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일 롭 아푸소(본명: 로버트 제임스 아프소)가 뉴욕주 뉴버크에서 출생. 뉴욕주 북부 업스티드에서 자랐으며 3살때 부터 드럼 흉내를 내기 시작!!
태어날때 부터 드럼은 나의 일부였던것 같다. 피속에는 리듬감이 흐르고. -롭-
1964년
2월 29일 데이브 스네이크 세이보(본명: 데이빗 마이클 세이보) 뉴저지에서 출생. 존 본조비와 같은 마을에서 자란 그는 10살 무렵에 존과 안면을 트고 지냈다.
5월 31일 스코티 힐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출생.
학교에서 선생이나 급우들에게 바보취급을 당하기 일쑤였고 난 점점 문제아가 되어갔다. 그때 내게 의지가 되어 준것은 부모님과 록 그리고 기타였다. -스코티-
1966년
2월 29일 레이첼 볼란 뉴저지의 교외에서 출생. 초등학교 6학년때 키스의 진 시몬즈를 보고 반해서 그와같은 악기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등 아르바이트로 40달러를 모아 베이스를 샀다.
볼란이란 성은 18살 부터 사용했다. 티 렉스의 마크 볼란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뜻을 담아 볼란이란 성을 쓰기 시작했다. -레이첼-
1968년
4월 3일 세바스찬 바하가 바하마의 프리보드에서 출생. 후에 1974년 되던해에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3년뒤에 최종적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
1982년
뉴저지로 이사한 롭, 본조비의 드러머 오디션에 참가. 이일을 계기로 스네이크와 알게됨.
14살의 세바스찬은 학교의 댄스 파티에서 레드 제플린의 록 큰롤을 열창하여 단번에 교내 스타로 떠오름.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짜릿한 맛을 잊지 못해 록커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바스찬-
1983년
집을 나온 세바스찬 홀로 런던으로 이주.
아버지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하셔서 가출을 했다. 학교는 모두에게 똑같은 복장을 강요해서 싫었다. 셔츠에 넥타이를 매야하는 제복이 싫어서 나는 교복위에 모터헤드의 뱃지를 달기도 했다. 런던으로 옮긴후 아버지는 보이스 트레이닝에 쓰라며 매주 40달러를 송금하셨다. 이돈은 때로 식비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보이스 트레이닝은 4년간 계속 받았다. -세바스찬-
1985년
세바스찬은 브렛 카이서란 가명으로 밴드 마담 엑스에 가입.
마담 엑스의 멤버들은 모두 서른에 가까왔고 미국의 클럽계에선 꽤 파워가 있어서 그들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록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러니 밴드를 그만 둔거지.... -세바스찬-
레이첼과 스코티, 뉴욕 북부주를 무대 삼아 활동하는 갓센드(GODSEND)의 멤버로 연주. 하지만 이밴드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공연도 잘 잡히지 않았고 밴드의 앞날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30도가 넘는 여름날에 육체 노동을 할수밖에 없었다. -레이첼-
1986년
스네이크와 레이첼이 중심이 되어 스키드 로우 결성. 그후 롭이 가입.
1987년
3월 신데렐라 대신 3일간 본조비의 오프닝에 참가한 스키드 로우는 밴드는 봐줄만 하지만 보컬리스트의 역량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고 보컬을 해고. 11월 카메라맨 마크 와이즈의 결혼식을 계기로 세바스찬을 알게 됨. 멤버들은 돈을 모아 세바스찬의 편도 탑승권을 마련해 그를 불러들였고 클럽 밍글스에서 합주를 하며 의기투합했다. 얼마후 존 본조비와 리치 샘보라가 설립한 뉴저지 언더그라운드와 계약.
스키드 로우로 부터 데모 테잎을 받고 이밴드라면 잘 해나갈수 있을것이라 직감했다. -세바스찬-
1988년
아틀란틱 레코드와 계약. 프로듀서로 마이클 와그너를 맞은 이들은 뉴저지의 작은 차고에서 사전 작업을 마친후 위스콘신 주의 로열 레코더스에서 녹음에 착수.
마이클 와그너는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밴드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프리 프로덕션부터 계속 참가했던 그의 열의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우리의 여섯번째 멤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네이크-
1989년
1월 26일 본조비의 서포트 밴드로 미국 투어 시작. 아메리칸 클럽 투어도 병행.
2월 데뷔 앨범 SKID ROW 발표.
2월 28일 버지니아주 햄튼의 공연에서 성적인 욕설과 외설적인 몸짓을 했다는 이유로 세바스찬이 체포당함. 이후 벌금을 내고 석방됨.
3월 8일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의 공연에서 한 관객이 세바스찬을 향해 'BABY' 란 말을 던진것이 원인이 되어 싸움이 벌어짐. 이 사건은 그 관객을 장외로 추방하는것으로 일단락 되어짐.
3월 15일 본조비와 뉴저지의 메도우랜드 어리너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공연. 이날의 공연에서 스키드 로우의 우상이였던 에이스 프렐리(키스의 기타리스트)가 등장. 무대에 열기를 더했다.
4월 첫 앨범이 골드 획득.
콘서트 일정중 시간을 내서 L.A에서 18 AND LIFE 비디오 클립 촬영.
5월 캐나다 뱅쿠버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HOLIDAY IN THE SUN을 녹음. 이곡은 약물 반대 캠페인 앨범 STAIRWAY TO HEAVEN, HIGHWAY TO HELL에 수록.
머틀리 크루의 앨범 DOCTOR FEELGOOD의 레코딩에 참가한 멤버들은 TIME FOR CHANGE에서 코러스를 넣었다.
6월 16일 펜실베니아 주 존스 타운의 포인트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벌이던중 다시 F로 시작하는 욕설을 발설한 세바스찬이 경찰에 체포됨. 결말은 벌금형. 한편 18 AND LIFE 비디오가 MTV에서 각광을 받으며 리퀘스트 1위를 차지.
7월 본조비와의 투어 마지막날. 본조비의 크루중 한명이 장난을 쳤는데 이를 존 본조비의 소행으로 오해한 세바스찬이 존과 주먹이 오가는 싸움을 벌였으나 곧 화해.
세바스찬, 스네이크, 레이첼은 에이스 프렐리의 앨범 TROUBLE WORKIN'에 백코러스로 참여.
우상인 에이스에 피트 크리스까지..... 꿈같은 녹음이였다. -레이첼-
이달하순, 1집앨범이 플래티넘 획득.
8월 9일 모스크바 평화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소련에 도착.
12,13일 본조비, 스콜피온스, 머틀리 크루, 오지 오스본, 신데렐라, 고르키 파크가 출연하는 레닌 스타디움에서 오프닝을 연주.
스키드 로우는 세계 최고의 밴드입니다. -모스크바 평화 축제의 한 관객-
19일 영국의 밀튼 킹즈 보울에서 열린 야외 공연에 출연하여 유럽 무대에 첫발을 디딤.
20일 런던 마키에서 열린 공연에서 관객이 쇄도하여 그 일대에 대혼잡이 일어남. 공연이 끝난후 호텔에 몰려든 팬들과 대대적인 파티를 가짐.
런던은 정말 멋진곳이야 난 여기서 살겠어!! -세바스찬-
9월 23일 18 AND LIFE가 싱글 차트 4위, 앨범은 차트 6위를 기록.
10월 1집 앨범이 더블 플래티넘 수상.
14일 머틀리 크루의 서포트 밴드로 유럽 투어 시작. 첫 공연지는 서독의 엣센 지방.
11월 1일 머틀리 크루, 화이트 라이언과의 유럽 투어가 런던 웸블리 어리너에서 시작. 이 순회 공연후에는 VAIN을 이끌고 영국 클럽 투어를 돌았다.
11월 6일에는 영국 애딘버러 플레이 하우스에서 공연중 맨앞에서 팔짱을 낀채 우두커니 서 있던 관객이 세바스찬의 비위를 건드려 한바탕 주먹 다짐이 벌어짐.
12월 15일 에어로스미스의 서포트 밴드로 미국 투어 시작.
12월 27일 메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공연에서 관람석에 날아온 병에 얼굴을 맞은 세바스찬, 격분하여 객석으로 돌진. 이때 흥분한 그가 던진 병이 싸움과는 전혀 무관한 한 소녀에게 상처를 입혀서 경찰에 체포됨. 이번의 보석금은 2천달러.
1990년
1월 22일 제 17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헤비메탈 부분 최우수신인상 수상.
3월 L.A의 공연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멤버였던 스티브 존스가 부대에 오름. 존스와 인연이 깊은 멤버는 레이첼로 그의 솔로 앨범에 공동 작곡자로 참여한 경험이 있다.
4월 스키드 로우의 멤버들은 휴식과 함께 2집 준비에 들어감.
5월 4일 2주간의 호주 투어 개시.
5월 27일 위스콘신주에서 벌어진 월드 시리즈 오브 록 페스티발에 화이트 스네이크, 그레이크 화이트등과 참가. 3만 7천명앞에서 치룬 이 공연이 1집앨범으로 가진 그들의 마지막 쇼였다.
11월 스네이크와 레이첼을 중심으로 2집에 대한 작곡이 진행됨.
11월 6일 L.A에서 열린 음악 잡지 RIP의 파티에서 세바스찬은 건즈 앤 로지즈, 메탈리카의 멤버들과 함께 밴드 GAK를 결성하여 라이브를 선보임.
12월 중순 첫 홈 비디오 OH SAY CAN YOU SCREAM 발매.
1991년
1월 존 레넌의 미망인 오노 요코가 중심이 된 GIVE PEACE A CHANCE의 레코딩에 세바스찬, 레이첼, 스코티가 참가. 2집 녹음이 플로리다주에서 시작.
3월 L.A에서 믹스 다운에 들어감.
5월 20, 21일 시카고에서 2집의 첫 싱글 MONKEY BUSINESS의 비디오 클립 촬영.
5월 24일 건즈 앤 로지즈의 서포트 밴드로 미국 투어에 나섬.
5월 29일 2집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첫 등장.
1992년
1월 12일 버지니아주에서 열린 공연에 이날을 끝으로 서포트를 마치기로한 판테라의 멤버들이 엣날 키스의 요란한 분장을 하고 무대에 등장하여 멤버들와 키스의 히트곡들을 연주. 판테라가 떠난 오프닝 자리는 사운드가든이 메웠다.
1월 19일,26일 브라질에서 열린 헐리우드 록 페스티발에 참가(담배회사인 헐리우드의 주최로 이런 이름이 붙었음). 이 공연은 상파울로와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가각 3일간 열렸는데 스키드 로우는 두 공연 모두 마지막날 헤드라이너로 출연.
26일 공연에선 세바스찬은 발목을 다치고 스네이크는 복통을 일으켰지만 큰사고 없이 끝남. 세바스찬과 레이첼은 공연이 끝나고 행글라이딩에 도전.
3월 14일 L.A교외인 라그나 힐즈의 공연에서 앵콜을 할때 건즈 앤 로지즈의 더프와 맷 소럼이 등장, 함께 연주했다. 이 공연의 백스테이지에는 머틀리 크루, 슬레이어, 수어사이드 텐덜시즈, 키스등의 멤버가 모여 마치 친목회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3월 17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공연에 세바스찬의 우상인 롭 핼포드가 가세하여 DELIVERING THE GOOD을 열창.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롭은 후에 스키드 로우의 미니 앨범에 찬조 출연했다.
4월 16일 펜실베니아주 존즈 타운에서 쇼를 가졌는데 공연장인 워 메모리얼 어리너에 한 목사가 나타나 스키드 로우를 비방하며 성서를 나누어 줌. 이에 멤버들은 그 목사를 위선자라며 무시.
4월 29일 뉴욕주의 공연에 판테라의 멤버와 앤스랙스의 스콧 이언이 등장하여 키스의 곡을 연주.
5월 6일 미시건주 카라마즈의 공연에서 한 또라이가 세바스찬을 노리고 폭죽을 던졌으나 폭죽이 미처 무대에 닿기전에 터지는 바람에 11명의 관람객이 화상을 입었다.
5월 23일 위스콘신 주에서 열린 월드 시리즈 오브 록에 판테라, 메가데쓰등과 출연.
6월 12일 미니 앨범 B SIDE OURSELVES 발매. 8월 22일 영국 도닝턴에서 개최된 몬스터즈 오브 록에 참가.
1993년
1월 건즈 앤 로지즈의 서포트로 호주 공연 시작. 한 공연장에 걸려있는 '금주'수칙을 발견한 세바스찬, 발끈하여 무대로 맥주 상자를 끌어내 객석으로 맥주병을 던짐.
2월 9일 뉴욕에서 열린 레이 길런(배드랜즈 보컬리스트) 추모 공연에 참가. 한편 3집을 준비하며 잠잠하게 지내는 이들에 대한 팬들의 문의가 쇄도하자 세바스찬은 이렇게 답했다.
"아침에 일어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곡을 들으며 이를 닦고,운동을 하면서 맥주를 몇잔 마시고 노래를 불러보며 스네이크와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작업을 할수 있는지 알아보고 일정이 맞으면 모여서 일을 한다."
뉴저지에 위치한 그의 집엔 스테레오 설비가 완벽히 되있어서 매일 비행기가 뜨는 정도의 사운드가 나는데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한 세바스찬은 아들 패리스의 청각 보호를 위해 항상 귀마개를 씌워준다고 한다.
3월 새 앨범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 밴드로부터 세바스찬이 열일 제쳐두고 하노이 록스의 전 멤버인 앤디 맥코이와 음반 작업을 한다는 묘한 소문이 발생. 이에 대해 밴드나 매니저측은 묵비권을 행사.
6월 13일 스키드 로우의 세바스찬과 스네이크, 판테라의 다임벡 대럴과 렉스, 와일드 하트의 전 멤버였던 밤 밤으로 구성된 밴드 SEBASTIAN BACH'S ROCK BUDZ가 뉴욕의 클럽 라임 라이트에서 마리화나 합법화를 추진하는 단체를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에 출연하여 30분간 공연.
1994년
7월 4일 플로리다주 덴버에서 열린 독립 기념 행사에 스키드 로우가 출연 신작을 위한 리허설로 야외 무대에 서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라이브를 시도했으나 오래간만의 공연이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더구나 공연 직전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해 매우 긴장했지만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새곡에 대한 반응도 좋아 안심했다는 후문. 한 동안 세바스찬과 스네이크의 불화 소문이 있었고 사실 두사람이 크게 한바탕 한적도 있었지만 곧 화해했다고.
정말 해체까지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갑자기 밴 헤일런이 떠오르더군요. 데이빗 리 로스가 탈퇴할 무렵의 벤 헤일런 말입니다. -롭-
22개월 동안 투어를 돌던 스키드 로우는 정말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하지만 유난히 뜨거운 피를 자랑하는 세바스찬은 아직도 세계를 한바퀴 돌수있는 에너지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빨리 보통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립감을 느낀 세바스찬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씨바...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군.... 난 외톨이라구..."
그의 이 말한마디에 매스컴은 부지런히 돌아갔고 세바스찬의 말은 점점 부풀어져 밴드의 해체설까지 이르렀다. 매스컴이 계속 오버를 해대자 다른 멤버들은 불안해졌다. 투어로 인해 누적된 피로는 스트레스를 불렀고이로 인해 밴드가 원만하지 못한건 사실이였다. 스네이크와 세바스찬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잦은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팀을 깨?
좃까는 소리였다. 이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라이브를 찍은 비디오를 함께 봤다. 산처럼 모여 물결처럼 움직이는관중과 별다른사인없이 마음을 통해 쇼를 이끄는 밴드...... 어렵게 얻은 이 소중한것들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더라도 재고해야 했다. 멤버들의 불화는 이렇게 지나간 일이 되었다.
298장... 매니저의 말에 난 고개를 떨구었다. -세바스찬-
세상은 변했다. 코드 몇개만 알고도 음반을 발표할수 있고 유명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열렸고, 젊은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웨인과 가스 콤비는 에어로스미스, 킴 베이싱어등의 인기인들을 등장시켜 웨인즈 월드 2를 내놓았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제는 흠흠.. 킥킥.. 거리는 비비스와 벗헤드가 주도권을 잡은것이다. 일선에서 뛰는 스키드 로우는 변화를 몸으로 느꼈다. 그들은 현시대에 환영받는 그런지가 명백히 아니였다.
94년을 맞으며 매니저인 독 맥기와 멤버들은 한 해동안 B사이드 앨범이 얼마나 팔릴것인지 내기를 했었다. 하지만 그 앨범은 나온지가 2년이나 지났고 지금은 그런지류가 인기를 얻는 시대라서 어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리의 음반은 얼마나 팔렸을까. 94년이 지난뒤 독은 모두 모인 자리에서 판매량을 발표했다. 298장......
세바스찬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구나... 풀이 죽은 멤버들의 머리위로 장난기 어린 독의 목소리가 지나갔다.
"거기다 곱하기 1000"
결론은 298,000장이였다. 정규 앨범도 신보도 아닌데 롤린스 밴드나 홀등의 신보와 비슷하게 팔린것이였다. 이소식은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타를 들고 나타난 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봐 당신은 프로듀서로 온거 아냐?" - 세바스찬-
멤버들은 새로운 시도를 원했고 변신을 위한 제 1보로 프로듀서를 바꾸기로 했다. 멤버 전원의 찬성을 얻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밥 록이였다.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밥은 자신의 실력을 십분 활용해 기타 컬렉션을 두 기타리스트에게 개방해 맘껏 새로운 시도를 하게 했다.
세바스찬에게는 그의 야생마같은 성대를 잘 조련하여 능수능란한 보컬리스트로 재탄생시켰다.
멤버 모두 밥의 작업에 매료 되었지만 특히 레이첼은 배운바가 컸다. 신인 밴드 갓스피드의 데뷔작을 프로듀스했던 그는 밥의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경험을 공유했다.
94년 10월부터 캐나다 뱅쿠버에서 레코딩을 시작한 스키드 로우는 1995년 3월 14일에 공식 3집 앨범인 SUB - HUMAN RACE를 발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