을
삼았다고 한 그곳이 된다. 위의 두 강 사이의 거리가 86여 리이며 그 당시 패수(浿水)였던
중전소동사하에서 요동의 옛 요새인 산해관(山海關)까지의 거리는 25여 리로 말을 달려 달아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패수는 중전소동사하가 되며, 위만은 기준에게
망명하여 두 강 사이 백여 리의 땅에 봉해졌는데, 그곳에 살고 있던 중국의 피난민들을 선동하여
기준을 멸망시킨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충실히 이어받은 이병도는 평양의 대동강(大洞江) 남쪽의 벌판에 있는
자그마한 토성을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하였고, 청(淸)나라 말기 저명한 지리고증학자 (地理考證學者)인 양수경(楊守敬)은 사마천이 쓴「사기(史記)」에는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동강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문정창은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해 있어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고 논박했다. 그래서 필자는
왕검성을 현재의 대능하(大凌河) 동쪽의 북진인 광녕(廣寧) 지방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이상 1994년 3월 28일, 해동신문 『새로 쓰는 우리역사』]
「고려도경」권 31편을 보면 고려 보제사에 백동 일만 오천근을 주조해 만든 큰 종이 있는데
이층누각인 중루에 설치했더니 소리가 너무 커서 글안(거란)의 왕선우가 싫어해 이 절로 옮겼다는
기사가 나온다. 보제사는 반도 내에 있지도 않았고 글안(거란)은 신강성에서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지방에 있었으므로 그 아래 서장 감숙성이 고려 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천성 성도엘
가면 고려 왕건의 왕릉이 그곳에 서 있다. 김문기 가문의 비밀이 전해주는 것처럼
동명이인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해서 궁국적으로는 사학자들이 규명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직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매도할 단계는 아니다.
연고가 없는 진시황이나 주원장의 왕릉을 한반도에 세워줄 리 없는 것처럼 연고도 없이 그곳에
왕건의 왕릉이 서 있을 리 있다고 보는가? 그곳에 서있는 왕건 왕릉의 묘비석의 기록을 한 번
보자. 만일 재야 민족사학자들의 동일인 주장이 맞다면 다음의 사천(쓰촨)성 성도의 왕건 능묘의
비석을 보면 왕건의 고려 역사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이충녕에 의해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할 정도로 왜곡되었는지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동명이인이라면 좀 더 뒤에 김문기 가문의 조선왕조 비밀을 밝히면서 드러나겠지만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천성 왕건의 영릉(永陵)의 묘 비석 기록
아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쓴 비석이므로 지나정부) 역사상 오대십국(五代十國)(公元907년
당(唐)이 망하고 979년에 이르러 송(宋)이 북한(北漢)을 멸(滅)함), 이때는 당조(唐朝) 말년으로
번진(藩鎭) 할거가 계속 발전된 때이었다. 북방 5대(代)인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및 후주(後周)와 한족(漢族)과 소수민족 정권이 부단히 번갈아 교체되어 전란이 그치지
않고, 사회 동탕(動蕩:움직임)이 불안하여, 생산이 매우 큰 파괴를 당했다. 10국의 9국이 남방에
있었는데 (오(吳), 남당(南唐), 전촉(前蜀), 후촉(後蜀), 남한(南漢), 초(楚), 오월(吳越), 민(閩)과
형남(荊南)), 각기 한 쪽 모퉁이를 의거해 경계를 지켜 백성을 쉬게 했다. 대략 잠시의
대규모전쟁으로 의업과 공상업이 비교적 북방에 발달했다.
관중과 중원지구의 명신(名臣) 사족(士族)이 난을 피해 남으로 내려와 할거한 약간의 주현(州縣)의
번진(藩鎭)이 서로 결합해, 구성을 완료하니, 각 개가 한 쪽으로 치우쳐 수명이 짧은 천자의
소(小) 조정(朝廷)이었다. 동시에 문인 재사 및 양공(良工), 교장(巧匠)이 촉진되어 남방문화 예술이
발전되었다. 그 중에 오(吳), 남당(南唐)과 전촉(前蜀), 후촉(后蜀)은 당조(唐朝) 지방경제의
“양일익이(揚一益二)” (회남(淮南)의 양주(揚州) 제1(第一), 검남(劍南)의 익주(益州) 제2(第二))의
기초가 상(上)으로, 비교적 기타 각국 경제와 문화는 발달을 요했다.
왕건(王建)은 공원(公元) 891년 성도(成都) 임서천(任西川) 절도사(節度使)로 들어옴. 907년 황제로
즉위(蜀). 925년에 이르러 후당(后唐)이 정벌하러 옴. 그 아들 왕연(王衍)이 나아가 항복함. (후당
이존욱에게 전촉왕 왕건 망함)
전촉(前蜀) 정권의 통치, 실제 공력(共歷) 35년 서천(西川) 및 산남(山南) 서도(西道)지방 동쪽에
거함. 왕건(王建)의 자(字)는 광도(光圖)로 허주(許州) 무양인(舞陽人)이다(일설에 陳州 項城人이라
함) 어린 시절 무뢰(无賴)했으며, 표도(剽盜:날치기)를 업으로 삼았고, 중죄(重罪)를 지어 옥살이 (系獄)를 했다. 뒤에 (허창을 다스리는) 충무(忠武)군졸이 되었다.(忠武軍鎭陳, 許二州, 治許昌)
많은 장교 중에 특출나서 채주군(蔡州軍) 우후(虞候)에 뽑혀 부임했다. 881년 등주(鄧州)와
채주(蔡州) 병(兵)에 있는 충무 군졸을 일부 나누어 합병해 8도(都)로 편제하고 도장(都將)
일 천 인을 두니 왕건은 8도(都) 도두(都頭)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는, 당(唐) 희종(僖宗)이
촉(蜀)으로 도망쳐 달아났을 때이다. 884년 그와 진휘(晋暉) 등이 각 소속 부(部)를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가니 부르기를 “수가오도(隨駕五都)”라 했다. 희종이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니
장군(왕건)의 신책(神策)이 군(軍)을 평안한 시절로 만들었다.
886 년, 희종(僖宗)이 흥원(興元)으로 도망쳐 달아나자, 그를 요령벽주자사(遙領壁州刺史)로 파견해
부병(部兵) 술삼천(戌三泉) 진휘(晋暉) 등을 거느리고 흑수(黑水)에 주둔해 잔도(棧道)를
수복(修復)했다. 오래지 않아 실권을 지닌 환관 역인(점치는 관리)들이 5장(5將)을 내보냈는데,
그를 이주자사(利州刺史)로, 진휘(晋暉)를 집주자사(集州刺史)로 파견해 내보냈다.
887년, 그는 산남(山南) 서도(西道) 절도사(節度使)의 부름을 거부하고, 군을 모집하여 낭주(閬州)를
습격하고 자사(刺史)를 내쫓았다. 자칭 방어사(防御使)가 되었다. 윤 11월 서천(西川)의 부름에
응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행군했다. 녹두관(鹿頭關)에 이르러 또 거부를 당했다. 이에
한주(漢州), 덕양(德陽)을 쳐서 빼앗고 성도(成都)로 나아가 공격하고 한주로 돌아와 주둔했다.
888년, 다시 팽주(彭州), 접착(接着)을 공격하고, 서천(西川) 제주(諸州)를 크게 약탈했다. 소종(昭宗)이 즉위했다.
이와 관련해 이중재의 <새고려사>의 실마리 부분을 간단히 이해하면 의문이 풀린다..
즉, 글안(거란)은 동호 족으로 동호 족이란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망해 동쪽으로 흩어졌다
이동해 생긴 동이족이다. (키르키즈 위그루족) 진나라가 망한 후 생긴 나라가 글안과 신라인데
신라는 섬서성 서안 위 기산현에 계림이라 하고 도읍했다. 계림은 현재 중국지도에 보면 서안
위에 있는 순화현이다.이 순화현이 바로 신라의 경주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주편 참고)
이미 대륙 삼국에 대한 내용은 재야 민족 사학자 오재성이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에서 통치자
칭호와 국호의 사용 연대 및 수도와 국호의 연구로 대륙 내 광복신라(江淮新羅)와 독립신라
(동신라:반도와 만주)를 말하고, 고구려는 광복신라와 독립신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대륙신라인
광복신라(江淮신라)에게 패망했다고 말한 바(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통일신라는 광복신라로 당과
연합해 고구려 멸망) 있거니와, 같은 재야 민족 사학자 이중재는 「새 고려사」에서 「명사(明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해동역사(海東繹史)」, 「오대사(五代史)」고려전, 「고려사 지리지」,
「송사」고려전 강역, 「진서(鎭書)」의 한국땅 지명을 인용해 고려가 대륙에 있다고 단언한다.
필자는 그의 주장을 100% 지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륙사에 대해 이러한 연구가 목하
진행중임을 독자들이 알았으면 해서 소개한다. 이러한 주장을 인지하고 임혜상, 서량지의
대륙사를 들으면 역사에 문외한인 독자들도 대충 그 밑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오재성의 광복신라와 독립신라(동신라)에 대해 간단히 조감하면 다음과 같다.
-< 고구려는 광복신라(江淮신라)와 독립신라(東신라:반도와 만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광복신라(강회신라:대륙신라)에게 패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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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coo2.net/html/main.html-
백제는 한(漢)나라가 망한 후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삼국지와
오호(五胡)시대의 송서(宋書), 당대(唐代) 이연수의 남사(南史), 송대 사마광의 자치통감, 두우의
통전 등에 기술되어있지만 한국의 역사서에는 그러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없다.
(「上古朝鮮三千年史」崔在仁著) 대륙백제와 대륙신라는 본서의 의도가 아니므로 상기 동서에서
대륙백제의 흔적을 간단히 스쳐 더듬으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3대 기루왕(己婁王)
45년(121년)에 고구려 태조대왕이 요동과 현도와 낙랑태수와 싸웠을 때 기병 1만을 원병했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백제라고 기술되어있지 않고 마한(馬韓)이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마한은 온조왕 27년(AD8)에 이미 백제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후한서의 마한의
기록은 백제로 보아야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중국의 한(漢)나라가 망한 후 삼국시대 위(魏)나라 명제(明帝)때인
고이왕(古爾王) 6년(235)에 낙랑의 관리통역 잘못으로 고이왕이 격노하여 낙랑과 대방을 토벌
했는데,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전사하고 낙랑과 대방 두 군은 드디어 멸망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삼국지의 기록을 놓고 식민지사관의 대부인 두계 이병도는 말하기를, 삼국지 위지의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백제와 싸우다가 궁준은 전사하고 대방과 낙랑 두 군이 드디어
멸망했다는 기록은 표현상의 과장이고 실상은 백제의 항복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이병도 국사대관)
그렇지만 백제의 국력은 실로 놀라운 국력이었다. 백제 12대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그 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구수(仇讐)의 사이가
되어버릴 정도로 강성했던 국력이었다. 이러한 백제국의 국력을 오호(五胡) 시대의 송서
이만전(夷蠻傳) 동이백제조를 보면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고 있을 때, 백제 역시 요서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점령했던 곳은
진평군(晋平郡)이었다는 기록이다.
둘째, 당대(唐代)의 이연수(李延壽)가 쓴 남사 동이전백제조에는,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었는데 진대(晋代)에 이미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의 진평(晋平) 두 군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자치백제군을 설치했다.
셋째,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병력을 파견하여 백제를 친 곳이 백제 식민지인 요서
진평 두 군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魏兵追擊百濟爲濟所敗晋世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也)
넷째, 두우통전(杜佑通典) 변방이백제조(邊方夷百濟條)에는, 진(晋)대의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있었다. 백제 역시 요서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진평 두 군이며, 진평은 지금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라고 주를 붙이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최치원이 서기 866년에 당나라로 가서 부성(富城) 태수로 있을 때 당나라 조정의
태사시중에게 제출한 상소문에, 백제의 전성기에는 백만 병력으로 남쪽의 오월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 제(齊) 노(魯) 나라를 흔들었던 백제는 중국의 거대한
벌레같았다고 했다.
구당서 백제조에는 이러했던 백제의 경계가 기록되어있기를, 백제의 본국은 동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해를 넘어서는 월주(越州:절강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른다고 했다.
(百濟東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至高句麗)
이상의 대륙백제와 관련해 이중재의 대륙사 고증의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이
주장이 모두 옳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후 말하고자하는 대륙사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각론적인 지명비정(比定)의 시시비비를 떠나 대국적인 대륙사를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 역사는 상고사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원점부터 재출발해야 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1.고려 도읍지
「명사(明史)」기록에 의하면, 조선은 기자가 도읍 했던 나라이다. 기자가 도읍 했다면 산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후일 망명하여 남으로 내려가 섬서성 서안(西安)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서안, 장안(長安)성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당연합군의 작전으로 고구려는 동쪽
또는 북쪽으로 옮겨가 기원 후 668년에 만주에 있는 통화(通化)현과 환인(桓仁)현에서 망하고
말았다. 그 후 당나라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안(西安)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옛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살고 있던 땅은 송악이었다. 송악은 말할 것 없이 동경(東京)이며
평양(平壤)인 동시에 서경(西京)이다. 여기서 서경은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명사(明史)에는 평양은
서경 즉 섬서성 서안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은 천산과 곤륜산을 기준했으므로 유럽은 요서(遼西)였으며 서안은 동경이었다.
명사에서 송악은 동경이며 동경은 평양이고 평양은 서경 즉 서안이다. 평양이 서경에 있을 때
나라 북쪽에 있는 이웃나라는 글란(거란)이며 서쪽에 있는 부족국가는 여직(女直:여진)이다.
명사(明史)에는 거란과 신라의 선조가 진(秦)이라 나온다.(진의 시조는 동이족이고 진의 황실
영(嬴)과 진시황 정(政)의 실제 성인 여불위의 여(呂)씨 성은 강태공 여상(呂尙)의 여(呂)씨 성처럼
신농의 후예 강(姜)씨 성이 여(呂)라는 땅에 봉해져 생긴 동이족 후예라는 건 앞서 밝혔다: 필자)
위(魏)가 망한 후 위나라 사람들은 큰 무리는 신라로 작은 무리는 백제로 또 한편은 대륙의
남으로 내려가 왜(倭)국을 건설하고 백제 땅 안에서 속국으로 자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란에서 백제가 쇠약해지자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간다.
(오재성의 고증과 일치)
841년 당나라 무후(武后) 때 백제 후예들이 왜를 일본으로 부르게 했다.
(문무왕때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기존의 반도사관과 약간 차이가 있다)
「고려사절요」에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은 분명히 사천성 재동현(梓潼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이곳 지명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한다. 태조 왕건이 처음 도읍하면서 한주(漢州)라 했으므로
한주(漢州)가 최초 송악군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실의 비밀을 전하는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는 개경(송악) 허도(虛都:거짓수도) 주장과
일치한다)
그 후에 도읍을 서경(西京)으로 옮기면서 송악군을 동경이라 했다. 분명히 동경은 서경이었으므로
송악군의 이름을 사천성에서 서경으로 옮긴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태조가 처음 등극하면서
사천성 한주(漢州)인 송악군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는 고려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촉(蜀)나라이며 연호는 처음부터 후량(後梁)이라 사용했다. 그러다가 태조 19년 들어
후진(後晉) 고조인 천복(天福) 원년을 사용했다.(후량이 후당에게 망하고 후진은 거란에게 망함 )
태조 왕건은 촉(蜀)나라로 출발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다. 촉 나라가 망한 후 태조 왕건은
촉 나라 왕이 아닌 신라의 대장군 격이 되어 견훤의 무리를 타파한다. 그 후 신라가 기원 후
935년에 망하자 그 때 태조의 등극으로 고려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936) 그때가 태조 19년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호는 후량(後梁),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宋)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는 전자와 같이 혈통의 뿌리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2.「고려도경」의 건국설: 대륙 만이(蠻夷) 선우, 가한이 고려건국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이(蠻夷)는 스스로 군신과 같은 혈족이라고 했다. 그들의 호는
선우가한(單于可汗)이다. 기자가 봉해진 때부터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 고조 12년 연(燕:본래는 동이족의 하나) 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를 취합하고 뭉쳐서 만이(蠻夷)들과 함께 규합해 나라를 만든 곳이 조선의 땅이다....
주몽이 천자의 아들이라 외쳐 고기와 자라를 타고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흘승골성(紇升骨城:어떤
사서는 낙양 근처라 하고 어떤 사서는 서안이라 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하남성과 섬서성
지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니 주몽 일행은 흘승골성에서 살고 국호를 지어 고구려라 하고
고(高)씨라 했으며 한편 고려라 했다. 한무제가 망한 뒤 조선은 고려 즉 고구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한(漢)나라를 격파한 왕망(王莽)은 고구려(高句麗)로 아름을 바꾸었다.(후한서 고구려전 참고)
그리고 왕망의 손자 우거(右渠)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이란 조선사군이며
고구려현이다. 특히 고구려현에 속하는 것은 원도(元菟)군이다. 원도군이란 현도(玄菟)군을 말한다.
현도군의 군장 즉 소국의 임금은 북을 하사하고 북과 기녀와 예악의 부서를 두게 했다. 이
부서에 속하는 사람들도 조정에서 입는 옷을 입고 고을 현감의 명에 따라 관청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왕망이 병사를 일으켜 흉노를 베고 항복을 받았다. 고려인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도적들을
변방으로 쫓았다. 광무 중흥시 고려관리를 북방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상 고려도경에서 보듯이 고려건국에서는 기자의 도읍지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때 대륙에 있었던 만이(蠻夷)의 후예들인 단우(單于:선우)와 가한(可汗)의 부족국가들과
함께 고려가 건국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선우와 가한은 고려와 한 혈통임을 보여준다. 기자가
세운 땅에 고구려와 고려가 건국했음을 보여준다.
(기자가 반도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3. 「고려도경」이 전하는 계보명단
조선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왜곡, 개찬된 「고려사」는 건(建: 왕건), 무(武: 혜종), 요(堯: 정종),
소(昭: 광종)이래 공양왕 요(瑤)에 이르는 34왕을 말한다. 남송 서긍의 「고려도경」은 17대 해
(楷:인종)까지 고려사 세계와 일치해 끝내고 있다.(당시 책이므로) 「고려도경」에서는 고려보다
송이 천자국인 것처럼 되어 있으면서도 고려의 속국이 송나라인 것처럼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섬서성 서안(서경)이 도읍인 강대국 고려에 눌린 동쪽 하남성(하남성 개봉현 수도) 동쪽과 안휘성,
산동성 일대의 조광윤의 북송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방지역으로 쫓겨갔다. 고려는 북송보다
53년 먼저 세워졌으며 북송보다 200년 뒤에 망했다.
4.신라유민이 서역 돌궐로 도망했다는 기록
「고려도경」시봉(始封)에서는 고구려의 선조 주(周) 무왕때 기자가 주나라와 같이 세운 것이
조선이다. 그러기에 조선의 적자 즉 실제 본부인의 자식이며 실제 아버지의 성씨도 함께 지니고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周), 진(秦), 한(漢)나라 고조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선조가
이어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자 준(準)왕은 조선왕이었던 왕만(王滿)이다. 왕만은 연(燕)나라
노관의 반란으로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전에는 산서성 태원(太原)이 진번(眞番)이었던 것을
왕만이 남으로 내려와 피난민과 무리를 규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니 이것이 한(漢)나라다.
한나라는 섬서성 서안(西安) 즉 장안(長安)성에 도읍을 정한다는 기록이다. 고려도경 시봉에는
고구려가 그러하고 고구려 후손인 고려가 서안에 도읍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려도경은
서안 즉 섬서성 장안성이 옛 조선 즉 고조선의 땅이라고 적고 있다. 또 고려 때 신라유민들은
멀리 돌궐이 있는 곳 청해성(靑海省)과 신강성(新彊省) 등지로 분산되어 도망 갔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돌궐과 말갈은 고(高)씨이며 오래도록 끊어져 있다가 후당 동광 장종때 다시 복권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말갈이다. 돌궐과 말갈은 같은 시대에 지역만 다를
뿐 대륙에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말갈과 많은 전쟁을 치른 사실이
「삼국사기」<본기>에 기록되어있다.
선비족의 후예였던 말갈과 돌궐은 대륙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엄청난 활동을 했다. 말갈의
선조는 물길(勿吉)과 숙신(肅愼)이다. 고려도경 왕씨 계보를 보면 고려 때 송나라뿐만 아니라
글란(거란)과 요 그리고 금나라 등도 고려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로 기록되고 있다. 만약 고려가
한국땅에 없었다면 몽고와 원나라의 싸움터는 현 중국대륙이다. 어떤 사서들은 고려가
삼한통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한은 한 집안이라고 삼국사기 본기에 적고 있다.
모든 정사는 고려가 삼한통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고려 17대 인종때 중국 전대륙인 삼한을
통일한 바 있으므로 강대국인 고려를 코리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5. 신라의 패망과 고려의 출현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와 당나라는 강토를 양분해 가졌다. 고구려가 있던 땅은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리고 서안과 낙양 밑 쪽 광활한 영토는 신라(오재성이 말하는 소위 江淮광복신라)가 가졌다.
당이 망한 뒤 경순왕은 후당(後唐)시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말았다. 나라를 내어준 대가로 낙랑공주를 태조 왕건에게서 하사 받았다. 이때가 경순왕
8년 가을 9월이었다. 그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은 산서성 운주계(運州界)이며, 30여 군과
현이다. 운주계란 하남성과 산서성의 접경지 위쪽이며, 하현(夏縣) 아래 안읍(安邑:현재는
運城)이다. 후진은 고구려와 같은 혈통으로 고구려를 망하게 한 것은 나당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의 씨족 일부는 당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지만 직계혈통은 당나라에서
뿌리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양서(梁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해동역사, 북사, 송사,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각종 사서를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은 당나라 무후(武后) 이법(李法)의 외손자로 되어있다.
「삼국사기」경순왕 편 본문에 경순왕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으로 (당나라) 효종(孝宗)
이창(伊滄) 벼슬을 한 이(李)씨라 하고 백제 의자왕 편에 경순왕이 당나라 무후의 손자라
했으므로 효종은 당나라 무종의 아들로 당과 신라는 외가댁 혈족관계이다.
당나라가 섬서성 장안성에 도읍 했을 때 신라는 서안 서쪽에 있는 기산(岐山)인 계림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수도 인접지에 신라 경주가 있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최치원이 당에 수학한 것이나 혜초가 실크로드를 간
것은 신라가 대륙이고 같은 혈통관계라 가능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대륙에 함께 있었으므로 왕건은 신라를 산서성 안읍(安邑)에서 항복 받을 수
있었고 고려는 당나라와 신라가 망한 후 후당이 생길 때 함께 후진(後晉)의 씨족으로서 또
고구려의 후예로 당당히 대륙서안을 기준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6.고려의 뿌리
태조 왕건의 뿌리는 정확한 문헌이 없을 정도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세계도(世系圖)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다. 고려시조는 사찬(沙粲)이다.
사찬의 후예가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당나라 숙종황제와 정화황후에게서 태어난 경강대왕(의조:
왕건 조부)에 이어 세조(왕융: 왕건 부친)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이다. 당나라
숙종은 당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이형(李亨)이며 연호는 지덕원재(至德元載)이다. 이형은 후당 시
토번의 성을 함락시키고 7군을 거느리고 3 성(城)을 장악한 사람이다.
당 숙종 황제의 아버지인 원덕대왕(742-756)은 천보 원년으로 출발하여 15년 만에 물러나고
숙종이 등극한다. 그 후 보응(寶應) 원년에 진(晉)나라에서 조서를 받고 진(震)국을 세운 사람이
발해왕 대조영이다. 한편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왕건은 대순(大順) 원년(890)에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 있던 촉(蜀)나라를 취한다. 왕건은 당나라 때 촉 나라를 기원 후 890년에
갖게 되고 촉 왕이 되었지만 후당(923-936)이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42년 만에 망한다.
그러나 기원 후 939년 후진(後晉) 때 성을 이(李) 씨로 바꾸고, 기원 후 935년 신라 경순왕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고려로 등극한다. 왕(王)씨 성을 이(李)씨로 바꾼 것이 아니고 왕건을 그대로
두고 이 씨의 성씨인 것처럼 바꾸었다는 것이다.
정인지 고려사에는 (당나라 말기) 세조의 본처인 위숙(威肅)왕후 한(韓)씨 몸에서 정유생 정월
병술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이때는 당나라 건부(乾符874-879) 4년 즉, 희종(僖宗)
이현(李儇)때로 878년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의 차자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또
정인지 고려사에서는 동진(東晉)때 사(司)씨인 원제(元帝)와 명제(明帝)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혈통은 후양(後梁)때 선제(宣帝)이던 숙찰이다. 숙찰은 대정(大定)의 후손이라 했기 때문에
왕씨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왕건의 선조는 진(秦)나라가 망한 후 동진(東晉)으로
왕통이 이어지고 그 다음은 후양에서 당나라로 내려왔음을 정인지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왜곡되지 않은 고려 왕건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왕건은 13세에 당나라 왕통의 기세로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서 촉(蜀)을 세우고 20세 때인 907년 전촉(前蜀)의 왕 칭호를 받았으나 932년
같은 혈통의 후당(後唐) 이존욱에게 망하고 만다. 전촉이 망하자 맹지상(孟知詳)이 후촉왕으로
등극하나 936년 후진(後晉)에 의해 망하고 왕건은 본래의 이(李) 씨 성을 찾아 935년 다시
고려왕으로 등극한다. 전촉이 망한 932년부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왕건은 대장군으로
활약했다.
현재 대륙에서 왕건은 혈통이 없고 시골출신이며 떠돌이 야인처럼 가르치고 있다. 아주 못된
불량배인 양 사서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천성 현지 가이드들에게도 왕건을 불량아로 취급해
교육시키고 있었다.
(사천성 성도에 엄청난 규모의 왕건의 묘가 있다.(사진참조)
(개성의 초라한 왕건 묘는 한마디로 가짜란 소리다) 한마디로 현재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저의가 뚜렷했다. 후진(後晉)은 5대 10국 시대 때이다. <국사년표(國史年表)>는
왕건이 890년 중당(中唐) 대순 원년에 촉왕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대10국 때 석경당(石敬塘)이 글란(거란)병을 빌려 후당을 망하게 했다. 그리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하였다. 사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때는 후진(後晉)이라고 했다. 도읍은 하남성
개봉현에서 다스렸다. 후진은 산동성, 섬서성, 감숙성, 하북성, 산서성 남부이며 안휘성 북부지방
이었다. 글란(거란)의 신하인 후진은 두 임군에 11년간 지속했으나 소멸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는 후진(後晉)의 씨족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제왕운기」는 당나라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고려사」역시 당 숙종에서 뿌리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로 강소성 소주(蘇州)에 혁거세 묘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왕의 무덤 중 31명의 왕릉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1명의 왕릉은 화장하거나 무덤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신라왕릉 묘지의 지명은 모두가 현재 중국대륙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로 보면 경주의 왕릉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개 대륙의 선대 왕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가묘일
가능성이 크다:필자)
신라 35대 경덕왕때 현 중국 대륙에 있는 땅 이름을 중국대륙에서 고친 일은 있으나 경덕왕이
한국 땅에 이름을 옮긴 사실은 없다. 그러나 경덕왕이 고친 이름 중에 고려 6대 성종과 7대 목종
그리고 고려 8대 현종 때에 신라 경덕왕이 바꾸었던 땅이름을 한국에 옮겼을 뿐이다. 한국에
한자식 이름으로 지명이 정착된 것은 고려 27대 충숙왕 때이다. 한국에 있는 땅 이름은 대륙에
있던 것을 고려때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고려 이후의 한반도 지명을 보고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을 꿰어맞추다 보니 대륙에 있던 고려까지 한반도에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현재 고려사 뿐 만 아니라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을 보면 한국에 없는 지명이 70% 이상이다.
1931년 장려화(臧勵龢)가 펴낸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땅은 모조리
만주에 있는 봉천으로 옮기고 봉천마저 심양으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봉천 아니면 요녕성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함주(咸州)의 경우 함흥으로 번역해 이성계가 함흥에서 태어난 것으로
번역했으나 함주는 중국 하남성 통허현(通許縣)으로 이성계 부모는 여진족 사람이었다.
한반도로 지명을 옮기기 이전의 지명으로 삼국사기 견훤전을 보면 후백제 이야기가 아닌 본 백제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즉 견훤전에 신라 김유신이 황산(黃山)과 사비성(泗沘城)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황산(黃山)은 하남 위례성이 있으며 동웅주(東熊州)와 서웅주(西熊州) 및
웅이현(熊耳縣)이 있었던 하남성 급현(汲縣)에서 40리 거리에 있다고 되어있다. 백제는 본래
대륙의 산서성 직산현으로 지도상 산서성 위례성으로 표기되어있다.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
세웠다 한다. 그런데 금마산이 운남성 곤명시 동쪽 25리라 되어있고 혹 익주(益州)일 것이라
했는데 익주는 감숙성 성현과 임담현 남쪽 강천성 또는 사천성 봉절현이라 했으나 이 곳 이름을
당나라가 사천성 성도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가 바다를 넘었다 했으므로 아니다. 당나라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넜다면 분명히 섬서성 서안에서 하남성 낙양을 거쳐 개봉현에 이르는
하남성 패수(浿水)일 것이다.
(일본에 백제천이 있듯이 광서성 남쪽 남영(南寧)시 밑에도 백제(百濟)라는 지명이 있어
대륙백제를 증명한다)
견훤이 빼앗았다는 거창(居昌)의 20 여 개 성에 대해, 경상도 거창(居昌)에는 옛날부터 현재까지
20여 개의 성이 없었으며, 그 곳은 대륙의 땅이름으로 거용현(居庸縣), 거용관(居庸關),
거소산(居巢山), 거소현(居巢縣) 등으로 지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견훤 또한 경북 상주 사람이
아니라 하북성 상주사람이며 그가 나타난 완산주는 완주로 산서성과 하북성을 당시에 이르는
직예성(直隸城) 완현(完縣)을 말하는데 지금은 북경 남쪽 보정시(保定市) 서남쪽 백리 이내에 있다.
하남 위례성(慰禮城)은 산서성(山西省) 직산현(稷山縣)으로 산서성 위례성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
견훤전은 후백제의 얘기가 아니고 본 백제의 기록이며 신라 김유신은 하남성 급현(汲縣) 40리
거리에 있는 황산(黃山:계백이 죽은 곳)과 사비성까지 왔다. 견훤과 궁예가 전쟁을 한 덕진포는
귀주성 사남현 동남1리고 견훤과 신라, 백제, 고려의 활동무대는 중원의 사천성으로 철원은
철주가 있는 감숙성 민현 동쪽이며 고려왕으로 추대된 왕건에게 지리산 대나무 부채를 보냈다 한
지리산은 대나무로 유명한 사천성, 운남성의 경계지역인 운남성 학경(鶴慶)이며 여진족인 이성계의 고향인 함주는 함흥이 아니라 중국 하남성 통허현(通許縣)이다. 한반도 예성강에
염주(鹽州), 백주(白州),정주(貞州)가 있었나? 예성강은 패수(浿水)로 견훤아들 양검이 강주(康州)
도독이 되고 용검이 무주(武州)도독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다. 강주는 광동성 덕경현(德慶縣)이고
무주는 호남성 상덕현(常德縣)이다. 경상도 거창에는 20여 개의 성이 있지 않았으며 오강(烏江)의
지명은 반도에 없고 안휘성 화현(和縣)에 있는 곳이다. 청구(靑丘)는 산동성 광요현이며 견훤이
5000명 정예갑병을 데리고 공격한 의성부(義城府)는 사천성 광원현(光元縣) 호북성 경계에 있다.
견훤이 포로와 백성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전주(全州)는 전현(全縣)으로 호남성 영릉현(零陵縣)이다.
이 전주가 지금의 광서성 전주(全州)로 지명을 옮긴 것으로 지명사전은 밝히고 있다. 왕건이
주둔한 운주(運州)는 산서성 안읍(安邑)으로 경순왕은 이곳의 30여 군현을 왕건에 내주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후당 청태 원년에 견훤이 소식을 듣는 것으로 나온다. 또 신검이 이찬 능환,
파진찬 최승우의 보좌를 받아 아버지 견훤을 금강의 모친 고비와 일족들 및 시종들과 함께
유폐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서북에 있는 백탑 산중이라고 되어있다. (사실 전주
금산사 미륵불전에 일족 수십 명이 동시에 들어갔다는 기존의 주장은 불합리한 점이 많다: 필자)
왕건이 양검과 모사 이찬 능환을 유배한 진주(眞州)는 진부(眞符)로 사천성 무현(茂縣)서북을
말한다.
7. 고려사절요 기록
한주(漢州) 송악군은 사천성 자동현(梓潼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이곳 지명을 고쳐 덕양군
(德陽郡)이라 한다. 왕건이 처음 도읍하면서 한주(漢州)라 했으므로 한주가 최초 송악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면서 송악군을 동경이라 했다. 분명히 동경은
서경이었으므로 송악군의 이름을 사천성에서 서경으로 옮긴 것이 확실해진다. 태조가 처음
등극하면서 사천성 한주인 송악군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가 고려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 때는
촉(蜀)나라이며 연호는 처음부터 후량(後梁)이라 사용했으며 후량이 후당에게 망하자
태조19년부터 후진(後晉) 고조인 천복(天福) 원년을 사용했다.
8. 백제 부속 왜
왜는 위(魏)가 망한 후 큰 무리는 신라로, 작은 무리는 백제로 그리고 또 한 편은 대륙의 남으로
내려가 왜(倭)국을 건설한다. 이때 왜국은 백제 땅 안에서 속국으로 자라게 된다. 왜국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전란에서 백제가 쇠약해지자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간다. 기원 후 841년 당나라
무후(武后:會昌원년) 때 백제의 후예들이 왜를 일본이라 고쳐 부르게 했는데 왜국은 백제유민과
위나라 유민의 결합체6인 셈이다. 본래 위(魏)와 왜(倭)는 같은 뜻을 지닌 글자이다. 왜는 섬을
타고 내려갔는데 백제의 선조를 도 (島夷)라고 한다. 한편 백제의 선조는 멀리 간다고 하여
장이(長夷)라고 하며, 백제의 선조들이 워낙 먼 곳으로 이주해 가기 때문에 조이(鳥夷)라고도
한다. 조이란 새와 같은 동이란 뜻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선조가 조이(鳥夷)라고 하며
사학자들은 조이임을 밝히고 있다.
9. 왕건이 살던 곳은 촉군(蜀郡)
송사(宋史) 고려전에 왕건이 살던 곳은 개주(開州)라 했는데 개주는 촉막군(蜀莫郡)으로
한반도에는 이들 지명이 없다. 당나라 이후 성산(盛山)군으로 불려온 이곳은 그 이후 개주(開州)로
바뀌어 지금은 사천성 개현(開縣)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상고이래 본시 예맥(濊貊)의 땅이며
고려가 있던 경주(慶州)이다. 촉막군 개주는 개성부라 했으며 신라 때 동주(東州)라 하고 호를
동경이라 했는데 백제 때에는 금주(金州)라 했으며 금마군이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개성현으로 되어있다. 촉나라가 사천성이었으며 고려의 선조인 당나라가 사천성이었다.
명사(明史)에서 고구려 당시 신라, 백제와 같이 있었던 땅은 송악이라 했으며 송악은 동경이자
평양이며 서경이라 기록하여 송사 고려전과 부합하고 있음을 본다. 이 내용은 원사(元史)와도
일치하나 원사는 고려왕 34대를 27대 왕으로 기록하여 28대 충혜왕부터는 첩목아(帖木兒:문서첩
꼭두각시) 나무아이로 보아 이미 망한 나라로 보았다.
10.대륙지명을 반도로 옮기면서 역사왜곡
대륙의 지명이 한반도로 옮겨진 것은 거란의 침공이 많아지자 고려 6대 성종 때부터 8대 현종 때
대륙의 모든 행정지명을 그대로 한반도로 옮겨놓는다. 고려는 한국 땅에 도읍한 사실 조차 없다.
고려사에 나오는 땅이름은 10개 중 한 두 군데만 한국에 있는 것처럼 되어있다.
예를 들자면 전주, 광주, 청주 등이다. 이런 이름은 고려가 대륙에 있으면서 일부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령 경주(慶州)가 나오는 고려사 대목에 영주 하나정도를 빼면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대륙에서는 볼 수 있는 다음의 지명이 동시에 나온다. 삭주(朔州), 장주(長州), 복주(複州),
정주(定州), 진주(鎭州), 강주(康州), 운주(運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래주(來州), 곽주(郭州),
운주(運州), 양주(良州), 도주(道州), 정주(貞州), 영주(寧州), 가주(嘉州), 한주(韓州), 평주(平州),
영주(永州), 임주(林州), 신주(信州), 의주(宜州), 함주(咸州), 길주(吉州)
고려 15대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는 남경천도를 주장하는 상서를 올렸다. 고려사절요에서
김위제는, 도선비기에 고려의 땅에 삼경이 있는데, 중경이 있어 송악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있어 남경이 되고, 평양이 있어 서경이 되니, 11,12,1,2월은 중경에 머물고, 3,4,5,6월은 남경에
머물고, 7,8,9,10월은 서경에 머문다 한 기록을 배경으로, 개국 후 160 여 년에 빠져있는 남경을
만들어 천도해야 할 적기임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 있다. 결론만 밝히면 중경은 현재의 하북성
북경, 남경은 현재의 사천성 성도, 서경은 현재의 섬서성 서안이다. 고려 때 동 여진과 서 여진
(흑수말갈 후예)이 있었는데 서 여진은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 내외몽고에 있었고 동 여진은
지금의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에 있었고 북경을 중심으로 발해만 주위에 북송이 있었으며
동여진 좌측, 북송과 감숙의 서 여진 위에 요(遼)가 포진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예종때 서여진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데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면 서역에
있는 서여진이 무엇하러 요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수 만리 길을 해마다 찾아올 필요가 있는가.
또 고려 예종때 동여진 공아(公牙)가 조공을 바치고 가므로 예종이 사신을 시켜 후히 대접하고 고려의 동쪽경계까지 전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가 대륙에 있다는 기록이다.
11. 고려왕건 혈통과 궁예, 견훤
-高麗(AD.918∼AD.1395년:475년):고려 건국지는 사천성 성도.
왕건의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다.
① 왕건(王建)의 출생과 혈통
처음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왕씨계보(王氏系譜)에 의하면, 왕씨(王氏)의 선조는 개마고려대족야(蓋馬高麗大族也)라고 했다.
여기서 개마고려(蓋馬高麗)라 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에 있던 고구려(高句麗)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개마대산은 개마현(蓋馬縣)에 있다고 되어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 郡)에 속하고, 개마대산이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며, 평양성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서남쪽
태백산(太白山)이 있는 부풍현(扶風縣) 일대에 개마대산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왕씨의 선조들은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자 건현(建賢)이란 사람이
군장(君長:군신의 장)이 된 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후당(後唐) 장흥(長興AD.930∼933년) 때,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후당 명종(明宗AD.926∼930년)으로부터 임명받아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
(建元 州都督充大義軍使)가 된 후에 고려왕으로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도경에서 보면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 州都督充大義軍使)가 고려왕(高麗王)으로
봉작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건원(建元AD.343∼344년)은 동진(東晋) 때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을 말한다.
※ 고려도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씨의 가문은 본래 고구려의 큰 부족인 군신의 집안에서
파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姓)은 왕씨(王氏)가 아니라 고구려의 씨족(氏族)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성은 본래 고씨(高氏)의 집안인 것을 고려도경에서는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려도경에 의하면 북송(北宋)의 태조(太祖)였던 조광윤(趙匡胤
AD.960∼963년)의 아버지는, 후한(後漢) 3代건우(乾佑) 유승우(劉承佑AD.948∼950년)이며,
유승우의 조상은 동진(東晋) 7代강제건원(康帝建元) 사마악(司馬岳AD.343∼344년)이다.
말하자면 사마악의 후손이 후한 3대 건우(乾佑)인 유승우(劉承佑)로 이어지고, 유승우의 아들은
북송(北宋) 때의 조광윤(趙匡胤)으로 성씨(姓氏)가 바뀌면서, 다른 나라로 혈통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 성씨가 바뀌는 것은 어떤 나라에 등극할 때 그 나라 왕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왕이 다른 성(姓)을 주는 경우도 같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BC.2679년)의 아들이 25명이었는데, 성(姓)을 받은 아들은 고작 14명이라고
사기(史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BC.2578년)는
김씨(金氏)로서, 신라왕의 대부분은 김씨(金氏)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는 고신씨(高辛氏BC.2482년)로 황제의 증손자이다. 본래 황제의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고 했는데, 후일 희씨(姬氏)로 바뀌었고, 아들들은 희씨 성이 아니라 엉뚱하게
다른 성씨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에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에서
시조사찬(始祖沙粲)으로 이어지고, 후당(後唐)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인
이형지덕(李亨至德AD.756∼758년)의 왕비(王后)인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이어져 왔다.
그 후 경강대왕(景康大王)에서 마지막 당세조(唐世祖)인 장종(蔣宗) 이존욱(李存勖)
동광(同光 AD.923∼926년)에 이어, 태조왕건(太祖王建)으로 혈통이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태조왕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씨(王氏)는 성이며, 건(建)은 죽은 후의 휘호이다. 왕씨는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였던 아버지 융(隆)의 장자이며, 왕건의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때의
금성(金城)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임을, 후한서와 여러 정사(正史)에서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 희종(僖宗) 이현(李 ) 건부(乾符AD.874∼879년) 4년,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AD.874∼884년) 3년인,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 14일에 태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에서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이라 했으므로, 한주(漢州)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고조선 때부터 삼한(三韓)과 삼국 때까지 한반도에는 한주라는, 한자로 된 지명은 없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한주(漢州)의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 두었던 곳으로,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했다. 송(宋)나라 때는
한주덕양군(漢州德陽郡)이라 했으며, 원(元)나라 때 와서 한주(漢州)라고 했다.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모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였으나, 중화민국 때 와서 이름을
고쳐 광한현(廣漢縣)이라고 적고 있다.
※ 한주(漢州)를 당나라 때 덕양군(德陽郡)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61쪽에 있는
德陽郡을 찾아보았다.
덕양군은 후한 때 사천성(四川省) 자동현(梓潼縣) 북쪽에 두었다가, 그후 지명을 옮겼다. 그곳은
사천성 수녕현(遂寧縣) 東南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주 송악군(漢州松嶽郡)은 중국대륙에 있는 사천성 성도(成都)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태조 왕건은 한주 송악군에서 태어났으므로,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기로 한다.
唐나라 세조의 장자(長子) 어머니는 당나라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AD.756∼758년)인
이형(李亨) 지덕(至德)의 왕후인 정화왕후(貞和王后) 한씨(韓氏)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당나라
세조는 당무후(唐武后)인 무종(武宗AD.841∼860년) 이전(李 )인 회창(會昌)이다. 그러니까 당나라
세조였던 무종(武宗)의 아들인 태조 왕건은 희종(僖宗AD.874∼877년)인 이현(李 ) 건부(乾符)
3년에 태어났다. 고로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正月十四日에, 왕건은 당나라 혈통으로 한주
송악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혈손(血孫)으로 고려(高麗)를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인
한주(漢州)였던 송악군(松嶽郡)에서 건국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당(後唐)에게 망한 후 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태조왕건이 전촉(前蜀)을 건국한
연대는 AD.918년으로,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AD.916년)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서는 태조왕건의 건국연대를 전촉(前蜀)을 세운 AD.918년으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 동진(東晋)에 이르고, 따라서 당나라
숙종인 원덕대왕의 장남으로 금성태수 융이었던 세조 무종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었다. 왕건의
아버지는 금성태수로 있다가 후당(後唐)의 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 한무제(漢武帝BC.140∼135년)는 우거(右渠)로서, 조선을 멸한 후 고려현(高麗縣)에 원도군(元
郡)을 속하게 했다. 그 후 왕망(王莽AD.9∼13년)은 군사를 일으켜 흉노(匈奴)를 주살하고
전한(前漢)을 격파한 후 신(新), 즉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그리고 후한(後漢)인 동한(東漢)이 실질적인 고구려로 내려왔다. 고려태조 왕건의 선조는
동진(東晋)을 거쳐 당나라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동안 나당(羅唐)에 의해 AD.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8년 후 고구려가 망한 후 당 숙종인 원덕대왕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무종(武宗)인 이전(李 ) 회창(會昌)이다. 또한 무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왕건은
후당(後唐) 장흥(長興AD.930∼933년) 2년에 고려왕으로 등극하여 26년간 재위하다 67세에 죽은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기록되어 있다.
※ 태조왕건의 계보와 건국은 이상과 같이 이루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 성도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는 송악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려는 옛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에서 천자국(天子國)으로 서서 위업을 떨치게 되었다.
고로 한국의 국제 칭호는 고려인 코리아로 현재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릉이
한반도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② 왕건의 활동무대와 지명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은 사천성 성도(成都)
※ 왕건은 기원후 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正月) 십사일(十四日),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태조왕건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漢州松嶽郡. 唐改曰德陽郡. 宋曰漢州德陽郡. 元曰漢州. 明淸皆屬. 四川省成都府.
한주송악군은 지금의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임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기록되어 있다.
※ 왕건이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한(後漢)에 의해 망한 후, 궁예의 장수로 활약할 무렵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명은 삼국사기ㆍ고려사ㆍ고려도경ㆍ삼국유사ㆍ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난 것을 정리해 본 것이다.
굳이 지명을 정리하고자 한 것은 과연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 대륙에서
태조왕건과 궁예, 그리고 견훤(甄萱)이 활동했는지의 여부를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해두려는 데
있는 것이다.
※ 남주(南州)는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서쪽이다. 당나라가 땅이름을 고쳐 초주(楚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다시 고쳐 남주군(南州郡)이라 했다. 그 후 다시 남주(南州)라
했고, 이곳은 현재 사천성(四川省) 기강현( 江縣) 남쪽 90리라고 했다.
남당(南唐) 시에는 땅이름을 고쳐 장주( 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송(宋)나라 때
다시 고쳐 장주( 州)라 했다가, 송나라는 다시 기미주(羈 州)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옛
서주부(敍州府)의 경계라 했던 것이다.
※ 철원(鐵圓)은 철주(鐵州)로서, 조선의 평양(平壤), 즉 중국의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의 서북인
감숙성 민현(岷縣)의 동쪽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1쪽에 기록되어 있다. 철원(鐵圓)은 옛
고구려의 땅으로서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곳이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적고 있다.
※ 금성(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융(隆), 즉 세조였던 당나라 무종(武宗AD.841∼846년)이
금성태수로 지낸 곳이다. 금성은 금성군(金城郡)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옛 난주(蘭州)와
서영(西寧)의 두 주(州)를 뜻한다. 또한 금성현(金城縣)은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南이라고,
중국지명대사전 543쪽에 기록되어 있다. 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무종(武宗)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대왕(大王)들이 항상 욕심을 가지던 조선의 숙신(肅愼)이었던 변한(卞韓)의 땅이라고,
고려사절요에는 적고 있다.
※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靑州), 괴양(槐壤)과 당성(唐城) 즉 당나라 성 등을 태조왕건 20년에
군(郡)과 현(縣)을 모두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어서 광주(光州), 금성군(錦城郡) 즉
금성(錦城), 나주(羅州), 양주(良州)까지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려사절요).
※ 광주(廣州)는 하남성(河南省) 노산현(魯山縣)과 양성현(襄城縣)으로 되어있는데, 후일에
광동성(廣東省) 곡강현(曲江縣)과 남해군(南海郡)으로 옮겨졌다.
※ 충주(忠州)는 사천성(四川省) 충현(忠縣)에서 다스린 것으로, 중국지명대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山東省) 익도현(益都縣)과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東南80리와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 東北으로 기록되어 있다.
※ 괴양(槐壤)은 어디인지 기록이 없다.
※ 당성(唐城)은 당성현(唐城縣)으로 호북성(湖北省) 수현(隋縣) 西北.
※ 광주(光州)는 후위(後魏) 때 산동성(山東省) 액현(掖縣), 즉 지금의 산동반도 내주(萊州)이다.
※ 금성군(錦城郡)은 금현(錦縣)이며, 요(遼)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 했다. 영락현(永樂縣)은
하북성(河北省) 서수현(徐水縣)이며, 한편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東南120리로 기록되어 있다. 금성(錦城)을 금주(錦州) 또는
조양현(朝陽縣)이라 했으며, 일명 설금현(設錦縣)과 도하현(徒河縣)이라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는
요서군(遼西郡)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 조양현(朝陽縣)은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東南80리와, 산동성(山東省) 장구현(章丘縣)
西北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양현(朝陽縣)은 지금의 서안(西安)이다(왕성(王城))
※ 도하현(徒河縣)은 교하현(交河縣)으로서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 서쪽인
카자흐공화국까지 정벌한 것으로, 고려사 지명에 나타나 있다. (예) 조선현(朝鮮縣)을 보면 한나라
때와 후한(後漢) 시까지 진(晉)나라가 있던 곳은 고려의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이때 고려는
고구려이다. 즉 옛 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이며, 이곳은 평양(平壤)인 장안성(長安城)이며,
후위(後魏)의 무리들이 모두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04쪽에
기록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하며, 일명 험독성(險瀆城)이라 하여, 조선 왕만(王滿)이
도읍한 험독현(險瀆縣)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51쪽에
적고 있다.
※ 나주(羅州)는 치염강(治廉江)이 흐르는 치수(治水)이며, 치수(治水)는 산서성(山西省)
삭현(朔縣)으로 東北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되어있다. 지금에 와서 황수하(黃水河)라 한다. 그러나
후일에 이르러 광동성(廣東省) 화현(化縣) 東北으로 지명을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 양주(良州)는 양성현(良城縣)으로, 강소성(江蘇省) 비현( 縣) 북쪽 60리인 것으로 되어있다.
※ 상주(尙州)는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 북쪽 경계 지역이며, 이곳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태어난 고향이다.
※ 정주(貞州)는 정풍주(貞豊州)로서, 귀주성(貴州省) 흥의부(興義府)로, 일명 정풍현(貞豊縣)이다.
※ 등주(登州)는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다. 일명 동모군(東牟郡)이며,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을 말한다(지명사전 926쪽).
※ 운주(運州)는 운성현(運城縣)으로서 산서성(山西省) 안읍현(安邑縣) 西南15리이며, 일명
가염성(可鹽城)이라고 지명을 바꾸었다.
특히 운주는 신라 56대 경순왕 8년 9월에 운주계(運州界) 30여 개나 되는 군과 현을,
태조대왕에게 내주면서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운주계란 운주의 주위에 있는 군과 현을
말한다(삼국사기, 고려사 등 참고).
※ 청주축나성(靑州築羅城)은 옛 九州의 하나이다. 청주에 나성(羅城)을 쌓은 곳은 지금의 산동성
익도현(益都縣)에서 다스려졌다. 이곳은 산동성 교동도(膠東道)인 제남(濟南)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웅주(熊州)는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西南70리에 있으며, 이곳은 웅이산(熊耳山)이 있는
지역이다.
※ 염주(鹽州)는 한(漢)나라 때 두었던 고성현(高城縣)으로, 지금의 하북성 염산현(鹽山縣)으로
南40리이다. 염주(鹽州)는 후위(後魏) 때 둠. 수나라 때 지명을 염천군(鹽川郡)이라 했고, 당나라 때
다시 염주(鹽州)라 했다. 송나라 때는 다시 지명을 고쳐 서하(西夏)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영하(寧夏)의 염지현(鹽池縣) 북쪽이라 했다. 이곳은 고조선(古朝鮮)의 경계라 했으므로, 이때
고조선은 중심부인 서경(西京), 즉 서안(西安)의 북쪽이다. 지금의 섬서성 북쪽인
내몽고(內蒙古)와의 접경지대를 말한다. 그러나 염산현(鹽山縣)은 하북성 염산현으로 되어있다.
※ 위주(謂州)는 지명이 보이지 않음.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땅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아주(牙州)는 아산(牙山)으로 흠현(欽縣) 남룡문(南龍門) 동쪽 60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거아산(距牙山) 20리로 되어있는데, 거아산은 지명사전에 없었다. 한편 마안산(馬鞍山)으로
되어있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안산(馬鞍山)은 아산(牙山)으로 처음 있던 곳부터 순차적으로 지명이 옮겨진 것을 번호 순으로
엮어보려 한다.
- 다음편에 계속 –
[출처] 109. 왕조의 비밀 2 - 7|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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