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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חַיֵּי שָׂרָה 하예이 사라" : 11월 둘째 주 in 5784
창23:1-25:18(To), 왕상1:1-31(Haft), 마1:1-17,고전15:50-57(Brit), 요4:1-6:71(신약)
1부 예배 유니스 목사님
< 사랑이 살게 하게 >
하예이 사라가 얼마나 놀라운 포션인지 새롭게 알게된 것 같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얻고자 하시는 칼라들의 대표 이름이 사라이고, 그래서 사라의 에너지와 힘이 신부가 준비되는데 가장 필요한 에너지였다. 그 말씀에 대해서 더 깊이 보도록 하자.
창23
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오늘 말씀 제목은 사랑이 살게하네라는 제목을 가지고 하예이 사라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다.
창23:1에서 쉰과 눈이 계속 반복된다. 사라, 샤나, 에쓰림, 쉐네이. 쉰은 불을 상징한다. 펄펄 끓고, 죽은 자도 일어나게 하고, 잠자는 자를 깨어나게 하는 성령의 불,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첫 단어가 참 놀라운 단어이다. 바이흐유, 사라의 생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야라는 동사가 아니라 이흐유라는 동사를 쓴다. was, 하야라는 동사가 있는데, 여기에 이흐유, 미래형에 바브를 붙여서 과거를 만들었다. 문법적으로는 과거인데, 의미로는 미래란 것이다. 이 사라의 생명에 대해서 첫 번째 나누는 것은 사라는 집착했다는 것이다.
1. 사라는 집착했다
집착이 나쁜 단어 같지만, 우리 교회가 욕을 그렇게 먹어도 포기할 수 없는 단어인 다바크이다. 사라는 생명, 미래에 집착했다. 그래서 굳이 주님은 과거를 쓰실 때, 미래형이 바브를 붙여서 쓰신다. 바브는 우리를 다 연결시키시는 주님, 시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이다. 미래에 바브가 붙으면 과거가 되고, 과거에 바브가 붙으면 미래가 되는,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마크펠라, 이중 구조, 지금 시간을 살지만 다른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하시는 주님이 사라에서 결합했을 때, 사라의 생명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사라의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알 수 있다. 127살이라고 안 하고, 100년, 20년, 7년이라고 끊어서 이야기하면서 사라의 생명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라가 생명을 낳았다는 것이다. 사라와 하임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시켜서 한 단어로 만든 쓰미쿳 문법 용법이 하예이 사라이다. 사라로부터 생명들이 나왔다. 사라의 삶은 평범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기 가족을 위해서, 먹고 살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생명과 제자를 낳았다. 쿠미 칼라, 하나님이 이 주간에 다시 한번 제자삼는 것에 대해서 도전하시는 것 같다. 그동안에는 저 LTG 좀 해달라는 사람이 몇달 동안 없었는데, 이번 주간에 LTG를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해보겠다는 사라의 생명들이 나타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라의 집착과는 다른 내가 살기 위한 집착을 한다. 이번주 목요일날 도전해봤다. 자기가 제일 집착하는 것들, 내가 소유하면, 내게 붙여버리면 내가 되는 것들을 되뇌어보라고 했더니, 조윤희 집사님은 돈이 최고라고 하면서, 돈이 나입니다를 계속 되뇌었다고 한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는데, 똥 사건이 많은데, 똥이 나입니다. 내가 그토록 거부하고 싶고, 떼어버리고 싶은 것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면서,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묵상해봐야 한다.
사람의 인정, 인정이 나입니다. 이렇게 되뇌어보라. 집착이 나입니다. 그토록 얻고 싶은 권력, 힘이 나입니다. 그때 느껴지는 여러분의 감정이 어떤가? 이것을 수치스러워하는지, 너무나 열정적으로 원하는지 말이다. 그런데 사라는 결코 집착의 노예로 살지 않았다. 결코 거지로 살지 않고, 도둑으로 살지 않고, 창녀로 살지 않았다.
사라가 다바크했던 유일한 것은 생명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사라를 열국의 어미다. 너가 낳고, 무엇이 나입니다라고 해야할 유일한 것은 바로 이 자리에 미래가 들어가야한다는 것이다. 미래가 나입니다. 아들이 나입니다. 생명이 나입니다. 이런 단어를 집착했던 여인이 바로 사라였다.
שׁרה 사라
여기서 놀라운 단어가 많이 나왔다. 이스라엘, 쉬르(노래), 싸르(지도자, 리더)도 나왔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리더가 된다는 것이다. 사라가 되는 것이다. 리더가 되는 것은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에 집착하는 것이다. 미래를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리더를 붙들고 의지한다. 제가 소백산에 갔을 때 길을 잃어서 한번 길 없는 산에서 목사님과 내려올 때 참 고생한 기억이 있다. 베냐민 지파의 달로 옮겨가면서, 베냐민 지파를 대표하는 문자가 싸멕이다. 붙들다, 집착하다는 뜻이 있다. 산에서 내려올 때 뭔가를 붙들어야 한다. 특히 길 없는 산을 내려와야 하는데, 나뭇가지가 시원찮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것은 위험하다. 힘 없는 것을 붙들었다가는 큰일난다. 우리는 뭔가를 붙들고 의지하고 싸멕하면서 살기 원한다. 집착하면서 살아야 내가 살 것 같다
엊그제 목사님께서 샤밭 때 골룸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골미, 이것이 히브리어, 시편 말씀에서 나왔는데,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라고 하는 원초적인 우리의 본능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골룸 이야기를 하셨다.
골룸이 굉장히 귀엽고 친근하지 않은가? 우리 안에 형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늙은 왕에 의해서 형성된 우리 에고의 전형적 이야기이다. 재미난 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이 골룸의 이름이 꿀꺽이라고 번역되었다. 목에서 꿀꺽 삼키는 의성어를 빗대어서 말이다. 이게 히브리어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것이지만, 내가 원하는 돈과 사랑을 꿀꺽 삼켜버리고 먹어버리고 싶은 이름인 것이다. 원래의 이름은 스미아골이었다. 이 두 인격에 안에서 계속 싸운다. 스미아골의 뜻은 파고들다, 기어들어가다란 뜻이다. 우리의 에고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태도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나만의 세상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집착해서 파고들어가는 것이 골룸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자가 스미아골이었을 때 친구와 낚시하는 도중에 친구가 반지를 발견했다. 그러자 이 반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스미아골이 자기 친구를 목졸라 죽인다. 그리고 그 반지를 자기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가지고 간다. 이 반지는 내 생일이야. 이 반지는 생일 선물로 하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고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한다. 에고의 전형적인 자기 변명과 합리화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반지의 힘을 악용해서 말씀을 피우다가 마을에서 추방당하게되고, 점점 방황하게 된다. 반인족이었던, 사람과 비슷했던 스미아골이 저렇게 햇빛을 느끼면 고통을 받는 몸으로 변질되어서 빛을 싫어하게 된다.
요한복음에 빛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우리는 거부했다고 한다. 우리는 골룸이 되어서 점점 빛을 고통스러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골룸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땅의 심장을 찾겠다고 산맥의 지하로 무의미한 여행을 떠나지만, 반지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반지의 힘 때문에 노예가 되어서 육체와 마음이 뒤틀려서 타락해버린다. 골룸이 하는 여러 어록 중 가장 골룸의 말에 붙든 단어가 있다. My precious. 내가 정말 소중히하고 집착하는 것이 반지인데, 사라의 생명과 골룸의 생명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라는 my precious를 미래에 두고 있다. 그러나 골룸은 당장 이 반지가 내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대조적인 것이다. 아라가 엊그제 대박을 쳤는데, 너무 아라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생생하게 보여진다. 용희가 항상 그런 말을 한다고 한다. 여보, 내가 다 할게. 괜찮다. 기다려. 걱정하지. 누워서 이야기를 계속하면 아라는 당장 하라고, 지금 하란 말이야 하면서 돌고래 소리를 낸다고 한다. 얼마나 지금 당장 하기를 원하는 골룸의 모습을 그들이 전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지 모른다
ויהיו 바이흐유
사라는 미래에 집착했다. 나의 생명, 내 삶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그래서 미래를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미래는 상상한다.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미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 과거를 후회한다. 그리고 미래는 상상하지 않고 두려워한다.
우리의 아보트, 아브라함과 사라는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도 미래를 상상하지 않고 보험들기 위해 다닌다. 주님과 보험 회사로 믿는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창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마크펠라는 double이다. 이 땅에 살지만 다른 세상을 사는, 그 미래의 세상, 올람 하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골룸처럼 반지에 집착해서 지금 당장을 원한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의 롯처럼 미래를 다 팔아버리게 된다. 지금 당장 하나의 세상만을 사는 우리들,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받으려고. 골룸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골룸처럼 그 반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사실 더 내면의 우리의 존재는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데 만족을 못한다. 온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싶다. 그래서 술과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 사랑받는 것 같지 않은가? 알콜 중독이 왜 위험하냐면,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것을 포기할 때 걸리는 것이다. 사람에게 난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구나. 그래서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된다. 그 사랑받는 느낌을 혼자 일으키는 것이다.
일본에 은둔형 골룸의 다른 이름이 히키코모리이다. 사회적 문제가 심각한데, 그 안에 박혀서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빛으로 나오기 거부하는 골룸의 현대형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집안에서 뭘 할까? 인간은 사랑받는 느낌을 혼자 일으켜서라도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혼자 일으키는 것이다. 게임을 한다던지, 뭔가 맞춘다던지, 혼자라도 사랑받고 인정받는 느낌을 일으킨다.
아까 골룸 사진을 다시 한번 보자. 우리가 왜 이렇게 골룸이 되었느냐? 골룸의 눈을 보면 정말 크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눈, 너무 무서워서 미래를 살지 못하고, 그 생명을 미래에 두지 못하고, 취약한 알 수 없는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
창23: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아브라함은 그냥 준다고 하는데, 꼭 돈을 주고 산다. 너의 미래를 보장해주겠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내가 댓가를 지불해서 사겠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충분한 댓가 지불, 내가 나의 댓가, 나의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그것을 얻겠습니다. 그 다음 세상을 얻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이라고 다 같은 세상이 아니다. 여기에 몇십명이 있어도 다 각자의 세상으로 이 땅에 와 있다. 그러나 아보트들의 위대함은 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여러분과 공유하는지에 대해서 판단되어진다.
고 아버지, 유 어머니를 보면서 너무 많은 감탄을 한다. 유 어머니의 여리여리한 외모 안에 있는 다양한 세상을 체험하면서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2018년에 어머니 유방암이 재발하셔서 3개월 정도 한국에서 방사선 치료를 하실 때가 있었다. 제가 그때는 거의 초보 사모여서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끌고 무조건 분당으로 갔다. 거의 매일 갔던 것 같다. 어느 누가 와도, 어느 세상이 자기의 세상에 와도 그것을 한번도 거부해본적이 없는 어머니의 사라같은 큰 생명을 보면서 너무 큰 도전과 감동을 받은 때가 있었다.
우리가 단독자로 하나의 박스 안에 갇히면 단 하나의 세상밖에 살 수 없는데, 그리로 기어들어가는 스미골, 골룸처럼 살 수 밖에 없지만, 내가 사라가 된다면, 오늘 사라의 생명을 받는다면, 여러 세상, 마크펠라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두려운 골룸이 하는 전형적 태도가 있다. 골룸은 엄청난 살기를 보인다. 그런데 이 살기가 다른 상대에게 보여주는 살기도 있지만, 자기를 그렇게 공격한다. 여러분들도 자기 공격을 많이 하신다. 가해한다. 이 살기는 왜 생길까? 인카운터 때 다 배웠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많이 노출되었을 때, 자기 공격성 살기가 생긴다. 대표적인 상황들이 부모님이 어렸을 때 싸울 때이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생명이라는 본성 자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원한다. 그런데 부모님이 지금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 있으면, 아기는 본능적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주라고, 저 상황을 빨리 바꾸라고 자기를 공격한다. 그런데 상황을 바꿀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제발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마시라. 아이들의 공격 살기의 레벨을 엄청 높이는 행동이다.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시지 않는가? 상상력, 창의력도 풍부한 아이로 자라기 원하는가? 부모가 사랑하면, 에하드 안에서 자라난 어린 아이들은 그냥 창의력이 생긴다. 그 아이는 부모를 힘들게 해주는 상황을 바꾸고 싶지만,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그것도 못해 너 때문이라도 스스로를 공격하는 자기 공격성 살기가 생긴다
코끼리를 어렸을 때 묶어놓으면 움직이려고 하면 끈 때문에 아프다. 그런데 다 큰 코끼리의 끈을 풀어줘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의 아픔의 기억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갇히고 스스로를 공격하는 살기로 들어가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하나되어서 사는게 아니라, 세상과 자꾸 싸우려고 한다. 항상 전시 상태에 있다. 항상 전시 상태에 있을 때는 어떠한 상상력도 풀어져 나올 수 없다. 항상 뭔가 죽을 수도 있는 상태라고 할 때, 땅이 흔들리는 지진 상태에서 어떻게 상상하고 창의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갇힌 상태, 아픈 상태, 자기 공격의 살기를 하나님이 가장 힘들어하고 슬퍼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부제는 제자는 상상한다이다. 제자는 상상하는 자이다. 마음껏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세상, 아버지의 세계는 참 아름다운데, 세상은 그냥 세상인데, 왜 이렇게 나는 세상이 힘들고 세상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지? 괜찮다는 말이 안 나오지?
우리는 생명, 삶이 미래에 있다는 것을 꿈꿀 수 없는 상태에 들어와버렸다. 어제 조장 모임에서 목사님이 의인들이 받는 세상은 최소한 2-400개를 주님이 준비하고 계신다. 지금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마크펠라의 세상으로 들어가면, 생명에 집착한다면 주님이 준비하신 몇백개의 세상을 누릴 수 있는 삶이 온다. 먼저 가신 아보트들, 사라의 후예들, 모두 그런 세상을 살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 세상만이 세상이 아니란다. 우리에게 몇백개의 진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와 동역하고 있을 줄 믿는다. 이것은 골룸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다. 골룸은 아버지가 없다. 골룸이 공동체로 사는거 봤는가? 단독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사라는 생명을 낳았다.
창21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상상하며 웃었다. 인류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보았을 때 100살이었다. 사라가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고 한다. 나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한다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온 인류에게 웃음을 주기 원했다
앤써니 디베네뎃이라는 뇌 과학자가 이런 말씀을 했다. 스트레스를 잘 받는 사람이 있는데, 잘 회복하는 사람도 있다. 그 특징을 연구했더니, 사람에게는 유쾌지능이 있는데, 그것이 타인에 비해 높은 사람이 회복탄력성이 좋다고 한다. 영어로는 "Playful interlligence", 어떤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키울 수 있냐고 했더니, 첫째는 상상하라. 둘째는 사람들과 어울리라. 셋째는 웃어라. 넷째는 즉흥적으로 뭔가를 해봐라. 다섯째는 경탄하라. 삶에 대해서 경이감을 느끼라고 되어있다. 한번 활짝 웃어보라고 한다.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다. 우리가 그것보다 뭐가 더 필요할까? 시간이 중첩되고 다음 세상이 함께한다는 이야기는 과거-현재-미래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었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보면 지금도, 미래에도 있을 사건이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한다면, 십자가에 집착한다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서 인류에게 웃음과 유쾌함을 주시고, 이쯔학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셨고,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의 씨를 통해서 대적의 문을 취하리라. 심각한 영적 전쟁을 통해서 대적의 문을 취하는게 아니다. AI 시대에 가장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 유형이 잘 노는 사람이다. 이제 열심히 공부하고, 잘 공부하는건 AI가 더 잘한다. 이제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playful intelligence를 키우는 이삭이 되기 원한다. 사라가 가져오기 원했던 삶은 미래와 아들, 메시아에 있었다
미래를 상상하라. 첫 번째로 과학자가 이야기했듯이 상상해야 하는데,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이 뭘까? 우리는 모른다. 빛에 속한 것은 하여튼 모른다. 어둠에 속한 것을 이야기해보면 알 수 있다. 골룸, 우리가 상상한 상상이다. 골룸이 잃어버린 반지를 얻게 되었을 때 이 상상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반지를 찾아 헤메였다. 그리고 몇번 찾은 다음에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에고는 절대로 빼앗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 너가 죽어야 한다, 주는 사랑, 이런 이야기를 10년 동안 해왔는데, 제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왜 우리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고, 더 이상 아버지를 찾아가기 싫냐면, 너가 죽어야한다는 것을 굉장히 굴욕적으로 느낀다. 지라는 소리인 줄 안다. 목사님이 나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한다는 감정을 느낀다. 하나님이 너가 죽어라고 하시는 것은, 진짜 강자가 되라는 말이다. 진짜 강한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정말 힘든 것이다. 지식, 머리로 가르치는 것이 너무 힘들다.
여러분을 가르치다보니, 빨간 에고를 파랑 에고로 바꿔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쁜 사람에게 훌륭한 사람되게 하는 것이다. 나이스한 놈으로 되게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놈을 죽여야 하는데, 우리는 샤나, 변혁을 나쁜 놈에서 좋은 놈으로, 약자에서 강자로 바뀌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제가 이번주에 한 제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편이 자기를 무시하는게 너무 싫고, 남편이 그런식으로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는게 너무 싫다고해서 제가 딸에게 이야기했다. 너는 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셨는데, 왜 너는 남편에게 모욕을 당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니? 왜 우리는 욕을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할까? 왜 우리는 욕을 먹으면 굴욕감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기어들어가는 골룸, 빛을 싫어하게 된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한 삶을 사는 여자들이 있다. 사라와 사라의 생명을 계승한 리브가, 여러분들이 희한한 삶, 기꺼이 져주는 삶으로 들어가겠다, 이중구조의 희한한 세상을 가져오겠다. 어떻게 하면 져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너가 살아난다면, 그런 사랑을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리브가라고 한다
רקב 리브카 <-> קבר 케베르 : 무덤
리브가는 케베르이다. 내가 죽겠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이 죽음, 무덤이 가득한 곳이 이스라엘에 한 군데 있다. 고 목사님이 상상하시는 것 중 하나가, 마사다에서 인카운터를 하는 상상을 하셨다. 그 상상에 집착해서 그것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마사다는 왜 이렇게 기름부으심이 강할까?
마사다는 피, 죽음, 무덤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스라엘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그때 로마군과 대항하다가 더 이상 대치할 공간이 없어서 유대인들이 마사다로 도망와서 최후 항쟁을 벌인다. 그때 마사다라는 천연적 요새가 있는 것이다. 깍아지른 절벽이다. 그나마 서쪽이 완만해서 거기로 로마군이 쳐들어와서 산성을 쌓기 시작한다. 치사한 로마군들이 같은 유대 노예들로 이것을 쌓아간다. 이스라엘군이 쌓아올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저게 완성되면 우리가 죽는데, 저들이 자기와 같은 형제들, 아흐, 생명인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들을 쏴야할까, 말아야 할까? 쏘면 저 사람이 죽고, 안 쏘면 내가 죽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저 사람, 나의 생명을 쏘아서 내가 살아남게 되었다면 그 삶은 진짜 삶일까? 유대인 600명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600명이 서로를 죽이고 자결하는 일이 있던 곳에, 이 골룸과도 비슷한 한 사람이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마사다에 골룸의 상상을 했던 한 인물이 이런 미래를 쌓는다
가시면 절벽에 이런 왕궁이 있다. 바로 헤롯이라는 골룸이 그 마사다에, 그 물이 없는 곳에 사우나를 짓는다. 왕궁과 초호화 사우나이다. 우리가 누리고 싶을 때 어디 가는가? 찜질방 가지 않는가? 헤롯이 상상한 것은 이것이었다. 기괴한 암석 위에 뜨끈뜨끈한 온돌 사우나를 설치한다. 한국이 온돌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헤롯이 상상해서 발명을 했다. 헤롯은 굉장히 두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자기가 죽을까봐 두려워했다. 헤롯은 에돔 사람이었다. 에돔이 가까웠기에, 위험에 처하면 도망와서 마사다에 숨겠다고 하면서 두려움에 떤 골룸이 상상해서 지었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헤롯, 골룸, 우리가 상상하는 상상은 이 정도인 것이다. 안 두려운 것이 없다. 여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결혼 직전이다. 결혼하면 너무 두렵다. 새롭고 낯선 사람과의 삶, 시집살이가 두렵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것도 두렵다. 돈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두렵다. 돈이 없어도 두렵다. 정말 이 빨간놈, 파란놈, 이 놈이 죽여야 하는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 그러나 순순히 죽지 않는다. 골룸이 끝까지 죽지 않는다. 그 두려움이 와도 아니라고 하면서 고집을 피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죽기 싫어할까? 왜 이렇게 인정하기 싫어할까? 인카운터 때 배웠듯이, 인정하면 그 놈이 죽는다. 왜냐하면 그 놈이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라고 하면 죽는다. 그래서 스미아골과 골룸의 두 가지 인격을 보이다가, 프로도가 골룸보고 나가라고 소리쳤을 때 골룸의 인격이 사라진 때가 있었다. 그때 자유를 얻었다고 뛰는 명장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두려움이 많다고 인정하면 골룸이 죽는다. 우리 에고가 죽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인정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 두렵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쎈척하기 좋아한다. 행복한 포장지로 감춘다. 끊임없이 아픔으로, 수치로 들어가야하는데, 십자가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헤롯처럼 이런 상상을 하면서 우리를 감추고 그 두려움을 감춘다.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하나님, 참 두려운 것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이렇게 고백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해보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골룸이 부르는 노래, 우리가 인정할 때 그 골룸의 인격이 떠나갈 줄 믿는다.
== 하나님 참 두려운 것이 많습니다 ==
골룸이 노래했는데, 우리가 골룸이 아닌 노래가 여기에 있었다. 시편에서 골미라는 단어 뒤에 이렇게 이야기된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가 골룸이지만, 그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내가 너의 장기를 샀다고 되어있다. 내가 핏값을 지불하고 너를 샀다. 골룸에게 희망이 생겼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를 아빠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를 아들삼아 주셨다.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엊그제 노아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지지 않는 남편을 보는 것이 희준이 보는 것보다 힘들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변화시키려고 한적이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남편을 바꾸고자 할까? 사라는 아브라함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외무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외부탓을 할까? 아라는 용희가 바뀌어야만, 자기 삶이 온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명에, 미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금 당장 남편이 바뀌기 원하고 있다. 그럴 때 아라는 용희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용희에 대해서 여러분이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 있는가?
상상할 때 필요한 것을 태어남의 지식이라고 한다. 여러분을 변명할 때, 나는 이렇다고 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제발 토라의 말씀을 이용해서 우리의 골룸이 커지지 않기 원한다. 용희는 갓 지파인데, 갓 지파는 자기 질서를 세우는데 아주 탁월하다. 뭔가 세워놓는 것을 잘한다. 우리 형제는 다 알다시피 고아로 자랐다. 너무나 힘든 세상을 살았다. 그런데, 이 세상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 나에게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있는가? 없다. 맨정신으로 살면 되는가? 안된다. 그래서 잔다. 그 질서를 세워놨다. 그런데 아라가 자지 말라고 하는게 통하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자기는 자는 남편을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물어뜯고 자지 못하게하고, 어이없어서 미친년이 되어버린다. 그 자는 남편을 몇번이고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면서 잠이 든다. 갓 지파는 한번 세워놓은 질서를 바꾸지 않는다. 이것이 갓 지파의 능력이다. 여기에 대해서 상상해보자. 용희라는 영혼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제때 잘 수 있겠는가? 그런 상상을 해줄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용희가 세워놓은 갓 지파의 질서를 다시 새롭게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땜빵하는 회개가 아니라, 완전한 질서를 바꾸게 하는 turning을 할 수 있는, 교회를 위해서 질서를 세워주고, 우주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질서를 세워주는 놀라운 갓 지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상을 하는 자를 사라의 생명들이라고 한다
타인을 온전케하는 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내 한 몸, 일신의 영달에 연연해하지 않고, 모든 변화/혁신을 이루는 것이 상상력이다. 잠자는 용희 안에 신이 들어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 모든 환경 가운데 하나님이 용희를 위해서, 용희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하는 그런 상상, 그런 잠재력을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의 출현이 바로 용희를 구원할 수 있는 사라의 강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 신을 꺼내주는 힘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골룸같이 사는 우리의 상상은, 아라가 아기 재워놓고 남편이랑 오붓한 시간 갖는 이런 상상밖에 못한다. 저 처럼 노란 조명 아래에서, 남편과 생선살 서로에게 얹어주는 상상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상이다. 그러나 상상이란 인류의 아픔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신성을 가지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갓 지파의 데스티니대로 살 수 없는 아픔을 느껴주고, 그것을 꺼내어줄 수 있는 것이 상상이다. 이것이 사라가 했던 100의 상상, 엄마의 상상이었다. 20의 상상이었다. 아픔을 느껴주겠다. 그리고 7, 끊임없이 변화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 사라가 했던 변혁이었다
우리는 똑같은 삶을 계속 반복한다. 옛날에 아버지들이 술을 드시면, 맨날 똑같은 말을 하셨다. 아버지가 5살 때부터 집을 나와서 안 해봤던 일이 없다는 것이 같은 레파토리였다. 최 장로님에게 그것이 사라진 이유는 유다의 생명을 꺼내주는 눈이 하나둘씩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방식, 짓,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것을 두려움의 영, 중독, 매임, 묶임의 영이라고 한다. 상상하는 것이라곤 남편의 목을 졸라서라도 지금 일어나서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자. 판단, 정죄, 헤어지고, 분리, 파괴하는 상상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이다.
골룸은 머리가 없다. 왜? 한 가지만 먹었다고 한다. 이토록 많은 아버지의 세상 안에 맛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한 가지 물고기만 먹고, 한 가지 세상만 살다가 탈모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하예이 사라, 7의 빛으로 계속 변혁하고 상승하는 삶, 놀라운 여러가지 삶을 살 수 있는 삶, 이렇게 우리를 100의 삶까지 끌어올려주는 힘을 베냐민의 힘이라고 한다.
키슬레브월이 이제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베냐민은 에프라임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균형잡힌 데스티니가 있다면, 므낫세는 그것을 다 모으고 결합시키는 에너지가 있는 지파이다. 그렇다면 모두 다 사랑해서 모았다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미래를 무엇을 위해 집착하며 나아갈 것인가를 제시해주는 사람을 베냐민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냐민은 상상하게 되어있다. 한번도 가지 않은 비전을 향해서 가야하기에, 베냐민에게 가장 발달한 것이 상상이다
우리 교회는 한 사람의 베냐민이 상상한 것의 열매이다. 한 사람이 이 한국 땅의 아픔, 비전이 없는 우리의 아픔을 느껴주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 아들, 제 안에 있는 신성을 꺼내주는 한 사람이 출현했을 때, 한 마리의 늑대가 출현했을 때 그분이 하신 상상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 교회이다. 이 베냐민들은 비전을 추구하고 상상하는데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것도 위험하게 만들어서 도전하는 삶을 베냐민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이, 용기라는 뜻, 베냐민이 가진 상상력이라는 히브리어가 뭔지 아는가?
אמץ 아마쯔 : 엄마의 의
강도가 들어와서 자식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이 자식을 죽일텐데, 너가 대신 죽을래, 너의 아들이 죽을래? 하면 여기 있는 부모님들은 100이면 100, 자기가 대신 죽는다고 한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은 사랑이 나온다. 엄마의 의, 이것이 사라가 가진 100의 충만이었다
지금 인류가 일론 머스크의 상상으로 AI가 개발되고, 로봇이 개발되지만, 이 단독자가 어떻게 600만불의 사나이가 될까라는 상상밖에 못한다. 신체 증강이 되어서 능력있는 단독자가 될까라는 상상밖에 못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의 상상력은 놀랍게도 דמיון 드미온이다. 닮아가는 것이 히브리어로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용희가 신을 닮아갈 수 있다.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
내가 아버지와 같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수치이다. 수치는 잘못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 신과 같지 않구나. 죽음을 주시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없구나. 그러나 나는 그분과 같이 되겠다고 용기를 내는 것을 미래에 집착한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상상해야겠는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상상력, 그분이 모리아산에서 했던 상상력이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주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친구라고 했다. 그 상상이 무엇이었는가? 자식을 번제로 바치는, 각을 뜨는, 십자가형에 취하는 상상을 그 친구들은 했던 것이다. 우리는 신처럼 내가 증강되기 원하는데, 이놈의 신은 와서 죽어버렸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한 과학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 인간은 갑각류와 비슷한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갑각류는 겉이 딱딱하다. 꽃게, 가재, 이런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갑각류가 딱딱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성장하는 유일한 순간은 껍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올 때라고 한다. 그 순간은 아주 취약하고 약해져서 살이 말랑해서 누가 건드리면 죽을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누구에게든 잡아먹히고 상처받는 그 순간에만 갑각류는 성장한다고 한다. 여러분이 성장할 수 있는 순간은, 내가 가장 상처받기 쉽고,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란 것이다. 성장이고 뭐고 나는 상처받기 싫다고 했던 두려움에 벌벌 떠는 골룸의 모습이 있다면, 주님 앞에 저는 두려운 것이 많다고 고백하며, 그 목숨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기 원한다
아라가 말씀 전하는 것을 보면서, 아라가 선교사가 맞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사그러져가는 불꽃같지만, 그 안에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아라가 이런 고백을 했다. 터닝 포인트의 몇번 순간이 있었는데, 되돌아보니 모두 엄청난 주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나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요르단 마인 온천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온천수가 하늘에서 폭포처럼 떨어졌던 때 아버지의 고백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셨다고 나눠주셨다. 내가 너를 위해서, 수천년 동안 이 물을 낭비해왔다. 계산기가 부서지는 그런 순간, 그 엄청난 주님의 여러분을 향한 사랑이 부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죽어도 내가 감사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닮아가겠다고 하는 베냐민의 용기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 간절히 기도한다. 고통도 감사로 받을 수 있는 이 베냐민의 용기가 우리 삶에, 교회의 기초인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누군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 엄마의 힘으로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 이순희 권사님이 저희 엄마이신데, 중학교 때 제가 약하고, 맨날 가위에 눌리고 힘들었다. 어느날 자는데 눈이 너무 깨질 것처럼 아픈 것이다. 그때 질병의 영에 많이 노출된 상태였다. 유리 파편이 박힌 것처럼 따가워서 엄마에게 갔는데, 그때 저희 엄마가 뜨거운 혀로 저의 눈을 핥아주시는 것이다. 그 온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딱딱하고 굳은 마음이, 고체와 같은 우리의 에고가 어떻게 상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액체가 되고, 성령처럼 바람이 되고,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목요일날 "상전이"라고 설명했다. 고체가 기체가 되고, 액체가 되고,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잘 들으신 분은 캐치를 하셨을 것이다. 어떻게 변하는가는 설명을 안 해주시지? 분자와 분자, 아주 밀집되어있는 고체의 분자와 분자를 억지로 떼어낸다고 액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온도를 높여주면 된다. 그러면 고체가 따뜻한 온기에 의해서 액체가 되고, 그 액체가 기체가 되는 상승이 일어난다
באר לחי ראי 브에르 라하이 로이
이번 주의 주인공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에 거했다고 한다. 우리의 에고를 기체가 될 때까지, 상승할 때까지 감싸시는 브에르, 오르, 열과 온도와 빛이 있는 것 안에, 라하이, 훈련하는 생명으로 거한 것이다. 둘러싸는 빛 안에 계속해서 아버지처럼 되곘다고하는, 나의 수치와 아픔과 두려움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아버지처럼 되겠다. 나와 이웃 안에 있는 생명을 꺼내겠다고 하는 것에 이삭은 거했다는 것이다. 이런 용기가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믿는다
진짜 사랑하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옛날에 순관이가 찬양팀이었을 때 연습을 하는데, 뒤에 요한이가 들어가있는데 문은 잠기고 요한이가 어디에 끼었다. 얘는 자지러지는데, 그때 요셉이가 이 작은 창을 깨서 부쉈다. 그때 깜짝 놀랐다. 연예인인데 자기 몸이 다치면 안되는 사람인데, 순관이가 깨진 유리창 사이로 자기 몸을 던져서 들어가서 요한이를 구해오더라. 진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너 대신 죽어줄 수 있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죽음의 공포, 그 목숨의 안위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런데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여러분을 너무 사랑해주는 엄마가 여러분 대신 죽고, 내가 이 땅을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사는게 사는 것일까? 웃으면서, 깔깔대면서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전쟁 중에 저와 목사님이 남는다고 했을 때, 혹시 깔깔대면서 사셨는가? 못 살았다. 주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삶이란 뭘까? 많이 아는 스토리이지만, 하나의 스토리를 소개하겠다. 부모님을 잃고 살아가던 두 형과 아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형은 동생을 부모님대신 사랑했고, 그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동생이 삐딱해져서, 나쁜 이들과 어울리게되고, 폭력배와 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경찰에 쫓기던 동생은 다급한 마음에 집으로 달려와서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동생의 피묻은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주었다. 동생은 형의 옷을 입고 달아났고, 형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겁에 질려 달아났던 동생은 이 소식을 듣게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자수하였다. 큰 사회적 관심을 끌고 이 사건은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판사는 이런 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 자에게 무죄를 선언한다. 그 이유는 동생의 이름으로 이미 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두번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누군가가 그 대신 죽었기에 그는 법적으로 죄가 없게 되었다. 동생은 형이 남긴 편지를 읽게 되었다. 나는 너의 죄의 옷을 입고 너 대신 죽는다. 이제 너는 나의 옷을 입고 나 처럼 살아다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뭘까? 여러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죽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고, 사라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웃음이었는데, 어떻게 웃으면서 살 수 있을까? 그 형이 영생으로, 마크펠라의 세상, 다음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것, 그 세상이 진짜라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사는게 사는게 아닐 것이다. 형이 준 삶이 진짜 삶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살겠는가? 부활, 영이 진짜라는 것을 모른다면 동생은 살아갈 힘이 없을 것이다
동생은 죄가 유혹할 때마다, 옛 친구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 옷의 주인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유혹을 뿌리쳤다고 한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마지막 상상이 이것이었다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됨을 상상하셨다. 하나님은 에하드를 상상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하나되는 것을 상상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는 우리를 상상하셨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굳이 같이 살아야하나? 목사님이 이스라엘에서 우리가 전쟁 중에 나왔지만, 어떤 꿈을 꾸고 상상하게 하셨냐면, 우리 이제 다윗이와 다미를 하마스의 자식과 결혼시키자고 했더니, 다윗이 엄마는 아멘하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는가? 손양원 목사님 딸이 손동희 권사님인데 그런 고백을 하셨다. 용서까진 좋은데, 왜 우리 집에 들어와서 그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게까지 해야하는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가?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해서, 천하의 왕이 되셔서 그 에하드를 상상하는 그 상상을 하신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다. 이렇게까지해서, 그분을 닮아가서, 그분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이 댓가를 지불하고 산 마크펠라의 사랑이었다. 이런 위대한 사랑을 우리 모두가 하려고 이 땅에 선택해서 온 위대한 여러분들, 여러분 안의 위대한 신성이 깨어나기 원한다
==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하네 ==
* 기도
그 사랑이, 큰 사랑이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게하십니다. 돈이 나인 줄 알았고, 사랑이 나인 줄 알았고, 파워가 나인 줄 알았고, 똥이 나인 줄 알았던 우리 골룸에게 주님의 큰 손이 임하여서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가 내 영혼을 살리는 사라의 생명으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당신의 그 빛 안에 딱딱한 골룸과도 같은 우리를, 미친 정신으로 살 수 밖에 없던 헤롯과 같은 우리를 점점 상승시켜 신처럼 만들고자 하는 당신의 온기 가운데 거하고, 훈련하는 제자 가운데 거합니다. 우리는 당신 안에 있는 신을 상상할 수 있고, 우리도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 상상을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는 항상 싸우면서 살았습니다. 싸우려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 삶은 항상 전시상태였고, 내 주변의 생명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그들도, 나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를 자유케하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당신의 사랑 앞에 서오니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처럼, 그렇게 상상하고, 하나됨을 상상하고, 마지막을 상상하며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위대한 상상을 할 수 있는 키슬레브의 기름부으심으로 임하게 하소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를 위하여 목숨바쳐 사랑하신 주님, 이제 주님처럼, 나의 옷의 주인처럼 생각하고, 옷의 주인처럼 말하고, 나의 옷의 주인처럼 행동하는 그런 제자의 삶, 빛, 소금의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진정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는 제자들로 거듭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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