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낙비에 관한 시모음 12)
소나기 /이수찬
칠월의 뙤약볕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하늘
저-편에서
꺼무스레한 구름 떼 모여 들더니
낮은 저물녘처럼
빛을 잃는다
갑자기
온 누리를 삼킬 듯
뇌성벽력이 뻔쩍거리는 공포 속에
몸을 움츠린 채 흘러간 시간...
쏟아지던 장대비
삽시간에 개울은 홍수로 넘치고
온갖, 세진은 씻기어
바다로 간다
과연!
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미미한 인간의 존재임을 어찌 부인하리
찢어진 우산을 들고, 멍하니
바라보는 하늘가에
어느 새
소나기 거치고
갈라진 구름 사이로
파란 햇살이
살며시
미소 짓는다
요란스럽던
소나기 뒤에
평온을 되찾은 하루의 끝자리
석양은 조각구름 사이로
곱게
노을이 진다
나, 바람이 있다면...
온갖
번뇌 망상에 젖은 늙은이의 몸부림도
소나기 지나가듯
사그라지고
겹겹이 쌓여있던 근심 걱정도
싹쓸이
홍수에 씻기어
강물 되어
흘러 흘러간들 어떠리
소닉비가 내린다 /류동열
시원하다
차갑다
아프다
소리도 요란하다
가슴이 텅 비어 있으니 그런가 보다
빈 앙동이를 두드리면 소리가 크게 난다
세상 삶에 꼼수 쓰는 사람들
목소리가 큰 것이 빈 양동이를 닮았는가 보다
소낙비
내리다가 그치고
볕을 보이다가 또 내리는 변덕이 죽과 같다
신나게 두둘겨 반 죽여 놓고 모른 척
언제 그랬냐 한마디 사과도 없는
뻔질나게 잘도 변명을 내놓는 사람
흙탕물에 처박힌 민초는 안중에도 없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이 생긴다
선하게 살려고 하면 선한 일이 생기겠고
혼자 잘 먹고 잘살려 하면 타인은 봉이 될 것이며
모두 함께 살려고 하면 마음이 부자이다
한 그릇의 밥에 여럿의 숟가락 싸움
양보도 없고 사랑도 없고 상처만 내는
힘으로 역행을 가는 우리네 사람
식구들 잘 먹이려는 생각은 이해한다만
아까운 양식만 축내는 愚를 범하지 않길
오늘도 쉼 없이 소낙비는 소리를 지른다.
소나기 /사공정숙
불길하다 시장바닥에서 머리 풀고 쏘다니던 정신 나간 여자가 생각난다 달리기 출발선에서 딱총소리
기다리며 서 있던 어린 마음이 스쳐오고 더위에 문드러진 한 줄기 바람이 낯설어질 무렵
후드득 장독 위 감나무 잎사귀 두드리는 소리, 도량지 산안개가 도둑처럼 몰래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뛰어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함소리, 발자국소리가 토란잎에 굴러다니고 바깥마당 황소는 저녁 여물
생각에 잔등이 흠뻑 젖어들고
뚜껑 열린 우물에, 개울물에, 내 안에 가뭇이 꽂히는 화살들 풀과 나무, 무논의 벼가 매를 맞으며 퍼렇게
살아 움직인다 싸리나무 가지 아릿아릿한 매가 다락논 천수답에 몰매를 내린다
때려다오, 때려다오, 진저리치면서도 피하지 않고 받아내는 저 많은 풋것들의 순종과 굴욕이 들판 가득
펼쳐진다 생각도 의문도 아래로 아래로 씻겨 내려가고 천둥소리에 놀란 개구리 속울음을 삼키고 젖은 황
토벽이 서늘하게 식어가면
다시 개구리소리 매미소리, 도랑물이 콸콸 토하듯 흐르고 삿갓 쓴 농부가 물꼬를 손본다 한 마리 해오라
기 초록 논 가운데 눈부시다 길 위에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패인 상처에 고인 황토빛 진액, 시간이 흐
르면 맑아질 것이다 풀과 나무는 더욱 명랑해졌다 말간 하늘 꼭지가 얄미운데 젖은 오랑캐꽃 위로 나비가
날아든다
햇빛과 소낙비 /정연복
쨍쨍
햇빛 좋을 땐
소낙비가
가만히 물러서 있다
지금은 너의 시간이니까
맘껏 힘을 쓰라고.
주룩주룩
소낙비 내리는 날엔
햇빛이
슬며시 자취를 감춘다
오늘은 네 날이라며
제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햇빛과 소낙비
서로 숨바꼭질하다가도
이따금 반갑게 만난다
하늘의 영롱한 무지개로.
소묘 /서정윤
소나기가 지나가며
이 산 저 산 산 푸르름을 그린다
구름들의 손에 들린
푸른 붓자루,
잠들지 못한 산의 그림자를 지운다.
산은 산으로 살아
산이 생명으로 울어 자라는,
아직도 산은 상처 난 짐승들처럼
소리 지름으로 하늘 한 편에
서로 엉기어 있다.
산이, 산이
자신의 치유만으로 바쁘고
아직도 푸르름으로 자라지 못할 때
푸른 소나기가
이 산 저 산 그리며 지나고 있다.
소나기 /김경희
빗줄기 사랑 한바탕 헤집어놓고
푸른 초원 위에 꽃반지 끼워
고백하고선 부끄러운지 기약 없이
가버렸다
깨어난 바람 소리마저
애절하게 맨발을 감추려 메아리를
건네며 주던 사연 하나
고백은 문을 열고 사랑하는
순간마다 보듬고
속삭이는 말 너뿐이야
너 하나면 돼
소낙비 /김성화
마른 장마 속
비를 기다리던 마음
애타던 농촌 마음
넉넉하던 비는
도시와 농촌 인심 갈등하는 풍요
해운대 예식장 가던 길
차분히 내리던 비
어느새 소나기로 변해
물 폭탄이 된 거리의 광란
소낙비 맞으며 우산 쓴 길
상채만 조금 남긴 물 범벅된 몰골
축복 받는 신랑 신부의 예식시간
소낙비가 끊인 햇살 한 줌
빗속 햇살은 신랑 신부에게
하늘이 준 복이란 주례사
장내는 환호 물결
소낙비의 폭력의 괴로움
햇살 한 줌의 고마움
일상이 살아가는 정도에
울고 웃는 소낙비인가
소나기 /고송 정종명
가슴에 얼마나
큰 응어리 맺혔으면
닭똥 같은 눈물 쏟아 내며
포효하는가
못다 이룬 사랑의 아픔인지
불효한 죄 깨달아 통곡하는가
잘 벼룬 칼로
허공을 베어 응어리 풀리려나
눈에 핏대 세워 울부짖는
그 서러움
자식 먼저 보낸 어미 마음 보다
더 아릴까
순간의 발악에 멈춰버린 시간
아픔과 슬픔 흙탕물 되어 흘려보내고
처연한 뒷모습이 생경하다.
소낙비 쏟아지듯 살고싶다 /용혜원
여름날
소낙비가 시원스레 쏟아질 때면
온 세상이
새롭게 씻어지고
내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상쾌해져 행복합니다
어린 시절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그 비를 맞는 재미가 있어
속옷이 다 젖도록
그 비를 온몸으로 다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흠뻑 젖어드는
기쁨이 있었기에
온몸으로 온몸으로 다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며 소낙비를
어린 날처럼 온몸으로
맞을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을
소낙비 쏟아지듯
살고 싶습니다
신이 나도록 멋있게..
열정적으로..
후회 없이..
소낙비 시원스레 쏟아지듯 살면
황혼까지도 붉게붉게
아름답게 물들 것입니다
사랑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소낙비 /조채영
소낙비에 갇힌 적 있다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고
피할 곳 찾지 못해
멍하니
온 몸 적신 적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네가
내 눈앞을 스쳐 지나쳤을 때
너에 대한 그리움이
사정없이 몰려와
너에게 갇힌 적 있다
바보같이 가로등 처럼 서서
넋 잃고 너만 바라다 본 기억
눈에 삼삼하다
찌는 삼복에 시원한
소낙비 기다려진다
소나기 /단야
하늘도 덥다고 짜증을 부리더니
이내 비를 쫙쫙 쏟아 붓습니다.
농부는 소나긴가 한 마디하곤
삽 둘러메고 들로 나갔습니다.
해묵은 상처 감싸듯 허물어진 논둑 싸매고
서먹하던 이웃과 화해하듯 배수로 손보고
고개들어 시원한 빗방울에 얼굴도 씻고
하늘아~~!
적당히만 내리시게
지나치게 울 사람 너무 많으이...
소낙비 /김문억
모름지기 이렇게 한 번 울어 본적 있느냐
발가벗고도 부끄럽지 않게 통곡한 적 있느냐
맨발로 저리 고꾸라지며 달려본 적 있느냐
마들의 소나기 /문동만
북서울 오토바이 집에는 빵꾸를 때우는 스무 살이 있다
피자배달보다 오토바이가 좋아서 왔다는 스무 살이 있다
노랑머리 애인이 가끔 놀러 온다
열 받으면 그녀는 툴툴거리는 낡은 선풍기를 발로
걷어차 버리기도 하고 쭈그려앉아 제 입술로 불붙인
담배를 물려주기도 하는데,
그녀가 예뻐 보일 때는
땀 많은 애인 머리칼을 걷어올려주는 그 찰나
기름투성이 스무 살이 타이어를 주물거리다
불에 구운 풋콩처럼 검게 익은 손가락으로
그녀 볼에 기름 곤지를 찍을 찰나
그 키득대고 깔깔대는 소리가 덜 여문
덜 여문 수작인데,
여기는 바람 한점 없는 칠월의 기름밭
보는 사람만 젖는 소나기 내린다
소낙비이고 싶었다 /최민원
산 오르다가
살아가야 하는 짐을 벗듯
배낭을 벗고 물 한 모금 마시려
고개를 쳐들자 문득
나뭇가지를 차고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하늘에 길을 낸다.
저들이 자유롭게 길을 트며 사는 동안
멀리 파헤쳐진 산굽이의 도로 위를
굼벵이처럼 기는 자동차들 속에
벨트로 조여진 부속품으로
조립되어 앉은 사람들
어느 도시의 길섶에 배설되어
짊어진 삶의 터로 허우허우 들 때
나는 산 아래
들판을 태우는 보릿짚 연기를 타고
새가 튼 길을 따라 올라
땀 절은 세상을 시원하게 적시는
한줄기 소낙비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