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선 백화점에서 파는 최고급 도시락을 반백의 노인들이 줄을 서서 사 갑니다. 요즘 일본에서 페라리와 같은 고급차를 누가 모는 줄 아세요. 50~60대 자산가들입니다. 선진국 은퇴층 소비자를 ‘노인’이라고 넘겨짚고 접근했다가는 백전백패입니다.”
기업들이 앞으로 주목해야 할 글로벌 신소비층은 선진국 은퇴자, 중국 도시근로자, 북미 X·밀레니얼 세대, 인도·동아시아 여성이다. 일반적으로 고령층은 소비 시장에서 외면받는다. 은퇴 고령층은 고정 수입이 없기 때문에 소비에 소극적일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인구구조 변화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지 못한 단순한 억측”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선진국 은퇴층은 인생 후반기에 더욱 적극성을 띠는 세대”라며 “의료기술 발달에 따른 기대 수명 연장으로 인류 역사상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선진국 은퇴층 소비자를 공략하려면 ‘노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0년 단카이(團塊) 세대를 노리고 일본에 진입한 기업들은 다 망했다”며 “기업들이 이들 세대의 심리적·구조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넘겨짚은 탓”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세대를 구분해 특정하고 넘겨짚는 것이 아니라, 이 계층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용수 교수는 일본 경제를 바탕으로 고령화 문제를 연구한 ‘인구구조’ 전문가로 통한다.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연구실에서 전 교수를 만났다.
60세에 은퇴해도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소득 단절을 염려한 은퇴 세대는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인생 후반기에 더욱 적극성을 띠는 겁니다
전영수 교수
―선진국 은퇴 고령층이 주목할 만한 잠재적 소비자로 부상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은퇴를 하면 소득이 줄고 그에 따라 소비도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선진국의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고 성장 압력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자녀 세대가 부모보다 부자가 될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부모 세대에 부가 집중된 형태를 띱니다. 일본의 가계 금융 자산 규모는 1600조엔에 이릅니다.
이 중 70%를 60대 이상 노년층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산효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의료 기술 발달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60세에 현역에서 은퇴해도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소득 단절을 염려한 은퇴 세대는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생 후반기에 더욱 적극성을 띠는 세대가 탄생한 겁니다. 은퇴하면 활동이 줄어들 것이란 고정관념이 깨진 거죠”
―일본 단카이 세대의 소비 및 투자 패턴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는 주된 연령층은 60대 이상입니다. 일반적으로 60대가 되면, 삶을 정리하고 활동을 줄여갈 것으로 예상하고 내구소비재의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60대 이상에서 내구재 교체 수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페라리나 벤츠 몰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젊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열심히 벌었으니 이제 나도 쓰겠다’는 심리도 있습니다. 일본은 도시락 시장도 세대별로 양극화 양상을 보입니다. 백화점에서 파는 최고급 도시락을 반백의 노인들이 줄을 서서 사 갑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500엔짜리 도시락은 20~30대들의 몫입니다. 일본JR(철도)이 얼마 전 4박5일 20만엔(약220만원)짜리 국내여행 상품을 출시한 적이 있습니다. 최고급 국내여행 상품인데, 이게 출시 몇시간 만에 완판된 것으로 압니다.”
―일본에서는 투자에서도 60대가 주축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에선 자산을 통한 부의 증식에도 가장 적극적인 세대가 60세 이상 고령층입니다. 주식이나 금융자산 투자를 많이 하지요. 또 도심의 투자용 부동산도 있습니다. 고령층들이 부동산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입견을 버리고 도전해야… 은퇴세대인 단카이 세대는 자부심 강하고 취향 확고한데 ‘어르신 상품’이라고 홍보한다면 이는 실패로 이어져
―그렇다면 기업들은 은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과거의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의 수많은 대기업들이 시니어 시장을 노리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도전장을 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들 세대를 ‘노인 세대’라고 넘겨짚은 탓입니다. 단카이 세대는 고등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입니다. 자부심이 강하고 취향이 확고합니다. 넘겨짚을 세대가 아니란 뜻이죠. 좀 더 세밀하게 소비자 중심으로 니즈를 파악해야 합니다. ‘어르신 상품’이라고 홍보하는 순간 이 상품은 실패한다고 봐야 합니다. ‘내가 왜 노인이야?’라는 반발이 나오거든요.
일례로 계량기 숫자 크기를 키운 커피포트가 일본에서 잘 팔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니어를 위한 커피포트’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인구구조 동향을 잘 파악해 성공한 기업 사례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 편의점(세븐일레븐)을 잘 관찰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서 1990년 대부터 편의점 포화 논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유통업계에서 편의점만이 유일한 승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세븐일레븐 매출액은 2000년 2조500억엔에서 2014년 4조엔을 돌파했습니다. 일본에서 편의점은 젊은이를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일본 지방의 편의점에선 두부와 사골·간장·식초까지 팔지 않는 게 없습니다. 이는 은퇴 고령 인구의 니즈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ATM과 행정수납은 물론이고 24시간 의류수선 서비스까지 제공합니다. 전화 주문을 하면 배달하는 서비스도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도 커버하죠. 이런 세밀함이 일본 편의점이 승승장구하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