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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 / 고서화 스크랩 정선(鄭敾)의 ‘시의도(詩意圖)’를 통해 본 ‘시(詩)’와 ‘그림(畵)’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이보 추천 0 조회 226 19.02.07 1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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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敾)의 ‘시의도(詩意圖)’를 통해 본

‘시(詩)’와 ‘그림(畵)’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강 여 울


<차 례>

1. 들어가는 말: 동아시아 예술에서의 ‘시(詩)’와 ‘그림(畵)’
2. 시경(詩境)과 화경(畵境) - 문학과 회화의 경지
  1) 시의도(詩意圖)와 당시화보(唐詩畵譜)
  2) 그림(畵) 속으로 들어간 시(詩)적 화자(話者)

3. 시의(詩意)와 화의(畵意) - 심상과 실재의 소통
  1) 그림이 된 시론(詩論) -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4. 맺는 말: 시(詩)에서 또 다른 시로



<국문요약>


동아시아 회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詩)’와 ‘그림(畵)’ 사이의 유기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시와 회화 간의 밀접한 관계는 당말(唐末)에서 송대(宋代)를 거치며 성립된 문인화(文人畵)의 전통 속에서 더욱 확고해져 갔으며, 시를 주제로 창작된 회화인 ‘시의도(詩意圖)’는 점차 동아시아 회화의 대표적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그림과 글을 예술적 총체로서 결합하여 보는 전통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회화 창작에도 반영되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더욱 활발하게 제작된 ‘시의도’의 유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 중 한 명이다. 이 글에서는 정선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동아시아의 ‘시화일률(詩畵一律)’의 전통이 함축하는 철학적, 미학적 논의들에 대해 고찰한다.

동아시아 예술에서 시와 회화 두 예술 장르들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기반으로 통합되거나 상호 확장하며 새로운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 내는 방식들을, 작품 분석뿐 아니라 서양 예술관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정선의 시의도 작품들을 통해, 시적 이미지에 근거해 만들어진 도상화된 이미지의 활용, 시의(詩意)와 화의(畵意)의 상호 전환과 확장, 현실의 경험을 통한 시정(詩情)과 그림의 통합 등, 동아시아 회화 전통 속에서 시와 그림의 상호작용이 지닌 특수성과 가치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핵심어: 시화일률(詩畵一律), 겸재 정선(謙齋鄭敾), 시의도(詩意圖), 화론(畵論), 시론(詩論),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 연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동양철학.



1. 들어가는 말: 동아시아 예술에서의 ‘시(詩)’와 ‘그림(畵)’


시와 그림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시화일률(詩畵一律)’ 또는 ‘시화일치(詩畵一致)’는 동아시아의 회화적 전통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소식(蘇軾, 1037~1101)이 당대(唐代)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인화가 왕유(王維, 699~759)의 시에 관하여 그의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1)라고 표현한 구절은 이러한 시화일률의 예술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또한 곽희(郭熙, 1023~1085)의 “시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시(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2)라는 말 또한 동아시아 회화사에서의 시와 그림의 관계를 함축한다.


회화가 기존의 사회적, 종교적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된 장르로 그 위상이 고양되고, 단색조의 수묵화가 채색을 대체해 가던 당대(唐代)에 들어, 그림과 서예, 그림과 문학과의 관계는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와 회화 간의 밀접한 관계는 당말(唐末)에서 송대(宋代)를 거치며 성립된 문인화(文人畵)의 전통 속에서 더욱 확고해져 갔다. 그림을 대상 세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사상과 내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자기 수양의 방법으로서 적극 활용한 문인들의 문화 속에서, 시와 그림은 서로 분리된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고, 서로를 보완하며 그 지평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대의 서화론가 장언원(張彦遠, 815~879)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글과 그림은 각자 다른 이름을 지녔지만 공통된 근원을 가진다” 고 했다.3) 또한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 이치(詩書畵本一律)”라고 말한 소식은 “시로 모두 표현할 수 없으면 그것이 넘쳐 서예가 되고, 그것이 변해 그림이 된다”라고 말한다.4)


이처럼 송대 이후의 중국 회화에서는 시와 그림의 불가분의 관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그림과 글을 예술적 총체로서 결합하여 보는 전통은 조선시대 회화의 창작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의 문인들에게 시를 짓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창작 행위보다 광범위한 의미였다.
그림에 대한 감상을 시로 읊기도 하고 편지의 형식으로 시가 오가기도 하는 등, 시를 짓는 것은 문인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소통의 방식이었다. 이들은 많은 제화시(題畵詩)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시 또는 직접 창작한 시 등을 화제로 삼은 시의도(詩意圖)를 그렸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더욱 활발하게 제작된 시의도의 유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 중 한 명이다. 여기에서는 그가 다양한 시(詩) 혹은 시론(詩論)을 소재로 제작한 수많은 그림들 중,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시(詩)’와 ‘그림(畵)’의 유기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관계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철학적, 미학적 함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정선이라는 화가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 이 두 예술 장르들이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기반으로 통합되거나 상호 확장하는 방식의 한 측면을 작품 분석뿐 아니라 서양 예술관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드러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정선의 작품들로부터 동아시아 회화의 형식과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다양한 ‘시’와 ‘그림’의 상보적 작용들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소식, 東坡題跋, 서마힐남전연우도(書摩詰藍田煙雨圖) , “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 詩曰: ‘藍谿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2) 곽희, 임천고치, 화의(畵意) (곽사 지음, 신영주 옮김, 곽희의 임천고치, 서울: 문자향, 2003, 45~46쪽에서 인용)
3) 장언원, 역대명화기 1권, 叙畵之源流, “書畵同體未分, 象制肇始而猶略. 無以傳其意, 故有書, 無以見其形, 故有畫. …… 是故知書畫異名而同體也.”(장언원 지음, 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상, 서울: 시공아트, 2008, 16쪽에서 인용)
4) 소식, 문여가화묵죽병풍찬(文與可畵墨竹屛風贊), “詩不能盡, 溢而爲書, 變而爲畵.”(서은숙, 소식 제화시 연구 - 회화론을 중심으로 - ,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43쪽에서 재인용)



2. 시경(詩境)과 화경(畵境) - 문학과 회화의 경지


1) 시의도(詩意圖)와 『당시화보(唐詩畵譜)』


동아시아 회화의 대표적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시의도(詩意圖)는 시와 이미지의 밀접한 연관성과 상호보완 관계를 보여준다. 화가들은 시(詩)를 그림의 주제로 삼아 그 시가 표현하는 시정(詩情)을 화면에 옮겨놓음으로써 ‘시경(詩境)’과 ‘화경(畵境)’이 일치하는 경지를 추구했다.5) 시의도에서 강조되는 문학과 회화의 연관성은 동아시아 예술의 특성만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작품에 대한 언어적 묘사를 통해 최대한의 시각적 효과를 자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 서양 예술이론에서의 ‘에크프라시스(Ekphrasis)’6) 에서도 시각적 표상과 언어적 표상의 관계가 성립된다. 하지만, 이 둘의 출발점과 목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에프크라시스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언어의 능력”7)에 초점을 두지만, 동아시아의 예술에서의 시와 이미지의 관계에서는 시가 함축한 ‘비언어성’, 즉 시의 ‘회화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의도에서는 하나의 시가 자아내는 시정(詩情)의 심상(心象)을 화가와 회화의 ‘비언어적’ 사고와 표현방식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도는 18세기 이후 조선 회화의 중요한 경향으로 대두되었는데, 정선은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선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시의도의 주제는 당시(唐詩)와 송시(宋詩)를 비롯해 금(金), 원(元), 명(明) 등 다양한 시대의 시를 포함했고, 이와 더불어 조선의 문인들이 지은 시 또한 사용되었는데,8) 특히 조선 후기 중국에서 유입되어 조선의 문인과 화가들에게 소개된 고씨화보(顧氏畵譜), 시여화보(詩餘畵譜), 당시화보(唐詩畵譜) 등이 시의도 제작과 확산의 배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화보들은 중국 화가들에 대한 자료와 그림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의도의 화면 구성의 모본(母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9) 당시화보10)는 시와 그림, 글씨와 각의 예술 세계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종합 서적이었다.11) <그림 1> 당시화보를 비롯해 조선에 유입된 화보들에 실린 시와 그림들은 정선을 포함한 당시 화가와 문인들의 그림 제작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산수 자연의 정취와, 은자의 모습이 조선 문인들의 꾸준한 인기를 얻어 많이 그려졌다.


현실 사회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투영하는 산수 자연의 이미지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산수화의 출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2)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예술적 반작용으로 생성된 산수화는 당대(唐代)를 거치며13)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인화의 대표적 주제로 자리매김 했고, ‘산수(山水)’라는 주제는 청렴의 정신과 세속을 초월한 은사(隱士)적 이상이라는 가치를 함축하게 된다. 당시(唐詩)가 조선 시대 문인들이 창작한 시의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요인 중 하나는 당시 속에 반영된 이러한 문인적 이상이었을 것이다. 당시가 묘사하고 있는 내용들, 특히 세속을 떠나 은거하고 자연과 합일의 경지를 추구하는 모습 속에 당시 조선의 문인들은 스스로의 이상을 투영하고자 했다.


정선 또한 당시화보에 근거한 많은 그림들을 그리며 다양한 활용 방식을 보여주었다.
화보에 수록된 삽화 전체가 화면의 구성에 사용되기도 하고, 배경, 인물 및 경물들이 부분적으로 응용되거나 변용되기도 하였다. 화보에 실린 시 또한 화면 속에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정선의 당시화보의 활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풍경과 경물, 인물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활용되며 점차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정형화는 일면 매너리즘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는데, 특히 정선이 그림 속에 표현한 ‘인물’의 이미지들은 시경(詩境)과 화경(畵境)을 화면의 안과 밖에서 연결하며 시인, 화가와 감상자 사이를 이어주는 장치가 된다.


<그림 1> 왕유, "소년행(少年行)," 당시화보


5) 시의도(詩意圖)의 경우 화제가 되는 시에서 취한 시구(詩句)가 화면에 그림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림이 먼저 제작되고, 그것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로써 쓰인 제화시(題畵詩)와는 구별된다.
6) 시각적 표상에 대한 언어적 표상을 의미하는 ‘에크프라시스’는 18세기 말 이후 문학 및 예술비평에 적용된 개념으로, 원래는 그리스 수사학의 한 영역이었다.
Poetry Foundation: www.poetryfoundation.org/learning/glossary-term/ekphrasis
7) 피종호, 문학과 회화의 경계 또는 경계를 넘어서 , 카프카 연구 제19집, 한국카프카학회, 2008,87쪽.
8) 조인희, 조선후기 시의도 연구 ,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50~51쪽.
9) 위의 글, 56~66쪽.
10) 당시화보(唐詩畵譜)는 명나라 말기의 장서가인 황봉지(黃鳳池)에 의해 기획, 출판된 화보집으로 당시 중 뛰어난 작품들을 선정하고 그 내용에 맞는 그림을 화가가 그리고, 그 그림을 목판으로 새겨 판화로 찍어낸 것이다. 또한 당대 명필들의 글씨를 받아서 함께 판각으로 실었다. 황봉지 편간, 기태완 역주, 당시화보, 서울: 보고사, 2015.
11) 당시화보의 서문을 쓴 왕적길(王迪吉)은 성당(盛唐)의 시들은 “시 속에 그림이 있는 것(詩中有畵)”중에서 더욱 정교하며, 마음속에 있는 뜻이 발현되어 표현되니 그림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며, 진정한 시취(詩趣)는 회화와 일맥상통함을 강조했다. 왕적길, 당시화보서 , “詩以盛唐爲工, 而詩中有畵, 又唐詩之尤工者也. 蓋志在於心, 發而爲詩 …… 叢聚目前, 孰非畵哉!”(황봉지 편간, 기태완 역주, 위의 책, 7~19쪽)

12) 서복관 지음, 권덕주 옮김, 중국예술정신, 서울: 동문선, 1990, 253~277쪽.
13) 남북조 시대의 종병(宗炳, 375~443)과 왕미(王微, 415~453)와 같은 지식인들은 당시의 불안한 사회정치적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자연 속에 은거하며 산수화를 그렸고, 당말 오대의 이론가 형호(荊湖, 855~915) 또한 스스로 난세를 피해 은거하며 필법기(筆法記) 등의 화론을 통해 비로소 수묵을 사용한 산수화의 미학적, 사상적 위치를 확고히 했다.



2) 그림(畵) 속으로 들어간 시(詩)적 화자(話者)


시인의 시정(詩情)이 화가의 해석과 상상력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구성되는 시의도에서는 감상적 정감이 특히 중시된다. 이때 시적 화자와 감상자 사이의 시정(詩情) 교류의 매개로서 산수 속에 표현된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14) 시의도의 소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이다.15)

앞서 살펴보았듯이, 다양한 화보들의 화면구성법과 인물 및 경물들의 표현은 조선시대 산수인물화의 표현에 영향을 끼쳐 다소 정형화, 도식화된 도상들을 만들어 내었다. 정선의 산수표현도 많은 부분 당시화보등의 화보를 바탕으로 한다.16) 한편, 산수인물화에서 산수 묘사보다 ‘인물’ 또는 ‘은자(隱者)’의 표현에 더 중점을 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화제(畫題)로 사용된 시의 내용에 등장하는 은자의 삶에 감상자 자신, 즉, 그림의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그림의 향유자인 문인들 스스로의 모습을 이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17) 특히, 현실을 떠난 은자의 이상향에 대해 읊은 왕유(王維, 699~759)의 시의 경우 조선시대 문인 사대부들이 동경하는 이상적 인물상과 연결되기 쉬웠을 것이다. 인물 표현은 당시화보와 더불어 개자원화전 등의 도상들도 많이 차용되었다. 정선 또한 시의도의 주제로 은거를 상징하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정형화된 도상, 특히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 후기의 시의도가 갖는 특수한 목적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화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흥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감상자—아마도 그림의 주문자일 가능성이 큰—가 그림을 통해 원래의 시정(詩情)을 다시금 환기하고 경험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제작된 시의도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시구의 내용이 충실하게 그려지는 경우는 누군가에게서 부탁을 받아 그렸을 가능성을 말해준다.18) 주문자의 감상을 위해 그려진 시의도는 화가 자신의 정감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시의도와는 그 성격과 의도가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 화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을 것이고, 시화보 등의 도상을 적극 활용했을 것이다. 한편, 정선은 개자원화전 등 화보의 도상을 채용해 시의도를 그리면서도 실제의 경치를 반영하기도 하고, 각기 다른 시의 시정(詩情)을 하나의 화폭에서 연결시키기도 하는 창의성을 보여주기도 했다.19) <그림 2>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의도의 인물들은 시적 경험을 촉발하는 일종의 상징적 매개물 혹은 매체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상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형화의 과정을 거쳐 그 형상 속에 보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의미와 형태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즉, 재현적 이미지가 도상적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산수인물화를 향유하는 조선의 문인들에게 고대 시인들의 시구(詩句)는 원래의 맥락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도 하며 당시의 공동체 속에서 공유되고 확장되는 또 다른 문화적, 예술적 콘텐츠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그림들 속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인물 도상들은 이와 같은 문화적 내용을 나누게 해 주는 일종의 아이콘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물 도상 속에 시 전체의 의미와 시정(詩情)이 함축되는 것이다. <그림 3>


정선의 산수인물도의 인물들은 그림 안의 산수 속으로 들어간 ‘시적 화자’이다. 이 인물들의 이미지는 감상자와 시의(詩意)를 연결하는 회화적 장치이다. 즉, 관객과 화면을 매개할 뿐만 아니라 시 전체의 시정을 함축하는 도상이다. 산수인물도 속의 인물들 자체가 은일자의 이상향에 대한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의 시문학적, 문화적 맥락을 읽어내는 감상자는 이러한 상징적 인물에 스스로를 이입(移入)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이상에 대한 은유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 시의도에 등장하는 ‘도상화된 이미지’들-인물뿐만 아니라, 경물과 사물에 이르기까지-을 통해 시인과 화가의 뜻, 즉 시의(詩意)와 화의(畵意)가 모두 공유되는 것이다.


<그림 2> 정선, <무송관폭(撫松觀瀑)>, 지본수묵, 22.3×75.8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3> 정선 <무송관산(撫松觀山)>, 지본수묵, 97×55.8cm, 간송미술관


14)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파주: 돌베개, 2014, 225쪽.

15) 하향주, 조선후기 화단에 미친 당시화보의 영향 ,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23쪽.
16) 진보라, 당시화보와 조선후기 회화 ,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17) 조인희, 왕유 시의도를 통해 본 조선 문인들의 이상 , 동악미술사학 제17호, 동악미술사학회,2015, 144쪽.
18) 민길홍, 조선 후기 당시의도-산수화를 중심으로 , 한국미술사학회 제233․234호, 한국미술사학회, 2002, 78쪽.
19) 예를 들어 <무송관폭(撫松觀瀑)>의 경우, 개자원화전의 인물 도상을 실제의 경치에 적용한다. 화면 왼쪽의 화제 “삼용추 폭포 아래에서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인데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중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따온 것이며, ‘삼용추’는 정선이 방문했던 내연산 용추 계곡이다. 또한,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도상은 원래 개자원화전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네(影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와 연결되는 인물 표현이다. 정선은 이 부채 그림을 통해서 ‘삼용추’라는 진경을 도연명의 시 「음주」 와 「귀거래사」 의 시의(詩意)와 결합시킨다.



3. 시의(詩意)와 화의(畵意) - 심상과 실재의 소통


1) 그림이 된 시론(詩論) -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동아시아 예술의 전통에서는 시와 그림에 대한 비평적 논의에 있어서 두 장르 사이의 차이보다는 서로간의 긴밀한 연관성과 상호보완성이 더욱 강조되어 왔다. 중국에서 회화가 시와 견줄만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 이래, 시론(詩論)은 미술창작과 비평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20) 이러한 동아시아 예술의 특성은 재현으로서의 예술 또는 미메시스적 관점에서 시와 그림의 차이에 중점을 두고 비교하는 경향이 강했던 서양의 예술적 전통과는 많은 차이를 갖는다.


서양 예술사에서는 회화와 시의 관계가 ‘파라고네(paragone)’21)의 우열 비교론의 맥락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시는 말 하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 없는 시다”22)라는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 von Keos)의 명제나, 호라티우스의 “시는 회화와 같이”23)라는 표현은 문학과 미술의 유비관계가 일찍부터 논의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시와 회화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의 경우는 양자 사이를 경쟁 관계로 보는 관점을 취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적 회화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조각, 음악, 문학 등 타 예술 형식과 회화를 비교하며 시각에 근거한 회화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에게는 ‘말 하는 시’ 보다는 ‘보여 주는 그림’이 위대했던 것이다.24)

한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문학과 미술의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논하며, 미술의 우위를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미메시스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술에 대한 문학의 상대적 우위를 논증한다.25) 문학과 미술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두 장르는 같은 기준으로 비교되거나 통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26)


한편, 동아시아 예술은 시와 그림의 형식적 차이점보다는 양자가 제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갖는 기능, 즉 각기 다른 두 예술 형식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경험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결국 이 둘이 목적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시인과 화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것은 하나이며, 시와 그림을 통해 감상자가 느끼는 것도 상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예술 형식에 대한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가시적인 세계의 정확한 묘사 보다는, 감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러한 시와 그림의 통합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정선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와 문인들의 창작 소재가 되었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이 있다. 당 말기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가 지었다고 전해지는27) 이십사시품은 시의 창작에 있어서 24가지의 ‘풍격(風格)’28)을 시의 형식으로 풀어낸 시론이다.

다소 추상적이면서도 섬세한 정서에 관련된 ‘키워드’로 이루어진 풍격들은 주로 특정 장면과 풍경을 통해 묘사됨으로서 강한 회화성을 보여준다. 이십사시품은 조선에 유입된 이래 조선후기의 시(詩)와 화(畵)의 예술
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29) 하나의 시론(詩論)이 비단 시의 창작과 감상뿐만 아니라 회화와 서예의 영역에까지 적용되는 보편적인 미학적 기준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30) 이들이 주목한 것은 문예이론 속에 담긴 형상성이 야기하는 또 다른 예술적 창작의 가능성이었다.


이십사시품은 청나라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인들과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였고, 정선은 이십사시품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겨 놓았다.31)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그 이후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글씨가 더해진 것이 바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이다.32) 사공도시품첩은 ‘당시의도’처럼 대구(對句)를 화제(畵題)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품 각 편의 전체적인 정서와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십사시품의 각 편은 회화적 화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시각적 형상화에 치중되어 있고, 거의 모든 편
에 경물과 인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공도시품첩은 추상적인 미학적 개념들이 어떻게 시어(詩語)로 표현되고, 그 문학적 표현이 다시 화폭 위의 구체적인 이미지인 그림으로 옮겨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특히 언어로서 담아내지 못하는 ‘신(神)’과 ‘도(道)’33)의 영역을 형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방법은, 이십사시품의 내용을 화폭으로 옮겨 놓는 핵심적인 고리가 된다.34) 여기에서는 24개의 풍격 중 ‘웅혼(雄渾)’과 ‘섬농(纖穠)’을 예로 들어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풍격’ 혹은 미학적 개념을 정선이 어떠한 방법으로 회화적으로 형상화해 내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웅혼(雄渾)’35)의 한 구절인 “형상 밖으로 훌쩍 벗어나 존재의 중심을 손에 쥔다(超以象外 得其環中)”는 표현은 동아시아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시와 그림이 궁극적으로 표현해야 할 자연의 원칙 또는 본질로서의 ‘도(道)’와 ‘신(神)’은이십사시품 속에서도 수차례 등장한다. 한편, 이러한 형이상의 영역에 대한 표현은 역설적으로 형체의 묘사를 통해 암시되어야 함이 강조된다. 다소 추상적인 언어들로 묘사된 ‘웅혼’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미지는 ‘구름(雲)’이다.

정선이 그린 ‘웅혼’ 또한 시의 한 구절인 “뭉게뭉게 먹구름을 피어나고, 휘익휘익 긴 바람은 몰려온다(荒荒油雲 寥寥長風)”를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 4>

시첩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간략한 화면에 굵직한 표현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형상을 초월하고 존재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이 시인 또는 화가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 표현방법의 핵심은 “무리하게 붙잡지 않는(持之非強)”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개로 하고, 화가는 형상을 매개로 삼지만 오히려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웅혼’에 등장하는 ‘구름’은 매우 적합한 시각적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은 시시각각 변하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구름을 형상을 벗어난 형상, 하나에 얽매이지 않는 형상으로 보았을 것이다.36)


한편 ‘섬농(纖穠)’37)의 경우 정선은 시의 첫 여덟 구절을 그림으로 옮기고 있다. <그림 5>

버드나무와 활짝 핀 꽃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의 한 여인이 등장한다. ‘섬농’은 섬세하면서도 화사하고 풍부한 모습을 가리킨다. 섬세함과 농후함으로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웅혼’의 간결한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한 필치로 표현되었다. 또한 거의 단색조를 보여주는 ‘웅혼’과는 달리 화사한 색상으로 여인의 모습과 만개한 꽃잎을 강조하고 있다. 정선이 묘사한 ‘웅혼’과 ‘섬농’의 비교는 시정(詩情)을 형상화 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 의미를 표현하기가 다소 난해한 ‘웅혼’은 오히려 세부적인 표현을 자제함으로써 그 효과가 더욱 살아난다. 이와는 달리 ‘섬농’은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을 통해야 그 시정의 분위기가 더욱 잘 전달되는 경우이다.

이십사시품에서 ‘섬농’의 언어적 표현은 ‘웅혼’의 다소 암시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묘사적이며, 다양한 감각들을 활용하여 시정(詩情)을 전달한다. 아름다운 여인이나 활짝 핀 꽃등에 대한 시각적 묘사뿐만 아니라, 시냇물 소리와 꾀꼬리 울음, 산들바람과 따사로운 햇볕 등 청각적, 촉각적 감각 또한 환기시키고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시정이 때로는 암시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때로는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에 의탁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정선의 ‘웅혼’과 ‘섬농’의 시각적 대비는 화가 또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구체와 추상, 즉 세부 묘사와 함축적 표현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시의(詩意)와 화의(畵意)를 성공적으로 엮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4>
정선, "웅혼",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반시직, “웅혼”, <사공도이십사시품도(司空圖二十四詩品圖)>
장부, “웅혼”, <화어제시의(畫御製詩意)>
제내방, “웅혼”, <시품화보(詩品畫譜)>


<그림 5>
정선, "섬농",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반시직, “섬농”, <사공도이십사시품도(司空圖二十四詩品圖)>
장부, “섬농”, <화어제시의(畫御製詩意)>
제내방, “섬농”, <시품화보(詩品畫譜)>


20) 수잔 부시 지음, 김기주 옮김, 중국의 문인화, 서울: 학연문화사, 2008, 47쪽. 원저는 Susan Bush,
The Chinese Literati on Painting : Su Shih to Tung Chi-cha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21) 이탈리아어로 “비교”를 의미하는 “파라고네(paragone)”는 르네상스 시기에 비롯된 예술 형식 비교 논쟁으로, 회화, 조각, 문학, 음악, 건축 등 각 분야의 특성을 비교해 우열을 논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Heinrich F. Plett, Rhetoric and Renaissance Culture, De Gruyter, 2004, pp. 297-312.
22) “Poema pictura loquens pictura poema silens”, 피종호, 문학과 회화의 경계 또는 경계를 넘어서 ,카프카 연구 제19집, 한국카프카학회, 2008, 84쪽.
23) “Ut Pictura Poesis”(“시는 회화와도 같습니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호라티우스,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시학, 서울: 문예출판사, 2006, 199~200쪽.
24) “If you call painting dumb poetry, the painter may call poetry blind painting. Consider then which is the more grievous defect, to be blind or dumb?” Leonardo da Vinci, Notebooks, selected by Irma A. Richter, edited by Thereza Wells,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p. 190.
25)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지음, 윤도중 옮김, 라오콘 –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파주: 나남,2008. 원저는 Gotthold Ephraim Lessing, Laokoon: oder, ?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 Velhagen & Klasing, 1894.
26) 레싱은 미술은 “유일한 순간”과 “하나의 관점”을 묘사하는 데 반해, 문학은 시간의 흐름과 상상력의 유희 속에서 회화적인 순간을 다양하게 전개한다고 본다, 따라서 공간은 화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시간의 흐름은 문학의 영역이라고 분명히 구분 짓는다. 피종호, 앞의 글, 93쪽.
27) 근대기까지 당나라 사공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현재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정확한 저자와 제작시기를 확증할 수 없다고 한다. 안대회, 궁극의 시학 – 스물네 개의 시적 풍경, 파주: 문학동네, 2013, 680~690쪽.
28) 웅혼(雄渾), 충담(沖淡), 섬농(纖穠), 침착(沈著), 고고(高古), 전아(典雅), 세련(洗鍊), 경건(勁健), 기려(綺麗), 자연(自然), 함축(含蓄), 호방(豪放), 정신(精神), 진밀(縝密), 소야(疏野), 청기(淸奇), 위곡(委曲), 실경(實境), 비개(悲慨), 형용(形容), 초예(超詣), 표일(飄逸), 광달(曠達), 유동(流動)
29) 1713년 청의 강희황제가 조가의 사신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일행에게 전당시(全唐詩)를 하사함으로써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금지아,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이 조선후기 문예이론사에서 차지하는 자리 , 중국어문학 제52호, 영남중국어문학회, 2008, 163~165쪽.
30) 정선뿐만 아니라 신위(申緯, 1769~1845),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희룡(趙熙龍, 1789~1866)등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이십사시품의 미학범주를 적극 수용하며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안대회,앞의 책, 6쪽.
31) 청나라의 화가들이 이십사시품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반시직(潘是稷)의 <사공도이십사시품도(司空圖二十四詩品圖>), 1748, 장부(張溥, 1708~1761)가 그린 <화어제시의(畫御製詩意)>, 제내방(諸乃方)의 <시품화보(詩品畫譜)>가 있다. 안대회, 앞의 책, 12~18쪽. <그림 4-5>
32) 정선의 그림은 그가 74세였던 1749년 완성되었고, 이광사의 글씨는 1751년 쓰였다. 사공도이십사품첩(司空圖二十四品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49년 작, 견본담채, 27.8×25cm
33) ‘신(神)’과 ‘도(道)’는 시(詩)가 궁극적으로 담아내어야 하는 것의 본질로서 이십사시품에 수차례 등장한다. ‘신(神)’이 9회 ‘도(道)’가 8차례 쓰였다.
34) 섭랑에 따르면, 이십사시품은 “의경(意境)”이란 미학 본질을 통해 우주의 본체로서의 “도(道)”의 추구와 “허정(虛靜)”의 마음 상태를 중시하는 노자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섭랑 지음, 이건환 옮김, 중국미학사대강, 서울: 백선문화사, 2000, 289~292쪽(원저는 葉朗, 中國 美學史大綱,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5).
35)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웅혼(雄渾) , “大用外腓, 真體內充, 反虛入渾, 積健為雄. 具備萬物, 橫絕太空, 荒荒油雲, 寥寥長風. 超以象外, 得其環中, 持之非強, 來之無窮.”

36) 정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반시직이 표현한 ‘웅혼’ 또한 구름에 초점을 맞춘다. 반시직의 그림은 다른 시각적 대상들은 모두 생략하고 다소 추상적인 형태의 구름 이미지만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림 4>
37) 이십사시품, 섬농(纖穠) , “采采流水, 蓬蓬遠春, 窈窕深谷, 時見美人. 碧桃滿樹, 風日水濱, 柳陰路曲, 流鶯比鄰. 乘之愈往, 識之愈真, 如將不盡, 與古為新.”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동아시아의 회화적 전통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발달해 왔다. 인물화에서는 회화가 전달해 내어야 할 정수로서 인물의 정신, 즉 ‘신(神)’을 말했다면,38) 산수화 이론에서는 보다 확장된 대상인 산수의 모습 속에서 담아내어야 할 것으로 자연의 원칙이자 근원인 ‘도(道)’를 내세웠다.39) 이들에게 논리적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은 오히려 보다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전달 가능한 것이었다. 초기의 산수화가 대상에 내재한 자연의 원리인 ‘도(道)’를 담아내는 것을 추구했다면, 송대 이후 확립된 문인화의 전통 속에서 그림이 표현해야 할 것은, 대상의 본질에서 창작 주체의 인격이나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묘사 대상이 아닌 창작자의 마음이나 정신세계를 그림 속에 담아내는 것은 ‘사의(寫意)’로 표현된다. ‘의(意)’는 단순한 감정이나 정감에서부터, 작가의 사고와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개념이다.40) ‘사의’는 특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순한 여가 생활이 아닌 중요한 개인 수양의 일부로 여겼던
문인화의 전통에서 강조된다. 이러한 ‘사의’의 추구는 더 나아가 자연 최고의 원리인 ‘도(道)’를 표현하거나,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사물의 형상에 의탁하여 보이지 않는 궁극적 이치의 경지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사의’의 경지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조형관 또한 외적 형상의 모사(模寫)가 아니라, 그 사물이 가진 본질의 형용에 가치를 두었다.41) 사물의 ‘형(形)’을 가능케 하는 본질을 그림을 통해 표현해 내고자 하는 조형관은 시의 창작원리와 같은 것으로 여겨져 ‘시화일률(詩畫一律)’의 사상 속에 자리 잡았다.42)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들 또한 형상을 넘어선 ‘사의’의 경지를 중시했고, 이러한 경향은 ‘화의(畵意)’를 통해 ‘형사(形似)’43)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한 김정희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었다. 대상의 본질이 충실한 묘사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면, 주체의 정신과 사상은 구체적 형체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암시적이고 생략적인 방법을 통해 더욱 잘 표현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4)


그림의 객체가 되는 대상의 본질과 그리는 주체의 정신 간의 관계는 시와 그림의 상호작용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정선의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 <그림 6>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그림 7>을 통해서 ‘시의(詩意)’와 ‘화의(畵意)’의 상호 작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흥미로운 화면 구성의 <함흥본궁송>은 태조 이성계가 함흥의 고향집에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를 그린 것인데, 정선 자신은 실물을 본 적이 없다. 함흥에 다녀온(1756년) 문신 박사해(朴師海, 1711~1778)의 문집 창암집(蒼巖集)에 따르면 함흥 본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정선에게 본궁송을 그려달라고 청했더니 자신의 설명만 듣고도 실제로 본 듯이 묘사해냈다고 한다.45) 대상 사물에 대한 ‘형사(形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작가의 마음속에 생성된 ‘심상(心象)’ 또는 ‘화의(畵意)’가 상상력과 이전의 시각적 경험, 회화적 기술과 양식적 표현을 통해 실재와 실물을 넘어서는 회화적 ‘진(眞)’을 만들어 낸 것이다.46)

여기에서의 회화적 ‘진(眞)’은 불변의 진리로서의 ‘진’이나 현실세계와의 시각적 닮음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으로서의 ‘진’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다양한 감각적 구성 요소를 모두 담아내려 하는 대신, 선택적 집중과 경험세계에 대한 일종의 ‘편집’ 및 ‘재구성’을 통해 대상의 가장 핵심적인 기질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창조된 ‘회화적 실재’로서의 ‘진’이다. 즉, 현실의 ‘진(眞)’과 회화적으로 창조된 이미지로서의 ‘환(幻)’ 또는 ‘가(假)’의 상호침투 속에서 탄생한 회화적 ‘진’47)으로 “자연조화가 개념화된 이상경”48)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 화원들의 시험인 규장각자비대령화원(奎章閣差備待令畵員) 녹취재(祿取才)의 출제 과제는 조선의 문인들에게 현실과 회화적 ‘진(眞)’이 어떤 관계로 받아들여졌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시험에 응시하는 화가들에게는 당시 문인들 사이에 선호되었던 당시(唐詩)가 출제되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과제가 주어졌다.49) 서양미술사적 시각에서 보자면, 화원의 시험 문제가 실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닌, 시구(詩句)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 당시 그림의 감상자들에게는 화가의 정확한 기술적 모사력 보다는 ‘시의(詩意)’를 적절한 ‘화의(畵意)’로 해석하여 화폭에 담아내는 문인적 상상력과 표현법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한편 <경교명승첩>은 고대 시인들의 시가 아닌, 한 조선 문인의 시와 정선의 그림 사이의 동시대적 교류를 보여준다. <경교명승첩>은 정선과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시화첩이다. 서로 우정이 각별하였던 두 사람은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발령되자 한양의 이병연이 시를 써 보내면 정선이 시제(詩題)에 맞추어 그림을 보내주기로 했다고 한다.50) 시가 먼저인지 그림이 먼저 보내졌는지 확실치 않은 경우도 있지만 주로 이병연이 먼저 시로 제의하면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시의’는 화가에 의해 ‘화의’로 바뀌어 다시금 시인에게 돌려보내진 것이다.

하첩에 포함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은 정선과 이병연이 주고받았던 ‘시의’와 ‘화의’, ‘시정(詩情)’과 ‘화흥(畵興)’의 교류를 함축하는 듯하다. <그림8> 노송 아래 앉아 필묵과 종이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두 노인이 묘사된 화면 위에는 이병연이 정선에게 보낸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시화거래(詩去畵來)”의 내용을 담은 편지의 한 구절이 쓰여 있다.51) 공교롭게도 이 두 노인의 모습은 개자원화전에 등장하는 이백(李白)의 시구 “이인대작산화개(二(兩)人對酌山花開)”에 대응하는 인물 묘사와 닮아있다. 정선은 이병연과 자신의 시와 그림을 통한 예술적 교류를 산 속에서 술과 풍류를 나누는 두 지음(知音)의 흥취에 빗대고자 했을 수도 있다. 상첩에서는 한강을 따라 내려가며 바라본 풍경을 담은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가 짝을 맞춰 어우러져 있다.52) 정선은 현실의 경험과 개인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시의도의 형식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활용했다. 화면 속에서 이병연의 ‘시의(詩意)’와 정선의 ‘화의(畵意’)가 ‘실경(實景)’을 매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림 6> 정선,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1750년, 견본채색, 23.4×29.5cm,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


<그림 7> 정선, “목멱조돈(木覓朝暾)”,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하권, 1751년, 견본담채, 26.4×29.5cm, 간송미술관


<그림 8>
이병연, “시거화래(詩去畵來)”, 1741년, 지본묵서, 35.3×24.4cm
정선,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1751년, 견본담채, 26.4×29.5cm
<경교명승첩> 하권, 간송미술관


38) 초상화로 잘 알려진 고개지(顧愷之, 344~406)는 “이형사신(以形寫神)”, “전신사조(傳神寫照)” 등의 개념을 통해 ‘형상(形)’을 통한 ‘정신(神)’의 전달을 회화의 목표로 강조했다. “四體姸蚩, 本無關於妙處. 傳神寫照, 正在阿堵中” ; “以形寫神, 而空其實對, 筌生之用乖, 傳神之趨失矣.” 장언원지음, 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하, 서울: 시공아트, 2008, 64쪽, 92쪽.
39) 예를 들어, 산수화를 대상으로 한 종병의 화산수서(畵山水序) 는 산수의 형상을 ‘도(道)’를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山水以形媚道”). 유검화 편저, 김대원 주석, 중국화론집성 주석본: 산수편 서울:학고방, 2013, 20쪽(兪劍華, 中國古代畫論類編 第2版 修訂本, 人民美術出版社, 2000). 형호 또한 필법기(筆法記) 에서 ‘도(道)’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물의 형상들의 근원,즉 “물상지원(物象之源)”을 산수를 그리는 화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해 내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子既好寫雲林山水, 須明物象之源‘”). 같은 책, 52쪽.
40) 변영섭, 문인화, 그 이상과 보편성, 서울: 북성재, 2014, 19쪽.
41)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 서울: 문예출판사, 2013, 205~207쪽.
42) 위의 책, 211쪽.
43) “형사(形似)”라는 표현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외형이 대상과 닮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阿兄形似道”(세설신어, 상예(賞譽) ), “形似其舅”(세설신어, 배조(排調) ). 이러한 의미에서 파생되어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등 그림에 대한 논의에서의 “형사”는 회화적 묘사를 통한 “외형적 닮음”, “외형적 닮음을 추구하는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44) 홍선표, 앞의 책, 273쪽.
45) “신이 정선을 위해서 그 보온 바를 말하옵고 그것을 묘사하게 하오니, 선은 사실 보지 못했삽고 말만 듣자왔아오나 그 방불하옴이 있사옵니다(臣爲鄭敾, 道其所見, 使摹寫之, 敾實未見, 聞言而存其髣髴).” 최완수, 겸재 정선 3, 서울: 현암사, 2009, 413쪽.
46) ‘진(眞)’을 회화적 이상의 개념으로 논의한 것은 형호의 필법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의 ‘진’은 초상화에서 산수화로의 전환해가는 예술론의 변화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한데, 외형적 모습인 “화(華)”와 “형(形)”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특성과 생기를 함축한 “기(氣)” 또는 “실(實)”을 표현하면서 시대의 가치관까지 함축한 회화적 이상으로서의 ‘진’이다. 필법기 의 ‘진’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지순임, 중국화론으로 본 회화미학, 서울: 미술문화, 2008, 188~225쪽.
47) 조선시대의 회화에서의 ‘진(眞)’과 ‘환(幻)’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고연희, 조선시대 진환론의 전개 – 산수미와 산수화에 관한 담론 , 한국한문학연구 제29호, 한국한문학회, 2002, 119~148쪽.

48) 위의 글, 144쪽.
49) 하향주, 앞의 글, 60쪽.
50) 최완수, 겸재 정선 2, 서울: 현암사, 2009, 47~48쪽.
51) “내 시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그 사이 경중을 어이 값으로 따져 논하겠는가(我詩君畵換相看輕重何言論價問).” 시구 번역은 앞의 글에서 인용함.
52) 예를 들어, 남산에 해가 솟아오르는 장면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에는 사천의 시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궁궐 잘 드러나지 않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曙色浮江漢, 觚稜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가 함께 하고, 양화진(楊花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양화환도(楊花喚渡)>에는 “앞사람이 배를 불러 가면, 뒷손님이 돌이키라 한다. 우습구나 양화나루, 뜬구름 인생 헛되이 오가는 것 같다(前人喚船去, 後客喚舟旋, 可笑楊花渡, 浮生來往還)”라는 시구가 짝을 이룬다.



4. 맺는 말: 시(詩)에서 또 다른 시로


동아시아 회화, 특히 문인화의 전통에서 회화의 역할에 모방이나 재현을 넘어선 인문적이고 더 나아가 철학적인 가치를 부여한 핵심적 요소 중 하나는 시(詩)와 그림의 상호보완 관계의 성립이다. 문학 작품으로 창작된 시들이 회화의 소재로서 적극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은 그림 속에서 다양한 시적 이미지의 차용을 전개해 나갔다. 시와의 결합을 통해 회화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획득하며 다층적 의미와 정서들을 함축하는 상징이 되어 감상자에게 보다 풍부한 해석과 감흥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시’가 되기를 추구했다. 시의도의 활발한 제작과 그 배경이 되는 문인들의 사유방식은 조선 후기 문기(文氣)가 충만한 사의(寫意)적 문인화로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시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선의 작품들은 동아시아 회화가 보여주는 보편적인 특성인 시와 그림의 상호작용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나름의 창조적인 방식으로 시경(詩境)과 화경(畵境), 시의(詩意)와 화의(畵意)를 엮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선의 시의도가 보여주는 시와 그림의 상호작용의 양상과 효과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당시화보 등 시화보의 제작과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한 정선의 시의도들이 보여주는 도상화된 이미지들의 역할이다. 인물, 경물 혹은 사물들의 형상은 시의 의미와 정서를 함축하는 상징적 도상이 되어 시적 화자의 시정과 감상자와 심상을 연결시켜주는 매개가 되기도 하고, 화가 자신의 주체적 정서와 정신성을 투사하는 은유적 장치가되기도 한다.

둘째, 정선의 <사공도시품첩>이 보여주는 이십사시품도의 회화적 표현 방식에서와 같이, 시가 함축하는 추상적인 ‘시의(詩意)’를 이미지로 전환하거나, 시 속의 구체적 장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시의(詩意)’와 ‘화의(畵意)’의 상호 보완과 확장이다. 셋째, <경교명승첩>이 보여주듯이 ‘시의도’의 표현 방식은 실경(實景)과 시정(詩情), 즉, 창작 주체의 개인적 경험과 공시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적 소재를 엮어내는 예술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정 시구들이 반복적으로 시의도로 그려지면서 전형화된 이미지가 형성되고, 화보의 제작으로 이러한 이미지들이 더욱 널리 공유되는 현상 속에서 생성된 ‘도상화’된 이미지들은 한편으로는 정형화된 화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미지들이 원래의 시를 벗어나 새로운 화면 구성의 일부로 사용되며 그림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도상 자체가 상징적 ‘시어(詩語)’와 같은 기능을 획득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옛 문인들에게 고대의 시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시정을 품은 고대 화가들의 그림들은 또 다른 ‘시각적 시’가 되어 다시금 후대 화가와 문인들의 예술적 소재가 되어왔다.

조선의 화가들은 고대 시인들의 시구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시화보의 도상들을 활용하기도 하며 그들만의 화폭을 그려내었다. 새로운 창작을 위해 이미 ‘상징’이 된 옛 시와 옛 그림들으로부터 형성된 ‘도상적 이미지’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화가로 하여금 화면 속에 보다 많은 의미의 층을 형성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예술 창작 방식은 시와 그림 그리고 두 예술 형식의 결합이 만들어 내는 은유와 상징의 무한변주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정선의 시의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와 그림의 밀접한 협력관계는 동아시아 회화가 서양 회화에 비해 훨씬 이른 시기부터 대상세계의 묘사를 벗어나, 그림을 통해 형이상학적 이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상적 가치 또한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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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7. 4. 20 심사일: 2017. 6. 12 게재확정일: 2017. 6. 27



<Abstract>

A Study on the Interplay between “Poetry”and “Painting” in Jeong Seon’s “Poetry Painting”


Kang, Yoewool*


One of the most significant qualities of East Asian painting lies in the organic and dynamic interplay between “poetry” and “painting.” This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poetry and painting was firmly established in the tradition of literati painting that was formed in the years from the late Tang Dynasty to the Song Dynasty. A great number of paintings based on poems – called “poetry paintings” – were created from the Song Dynasty onward, and this holistic view of poetry and painting also influenced the artistic creation of the Joseon Dynasty’s literary circles. Gyeomjae Jeong Seon (1676-1759)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painters who led the trend of “poetry paint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essay explores the philosophical and aesthetic implications of the integration of poetry and painting in East Asian art through Jeong Seon’s works inspired by poetry. The process by which these two different art forms were fused and expanded based on their similarities as well as differences to create new metaphors and icons is discussed through an analysis of Jeong Seon’s art works as well as a comparison with Western theories. The characteristics and values of the interplay between poetry and image in East Asian painting – including the appropriation of poetic images, the interchange between poetic implication and visual expression, and the interweaving of personal experiences, poems, and images – are illuminated.



* Ph.D. candidate in Eastern philosophy, Department of Philosoph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Keywords: Integration of painting and poetry, Gyeomjae Jeong Seon, poetry painting, theory of painting, theory of poetry, Album of Sikong Tu's Modes of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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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혼 [雄渾]


웅건(雄建)하면서 혼후(渾厚)한 풍격상의 특성을 가리키는 평어. 웅은 크고 위세가 당당하며 강해서 힘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 혼에 대해서는 양웅(揚雄)이 해석하기를 "뒤섞여 실마리가 없고,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渾沌無端 莫見其垠)"(『태현경(太玄經)』)이라고 했는데, 혼성(渾成) 또는 혼후(渾厚), 혼연일체(渾然一體)라고 쓰기도 한다. 웅혼은 일반적으로 기세가 웅장하고 드넓으며 거침없고 호한(浩澣)하면서 아득해 경계가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웅혼을 『24시품(二十四詩品)』의 첫머리에 배치하면서 이렇게 형상화하였다. "온갖 물상을 갖추었으며, 드넓은 하늘을 가로로 끊는다. 어둡고 어둡구나 흐르는 구름이여, 고요하고 고요하구나 긴 바람이여!(具備萬物 橫絶太空 荒荒油雲 寥寥長風)" 그 의미는 웅혼한 기상이 마치 만물을 두르고 감싸서 하늘을 가로질러 꿰뚫고, 넓고 아득해서 끝을 알 수 없는 구름과 같으며, 드넓은 하늘을 오가는 바람처럼 공활하다는 말이다.


작자는 반드시 먼저 높이 보고 멀리 내다보는 마음 속 자세와 우주를 삼킬 듯한 기백을 갖추어야, 검푸르고 아득하며 고요하고 개방된 자연 경물을 대했을 때 능히 마음을 울리고 혼백을 놀래킬 수 있는 웅혼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옛날부터 고산대택(高山大澤)과 호해변새(浩海邊塞)를 찬탄하며 읊조렸던 작품이 많았던 것이다. 예컨대 두보(杜甫, 712-770)는 「등고(登高)」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들은 우수수 하염없이 떨어지고, 다함이 없는 장강의 물은 잇달아 굽이쳐 내려온다.(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고 했으며, 왕유(王維, 701-761)는 「사지새상(使至塞上)」에서 "한없는 사막에 외로운 연기는 곧게 솟고, 기나긴 강줄기에 떨어지는 해는 둥글다.(大漠孤烟直 長河落日圓)"고 묘사하였다.


고적(高適, 702?-765)은 변방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하면서 "교위의 깃털 단 편지는 넓은 바다를 날고, 선우의 사냥하는 불빛은 낭산을 비춘다.(校尉羽書飛瀚海 單于獵火照狼山)"(「연가행(燕歌行)」)고 했으며, 잠삼(岑參, 715-770)은 눈 내리는 사막의 기이한 자취를 찬탄하면서 "넓은 바다는 난간인 듯 백 발 얼음에 둘러있고, 슬픈 구름은 참담하게 만리에 응어리져 있다.(瀚海闌干百丈冰 愁雲慘淡萬里凝)"(「백설가송무판관귀경(白雪歌送武判官歸京)」)고 묘사했는데, 모두 웅혼한 작품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웅혼은 또 일종의 심침박대(深沈博大)하고 저온혼후(底蘊渾厚)한 기세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같은 기세는 용암이 가득 고여 있다가 일순간에 폭발하는 화산과 같은 장엄함을 보여준다. 조조(曹操, 155-220)의 「호리행(蒿里行)」과 「단가행(短歌行)」과 같은 서정적인 작품도 강개한 심정이 창량(蒼凉)한데, "기운과 운치가 가라앉고 웅장해서(氣韻沈雄)" 웅혼한 기개가 부족함이 없다. 웅혼은 경계와 기세를 모두 가리키기 때문에 보통 기상이 웅혼한 것을 통칭하는 데 쓰인다.(임종욱)



정선 웅혼


섬농(纖穠)-섬세하고 아름다움 (사공도시품첩), 비단에 채색, 27.8㎝x25.2㎝, 174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화환상간 (詩畵換相看)


목멱조돈(木覓朝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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