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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묵상글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 내일을 준비하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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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일을 준비하라
신앙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있어서 미래를 소중하게 봅니다. 지상 삶의 마지막을 영원한 새 삶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상을 넘어 천상을 희망한다면 무방비로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지금 최선에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현명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삶 자체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교회의 삶을 마치고 천상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천상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부잣집 집사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 결국은 주인으로부터‘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비록 잔꾀를 부렸지만,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재산을 사람에게 배려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래 놓고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빛의 자녀들은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천상의 미래를 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천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고 주님 눈에 들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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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선심 팍팍 씁시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습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칭찬받는 이유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집사가 불의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집사가 영리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우선 집사가 불의하다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리했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게 처신했다는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과 책임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집사에 대한 다른 비유에서 주님 말씀하셨듯이,
정해진 양식을 제때 다른 종들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주인의 종들이 건강하게 주인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란 하느님이시고,
정해진 양식이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책임과 함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집사는 책임과 자유를 주인의 뜻에 맞게 쓰지만
불의한 집사는 책임과 자유를 자기 뜻대로 씁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기에
의로운 집사는 주님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책임과 자유를 선용하는 데 비해
불의한 집사는 주님 사랑도 악용하고 책임과 자유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씁니다
아무튼, 오늘 비유의 집사는 처음에는 불의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 그러면 자기가 벌 받을 거라는 것을 눈치챘고,
그래서 이제라도 주님 뜻에 맞게 주님 사랑을 나누기로 했고,
그래서 주님도 그런 집사를 칭찬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도 그러라는 말씀이겠지요.
우리도 지금까지 불의한 집사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집사라는 신분과 책임을 망각하였고,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자유를 내 욕망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꽤 먹은 이제부터라도 내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데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선심 쓴다고 하는데
우리는 주님 것을 가지고 선심 팍팍 쓰면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주님 사랑을 가지고 선심 팍팍 씁시다!
사랑 나눔에 인색했던 우리 이제 주님 사랑으로 선심 팍팍 쓰는 회개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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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하오나, 주님!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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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함’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습니다.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국가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은 말 그대로 ‘각자도생’해야 합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지낼 만 합니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밥은 먹고 지내는지? 신문사 운영은 잘 되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사제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교구청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살 겁니다.” 주교님께서도 “조 신부는 잘 지낼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4년 동안 그럭저럭 잘 지낸 것 같습니다. 팬데믹 중에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르클린 교구의 한인성당 사제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도타고, 캠핑도 다녔습니다. 교우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언제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제가 신문사에만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퀸즈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도와주었습니다. ME 대표신부와 꾸르실료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분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이면 ‘복음묵상’을 하였습니다. 묵상 내용을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감사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묵상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도, 휴가 중에도 복음묵상은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3시간은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였고, 걸으면서 강의를 들었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제가 각자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의 도움, 복음묵상, 규칙적인 운동에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내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전해 주신 기쁜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 짧지만 좋은 글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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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의미는 아주 단순합니다.
앞뒤 가리지 말고 선을 베푸십시오. 자선을 베풀고, 나눠주고 탕감해 주십시오. 지금 위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곳 하느님 집 문간에 서서 주님과 셈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과 셈을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100년도 못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모습은 그와 반대입니다. 꼭 영원히 살 것처럼 우쭐대며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장 일주일 뒤 우리가 하느님 나라 문 앞에 서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날 전부를 셈해야 한다고 한다면 지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집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구마구 탕감해주고 자비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도 하느님 집 문간에서 탕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은 셈이 빠릅니다. 우리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 셈은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빨라질 때입니다. 하느님 집에 들어갈 준비를 서두를 때입니다.
‘나는 아직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비를 베풀고 탕감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하늘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보호와 치유의 성모님
8월에 베트남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 순례 중 처음 만난 성모님은 ‘짜끼우’에서 만난
‘보호의 성모님’이었습니다.
두 번째 만난 성모님은
‘라방’에서 만난
‘치유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지 순례를 하며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보호와 치유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보호는 다른 말로 치유라고 쓸 수 있습니다.
치유를 다른 말로 보호라고 쓸 수 있습니다.
보호함으로 치유가 이루어지고 치유 함으로 보호함이 이루어집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치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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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들이 다른 성당에 비해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 미사에는 100명 이상의 아이가 나와서 얼마나 예쁘게 미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이들 눈에는 제가 나이 든 아저씨로만 보일 텐데도 저를 거부하지 않고 먼저 다가옵니다. 멀리서 저를 보면 뛰어와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제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어색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 손이 자기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손을 잡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이렇게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잡은 적이 있었을까?’ 아이의 손을 잡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없습니다. 만약 다 큰 성인의 손을 잡고 걷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의 손이면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이고, 여자의 손을 잡고 있으면 역시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도 불편해지고, 저 역시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너무나 편합니다.
아이의 솔직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있기에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은 퇴색해지고 서로가 편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확 와닿습니다.
유치원생인 아이 엄마가 제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우리 아이가 신부님 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또 그 아이가 너무나 예쁘게 보였습니다. 문득 하느님도 “하느님, 보고 싶었어요. 하느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라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으실지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 좋아하십니다. 특히 솔직하고 진실되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면 아빠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다가오면 기뻐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없앴을 뿐만 아니라, 들통나서 쫓겨난 뒤에도 생계를 보장받으려고 주인의 돈을 씁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못된 집사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왜냐하면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바로 미래에 지향을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받아주시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오늘을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연결할 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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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굳세게 밀고 나가라(로잘린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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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으로 살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 있음이 축복이자 은총입니다.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살라고, 사랑하라고, 회개하라고, 보속하라고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자 더욱 우리 삶을 추스르며 깨어 살아야 하는 달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문득 떠오른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깨어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위한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의 미래에 대처한 민첩성을 배우라는 것이지 그의 삶을 배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에게 주목할 것은 그가 “어떻게”대처했느냐 이지 그가 “무엇을”했느냐가 아닙니다.
불의한 집사는 미구 닥칠 위험에 대비하여 참으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결행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임의대로 과감히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 심중을 전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속에 살지만 빛의 자녀들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빛의 자녀들 역시 분발하여 미래에 대처하여 약은 불의한 집사와는 달리 하루하루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위기에 민첩하게 대처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하겠고 그의 태만하고 무책임했던 과거의 삶은 철저히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최고, 최상의 미래에 대한 대책이겠습니까? 하루하루 한결같이 정의와 평화의 삶, 사랑과 지혜의 삶, 찬미와 감사의 삶, 회개와 보속의 삶, 맡은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삶이겠습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삶입니다. 말그대로 성인다운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배울 삶의 롤모델은 약은 집사가 아니라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 제1독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위대한 성인 대 레오 교황 학자입니다. 여기에 저는 또 한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940년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위대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와 평생 영적 교류를 갖었던 기도의 사람,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여사입니다. 의사였던 그녀의 임종을 앞둔 시기에 대한 묘사입니다.
‘건강이 점점 약해지던 그녀는 기력이 없어 더 이상 환자들을 진료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1950년대 중반에 의료행위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로도 기도하고, 뜨개질을 하고, 편지를 쓰고, 책을 읽으며 활동하던 슈파이어는 죽음을 앞두고 “죽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앞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1967년 9월17일,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날은 빙엔의 힐데가르트 축일이었다. 슈파이어의 전 생애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명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스며드는 삶이었다.’(기도의 세계, 569쪽)
복음의 약은 집사와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 충실하고 슬기로운 슈피이어 여사입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녀다운 삶인지요!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겸손과 그 사명에 전력투구하는 삶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이와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복음 선포를 자랑으로 여기며, 명예로 여기며 시종여일, 한결같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한 바오로의 한평생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한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섭리와 사랑의 하느님은 그 시대에 맞게 당신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오늘 기념하는 대 레오 교황학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정말 위대한 교황입니다. 재위 21년 동안의 업적은 정말 불가사의, 놀랍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라고 평합니다. 제45대 교황으로 재위 21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 교회를 넘어서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로 거론되며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입니다.
교황님 재위 기간은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과 더불어 서로마 제국이 위기에 봉착한 시대였습니다. 교황은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용감하고 지혜롭게 이들로부터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권위와 위엄을 로마시민들에게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사자라는 레오 이름 뜻대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교황이었으며, 교황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요약됩니다.
내우외환,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가지 이단 사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서 황제 역할까지 했던 당시 서방 유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교황은 교회학자라는 칭호을 받을 정도로 173편의 서간들과 100여편의 강론집을 남겼습니다. 교부시대의 마지막 교황으로서 그의 문체는 레오 문체라고 불릴 정도로 수세기 동안 교회 문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레오 1세와 같은 예술같은 서간을 쓰거나 강론한 교황은 역시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나타나기 전까지 150년 동안 없었습니다.
안팎으로 백척간두에 처해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뛰어난 무수한 서간과 강론을 남길 수 있었던지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훌륭히 수행해온 레오 대교황은 교회를 넘어 세속의 황제 역할 까지 하며 로마를 구하고 유럽을 수호했던 참으로 위대한 교황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당시 과거 로마제국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던 부득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르나크의 말과 같이 이제 로마교회는 종교적 의미에서 서로마제국이었고, 로마주교는 사실상의 황제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런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때 오해도 많이 해소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로부터 배울 바는 미래에 신속히 대처하여 유비무환의 자세로 맡은 바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방금 예로들었던 바오로 사도, 위대한 대교황 레오1세, 그리고 간략히 소개했던 슈파이어 여사처럼 말입니다.
11월 위령성월, 죽음을 묵상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크던 작던 깨어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지혜, 찬미와 감사, 회개와 보속, 그리고 맡은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연장되는 하루하루 선물로 주어지는 날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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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까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가지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가지려 하는 것보다
나누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나누려 할 때에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오르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오르려 하는 것보다
낮아지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낮아지려 할 때에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섬김 받으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섬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섬기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섬기려 할 때에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내치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내치려 하는 것보다
품으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품으려 할 때에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죽이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죽이려 하는 것보다
살리려는 사람이
어떻게든
더 살리려 할 때에
세상은 더 살맛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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