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旺山) 허위(許蔿) 기념관을 찾아서
德庵 李 德 熙
무술년 5월 16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베스트웨스턴호텔에서 숙박하
고 입암서원을 거쳐 영천 충효재와 정환직, 정용기 부자 묘소를 참배하고 구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을 찾았다.
왕산 허위선생은 1855년 4월 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작은 아버지 해초공과 맏형인 방산공 허훈에게 글을 배웠다. 방산공은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쳤던 분이다. 19세 연하의 동생에게 글을 가르치며 방산공은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 한다”라고 하여 왕산 허위선생이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또한 후에 안중근의사가 거사 후 법정에서 왕산 허위선생을 평하기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허위선생의 인품이 어떠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95년 10월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에 항거 1896년 을미의병 때 김산(김천)에서 기치를 들었다. 김산의병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였으나 고종임금의 밀서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청송 진보에 있는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진력했다.
선생은 1899년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성균관박사, 평리원 수반판사와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 등 관직에 봉직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1904년 평리원 수반판사로 재직 시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하는 등 한국침략에 박차를 가하자, 선생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배일 통문을 돌리는 등 항일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하고 협박하여 선생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귀향토록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어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대한제국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완전히 기울게 되자 1907년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해 11월에는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의병의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다. 그런 후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1만 여명의 의병을 양주로 집결시켰다. 서울 진공의 선공을 맡았던 선생은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삼백 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서울에서는 사전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리고 본대가 때맞춰 도착하지 않아서 패퇴하고 말았다.
비록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전국의 의병부대가 모여서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그리고 조국의 국권회복이라는 비전을 품고 강한 리더십과 결단력으로 행동에 옮긴 왕산선생의 그 기상은 우리의 표상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후 선생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08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이러한 왕산선생은 공훈을 기려 정부에서는 1962년 독립운동 최고의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서울시에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km 구간을 왕산로로 제정하였고, 2003년 9월의 호국인물, 200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2009년 9월 28일 왕산 허위선생기념관이 개관되었고, 기념관에서 바라보이는 생가 터에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그 뜨거운 민족애,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고 느껴보는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아! 선생은 가고 없어도 나라사랑 정신과 그 집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길이길이 배우고 본받아 우리 조국을 빛내자
戊戌年 晩春之節 德庵亭舍 閑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