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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창작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과 실제적 이론
박양근
떠났던 그대를 맞이하며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문학이 무엇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을까. 문학이 그런 것이라면 어떻게 문학을 만나야 하는가.
논자는 문학에 대한 질문은 인문학을 대할 때의 의문과 같다고 여긴다. 소크라테스는 희랍의 청년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문자의 숲에서 사는 작가에게 이 말은 “너 자신을 생각하고 너 자신을 읽어라”는 뜻이다. 이성의 시대의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여 육신이 아니라 정신에, 몸이 아니라 마음에 인간의 가치가 있다는 ‘코기토’를 말하였다. 작가는 자신을 알고 생각하는 존재자라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자라는 논거를 제시하였고 프랑스 과학철학자 바슐라르는 몽상의 미학을 통하여 상상과 이미지의 세계를 느껴야한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하이데거, 바슐라르의 인간론은 글을 쓰려면 이성과 감성, 머리와 가슴, 논리와 상상, 실체와 이미지를 아우르는 인문학과 예술계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논거를 뒷받침해준다.
글(작품)마다 품격을 지닌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즐감’이지만 악한 글을 만나면 ‘절연’한다. 사람과의 만남과 달리 글에 대한 판정은 1회전으로 끝난다. 시는 30초, 수필은 길어야 5분, 소설은 평균 30분이라는 시간동안 작가는 독자와 인터뷰한다. 하지만 작가는 직접 자신의 문학을 변호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
그러니 글을 잘 써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못지 않는 목숨 건 변호가 필요하다. 수필은 성찰, 체화, 감동, 혜안, 논리, 감수성, 문장력 등의 요건을 가능한 많이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해외에 사는 교포작가, 재미작가, 시애틀에 둥지를 튼 작가, 그들은 한국을 떠나 신대륙에 정착한 남다른 존재자이므로 노스텔지어, 노마드, 국제적 주제라는 정체성도 정립해야 한다. 그러니 어찌 좋은 수필을 쓰겠다는 의욕만으로 수필시학을 갖춘 산문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학창작은 열정과 자기 회의에서 시작하는 법, 떠난 그대들을 맞이할 조그만 문학 향연을 마련하고자 한다.
1. 어떻게 작가는 만들어지는가
수필을 압축하여 말하면 “인생 에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는 1580년에 간행된 《수상록》에서 ‘에세(essais)’라는 독특한 문학 형식을 고안하였다. 그는 프랑스어 ‘시도하다, 실험하다’라는 어원에 맞게 인간중심의 실존성을 가볍지도 과하지도 않은 문체와 사유와 통찰로 다양한 주제를 풀어냈다. 고전에 의탁하되 성서 인용을 거부하고 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면서 인간을 위한 새로운 텍스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신을 이야기하던 단테나 밀턴과 다른 몽테뉴라는 작가가 출현한 것이다. 이 경이로운 차이는 작가는 신의 부름을 받는 자가 아니라 점차적으로 자신의 작가의식을 형성해가는 자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인간 사후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식과 성찰과 열정이라는 정신적 질료를 문학이라는 용광로에 달구어 한편의 작품을 주조해내었다. 마찬가지로 순도의 작품을 만들려면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작가적 입신과 입문에 진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살아가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작가적 존재에 대한 탐색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시작한다. 너의 환경, 너의 가족, 너의 인성, 너의 능력, 너의 국가, 그리고 너의 ‘앎과 모름의 경계’를 알 때 제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앎은 로고스의 시작이면서 지성, 이성, 지혜, 논리가 그리스 청년의 자격이자 현대시민의 기초교양의 출발점이기도하다. 소크라테스의 지적 탐구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에 이르렀다. 이성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로서 생각 자체가 ‘있음’이라는 존재성을 담보하듯 육신보다는 정신을 강조하였다. 몸은 단순히 정육점에나 있을 살덩어리라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철학적 인식은 인문문학의 요소인 사유, 인지, 성찰, 자성(自省) 등에 일치한다고 하겠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너 자신을 아는 자‘는 생활인, ‘나는 생각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책을 읽는 수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건만으로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 데카르트의 뒤를 이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존재’와 ‘존재자’와 ‘현존재’의 차이를 제시하여 작가의 조건을 진일보시켰다. 그는 ‘현존재자’를 내세우기 위하여 ‘시간성, 불안, 배려, 일상성 그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고 숙성된 현존재(Dasein)라는 주체를 옹립하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시간과의 관계를 항상 의식하도록 주문한다. 세상은 본디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혼돈”스러워 인간은 누구보다 시간 프레임에 매인다. 현존재자로서 작가는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죽는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만 다른 존재자에 대해서는 ‘배려’를 갖는다는 것이다. 배려는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과 도구, 관념 등 모든 ‘대상에게 마음을 써주는 행위’로서 일종의 신앙적 사랑과 같다. 모든 만상과 만물에 대한 배려심, 이것이 자신을 앎과 생각함에 이어 작가적 실존을 규정하는 세 번째 요건이다.
또 하나의 요소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과학철학자 바슐라르가 말한 상상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몽상의 시학이다. 서양 철학은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문제를 지닌다. 그것은 플라톤부터 하이데거까지의 철학이 ‘로고스 중심주의’였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이성적, 논리적 로고스(logos)를 중시하면서 감성과 상상은 불순하고 나쁘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바슐라르가 반기를 들고 시적인 영혼은 인간 존재의 또 다른 축이고 상상력과 몽상의 중요하다고 설파하였다. 이 점은 객관적 존재와 주관적 존재로서 인간은 과학과 시의 두 축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문 문학가라면, 이성과 감성,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감수성, 개념과 이미지를 함께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칼 융처럼 집단적 무의식을 인정한다.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우주의 최초 생성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진화과정을 무의식에 간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무의식 속에 묻힌 아득한 기억을 일깨워 ‘우주적 의식’이라는 순수 에너지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창조는 빅뱅 →은하계 → 태양계 → 지구 → 광물계 → 물 → 식물계 → 동물계 → 인간 순으로 나타나므로 물•불•공기•흙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몽상을 통하여 문학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시대가 이미지와 상상의 시대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앙드레 지드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지배한다. 인간은 오감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지만 작가는 오감을 너머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몽상적 의식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므로 항상 몽상이라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수혈 받아야 한다. 그 때 작가의 글은 외적으로는 우주적이고 내적으로는 원초적인 존재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2. 문학 창작의 6단계
이제 논자는 개별 작가가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하이데거, 바슐라르가 설정한 페러다임의 어디에 위치해있느냐에 따라 그의 작품이 어떤 형상을 지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문학은 나와 너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를 설명하는 언어의 조합이다. 펜을 드는 순간 작가의 뇌리에 박혀있는 갖가지 형상과 이미지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작가는 그 현상을 글이라는 그릇에서 배양한다. 이때 젤과 비슷한 상태로 있는 지성, 감성, 이성, 오성, 영성 등의 심적 능력이 작가의식이라는 존재망(存在網)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글은 단순히 문자로 이루어진 언어망이 아니라 작가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존재망이라 하겠다.
글은 작가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러주는 지적도(地籍圖)이기도 하다. “어디”라 함은 지리적 장소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작가적 혼이 위치한 층위를 말한다. 그 위치가 글의 수준을 결정한다.
사람은 살면서 존재하고 존재하면서 산다. 의식주의 도움을 받아 생존하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한다. 보통 사람들은 물리적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하지만, 작가는 다른 생각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때 더 행복해진다. 첫 문인 에고와 마지막 문인 영성 사이를 잇는 계단은 올라갈수록 좁고 가팔라진다. 단테가 거친 지옥문이 9개, 연옥문이 7개, 천국문이 9개라면 작가가 들어가는 문은 자아(ego)→가족(family)→인종(sapiens)→생태(echo)→우주(universe)→신(god)의 순서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자아로 가는 문과 신에게 가는 문은 양극으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자아(ego)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기 위한 동기와 행동력을 가진 주체이다. 에고는 환경과 자아간의 간격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프로이드의 “나는 욕망한다”, 톨레의 “지나친 나를 버린다” 등이 자아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준다. 보통사람들은 현재 생활에 안주하지만 작가는 현실을 거부하고 진아(眞我)를 향해 나아가려한다. 그 운행 과정과 진로를 담은 글이 전(傳)이다.
다음 단계는 가족(family)이다. 가족은 DNA를 유산처럼 물려주고 물려받는 혈연집단이다. 가족이 개인을 생산하고 보호하고 양육하지만, 개인은 가족 일원에 대하여 호불호의 감정을 갖는다. 전통적 관점에서 가족의 최소 인원은 3인으로, 대표적인 가족이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며 바르셀로나에 세워지고 있는 ‘대가족성당’은 가족애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킨 현대건축물이다. 가족을 그리는 예술은 날카로운 직선을 피하고 이중섭의 그림처럼 부드러운 이미지를 모티브로 한다. 작가들이 심리적으로 가정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탈과 귀환을 서사로 펼쳐낼 때 록(錄)이 만들어진다.
다음 단계는 인종(sapiens)이다. 호모사피엔스에 대한 연구인 인문학(휴머니타스)은 천문(天文)이나 지문(地文)과 달리 인간 중심의 ‘liberal arts’로 구성된다. “자유를 위한 기술(記述)”로서 인간은 환경과 과학과 종교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유인임을 천명하는 인문 문학을 구성해낸다. 인문 문학은 권력투쟁의 과정을 기술하는 역사와 달리 자유와 사랑이라는 숭고한 투쟁을 사(史)로 서술한다.
생태(echo)는 개체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살피는 관점이다. 작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공존, 공영, 공애의 대상이고 지구는 존재자 모두가 함께 존재하는 둥지로 간주한다. 이 단계에서는 생태윤리와 하이데거의 현존재자가 등장하는 문학이 나타난다. 생태의식은 생명공경사상이 기본이므로 “다르면 다를수록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탈인문주의를 지향하고 작가도 바슐라르의 몽상적인 의식을 갖게 된다. 서로의 존재에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詩)의 단계로 진입한다.
우주(universe)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천문(天文)이다. 별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장한 후 천지현황(天地玄黃)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찾아낼 수 있으면 만다라 같은 글을 쓸 수 있다. 인간을 몸뚱이가 아니라 소우주이고 우주를 유영하는 영혼의 편주(片舟)로 간주하여 그 상상의 영역에 지정의(知情意)라는 문학의 가치를 붙이면 문(文)이 이루어진다.
신(god)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영성이다. 신의 세계를 신령스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기운 때문이다. 신령스러운 존재와 교감하는 힘을 기독교에서는 성령이라 부른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요 14:17),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요 14:26), 증거하시며(요 15:26),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 16:8), 인도하시며 말씀하시며 알리신다(요 16:13, 15)”고 한다. 이 말씀들은 문학이 무엇이여 어디에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를 알려준다. 신과 인간과 구원의 관계를 풀어내는 분야가 종교학이라면 문학도 성령과 소통하려는 영성(Spirituality)이 충만할 필요가 있다. 명상, 기도, 묵상, 고해 등으로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해주어 초인간적, 초자연적, 초우주(cosmos)적 단계를 풀어낸 글이라면 경(經)이라 부를 만하다.
작가는 “자의식에서 영성으로” 향하는 캡슐에 몸을 실은 우주인이다. 수만 년 전의 화석에 박힌 새를 보며 하늘을 날던 영혼을 상상하는 힘, 이것이 작가의 정신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자신의 영혼을 가둔 벽을 뚫기 위해 “맨 손톱으로 벽을 뚫듯 글을 쓴다”고 하였다. 이것은 영적 절대자와 소통하려는 작가의 자아승화의 표현이 아닌가.
작가 자신이 부단하게 변신하고 생각을 바꾸면 글이 달라진다. 마음속에 자리한 생각의 문을 차례차례 열 때마다 고통과 노력이 배가하지만 우주의 별이 된 것 같은 황홀한 행복도 증가한다. 그것을 위한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결코 문장으로 자신의 빈 곳을 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전(傳)을 쓰든, 가족의 록(錄)을 구성하든, 인간을 위한 사(史)를 기록하든, 자연생태를 사랑하는 시(詩)로 진입하든, 우주를 설파하는 문(文)을 이루든, 신을 위한 경(經)을 바치든, 모두 그대 당신을 위한 곡(曲)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 목적지로 나아가려면 ‘홀로 있음’이라는 고독을 견뎌야 한다.
3. 맥혈기(脈穴氣), 이것만은 알고 쓰자
글은 생물이다. 글을 생물이라 부르는 이유는 죽은 글이 있고 식물인간 같은 글이 있고 살아있는 글이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글쓰기가 고되고 힘들고 어려운데 자신이 쓴 글이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를 모른다면 헛수고만 하게 된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으로 안다는 말이 있고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제 힘으로 기어오르는 자식만을 기른다는 호랑이의 양육법도 있다. 글로써 삶을 충일하게 하고 작가라는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살아있는 글을 써야 한다.
글을 배우기 전에는 힘들지 않게 글을 쓴다.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을 잘 풀려나간다고 여긴다. 글줄에 막힘이 없고, 갖가지 표현이 떠오르고 머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연이어 떠오른다. 적절한 언어와 치밀한 구조보다 솔직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개념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믿는다. 나중에야 막된 버릇이라고 후회하지만 이미 내가 탄 글배(文舟)는 하류로 미끄러져 버렸다. 그때 쯤 수준 높은 작품을 대하고 본격 창작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글이 허점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늦다 여기지 말고 제대로 수영법을 익히면 난파선에서 빠져나와 구원의 둑에 다다른다.
이때 정법(正法)의 단계를 시작한다. 정법은 문장 규칙을 따르는 능동적인 모방으로서 글의 모뎀을 익히는 단계이다. 그것은 인즉문(人卽文). “글이 사람이다”는 글은 사람의 몸과 같고, 사람의 몸은 땅과 같다. 글과 몸과 땅은 모두 맥과 혈과 기를 지닌다. 맥혈기를 가져야 땅도 산 땅이 되고, 사람도 산 사람이 되며, 글도 산 글이 된다는 의미다.
산의 형세는 산줄기가 흐르는 모양으로 살필 수 있다. 지리학에서 그것은 산맥이라 부르며 우리나라의 주맥은 백두대간이다. 혈은 땅의 정기가 모인 자리를 칭하는 말로서 경혈이라고 부르며 맥과 혈이 모여 산의 기운을 이루어낸다. 명당이란 맥혈기가 어울린 터를 말한다. 인간의 생사와 산세간의 관계를 살피는 풍수학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다. 글에도 풍수학과 비슷한 작법이 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흙으로 만든 만큼 몸에도 맥혈기가 존재한다. 몸은 기능에 따라 신경계, 호흡계, 심혈관계, 비뇨기계, 골, 근육계, 그리고 피부계로 구분하지만 동양의학은 기능보다는 상호반응의 상태를 중요시한다. 인체의 혈은 신체의 기가 고인 부분이며 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를 곧게 세우는 척추다. 기는 신체에 고르게 퍼져 생리나 병리현상을 조정한다. 인체 원리를 이용한 침구나 안마나 지압은 혈의 기능을 조절하여 몸의 기운을 돋우어준다.
골격이 단단하고 곧을지라도 혈과 기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직립 기계에 불과하다. 신체를 곧게 세우는 골격이 온전하더라도 혈과 기가 제 구실을 못하면 식물상태가 된다. 혈과 기가 활력이 넘쳐도 골격이 곧지 못하면 신체는 기형이 된다.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죽은 시신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육체미에 호기심을 보이지만 인체연구가들은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도 온 몸이 반응하는 인체조직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과 마음이 살아있도록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알맞은 운동을 한다. 달리기나 등산을 하고, 헬스나 에어로빅을 한다. 또는 명상도 한다. 살아있는 글을 쓰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목표는 같다. 그것은 “좋게 살아있는 글”이다. 좋게 살아있는 글, 그것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 이 때 자신에게 맞는 활법(活法)을 얻게 된다. 이런 글을 쓰겠다는 사람은 세상의 가벼운 명예나 명리를 기꺼이 거부한다.
수필을 대할 때마다 인체의 오묘한 조화를 생각한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글은 살아야 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몸이 살아있으려면 유기체여야 하고 좋은 수필이 되려면 살아있는 글이어야 한다. 사람이 글을 지어내므로 글은 그 작가를 닮고 그의 기와 분위기도 본받는다. 문장을 분석할수록, 글을 쓸수록 인체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글의 맥은 서두와 전개와 결미로서 사람의 척추다. 서두는 주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생각하는 머리다. 오장육부가 있는 몸통이 음식을 소화하고 숨을 내쉬고 배설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면 글의 전개부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체험을 펼치는 곳이다. 다리가 꼿꼿하게 서야 몸을 제대로 받치듯이 결미가 탄탄하여야 전개부 전체가 균형미와 안정감을 갖는다.
허방 글이 있다. 멋스럽게 읽히지만 무슨 내용인지 작가 자신도 모르는 글이 있다. 그런 글을 맥혈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감동과 공감의 진앙이 없는 글은 혈이 없고 다른 내용으로 빠져버린 글은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유식하게 화소를 열거하고 있지만 문력과 감흥이 적은 경우는 기가 없는 탓이다. 글을 부지런히 쓰는데도 한편의 좋은 글도 건지지 못함은 혈을 제자리에 놓지 못함이고, 눈에 띄는 발전이 없음은 맥을 잡지 못함이고, 잘 쓴 듯한데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지 못함은 기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맥혈기가 없어 죽어버린 글은 아무리 멋진 수사법으로 꾸민다 해도 여전히 죽은 글이다.
맥혈기를 갖추면 글은 살아난다. 어려운 내용인데도 쉽게 읽히는 것은 맥이 반듯하게 서 있기 때문이요, 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머리가 멍해지거나 헉하고 침이 마르면 혈이 제 위치에 자리해있기 때문이다. 글을 읽어 나갈수록 빨려 들어가는 것은 글의 기에 감흥 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좋은 글은 쉬운 문장으로 깊게 쓴 글이다. 그러므로 문장이 아니라 내용을 생각하고, 전달이 아니라 공감을 생각하고, 멋진 기교가 아니라 감수성을 중시해야 한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다짐하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에는 “사람이 글”이지만 글을 쓰고 난 후에는 “글이 사람”이 된다. 맥혈기(脈穴氣)에 따라 감동의 진폭과 인식의 두께가 정해진다. 머리 굴리기(brain-storming)와 마음 굴리기(heart-storming)로 맥혈기를 단련하면 문학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의 기능적 전수보다 글의 유기적 생명을 의식하고 “오직 살기 위하여 글을 쓴다.”는 결의를 품을 때 글의 신이 도와줄 것이고 단테를 안내한 베르길리우스처럼 우주의 맥혈기로 안내해 줄 것이다. 단 한 편의 글일지라도 “이것은 살아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4. 상상의 네 가지 질문과 효능
작가는 “기억의 심부름꾼”이라고 칠레 국민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는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상상의 우체부’라고 바꾸고 싶다. 우편배달부가 가방에 갖가지 우편물을 담고 집집마다 찾아가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작가는 글 가방에 담긴 머리핀과 CD 음악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닌 의미, 색조, 생의 한 순간, 기분까지 전해야 한다. 우편가방이라는 상상은 길을 걷다가 진달래를 만나면 잠시 쉬어가는 감수성, 하수구에 버려진 녹슨 깡통에서 전쟁의 참극을 떠올리는 회상, 신이 머물고 있는 교회나 성당을 지나치면 그곳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신과 대화하려는 영성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현현을 어떻게 강렬하고 인상 깊게 표현해 내는가이다.
수필문학의 정체를 요약하면 체화와 의미화와 형상화와 일반화이다. 체화는 나의 고백을, 의미화는 인문학적 변용을, 형상화는 이미지화를, 일반화는 공감화를 지향한다. 음악이 선율로, 미술이 색채로 표현한다면 문학은 입상진의(立像盡意)로 설명한다. 입상진의는 형상으로 뜻을 전달한다는 의미다. 말하고자 하는 모든 대상을 눈앞에 살아있는 듯 세우는 것, 이렇게 하려면 사물과의 다층화된 대면과 교감이 필요하다. 다층화된 교감이란 형식에서는 미적 구조를, 내용에서는 영적 구조를 이루어 새로운 존재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 실천적 내공은 네 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노드롭 프라이어는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을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있음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베이컨은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상상은 사물과 인간과 우주와 언어를 결합하는 힘이다.
문학은 부호와 숫자가 아니라 언어라는 기호로 관계망을 만든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서도 “살아오느라 수고했다.”는 작가적 상상을 작동시킨다. 안성수 교수는 문학적 질문은 대상, 우주 전체, 인간계로 향한다고 현대수필에 게재한 「수필 오디세이(3)」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이 필요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처한 시공에 대한 좌표적 질문이다. 상상을 도출하는 내향적, 외향적, 횡단적, 좌표적 질문이 모두 합쳐지고 그에 대한 답이 도출될 때 인문철학적 수필창작이 무리 없이 이루어진다. 아래 시를 음미하여보자.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 이성선, <미시령 노을>
이성선은 물리적인 저울이 아니라 심미적 상상으로 지구의 무게를 잰 시인이다. 과학과 달리 인문 문학은 언어로 자연을 측량하고, 상상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몽상으로 우주를 사유한다, 낙엽과 우주와의 관계망은 생상과 이미지로 직조된다. 낙엽이라는 사물이 아니라 낙엽이 지닌 의미와 이미지를 바슐라르가 말한 상상과 몽상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 상상은 다음의 네 가지 과정을 거칠 때 가능해진다.
첫째는 대상의 근원에 대한 내향적 질문이다. 이를테면 “무엇인가?”이다. 오감으로 사물을 식별하지만 본질, 그 자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물의 이데아는 사랑, 미움, 아름다움, 갈등, 죽음 등 ‘무엇’에 대한 근원이다. “새(鳥)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날개와 둥지, 부력, 계절에 따른 이동통로 등에 대한 궁금증이지만 궁극적으로 ‘자유, 고독, 유랑, 전령’이라는 개념을 떠올려야한다. 민들레와 기러기의 ‘무엇’을 좇다보면 씨앗, 꽃, 줄기, 뿌리, 열매, 날개, 고향, 무리, 겨울 외에 ‘고독, 한해살이, 인내, 귀향’ 등을 떠올린다. 도형으로 그려보면 깔때기를 거꾸로 세운 듯 질문과 답변이 심화될수록 하나의 지점에 모이는데 그 마지막 정점(頂點)은 생사(生死)와 코스모스와 카오스이다. 탄생의 근원처럼 죽음의 근원, 사랑의 근원, 고독의 근원 등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로 글을 짜다보면 ‘무엇’이라는 의미망을 이룬다. 이런 내재적인 질문을 계속할수록 글 쓰는 집중력은 최적화한다.
두 번째는 외향적 질문이다.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외부의 화소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으면서 우주로 나아간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여타 대상과 생태망을 을 이룬다. 제재를 외적으로 확장시켜 나아가면 부채 모양의 방사형이 만들어진다. 가령 촛불을 선택하면 밤낮, 빛과 어둠, 발산과 소멸, 등대와 가로등 심지어 태양까지 끌어들여 불의 상관성이 확장된다. 연못에 핀 동그랗고 붉은 수련 하나에 외향적 질문을 가하면 우주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로 형상화한다. 여린 연꽃에서 폭발하는 우주의 기운과 생태계의 생명도 감지한다.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둘러보듯이 모든 사물들은 천지개벽 시대의 우주와 접선한다.
세 번째는 인간계로 건너오는 횡단적 질문이다. “그렇다면”이라는 부사로써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묻다보면 대상과 인간이 동일한 선상에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산, 바람, 눈보라, 차의 엔진, 울음은 인간에게 뭔가”와 같이 인간과 소재 사이를 오가는 횡단적 질문은 수필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수 질문으로 시나 소설과 달리 대상과 인간의 삶을 통하게 하는 관계망을 만든다. 사물과 우주를 향한 내적, 외적투시가 가능하더라도 인간의 삶과 연결되는 통로를 찾지 못한다면 수필은 시나 소설의 모방에 그쳐버린다.
네 번째는 글을 쓰는 작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좌표적 질문이다. 대상과 우주와 인간을 결속시킬 때 작가 자신이 처한 시간적 공간적 처지와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언제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공에 대한 질문에 따라 작가는 공간애(Topophilia), 노스텔지어, 노마드 등의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개성과 아우라를 가진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작가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milium)에 예민하다. 분수를 앞에서 보는가, 뒤에서 보는가, 위에서 보는가. 작가가 목수인가, 정원사인가, 벌목공인가에 따라 나무에 부여하는 상징도 달라진다. 지방에 사는가, 도시에 사는가, 해외교포인가, 여행자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할수록 상상의 궤도는 뚜렷해진다.
작가의 상상은 물리적, 심리적, 심미적, 영적 인상을 포함한다. 무엇이, 어떻게,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라는 질문은 작가와 대상과 인간과 우주를 잇는 망을 짜는 심미적 실(絲)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노발리스는 낭만화란 “평범한 것에 고귀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운 외양을, 낯익은 것에 낯선 위엄을, 유한한 것에 무한한 외모를 부여하는 상상이다.”라고 말하면서 “세계는 낭만화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욕망은 창조이다. 상상하고 몽상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일반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된다. 그 고독한 자기애를 감내하며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때 작가적 실존이 유효하다.
다시 떠나라, 작가여
인생은 여행이다. 삶의 여행이며 혼의 여행이다. 재미작가들은 오래전에 한국을 떠나 시애틀에 정착한 이민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이전 이주는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육체적 물리적 이소(離騷)로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생존의 트레블이었다. 그것은 대양을 횡단하는 돛배처럼, 열사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고통과 시련의 과정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다시 떠나기를 청한다.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육체가 아니라 혼의 여행을 권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고통을 목격하면서도 언젠가 천국에 다다른다는 행복을 노래하였다. 그는 산 작가로서 어두운 숲을 뒤로 하고 빛나는 구원을 위한 천상으로의 여행을 한 첫번째 작가이다. 최초의 여행작가 호메로스도 맹인이었지만 평생을 유랑하면서 《오디세이》라는 지중해 역사를 썼다.
작가에게 여행은 특별하다. 몸속에 원초적인 노마드의 피가 흐르고 있어 떠나고 돌아올 때는 한권의 책이 될 만한 경험을 한다. 작가는 늘 안일한 가정, 독선적인 사회, 폭주하는 시류에 묶인 자신을 해방시키려 한다.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나는 가정 교회 국가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작가가 되려면 늘 ‘홀로됨’을 찾아야 한다. 홀로 될 수 있는 시간, 홀로 머물 수 있는 장소, 홀로 볼 수 있는 나무, 홀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즉 영혼의 독신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여행으로 이루어지는 독신은 교향곡의 서곡과 화폭에 그리는 유화의 첫 붓질과 같다. 죽음의 관 속으로 들어가야 저 너머로 갈 기회라도 얻으니까. 과거를 죽여야 다시 살아나니까. 창작의 첫 요건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日常)에서 멀어질수록 진상(眞常)을 찾기 쉽다. 갖가지 공포와 좌절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마저 안으려는 원행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재미작가들이 진정 작가적 신원을 성숙시키려면 다시 떠나기를 해야 한다고 권하고 싶다. 필자가 2009년 발간한 《길을 줍다》에 실은 <그곳에 문도(文徒)의 땅이 있다>에서 작가적 신원은 밀림과 사막 가운데 숨어있는 화원(花園)에서 자란다고 하였다. 그곳으로 찾아가는 길은 좁다. 하느님이 천국의 문은 좁다 하셨는데 문학의 문은 더욱 좁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함께 들어가기에는 힘이 든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답은 하나다. 또 다른 “나를 부르는 숲”이다. 나를 부르는 숲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떠나 그대의 숲으로 찾아들어라.
박양근 약력
현재부경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1988년 대구가톨릭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스콘신-메디슨 주립대학, 펜실베이니아대학, 워싱턴대학, 리버풀대학, 남호주대학의 객원교수, 연구교수 및 초빙교수를 겸하였다.
1993년 월간에세이에서 「첼로가 되고싶어라」로 에세이스트로로 천료, 2003년 문학예술에서 한흑구론으로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한국문인협회기관지 월간문학 편집위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부산시문화예술위원, 과학과문학포럼 부산공통대표를 역임하였고 현재 부산국제문학제집행위원장, 영남수필학회장, 부산수필문인협회장, 부경수필아카데미전임교수를 맡고 있다. 그 외본인으 지도를 받아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한 30여 명과 수필가로 등단한 1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부경수필문인협회 지도교수로이며 수필과 비평, 현대수필, 수필세계, 에세이스트, 에세이문학 등에 평론, 작가론, 작품론 등 활발한 수필평론가로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 명장도서관, 남구도서관, 해운대도서관, 부산진도서관 등에서 길 위의 인문학, 동서고전읽기, 문학창작, 퇴직공무원 자서전 집필 강사 등으로 강연과 강의를 하고 있다. 그 외 미국 호주 캐나다 인문학강연을 매년 운영하며 현재 부경대학교평생교육원, 경주동리목월문창대학전임교수, 김해수필협회지도교수, 및 부산지역 도서관들의 인문학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수필집으로는 백화화쟁(2020) 일곱번째, 성좌(2016), 손이 작은 남자(2012년) 길을 줍다(2009) 문자도(2007) 풀꽃처럼 불꽃처럼(2000) 작은 사랑이 아름답다(1997)이 있고 문학관련 저서로는 수필의 이쪽과 비평의 저쪽(2021), 현대수필비평이론(2017), 잊힌수필, 묻힌산문(2017), 부산작고문인선집(2016), 현대수필창작이론(2013) 부산현대수필작가론)(2013) 한국산문학 (2012) 사이버리즘과 수필미학(2010) 좋은 수필 창작론(2005) 미국수필 200년(2005) 등을 발간하였다
2020 김규련문학상, 2019년 수영문학상대상, 2016년 동서문학상, 2012년 부산문학상본상, 2009년 구름카페문학상, 2007년 제17회수필문학상 수상, 2005년 신곡문학대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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