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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2008년 12월 15일 전남일보 게재
이보 추천 0 조회 48 10.04.27 05: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 표류 - 우이도

'조선의 하멜' 홍어장수 문순득
일본ㆍ필리핀 등 3년 2개월 표류기 '표해시말' 기록
200년전 동아시아 풍속ㆍ언어 '조선인 눈'으로 전해
직접 지은 나무집 등 흔적 산재…꾸준한 관리 절실

 

신안군 우이도에는'조선의 하멜'로 불리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직접 지은 집이 남아있다. 이 집에는 그의 5대손인 문채옥 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붕 등 일부를 수리했지만 나무집 그대로 남아있다 

 

355년 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한 네덜란드 사람이 있었다. 헨드릭 하멜이라는 그 인물은 조선에서 13년 넘게 생활했던 기록을 '하멜 표류기'로 남겼다. 그가 7년을 살았던 강진 병영지역에는 하멜 기념관을 비롯한 그의 대형 동상까지 들어섰다. 현재까지 국내에 하멜의 후손이 남아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 벽안의 유럽인이 있었다면 조선인으로 일본, 홍콩, 마카오, 중국 등을 표류하며 그들의 언어와 풍속들을 소개한 섬 지역 상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우이도에서 '홍어 장수'를 하던 문순득이다.

1970년대 신안 우이도 문채옥 씨 집 뒤주의 고서 더미에서 필리핀 말이 적힌 책이 나왔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1744~1830)가 지은 '유암총서'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에는 문씨의 5대조인 문순득이 바다에서 표류해 일본과 필리핀, 중국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 2개월 동안의 노정을 상세하게 담은 '표해시말'이 수록돼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표해시말'은 흑산도에 유배온 다산의 형 정약전이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95쪽 분량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문순득은 서남해의 특산품 홍어를 사다가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던 홍어 장수였다.

1801년 12월 25살이던 문순득은 우이도에서 그의 작은 아버지 문호겸 그리고 마을 사람인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나뭇꾼 아이, 김옥문 등 6명은 흑산도 남쪽 수백리에 있는 태사도로 홍어를 사러 갔다. 그러나 이듬해 1월18일 돌아오는 길에 우이도 서남쪽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2월 1일에다 유구국(오키나와)의 큰 섬인 양관촌에 닿았다.

 

문채옥 씨

 

 

문순득 일행은 8개월여를 그 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10월 7일 유구국을 떠나 우이도로 돌아오던 중 또 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됐고 11월1일 여송(필리핀)까지 떠내려갔다. 문순득은 필리핀 체류 8달만인 1803년 9월9일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광동, 북경, 의주를 거쳐 조선에 도착했다. 이윽고 1085년 1월8일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3년 2개월에 걸친 그의 표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문순득은 고향에 돌아와 표류 과정에서 겪었던 각 나라의 풍속을 상세히 기록했다. 한 어부, 그리고 장사꾼의 눈으로 본 이국 풍속을 구술한 것은 꽤나 정확하며 섬세하게 묘사됐다. 우이도로 유배와있던 정약전이 기록하면서 문순득의 기억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됐다.

 

 

                                                               

문순득의 표류내용이 담신 정약전의 '표해시말' 원본.

 

'조선왕조실록'에 문순득이 1809년(순조 9년) 6월27일 우리나라에 표류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 통역했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200년 전 동아시아 문화를 생생히 담고 있는 표해시록과 문순득의 흔적들이 우이도에 산재해 있지만 아직 관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 '표해시록'이 발견된 문채옥 씨의 가옥은 문순득이 직접 지은 집이다. 비록 지붕도 갈고, 수리도 여러번 하고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150년된 나무 집 그대로다.

문채옥 씨는 아흔이라는 나이 탓에 평소에는 인천에 있는 자녀 집에서 거주한다. 1~2달에 한 번씩 우이도에 들어오지만 꾸준한 관리가 어렵다. 어느 작은 섬에 남겨진 소중한 문화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체계적 연구와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이를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는 방안 또한 서둘러 고민해야할 대목이다.

글=고강인 기자 kiko@jnilbo.com
사진=고강인 기자ㆍ신안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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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저술 표해록 언어학적 가치 높아

 

 문순득(1777~1847)은 정약전이 집필한 '표해록(원명 표해시말)'의 실제 주인공이다. 우리나라의 '표해록'은 최부(1488년)와 장한철(1771년)이 남긴 기록이 널리 알려져 왔다. 뒤늦게 발견된 문순득의 '표해록'은 이와 함께 3대 '표해록'으로 불리고 있다. 앞선 두 기록에 비해 연대(1801년 12월부터 1805년 1월 8일까지의 기록)는 한참 후대에 속한다. 그러나 앞의 두 '표해록'은 중국 혹은 일본 한 곳만을 표류한 기록인데 반해 문순득 '표해록'은 일본ㆍ필리핀ㆍ마카오ㆍ중국 등 여러 나라를 표류한 기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며 홍어 판매상을 하던 우이도 주민 문순득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당시 우이도에 유배왔던 정약전이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타 '표해록'과 차별화 된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왔던 문순득의 눈에 비친 외국의 풍물이나 선박, 언어에 대한 관심도가 실학정신으로 무장한 정약전에 의해 체계적으로 저술된 것이다.

문순득의 해양문화에 대한 지식과 실학자 정약전의 학문적 소양이 결합하여 탄생시킨 뛰어난 해양문학작품이자, 역사적으로는 200여 년 전의 일본, 필리핀, 중국의 풍속과 언어에 대한 자료가 담겨 있어 국제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비록 문순득이 뛰어난 학자는 아니었지만 사물의 특징을 관찰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체험된 내용들을 잘 기억하고 기록해 와서 당시 우이도에 유배를 왔던 정약전에게 자신의 체험담을 들려주었고, 호기심 많던 정약전이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해록'이 탄생하게 되었다.

문순득의 '표해록'에는 유구, 여송, 안남 등 여러 지역의 풍속과 언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표류의 노정, 풍속, 궁실(집), 의복, 선박, 토산품, 언어 등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서술되었다. 특히 권말에는 112개 단어를 조선어와 유구어, 여송어를 비교해서 기록해 놓았다. 이는 언어학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특히 유구(오키나와)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매우 희귀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표해록'은 실학정신이 강했던 정약전에 의해서 집필되었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인 기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문순득 자신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문순득이 양반이나 학자가 아닌 평범한 서민이었기에 외국의 생활풍속이나 언어 같은 생활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문순득의 '표해록'은 과거에는 정약전이 집필했다는 기록만 전할 뿐 그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이도에 사는 문채옥(문순득의 후손)씨가 소장하고 있는 유암총서라는 문집에 이 '표해록'의 내용이 '표해시말'이라는 이름으로 필사되어 그 전체 내용이 사라지지 않고 빛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문순득과 관련된 유품이 지금도 후손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이도 문채옥 씨는 중국 서책, 부채, 노리개, 실띠 등 문순득이 표류시절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 온 것으로 전하는 유품들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최근 문순득의 '표해록'이 알려지면서 조선시대 실학사상의 보급과 표류를 통한 국제문화 교류 등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이 연구 발표되고 있는 추세다.

앞으로 문순득의 '표해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될 예정이다. 그가 지녔던 해양문화에 대한 인식과 기록을 통해 후손에게 전승하려는 의지가 200 여 년이 지난 지금 신 해양시대를 열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보석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최성환 (신안문화원 사무국장ㆍ목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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