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5.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 은총이 당연한 사람의 불행.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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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이 당연한 사람의 불행
잘 아시다시피 오늘 복음의 얘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 생각에 루카 복음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똑같은 은총을 받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방인보다 하느님께 더 감사드리지 않음을 꼬집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이 이방인보다 감사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를 더 잘 드려야겠지요.
그런데도 감사를 오히려 더 드리지 않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감사드리지 않음은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고,
감사하지 않음은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과 남이 똑같이 받았다면
그 사랑이 자식에게는 당연하고 남에겐 특별하겠지요.
나병 환자들이 같이 치유 받고 이방인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드리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은 하느님의 선민이고 아들이니
하느님 치유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이방인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았기에 그것은 특별한 선물이고 은총이고 그래서 감사드린 것이겠지요.
은총이란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은총이 아니고 특별할 때 은총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이유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어떤 환자가 돈 주고 의사에게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는 돈이 없어서 공짜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경우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그 치유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공짜로 치유 받은 사람은 무상의 은총이 되게 되겠지요.
차로 말하면 유상 수리가 아니라 무상 수리입니다.
이때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의사에게 불평할 것입니다.
왜 치유가 친절하지 않으냐?
왜 나에게는 돈 받고 그에게는 공짜냐?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도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치유해준 것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자신에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고,
하느님께 영광 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습니까?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그래서 오늘 우리도 반성합니다.
우리는 병을 치유 받고 많은 경우 의사가 치유해줬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셨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은총이 당연하고 그래서 은총이 아닌 사람은 불행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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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고,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홉은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았을까? 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 명의 나병환자와의 인터뷰”라는 존슨 그나나바라남의 꽁트에서 한 기자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소. 혹시 재발할지 모르지 않소. 그래서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선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감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소.”
또 다른 사람은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하는 일을 까맣게 잊었소.”
또 다른 사람은 “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었소. 그런데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다수를 따르오. 그래서 나도 돌아가지 않았소.”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한 사실에 대한 기쁨에 머물며,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돌아옴’과 ‘새로운 출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베풀어진 자비를 입고, 그에 합당한 ‘응답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를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요, 기적이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어,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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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은혜에 감사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탓을 돌리고 원망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껏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당시 나병이 나은 것은 사제가 확인해 주어야 다른 사람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받는 일에 급하게 행동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그런데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힘들고 지치고, 고통이 밀려와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가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내 공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결코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로마2,4)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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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날 ‘꾸르실료’ 교육에 함께 했습니다. 꾸르실료는 3박 4일 동안 교육을 통해서 ‘순종, 이상, 사랑’의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봉사자들은 제게 ‘어제 한국에서 왔는데 시차 때문에 피곤하지 않으신지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교육에 함께 하면서 오히려 시차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브레이크는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꿀벌이 슬프다고, 아프다고, 힘들다고, 외롭다고 일을 멈추면 이미 꿀벌이 아니듯이, 신앙인은 슬플지라도, 아플지라도, 힘들지라도, 외로울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노약자를 위해서, 장애인을 위해서, 바쁜 사람을 위해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계단을 걸어서 오르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바쁜 의사 선생님이 가능하면 늘 계단을 걷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환자들을 위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육 중에 신부님들의 좋은 강의를 듣는 것은 제게도 영적으로 큰 위안이 됩니다. 그 또한 시차로 인해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의 은총을 이야기하면서 신부님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을 전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잠시 ‘멈춤’이라고 합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 더욱 깊이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하면 더욱 상황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잠시 멈춰서 있으면 조금씩 보인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쉼 호흡’이라고 합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마음을 정리하면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숨고르기를 3번만 해도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숨고르기를 6번만 하면 나의 표정이 변한다고 합니다. 숨고르기만 잘 할 수 있어도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생각하기’입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가 있으면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을 수 있듯이 깊이 생각하면 몸도 마음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네 번째는 ‘행동하기’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헛된 꿈이 될 뿐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멈춤, 쉼 호흡, 생각하기, 행동하기’ 이것을 배운 것만으로도 3박4일의 교육은 감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도움의 은총을 이야기하면서 신부님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성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러면서 사위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장인의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장인은 사위가 처음 집으로 온 날부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신앙생활을 할 때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위가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할 때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 기도는 장인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저 역시도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는 적금, 보험, 연금에 가입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도움의 은총’을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은사를 받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내가 받았던 생명의 은총을 이웃을 위한 도움의 은총으로 나눌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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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엇이 중요합니까? 짬뽕입니까? 짜장입니까? 아니면 그 가운데 놓은 탕슉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처음 나병에서 나은 사람들은 모두 열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주님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각자의 길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병은 나았습니다.
그렇게 열 사람은 모두 병에서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다시 주님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분명 자신의 목적인 치유를 얻었음에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치유의 은총의 아닌 구원의 은총을 선물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기억하십시오. 감사의 선물은 구원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봉헌할 때 혹은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고난과 고통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면 그 감사의 열매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것입니다.
‘준주성범’이라는 신앙 서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범사(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매일매일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라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하겠다는 강박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며칠을 연속해 빠졌을 때
결국 영구히 그만두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매일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
자책하지 않는 것.
비난하지 않는 것.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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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처음 사제 서품을 받고서 제일 고민되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해소 안에서 훈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 교우가 참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으셨으면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훈화의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젊은 제가, 또 경험 없는 제 말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늘 조심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고해소에 들어간 지, 벌써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과 새 사제였을 때의 제 모습을 비교하면 정말로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당연하고, 내적인 모습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훈화, 강론, 강의….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첫 모습과 달리 처음의 순수한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꽤 많이 능숙해졌고 또 실질적인 도움도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하고 쉬운 것만을 하려는 안일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계속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성장이든 시간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 없이 곧바로 성장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곧바로 완성의 모습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나’의 존재가 너무 나약하고 부족하지 않을까요?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이 흐르는 시간 안에서 ‘나’의 생각이 차곡차곡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장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나의 이 몸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어떤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치유하셨을까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의 시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만이었습니다. 이 사람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특별한 선물도 받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구원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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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희망이 사라진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욕심과 희망을 비축해 두어라(발타자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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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삶
-겸손과 지혜, 찬양과 감사의 믿음-
지난 연중 제32주일 복음은 “열처녀의 비유”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삶이 모범으로 제시되었고, 이에 걸맞게 제32주간의 제1독서는 지혜서가 계속 배치되어 우리 모두 지혜롭게 살 것을 촉구합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소주제 역시 “지혜를 찾아라”입니다.
지난 주일 교황님은 강론에서 믿는 이들 모두가 내적 삶의 관리자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했습니다. 내적 삶은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적은 준비와 항구함이 요구된다 했습니다. 교황님은 우리 모두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과연 나는 마음을 보살피는 데, 기도에, 이웃을 섬기는 데, 삶의 목적지인 주님께, 시간을 바치고 있는지, 또 과연 나는 내 영혼의 기름을 잘 채우고 있으며 잘 유지되고 있는 지 끊임없이 깨어 살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이색적인 기사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고(故)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2013년부터 약 10년간 머물렀던 바티칸의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에 아르젠티나의 베네딕도회 관상 수녀들이 거주하도록 청했고, 내년 1월 초부터 6명의 관상 수녀들의 집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 관상 수녀들의 역할은 침묵과 고독중에 기도하는 현존 안에서 기도와 흠숭, 찬미와 보속의 사명으로 온 교회를 위해 날마다 노고중인 교황님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교황님을 위한 전폭적 기도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새삼 교황님의 깊은 신심과 지혜를 엿볼수 있는 기사 내용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세상 통치자들에게 지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의 우리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명심해야할 내용들입니다.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들어라, 깨달아라, 배워라, 귀를 기울여라,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세상 통치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으리라.”
어찌 겸손과 지혜를 추구할 자, 지도자들뿐이겠습니까?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뿐이니 사람 누구나 지혜를 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수이겠습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기도가 바로 자비송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치유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오늘 복음의 열명 나병환자처럼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겸손하고 지혜로웠습니다. 지난 주일 복음은 열명의 처녀들이었고 오늘은 열명의 나병환자들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상징하는 바, 오늘날의 모든 병자들입니다. 도대체 영육으로 병자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송을 바칠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멀찍이 서서 간절히 소리 높여 기도하는 나병환자들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런 자세로 우리 역시 참회와 더불어 자비송으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요약 기도와 같은 자비송이요 이에 근거한 동방수도승들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임종시 바칠 유일한 기도도 자비송 하나뿐일 것입니다. 자비송 기도의 은총의 열매가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지혜입니다.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으로 나병환자 열 모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다음입니다. 아홉이 반쪽의 육신만의 치유였다면 한명은 영육의 온전한 전인적 치유입니다. 그들중 한사람에 대한 묘사가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자비 은총은 차별없이 사마리아 사람까지 이르렀고, 참으로 아웃사이더(outsider) 국외자인 사마리아 사람의 찬양과 감사의 반응이 놀라운 충격입니다. 예수님의 응답이 오늘 복음의 절정을 이루며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과연 우리는 아홉에 속합니까?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에 속합니까? 겸손과 지혜, 찬양과 감사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이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마리아 사람처럼 겸손과 지혜, 찬양과 감사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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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
햇볕 한줌
한 모금 물
몸과 마음
들숨과 날숨
고운 벗들
일과 놀이
나날의 삶
오는 죽음
무엇 하나
당연치 않으니
늘 그렇게
거저 주시는
믿음의 하느님께
오롯이 영광을
희망의 하느님께
오롯이 찬미를
사랑의 하느님께
오롯이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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