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김설희
붉은 고추의 기원은 햇볕의 중심이 생긴 수십 억 년 전의 일이지
적도를 가로지르는 볕의 심장이 달아오르며 뿜어내는 열기
그 무엇도 구울 수 있겠지
계절에 매달린 잎과 열매
열일곱, 스무 살의 피를 들끓게 하지
파도에 밀려온 모래알을 어스러지지 않게 굽지
승냥이와 주인의 이어진 긴 끈을 익혀 인연이라 하지
칸나 얼굴에 핏물 색 스카프를 두른 것도 한여름의 이름이지
되풀이하며 오래 익은 것들은 하나의 이름이 되지
가령, 조약돌 썰물 꽃잎 담장 조카 편지...
이런 이름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볕이 활짝 필 때
마당이고 언덕이고 철길이고 사방으로 발을 뻗치지
새파란 고추는 그 볕의 옷을 끌어 덮으러 자꾸 늦잠을 청하지
그러면 발끝 혈관부터 데우고 몸을 슬슬 달아오르게 하겠지
그러다 가을이 저만치서 짧은 해를 물고 걸어오는 소리 들리면
흙냄새 고인 배춧잎에 어린 메뚜기 두어 마리 앉혀놓고
잇몸이 잘 여문 고추밭에 돌아앉은 여름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