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읽기 / 숀 호머 / 김서영 번역 (25)
4 . 무의식의 주체
6 <햄릿>과 욕망의 비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더불어 <햄릿>은 정신분석에서 핵심적 참고문헌이 되어 왔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인류의 정서생활에 나타나는 오랜 세월에 걸친 억압의 역사를 바탕으로 두 희곡을 구별하며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의 첫 번째 작품을 산출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그 기저에 있는 아이의 원망(願望)적 환상이 공개되어 마치 꿈 속에서와 같이 실현된다. <햄릿>에서 그것은 억압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 신경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우리는 그것을 억제했을 때 초래된 결과들로써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이상한 것은 더욱 현대적인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압도할 만한 효과 속에서도 관객들은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와 어니스트 존스는 아버지를 살해한 숙부에 대한 복수를 지연하는 햄릿의 행동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억압된 오이디푸스적 욕망과 관련하여 설명했다.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후 그의 어머니와 결혼함으로써 숙부는 햄릿 자신의 무의식적 소원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그에게 복수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라캉에게 <햄릿>은 억압된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관한 연극이라기보다는 주체성과 욕망의 드라마이다. <햄릿>은 욕망의 비극이다. 자신의 욕망이 헤어날 수 없이 타자의 욕망에 매여 있기에 욕망 안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의 비극이다. 엘리자베스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라캉은 <햄릿>을 '교착 상태에 빠진 욕망과 이를 타개하는 애도의 행위 양자의 알레고리'로 제시한다. <애도와 멜랑코리(Mourning and Melancholia 1917)>에서 프로이트는 애도의 기제를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점차적으로 리비도를 회수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이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는데 그동안 "상실된 대상(사람)의 존재는 마음속에 머물고 주체의 욕망은 잃어버린 대상에 고착된다. 애도의 과정이 끝나면 주체는 그들의 욕망을 다른 곳으로 선회시킬 수 있게 된다. 라캉에 의하면 햄릿은 어머니가 조급하게 그의 숙부와 결혼을 하여 상징적 아버지를 대체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다. 즉 그의 어머니는 햄릿이 자신의 욕망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선회시킬 수 있게 되기 전에 상실된 대상을 새로운 대상으로 교체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근원적 상실 대상은 팔루스이며 라캉의 설명대로라면 햄릿의 경우 상실된 팔루스를 애도할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욕망의 재기(再起) 또한 불가능하게 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애도가 멜랑콜리로 전환된다. 애도와 멜랑콜리의 결정적 차이는 "애도(의 과정)에서 빈곤하고 공허해진 것은 세상이지만, 멜랑콜리의 경우 그겋게 되는 것은 자아 자체"라는 점이다. 멜랑콜리에서 애도의 행위는 자기애적으로 자신을 향하게 되고 주체는 자신의 자아를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이는 애도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하여 주체를 시간 속에 동결기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라캉은 자기애를 상상계와 어머니/아이의 이자관계에 연관시킨다. 라캉에 의하면 햄릿의 딜레마는 어떻게 자신을 타자/어머니(<m>Other)의 요구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자신의 욕망을 인식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므로 라캉은 부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지연시키는 그 악명 높은 망설임을 타자(Other)의 욕망의 발현으로 해석한다. 햄릿은 도저히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햄릿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머니의 욕망 안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햄릿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욕망을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구별해 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혼동하고 이를 왜곡시킨다. 그는 그의 욕망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혼동은 햄릿과 오필리아의 관계를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다. 라캉은 오필리아를 욕망의 대상 - 대상a. 즉 햄릿의 욕망의 원인/대상- 으로 간주한다. 희곡의 초반부에서 햄릿은 오필리아로부터 떨어진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체와 대상 간의 상상적 관계를 분해시킨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경계가 용해된 상태에서 햄릿은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전 존재가 욕망의 대상에 대한 거부와 함께 소멸되고 역설적으로 그는 타자의 욕망 안에 구속된다. 오필리아는 그녀가 죽었을 때에만, 즉 그녀가 다시 획득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에만, 욕망의 대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 라캉에게 햄릿의 비극은 타자의 시간 안에 정지된 주체의 비극이다. 햄릿은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너무 일찍(플로니어스의 살해에서와 같이) 또는 너무 늦게(기도하는 클로디우스를 죽이지 못하고 그의 욕망의 대상 또한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치명적으로 부상을 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햄릿은 주체로서의 그의 위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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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 의하면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가설이다.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것을 주체의 말(speech)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 X라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의식은 상징계에서 나타나며 주체가 개인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상징계와 대면할 때 부상하는 것이다. 타자(an Other)가 없이는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 무의식은 타자 -각인된 내용을 해독할 수 있는 대화자, 독자 또는 분석가- 의 존재에 의존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주체 및 욕망과 주체는 한 명의 개인이라기보다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에서 구성되는 어떤 것으로서, 주체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이상 기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주체는 의미화 연쇄의 파열구(breach)- 충동이 드러나는, 상징계와 실제계 사이에 벌어진, 간극- 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