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4.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지혜롭게 하는 고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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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11.14 06:56
- 지혜롭게 하는 고통
연중 32주 화요일-20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를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혜안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사람은 혜안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혜안이라는 말이 바로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도 사람의 미간과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점과 보석이
바로 이 혜안을 뜻하는 것인데 두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이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실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두 눈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지혜의 눈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밖에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에 있는 생명을 보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사의 희망을 지닙니다.
이 얘기는 죽음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안을 보면 죽음만 보이지만
죽음 밖을 보면 죽음이 아닌 생명도 보이는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만 보고 죽음 밖은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의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또는 시련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고통을 시련으로만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고통을 단련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고통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은 곧 불행이지만
단련은 고통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시련은 당하는데 비해 단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수동적인데 비해 단련은 능동적인 것이며,
설사 단련을 스스로 하지 않고 받더라도 의미를 알고 단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영적인 지혜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고통을 단련으로 보고 고통 안에서 증강增强의 씨앗,
곧 고통을 통해 더 강해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것만을 본다면
영적인 지혜는 고통 너머에서 하느님을 보고
더 나아가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사랑까지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은 용광로 속의 금처럼 불로 단련을 받아
하느님께 맞갖은 아들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은총과 자비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지혜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사랑과 행복을 보게 하는 면도 있지만 고통이 이런 지혜를 갖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적인 측면,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하고
지혜가 고통을 사랑과 행복으로 보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얻기 힘들고,
영적인 지혜는 더더욱 얻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 지혜롭게 하는 고통이여!'라고 고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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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종으로 비유하며, “종”으로서 해야 할 일과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못하고 자유가 없이 매여 “종”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군주독제의 노예로 속박되어 살아가는 비천하고 뒤틀린 질곡의 삶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그렇다면 “종”이란 누구인가? “종”(δουλοσ, slave)은 주인에게 속하여, 그의 아래에서 섬기는 이입니다. 곧 고대 이집트나 로마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배 아래에 매여 있는 이들로,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 이들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였고 모세와 함께 해방되었지만, 또 다시 바빌론의 유배를 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불충함으로써 또 다시 전락하였고,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고통과 죽음의 종살이는 율법으로 더 강화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노예상태를 풀어주기 위해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를 <이사야서>에서는 네 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종’일뿐만 아니라 기꺼이 ‘인간의 종’도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의 “주님”이 되어 주셨고, 우리는 ‘해방된 종’, 곧 ‘자유인으로서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하느님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소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티토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하느님의 종”(티토 1,1)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주님의 종”이 된 이들입니다. 그 표시로 세례로 성령의 날인을 받고, 그리스도의 인장으로 날인된 이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장을 받은 이들을 바오로 사도는 “의로움의 종”(로마 6, 19)이라 부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체가 몸에 속해 있듯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도 바로 이 일, 주님을 섬기는 일을 다 하게 하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다 하게 하소서!
다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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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그런 행위를 바보짓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저“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시간도, 능력도, 재물도 주님께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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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님 생각 고향 생각 달래려고 하는 말이야/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면서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의 가사가 다 맞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4년이 넘게 뉴욕에 살면서 타향도 정이 들면 지낼 만 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욕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면 좋은 사람들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추모관에 가서 연도를 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보고 싶었던 동창 신부님들도 만나고, 함께 했었던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배려로 좋은 숙소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깨끗하고, 편리하고, 모든 것이 익숙했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어색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잠시 머물기 위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뉴욕 공항에 내리면서 하늘을 보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민 와서 정을 나누며 사는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한국에 더 많은 정이 갈 것 같습니다.
생각하니 사제의 삶은 ‘유목민’의 삶과 비슷합니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기 보다는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계속 머무는 곳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32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6곳의 본당에 있었습니다. 4곳에서는 보좌신부를 하였고, 2곳에서는 본당 신부를 하였습니다. 중견사제 연수와 제주도 엠마오 연수를 하였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용문 수련장에서도 지냈습니다. 지금은 이곳 뉴욕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제로 사목했던 중곡동에서의 생활은 먼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용산에서는 3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검정에서는 2년 동안 성전신축을 하면서 빌라에서 지냈습니다. 제기동에서는 말년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적성에서는 드디어 본당신부가 되어서 지냈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타향이 곧 고향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어디에 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내 욕망과 내 욕심을 먼저 찾으려고 한다면 아무리 편하고, 풍요로운 곳일지라도 결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은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유목민처럼 먼 타향에서 땀 흘린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광부로 파견되고, 간호사로 파견되어 힘들게 살았던 분들이 있습니다. 열사의 사막에서 땀 흘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통 받는 것 같았지만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진리를 깨닫는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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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함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마지막 날,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야 할 일’은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겸손’이라는 글자가 새겨지기를 바라십니다.
왜 오늘과 같은 복음 말씀을 들려주셨을까요?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겸손함으로 시작합니다. 사람 앞에 겸손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합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인지도도 높아집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선가 겸손이 점점 사라집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바랍니다.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서서히 겸손은 사라지고 교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조심하라 가르치십니다. 자라나는 교만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늘 하느님 앞에 우리가 고백해야 할 말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이라는 것을 들려주십니다.
오늘은 잠시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내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계신지요. 혹은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인디언의 격언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투덜대면
투덜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것이다.
삶이 가치 없다고 믿는다면
항상 가치 없는 증거를 발견할 것이다.
너의 생각이 너의 세계이다.
불평불만은 더 깊은 불평불만으로
비난과 비방은 더 깊은 비난과 비방으로
미움과 분노는 더 깊은 미움과 분노로
이와 반대로….
감사는 더 깊은 감사로
찬미는 더 깊은 찬미로
사랑은 더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대는 어느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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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리학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 ‘근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제게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정독이냐, 다독이냐, 일 년에 어느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하느냐 등을 물어보시지만, 근사록의 말처럼 1,000권을 읽어도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책을 읽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저자는 읽었을까요? 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유능한 과외 선생님 한 분을 보시고 직접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과외 선생님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굳이 돈 들여서 과외 선생님을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책을 읽는 것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책 읽는 것이 낭비일 수 있습니다.
유능한 선생님도 학생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유능함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즉, 학생의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완벽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 또 하느님의 뜻을 계속 무시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개조시켜서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드실까요?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서 기회를 주실 뿐입니다. 따라서 변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무슨 일인가를 했다고 해서 자기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신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부귀영화를 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 없는 분이 우리의 기도나 선행, 희생을 가지고서 무엇을 얻으시겠다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그 부모가 큰 기쁨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으로 당신의 길을 따르기만을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없고,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변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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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두 가지는 신뢰 그리고 믿음이다(제임스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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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歸家)의 여정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삶-
어제 수도형제들과 함께 참 오랜만에 왜관 수도원 장례미사에 참석했습니다. 독일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중 가장 친화력이 좋고 한국말을 잘하며 명랑하고 활달했던 거의 한국인과 같았던 주광남 보나벤투라 수사님 장례미사였습니다. 수사님의 약력도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1937년에 태어나 17살(1954년)에 수도원에 입회했고 22세(1959년)에 종신서원후 한국에 파견되어 86세(2023년)까지 선교사로 사셨으니 64년을 한국에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파킨스병의 악화로 병상에서 참 힘든 삶을 사셨으나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로 사시다가 선종한 것입니다. 어제 날씨는 겨울 날씨처럼 추웠지만 참 아름다운 만추(晩秋)의 위령성월이라 뜻 깊게 생각되었습니다.
“아, 수사님은 삶의 온갖 병고에서 해방되어 죽음의 마지막 문을 통과해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셨구나! 아, 축제와 같은 죽음이다! 죽음은 해방이요, 귀환이요, 해후요, 화해요, 위로요, 구원이로구나!”
저절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정말 장례미사는 물론 장지에서의 느낌 역시 축제같은 느낌이었고, 수도원 묘지에는 정다운 추억을 지닌 세상을 떠난 무수한 수도형제들이 살아서 수사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18년전 2005년 위령성월 단풍들 찬란히 덮인 땅을 보며 쓴, “마침내 별들이 되어” 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 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情)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수 있겠다”-2005.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고해인생이 아니라 축제인생이요, 죽음도 축제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라는 것입니다. 미사경문 제3양식중 장례미사시 제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이런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지혜서 역시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받은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선택받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은총은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드릴 응답은 찬미와 감사, 겸손과 순종, 사랑과 믿음의 응답뿐일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인데 새삼 무엇을 청하겠는지요! 참으로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믿고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다만 ‘종과 섬김의 삶’에 충실하며 ‘귀가의 여정’을 살 것입니다.
특히 강조할 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쉬운 것은 우리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쉬워서 기도하고 미사드리는 것이지 하느님이 아쉬워 기도하고 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쉬워, 구원받기 위해 찬미와 감사요 섬김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연중 평일 감사송 4’ 양식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쉬워, 필요해, 살기위해,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열렬히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와 감사인데 새삼 무엇을 요구하겠는지요! 이렇게 이해하면 오늘 복음에서 종의 반응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주님의 다정한 충고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깊이 늘 새기고 지내야 할 복음 말씀입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이런 종들 정말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충실하고 의로운, 멋지고 매력적인 종들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이런 영성으로 종과 섬김의 삶을 살면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자체가 구원이요,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역시 순탄대로를 밟을 것입니다. 저절로 이어지는 감사와 놀라움의 고백일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고, 하루하루 한결같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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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떠올리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내가
뭐라고
그럼에도
내게
맡기시니
오직
나는
고마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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