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7월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요즈음 뜨고 있는 주몽드라마를 보며
소서노에 대한 생각을 몇가지 적어봤는데, 너무도 할 이야기가 많은
주제를 간단히 적다보니 오히려 부족함만 보이는 듯합니다.....
------------------------------------------
소서노
서정록
요즈음 결혼하는 젊은 여성들은 시가보다는 친정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원한다. 신랑들도 대개 이런 신부의 바람에 동조하는 추세다. 시댁의 어른들도 굳이 며느리와 함께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예전처럼 시부모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보니 공연히 며느리와 함께 살며 눈치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현대판 처가살이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이미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여성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가부장제(家父長制)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땅에 가부장제가 정착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 불과 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땅의 오랜 가족제도는 ‘모권제(母權制)’였다. 모권제라고 하면 혹자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잘 나뉘어져 있다. 가정의 대소사와 살림, 교육, 조상을 모시는 제사 일 등은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고, 대외적인 정치, 외교, 군사, 거래 등은 남자들이 맡아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이 대외적인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가문의 의사를 물어 수행했으니,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던 화백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부족들 간에 일이 있을 때, 각 부족의 남성지도자들은 가문과 부족민, 그리고 최고 어르신들 - 당연히 여성이다 - 의 의사에 따라 다른 부족들의 대표들과 조율하여 만장일치로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때도 그랬고, 고려 때도 그랬고, 조선조에서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그랬다. 이런 모권제 하에서는 가문의 혈통과 전통의 계승이 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자연히 딸들을 시집보내기보다는 대신 사위를 맞아들였으니, 장가든다는 말 또한 여기에서 유래했다. ‘장가(杖家)든다’는 말은 ‘장인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처가살이의 결혼풍습이다. 고구려에서는 사위를 맞게 되면, 집 뒤편에 사위가 거처할 집(壻屋)을 새로 짓거나 사위가 거처할 방(壻房)을 내주었으니, 사위를 김서방, 이서방 등으로 부르는 풍습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요즈음 뜨고 있는 주몽드라마에는 소서노라는 여성이 나온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 지역의 군장이었던 연타발의 딸인데, 주몽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즉, 그녀에게 장가들므로써 비로소 나라를 세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 주몽은 자신의 수족과 동료 겨우 몇을 데리고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온 떠돌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이 그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소서노와 결혼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서노는 연타발 군장의 딸인 동시에 졸본의 부여계 부족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다. 아마도 소서노의 큰 딸이었을 것이다. 결국 주몽은 소서노와 그녀의 가문, 그리고 졸본의 부여계 사람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도 정치를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 소서노 가문에서 필요한 재원을 댔던 것이다.
당시는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와의 갈등 등 사회가 혼란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가문을 지키려면 아들들을 잘 키우는 것 못지않게 출중한 남성을 사위로 맞는 일이 중요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외적인 정치와 외교, 군사, 거래 등은 남성들이 전면에 나서 처리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권제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을 강인하면서도 내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의 전통시대의 모권제와 같은 풍습을 갖고 있는 북미 인디언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가정의 대소사는 여성들이 다 처리하고, 남성들은 오직 사냥하는 일과 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로서 신체를 단련하는 일, 그리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케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여성보다 더딘 남성의 영적 성장을 돕는 것은 물론 부족과 가문을 지키는 강건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성숙한 남성으로 키워냈던 것이다.
(비나리를 하는 고구려여인.... 필시 가족과 가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빌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은 고대 동북아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인들은 사내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경당(?堂)이란 학교에 보내, 글을 배우고 말타고 활을 쏘는 법을 배우게 했다고 중국의 역사서들이 전하고 있는데, 귀족과 서민의 자제들을 신분차별없이 똑같이 경당에 보내 문무를 연마하게 한 이 제도는 당시로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인들은 사내들이 많은 시간을 영적 성숙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이 본래 신궁(神宮)의 제사를 모시던 이들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기운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며 영적 탐구에 많은 시간을 썼다는 점을 보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권사회는 한편으로는 여성을 가정과 사회의 중심에 두면서 - 그래야만 가정과 사회가 평화롭고 협동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들을 강인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물로 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모권제 하에서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처가살이를 하던 남성들은 자연히 처가의 눈치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보리가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우리의 속담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사위는 사위일 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위는 처가의 부족회의, 가문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필요할 때 조언은 해도 직접 관여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가의 일은 처가의 여성들과 남자들이 모여서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사위도 자신의 본가에 일이 있을 때는 본가에 가서 본가의 여성들과 함께 논의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녀의 관계는 애정이 중심이 된다. 요즈음의 결혼이 애정관계로 시작했어도 가족관계, 아이문제, 경제관계 등 모든 게 얽혀들기 마련인데 반해, 당시의 결혼은 애정이 식으면 남성이 떠나거나, 또는 여성이 내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아이가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으레 여성의 가문에서 키우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권사회의 특별한 점의 하나는 딸들이 (사촌조카들을 포함해서) 내 아이, 네 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내 자식처럼 대하고 돌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모도 엄마, 5촌 당숙 아주머니도 모두 엄마다.
소서노가 주몽과 만날 당시는 그랬다. 그래서 연인이 떠나면 남은 사람은 님이 언제 다시 돌아올까 목마르게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더러 이런 기다림에 시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 애정관계는 삶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곁에 늘 살가운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애정보다는 가문과 가족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으니, 나중에 주몽의 전처소생인 유리가 나타났을 때, 소서노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주몽의 곁을 떠난 일이 그것이다. 아마도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소서노가 여걸이라 주몽이 전처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을 참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곁을 박차고 떠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당시는 고구려의 기틀이 어느 정도 다져진 뒤라 주몽이 왕가의 중심에 있었다. 주몽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소서노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소서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있으면 왕비의 지위에는 흔들림이 없겠지만, 두 걸출한 아들 비류와 온조는 생명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장차 왕이 될 태자가 되지 못한다면, 왕자의 신분이란 오히려 태풍 앞의 촛불처럼 생명을 위협당하는 불안한 신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서노는 결단을 내린다.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위해서 그들이 장차 큰 뜻을 펼 수 있도록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마침내 결심이 서자 소서노는 주몽을 뒤로 하고 자신의 가문을 거두어 두 아들과 함께 한강유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다.
애정보다는 가문과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했던 소서노, 바로 그것이 모권시대 여성들의 모습이다. 결코 소서노가 여걸이어서 남편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댓글 그렇군요!! 요즘 주몽드라마를 보며 소서노 팬이되어 가고 있는데,,,,고맙습니다.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으로 어머니는 제게도 고향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련해주어야 했기에 떠났다.' 그럴 수 있는 어머니 이기를 바래봅니다.
제가 혼동하고 있는 것인지요?
검은호수님께서 쓰신 글(제가 나중에 찾아보겠습니다) 어느 글에서는
가부장제가 이 땅에 정착한 것이 임진왜란 이후라고 하신 것으로 기억되서요.
(저 위 둘 째 paragraph의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삼국시대부터 이미 왕족 내에서는 가부장제가 도입됩니다. 신라는 모권제를 유지하다 훨씬 늦게 가부장제로 돌아서고요. 물론 백성들은 모권제를 유지하지만요....
@검은호수 고맙습니다.
오늘을 비님 오셔서
수확해서 익힌 도마도로 겨울양식을 준비하느라 실내에 있습니다.
화로와 이곳을 왔다갔다 하면서
(오늘 그릇 안태웠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다죠)
소서노의 결단 뒤에는 그런 대의가 있었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