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봉교회 (유관순생가)
3·1운동 때 유관순이 6개 군을 이끌어 아우내 장터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옥중에서 일본군의 모진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중기도와 만세를 부르다 순교한 유관순의 젊은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화여고 유관순기념사업회가 유관순열사기념교회당을 지었고 그의 생가를 복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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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천안 매봉 교회 ◈◈ ◈
▣ 매봉 교회 역사 ▣
매봉교회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1리 338-6에 위치해 있습니다.
옛 이름은 '지령리'라고하며 지금은 '용두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지령리는 산이 서쪽으로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으므로 산서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옛부터 산이 에워싸고 물이 돌아 흘러서 인물이 많이 날 땅이라 하여 지령리라고 불러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천이란 말도 순우리말로 하면 '아우내','아오내','아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름이 생기게 된데는 병천을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이나 봉우리들에게서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모두 병천에 와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천이 이곳에 와서 서로 아우르고 있는 자연 때문에 아우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아우내 장은 병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장의 개설은 1720년대 조선조 영조 때의 암행어사인 박문수가 조상의 묘 앞에서 시장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령리에 복음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그후 1901년에는 박해숙 전도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도처에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이름 아래 소위 을사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목적아래 시작된 의병운동은 먼저 지식인들에 의해서 항일 언론운동이 일어났고,
그리고 아울러서 애국적 유생들과 종교계 또는 전직 관료들에 의해서 상소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러한 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되자 이러한 의병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일본군이 도처에 파견되어 진정시킨다는 이름아래
갖은 횡포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일학교를 세워 ①농촌계몽 ②미신타파 ③문맹퇴치 ④독립운동
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의연금을 모아 대한매일신문사에
보내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한 숫자는 82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교회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자 다시한번 매봉교회를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도하다가 드디어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운동에는 전교인이 참여하였고,
결국 교회는 집회금지령이 내려졌고, 있던 교회마져 불살라지고 말아 해방이 될때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1967년 이화여고에서 동창생들이 모여 다시 교회를 세웠으며,
현재 교회는 1998년 기독교 대한 감리회 남부연회에서 모금하여 다시 건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