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금) 타이티를 떠나 웨스턴사모아(파고파고)로
새벽4시경 잠이 깨었다. 조용한 아침이다. 헤드렌턴을 착용하고 밖으로 나가 어제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물통과 연료통을 선실창고와 갑판에 잘 묶었다. 계류줄로 썼던 로프를 정리하고 휀더도 모두 콕핏 아래 창고에 넣었다. 그런 다음 아침을 만들어 먹었다. 6시가 좀 못된 시각이었다. 아직도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산호초를 빠져 나가도록 설치되어 있는 항로유도등이 더 잘 보였다. 엥커부이에 묶여있던 밧줄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4천마일 이상되는 먼 길을 항해해 와서 단 20시간을 머무르고 출발하는 최초의 어리석은 요트가 아닐까? 카나리아에서 그리고 우슈아이야에서 조금만 더 시간을 절약했더라면 최소한 몇일을 쉬었다고 떠날 수 있을 터인데 태풍시즌이 눈앞에 있으니 마음은 바쁘기만하다.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타이티섬에서 서쪽으로 8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모네아섬이 아침햇살을 받아 점점 밝아졌다. 깍아놓은 듯 험악한 산세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벼운 남서풍이 불어와 파도가 1미터쯤 일고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씩 무리를 이루어 바다수면에 거의 붙어서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마치 정글을 나는 아파치헬기같이 민첩하고도 정확하게 파도를 타고 넘었다.
타이티에서 사모아까지는 1,232마일이다. 9-10일쯤 걸릴 것이다. 타이티까지 4천마일 넘게 항해해 와서 이번항해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지만 이번 항해거리도 한국에서 필리핀까지의 거리와 맞먹을 정도로 먼 거리다. 엔진 스타트모터가 고쳐져서 엔진을 가동하면 80A 고성능 발전기가 충전을 한다. 그래봐야 스타터모터가 고장 나기 전의 상황이나 달라진 것이 없지만 한층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정전되었다 전기가 들어오면 전기가 있는 고마움이 훨씬 더 느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모네아섬을 남쪽으로 지나 사모아쪽으로 항로를 바로 잡고 나아갔다. 시간이 갈수록 타이티섬이 점점 작아지더니 오후3시경이 되어서는 옅은 해무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항로 남쪽에 위치한 마이하오섬이 점점 선명해졌다. 낮에는 선실에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워졌다. 타이티까지 오는 동안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차가운 해류가 남쪽에서 칠레연안으로 타고 올라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리쬐는 태양열에 따뜻하게 데워져서 전체적으로 온도가 더 올라가는 것 같다.
불안정한 날씨다. 비구름이 많이 형성되어 그 구름이 다가오면 바람이 강해지고 비가 왔다. 그런 다음 또 맑아지긴 하지만 구름들이 주변에 상당히 많아졌다.
저녁 6시경에는 60마일쯤 떨어진 라이에티섬이 수평선과 낮은 구름 사이에 석양을 등지고 그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비가 내렸다.
낮동안 몰려다니던 구름이 밤에는 완전히 사라져 레이더에 잡히는 일이 없어 편안한 밤이었다.
4월9일(토)
아침 6시 10분에 일출이 시작되었다. 푸른창공을 열로 있는 하늘 주위로 수세비를 뜯어 붙여놓은듯한 구름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타이티까지와 다른점이 있다면 구름들이 더 두꺼워지고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이다. 태양이 수평선을 박차고 올라오자마자 뜨거운 햇살이 콕핏으로 내려쪼인다. 본격적인 더위를 느끼게 한다. 선실의 창문을 모두 열고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아침부터 선풍기아래 앉아 있는다. 물을 작은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사과도 씻어 넣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이정도면 사모아에 도착하면 얼마나 뜨거울까? 하지만 파타고니아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따뜻한 남태평양이 아닌가!
한낮이 지나면서 바람이 약해져서 엔진을 가동하고 나아갔다. 엔진을 사용할 수 없으면 오늘 같은 날씨에는 동동 떠 있어야 한다. 사모아까지는 1030마일 남았다.
4월10일(일)
새벽4시경 비구름이 몰려와서 레이더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구름더미 밑에 어선인듯한 선박이 한척 있었다. 사모아에 한국 어선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한국말로 한번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하기야 여기서 사모아까지 아직 천마일이나 남았으니 이곳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여기저기 비구름 덩어리가 산재해있는 가운데 일출이 시작되었다. 김치찌개를 끓여서 아침을 준비했다. 김치가 시그러워져서 그냥 먹기 보다는 찌개를 만들어 먹는 편이 먹기가 수월하다.
‘자~! 이제 두 밤을 보냈다. 일주일만 더 가면 사모아다!’
사모아는 한국 어선단의 전진기지가 있다고 하고 또 한국교민들로 500여명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식품점도 있다고 하니 사모아에서 제대로 된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고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부푼다.
4월11일(월)
새벽2시부터 비구름들이 산발적으로 모여들어서 레이더 알람시스템을 사용할 수가 없어 제대로 잠을 잘수가 없었다. 구름이 많아 7시가 넘어서 해가 구름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쯤 좌현쪽에 큰 비구름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아래 쌍무지개가 떴다. 왼쪽의 무지게는 ‘보남파초노주빨’ 오른쪽 무지게는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후 오른쪽 무지게는 사라지더니 왼쪽 무지게가 구름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높게 올라간 무지게는 처음 보았다.
바람은 뒤에서 불어오고 긴 너울은 남쪽에서 다가왔다. 오늘도 평범한 남태평양의 날씨이다. 마케사스에서 사모아부근까지는 11월부터 3월까지가 스톰시즌이어서 스콜성 폭풍이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4월도 역시 스톰스즌에 들어가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자면 태풍이 12월에 발생할 확률과 비슷하다. 오후5시 한국과 4시간 시차가 나는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4월12일(화)
한낮의 선실온도가 34도까지 올라갔다. 남풍이 불때는 좀 서늘하다가도 동풍이나 북동풍이 불면 열기가 바람을 타고 몰려왔다. 해가 지고 밤에는 배가 부르기 시작한 달님이 중천에 떠 뱃길을 밝혀주었다.
4월13일(수) 타이티 출항 6일째 항해(남은 거리 552마일)
시간을 한 시간 당긴 탓에 일출은 5시 55분에 시작되었다. 시계를 조정하지 않았다면 6시 55분에 해가 떳을 것이다. 하루가 24시간이고 지구한바퀴는 360도이다. 그래서 한 시간의 거리는 15도가 되는데 현재위도에서는 그 거리가 870마일이다.(적도에서는 900마일) 인트레피드가 하루 약 130마일씩 서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하루에 9분씩 일출시각이 늦어지는 것이다. 동지와 하지가 되어 해가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시각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 속해있는 북반부에서는 하지로 다가감에 따라 해가 길어지고 있지만 반대로 남반부에서는 해가 짧아지고 있다.
4월14일(목)
밤에는 바람이 완전히 사라져서 장판과 같은 바다가 되었다. 아침이 되자 미약한 동풍이 일어 해면에 잔 파도가 일었다.
4월15일(금) 타이티출항 8일째(남은 거리 278마일)
아침 최저온도는 31도였고 낮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갔다. 시간이 잘 안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칠레에서 출발하여 타이티에 잠깐 쉬었다 온 것뿐 항해가 계속되고 있다. 사모아에서는 며칠간 육지에너지를 충전하기 때문에 다음 항해는 조금 수월할 것 같다.
4월16일(토) 사모아 파고파고항 도착 하루 전
만월이 되어가는 달님 덕분에 아침 5시까지 바다가 훤했다. 사모아섬에서 140여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환초섬 로즈아일랜드를 10여마일 떨어져 지났갔다.
아침부터 북풍이 계속불어와 배의 속력이 6노트를 오르내렸다. 정오가 지나고 나서 멍하니 콕핏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앞쪽 저쯤에 섬이 하나 보였다. 40마일 떨어진 타우섬이었다. 가이드북을 보니 산의 높이가 963미터였다. 타우섬은 사모아 파고파고항에서 70마일 동쪽에 있는 섬이다.
하늘에 옅은 구름이 깔려있어 노을이 더욱 붉었다. 낮의 기온은 35도였고 저녁에는 33도로 떨어졌다.
4월17일(일) 아메리칸 사모아에 도착하다.
새벽2시경 사모아 투투이라(Tutuila)섬 서편에 있는 등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달빛아래 섬의 윤곽도 어른거렸다. 섬에 도착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활동을 하려면 잠을 좀 푹 자두는 것이 좋겠지만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날이 샐 때까지 깨어있었다.
아침부터는 섬에 바람이 가려 해면이 거울처럼 변했다. 그리고 아카시아 향과 비슷한 내음이 미풍을 타고 날아왔다. 8시경. 파고파고 포트컨트롤을 불러 한시간 후 접한 할 예정이라고 입항통보를 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열려있는 만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서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파고파고 부두에 9시경 도착하였다.
배를 세관부두에 계류한 뒤 입항수속을 진행하였다. 검역과 세관, 항만관계자등 모두 5명이 나와서 각각 크루리스트를 한 장씩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특별수당으로 20달러씩 두 사람, 25달러씩 두 사람해서 90달러가 들었다. 수당은 공식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3명만 20달러씩 달라고 했고, 조금 후에는 4명으로 늘어났고 잔돈이 없어 두 사람에게는 50달러를 주고 10달러를 거슬러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한 명당 25달러라고 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입항허가를 받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계류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항만관리인은 항구 제일 안쪽에 엥커를 내리라고 했지만 닻을 끌어올리는 윈드라스는 고장나있고 고무보트에 엔진을 장착하기 위한 거치대도 파타고니아에서 유실되었기 때문에 어디가 되었든 안벽에 배를 붙이고 싶었다. 작은 배들을 위한 마리나 시설이 있었는데 그곳은 금년 1월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시설물들이 파손되어서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콘크리트 안벽은 무사했는데 그곳은 이미 어선들과 먼저 온 요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인트레피드가 길잃은 강아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항만관리인으로부터 무전이 와서 세관부두에 있는 모터보트옆에 배를 대어도 좋다고 하여 배를 돌려 나와 세관부두로 가서 배를 대었다.
배들 대강 정리해두고 카메라와 여권, 그리고 지갑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세관부두 출입구쪽으로 나왔다. 그곳의 경비실에는 덩치 큰 사모아인이 둘 근무하고 있었는데 친절하지는 않았다. 세계 어느 곳이나 동양인을 약간 얕잡아 보는 성향이 있다.
세관부두를 나와 마을쪽으로 걸어갔는데 일요일이어서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택시기사에게 한국식품점을 아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하였다. 그곳까지 3불을 주고 그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기사가 알려준 그 상점에 들어갔더니 한국식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중국사람이 하는 가게였다. 택시기사가 보기에는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다 같은 동양인으로 보인듯하다. 그 상점을 나와 수소문 끝에 한국사람이 운영한다는 상점을 찾아갔다. 그 가게는 큰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장을 없고 임산부인듯한 필리핀 여자가 둘이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장은 일리일리에 있는 교회에 갔다고 하였다. 교회에 가면 정보를 얻기가 수월할 것 같아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일리일리는 섬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파고파고에서 차로 30분거리였다. 일요일은 버스가 다니지 않아 택시를 타고 가려했지만 요금이 20불이라고 해서 단념하고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을 얻어타고 부근까지 갔고 그곳에서는 택시(5불)로 사모아 한국인 교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어서 어른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과 얘길 나누면서 예배가 끝나길 기다렸다. 아이들은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묻고는 주위를 빙둘러 모여서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대로 얘기를 해주었는데 아이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염치불구하고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비록 헌금을 보태기 못했지만 점심을 해결했다. 그곳에서 한국분들도 많이 만나고 돌아올때는 파고파고로 돌아가는 아주머니의 차을 얻어타고 왔다. 친절한 아주머니 덕분에 오는 길에 한국식품점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요일에 술을 구입할 수 없게 되어있었는데 아주머니의 조카며느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비밀리에 맥주를 몇병살 수 있었다. 일요일에 술을 팔면 벌금이 물어야 한다고 하는데 평일에도 밤늦은 시각에는 술을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이 하도 술을 많이 먹어서 나라에서 관리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리일리로 가는 도중 도로변에 버스정류소보다 교회가 더 많았다. 성당과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배로 돌아와서 구입한 식료품 중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나머지는 수납장에 보관하였다. 다시 걸어서 마을을 다녀왔다. 한국 사람이 운영한다는 가게에도 가볼겸 다리운동도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서 몇 가지 식료품을 더 샀다. 젊은 주인장께서 고맙게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주어 사모아에 있는 내내 배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사모아는 어선들이 많고 그 어선들이 잡아오는 참치로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과 배수리 공장이 이 섬의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 한다고 했다. 관광지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별로 갈만한 곳도 없고 해서 내리쪼기는 햇빛을 받으며 터벅터벅 배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선착장에 들렀다. 어선들은 ‘청명’ ‘미진박’ ‘그로리박’ 등 한국식 선명이었다. 선원들은 통가나 필리핀 중국 사람들이지만 선장은 한국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일요일이어서 만날수없었다. 안쪽 선착장에는 미국적 요트들이 5척 계류하고 잇었다.
5시경 배로 다시 돌아왔다. 빈 물통에 물을 채워서 배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모터보트와 견인선을 건너서 옮기느라 온몸이 땀 범벅이 되었다. 샤워를 하고 시원해진 맥주를 꺼내 마셨다. 해가 지고 나서는 빨래감을 들고 나가 수돗가에서 수많은 모기에 강제헌혈을 당하면서 빨래를 했다.
4월18일(월)
9시경 항만관리소에 찾아가서 입항등록을 했고 그 서류를 세관에 건네주었다. 그러곤 어선부두로 찾아갔다. 며칠 남지 않은 출어날짜에 맞추어 분주히 일들을 하고 있는 어선선장들을 만났다. 남해사람이 많고 나머지는 부산사람들이었다. 특히 남해출신 선장들이 많았다.
‘혹시 남해분이면 물건리에 이정태라고 압니까?’
‘예에! 정태하고 친구입니다. 정태를 우째 압니까?’
청명703호 선장 최은호씨와 미진박호 선장 김한용씨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 예! 사회친구죠. 나이는 저보다 2살 연배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만나면 같은 한국 사람인 것으로도 반가운데 친구의 친구라니 더욱 반가웠다. 낮에는 일들을 하느라 바쁘니 저녁때 술이라도 한잔하기로 하였다.
어제 교회에서 만난 김관숙님(78세)이 점심을 초대해주었다. 김관숙님은 40여년 이곳에서 어선과 관련된 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어선부두 바로 앞에 있는 ‘숙스시’라는 일식집을 소일삼아 운영한다고 했다. 한참 이곳에 배가 많을 때는 배가 300여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좁은 항구에 한국어선이 300척이나 있었다고 하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숙스시’에서 스시와 갈비로 점심을 잘 먹었다.
오후에는 항만관리자가 배를 옮기라고 해서 한국 어선들이 있는 곳으로 배를 옮겼다. 어선들이 3척이나 겹겹이 대어져 있는 바같쪽에 배를 정박해서 한번 밖으로 나가려면 쉽지 않았다.
오후에는 어선선주 한분과 식료품을 좀 더 구입하러 슈퍼로 찾아갔다. 가는 도중 한국분이 운영하는 선용품가게에 들리게 되었는데 낚시바늘부터 무전기, 베어링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물품들이 있었다. 그곳 사장께서 야자수 씨앗을 4개 챙겨주었다. 배에서 키우다가 집에 가져가면 아주 근사한 정원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리일리 한국슈퍼에 가서 건오징어4마리, 물냉면(3인분) 2개, 된장1통, 등등 필요한 부식을 좀 더 샀다. 슈퍼에서 만난 한국분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고 그곳에서 김치 2킬로 그램을 얻었다. 그리고 같이 간 어선선주께서도 2킬로쯤 주어서 이제 한국까지 김치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저녁에는 물건출신 선장인 최은호씨 일행과 늦께 까지 맥주잔을 기우렸다.
4월19일(화)
오전에는 오일독(Oil dock)으로 가서 연료를 채웠다. 그리고 남쪽으로 1킬로쯤 떨어진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입국도장과 출국도장을 동시에 받았고 세관으로 돌아와 출입항수수료 100달러, 정박료 67달러를 지불했다. 출입항 수수료는 일반상선과 동일금액이고 정박료를 지불하면 3개월간 머무를 수 있다고 했다. 3일 있다 가기에는 출혈이 좀 크다. 그러나 이 먼 이국땅에서 한국사람들이 만날 수 있고 한국식품도 구입할 수 있는 행복에 비할 수 있을까?
어선정박장 건너편에 한국슈퍼에 좀 더 많은 한국식품이 있다고 해서 가서 라면10개, 배추1개, 오란다과자, 미역1봉, 재첩국(2인분)2봉, 인스탄트 북어국1개, 콩300그램(밥에 섞어),등등 추가로 구입하였다.
저녁무렵에는 미진박호 정한용선장 부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맥도날드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애기를 나누었다. 부인이 62년생으로 나와 동갑내기였다. 고향이 구포라고 했다. 내 고향은 낙동강 다리를 건너 대저이다. 구포라고 하기에 김수곤씨(전 부산요트클럽회장)을 아냐고 하니까 안다고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곳 사람들은 두 번 건널 것도 없이 한 다리면 건너면 다들 아는 사람이었다.
아메리칸 사모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활성화된 해외송출 어선의 시범지역으로 서 많은 일을 해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잡히는 참치는 현지 공장에서 캔으로 만들어 세계각지로 수출된다고 한다. 초기에 한국 배들이 점점 늘어나 수백척에 이르자 원주민들이 반발해서 87년 한때는 원주민과 한국선원들 사이에 전쟁(돌맹이와 각목이 무기)이 일어나기도 했다는데 그런 사고와 더불어 여러 가지 사고로 이역멀리에서 선원들이 목숨을 많이 잃기도 했다는데 이곳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선원을 위한 한국선원묘지가 따로 있다고 한다.
정한용선장의 말에 따르면 10명 정도의 선원과 조업을 나가 2개월간 생활하는데 선원들이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선원들은 월급을 받지만 선장은 월급이 따로 없고 수확량의 퍼센트를 계약한다고 했다.
선장이 되기 우해서는 고기를 잘 잡는 게 가장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곳 미국령에서는 별도로 선장면허가 없어도 된다고 하였다. 고기가 항상 잘 잡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도박성이 있는 일이라고 한다.
저녁에는 ‘숙스시’에 가서 작별인사도 드리고 고마움의 답례로 한국섬일주를 하면서 지은 ‘뱃길지도를 그리다’를 한권 선물로 드렸다. 육지에 있는 시간들은 살같이 흐른다. 내일이면 출항이다.
4월20일(아메리칸 사모아를 떠나 투발루의 환초섬 푸나푸티로
출항하는 날에는 언제나 약간의 긴장이 따른다. 아침에 눈을 뜨니 4시였다.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출발준비를 했다. 6시쯤 주위가 밝아왔다. 어선에서 배를 떼어냈다. 새벽아침 조용한 바다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파고파고항을 빠져나왔다. 배웅을 받고 출발하는 것 보다는 이른 아침에 조용히 빠져나가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안전한 포구에서 또 다시 먼길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잠들어있는 항구를 빠져나오는 것이 덜 쓸쓸하다. 투발루(Tuvalu)의 수도인 환초섬 푸타푸티까지 거리는 약 700마일이다.
파고파고항을 빠져나와 북동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섬에 가려 바람이 없어 해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배가 지나간 곳에 자국이 길게 따라왔다. 섬을 우측에 두고 북쪽으로 약간 나아가다 서사모아섬의 북쪽 해상의 향해 선수를 맞추었다.
9시30분경 내려놓은 낚시에 소식이 왔다. 얼른 낚시줄을 잡아채고 당겨올렸지만 올라오다 중간에 떨어져 버렸다. 그 후론 통소식이 없어 아까 그 녀석이 죽다 살아온 이야기를 죄다 퍼뜨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 시간쯤 뒤에 소문을 못들은 다랑어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길이는 40센티에 무게는 1킬로쯤 되어보였다. 녀석을 끌어올려 즉시 다듬어 냉장고에 넣고 낚시는 철수하였다.
아침 겸 점심으로 파고파고에서 구입한 재첩국을 끓여 해결했다. 그리고 두어시간쯤 지났을 무렵 마른오징어를 한 마리(총4마리) 구워먹었다. 먹거리가 풍부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아메리칸 사모아와 서사모아와의 거리는 약 50마일이지만 파고파고항과 아피아항의 거리는 80마일이다. 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돛을 활짝 펼치고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사모아까지는 거의 서쪽으로 향해했지만 이제 부터는 한국을 향해 북서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달리는 만큼 한국과의 거리도 줄어든다.
오후부터는 바람이 좋아져서 6노트를 오르내렸다. 밤10시경. 서사모아의 수도인 아피아항의 불빛이 어두운 섬의 한가운데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낮동안는 비구름이 많이 몰려다녔지만 밤이 되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북두칠성과 남십자성, 독수리자리들 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름달이 되었던 달이 점점 줄어들어 이제 반달크기가 되어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바다를 환하게 비추어준다.
4월21일
아침이 되었는데도 달이 중천에 떠있다. 세일링하기에 충분한 바람은 아니었지만 날씨는 정말 평온했다.
4월23일(날짜변경선을 넘어서다.)
한국과 시간대가 3시간 차이나는 지역대로 들어왔다.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계산하기 편하게 4시간차이가 나는 걸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한국보다 20시간이 늦은 지역이었다. 부산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지구의 자전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감에 따라 시간대를 지날때마다 1시간이 덕을 보게 되었다. 이제 날짜변경선을 지남에 따라 실제로 3시간 빠르게 되었지만 4월22일은 사라지고 4월21일에서 4월23일이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으로 나아감에 따라 다시 시간대를 넘을때는 1시간씩 늘어난다. 결국 하루가 사라졌지만 지구를 서쪽으로 돌면서 시간대를 건널때마다 1시간씩 24시간을 더 보낸 것이다.
4월24일
뒷 바람이 12노트로 불었고 배의 속도는 5.5노트였다. 아침최저기온은 32도였고 낮 최고기온은 35도였다. 점심때는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남태평양의 동쪽은 기압이 1,020밀리바보다 조금 높은 편이었는데 서쪽으로 오니 대체적으로 1,010밀리바 아래도 내려갔다.
저녁 무렵 출발하고 처음으로 배 한척을 보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 중인 어선이었다. 선박위치송수신시스템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곳 참치잡이 배들은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혹시 배의 움직임을 보고 고기가 있다 싶으면 주변의 배를 끌어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월25일
북풍이 불었다. 푸나푸티를 75마일쯤 남겨두고 저녁이 되었다. 투발루의 남쪽 환초인 누쿠라에라에(Nukulaelae)를 지났고 곧 밤이 되었다.
4월26일(투발루 푸나푸티에 도착하다)
아침7시경 푸나푸티에 접근하여 산호초섬 사이의 수로를 따라 환초안으로 들어갔다. 환초안쪽의 수심은 충분했지만 중간 중간에 암초가 있어서 그 암초 사이사이로 조심스레 나아갔다. 무전기로 항만관리인을 몇 번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때쯤 검은 구름이 다가와 장대같은 비를 뿌렸다. 배를 잠시 멈추고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20분쯤 퍼붓던 비는 구름이 남서쪽으로 물러나자 올 때처럼 느닷없이 사라졌다.
8시30분경 상선2척, 어선3척이 정박되어있는 푸나푸티부두에 접안하였다. 요트를 위한 시설은 따로 없고 일반 배를 위한 시설이어서 콘크리트안벽과 배의 높이가 맞지 않아 밧줄로 배가 안벽과 적당한 거리를 둘수 있도록 했다. 어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중국어선이 두척, 피지어선이 1척이었다. 그중 피지어선(국적만피지, 선주는 한국)은 한국인선장이라고 하였다.
부두앞에 있는 세관사무실에서 입항절차를 마쳤다. 부두가 있는 곳은 땅의 폭이 특히 좁아서 바로 건너편의 동쪽해변이 보였다. 하루만에 이곳저곳을 가보려면 기동성이 좋아야 한다.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내려가서 10호주달러를 주고 오토바이를 한 대 빌렸다. 남북으로 총길이가 12킬로미터여서 그다지 가볼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섬 한가운데로 나있는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좌우로 집들이 듬성등성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바나나나무와 야자수나무가 빽빽했다. 중간에 공항이 있었는데 울타리도 없고 그냥 활주로만 하나있었다. 활주로 중앙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간판에 ‘인터네셔날 에어포터’라고 되어있었다. 1주일에 두 번 비행기가 온다고 하였다.
푸나푸티는 나처럼 갈길이 바쁜사람이 방문하기는 적당한 섬이 아닌것 같았다. 원시그대로인 주변의 암초나 작은 섬으로 가서 낚시도 하고 스노클링도 하면서 자유와 여유를 즐길수있는 그런 섬이다.
연료를 조금 구입하고 싶었지만 1리터에 1.7호주달러였다. 지금은 호주달러가 미국달러보다 더 가치가 높다고 하여 계산해보니 리터당 2천원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다른 섬에 가서 보충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피지어선 선장이신 지선장(65세)께서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해서 갔다. 참치회와 함께 준비된 한국음식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피지어선은 허가문제로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 동안 선원들끼리 다툼이 생겨 조선족 기관장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생겨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푸나푸티는 한국에서 남서쪽으로 약 3850마일 떨어진 투발루의 수도인 환초섬이다. 투발루라는 나라는 9개로 이루어진 섬나라로 인구는 10,900명, 국민소득은 825달러로 아직은 가난한 나라다.
다른 환초 형태와 다름없이 푸나푸티 환초도 남북으로 21킬로미터 동서로 17킬로미터로 중앙에는 육지가 없고 환초를 빙둘러 작은 섬으로 가운데 호수를 안고 있는 형상이다. 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심이 4천미터가 넘는다. 그런 바다에 우뚝 솟아 있는 섬이지만 정작 섬이 높이는 수 미터가 되지 않는다.
타발루 푸나푸티에서 나우루로(876마일)
4월27일
아침8시에 업무를 시작한다고 하더니 9시가 넘어서 세관직원이 나타났다. 섬 한가운데 있는 정부청사에서 조례를 하고 이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정부청사로 직접찾아가면 빠를뻔했다. 10시쯤 부두 안벽에서 배를 떼어내고 나우루를 향해 출발했다. 뒷바람이 4시방향에서 불어서 조금만 바람이 있어도 속도가 좋았다. 저녁7시경에는 푸나푸티위에 있는 누쿠페타우섬을 남쪽으로 지나갔다. 밤에는 비구름이 자주 출몰해서 갑자기 바람이 강해지면서 배가 풍상쪽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때 그때 바람의 강도에 맞추어서 조타기(윈드베인)를 조정해주어야만 했다.
4월28일 (116마일항해, 나우루까지 남은 거리 760마일)
바람이 조금 더 강해져서 속도가 6-7노트를 오르내렸다. 실내온도는 32도, 기압은 1005로 떨어졌다. 정오 무렵 누이(Nui)섬을 통과하여 북서진하여 올라갔다. 낮 동안 무려 80마일을 달렸지만 저녁부터 바람이 약해졌다.
4월29일(146마일항해, 나우루까지 남은 거리 614마일)
바람이 조금 약해졌지만 바람의 방향이 동북동에서 북동풍으로 방향을 틀어 속도를 6노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4월30일(160마일항해, 남은 거리 454마일)
계속해서 무역풍을 타며 속도를 내고 달렸다. 파고는 1.5-2미터이고 하늘은 맑았다. 한국과 2시간 시간차대로 진입하여 시계를 조정했다. 낮 동안 88마일을 달렸으나 저녁부터 바람이 약해졌다. 그 어떤 구름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올 수 있는 별들은 모두 나와 반짝였다. 칠레을 떠나 태평양을 접어들었을때 ‘태평양만 건너면 끝이다’라는 생각에 김치국을 좀 마신 것 같다. 6천 마일을 달려오고도 아직 3천마일이 남았으니 정말 끝없이 넓고 넓은 태평양이다. 기분은 태평양 진입초기에 다 내어버렸고 이제 담담하게 하루하루 한국으로 거리를 줄여가는 항해이다.
밤 동안 바람이 미약했지만 바람의 방향이 좋고 해류 또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평속 5노트정도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5월1일(일, 항해거리 154마일, 나우루까지 300마일)
생선이 떨어져서 어제부터 낚시를 내려놓았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침에 낚시를 걷어 올려서 확인해보니 미끼로 사용하는 가짜오징어의 다리를 반쯤 잘라먹었다. 그래서 가짜 오징어의 윗부분은 그대로 두고 아래쪽은 사모아에서 구입한 진짜 오징어 다리를 낚시 바늘에 끼웠다. 그랬더니 점심때 쯤 크게 입질을 한번 했다. 낚시 줄을 잡아채고 억센 힘을 잠시 맛보긴 했지만 면상은 보여주지 않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제대로 주둥이에 걸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낚시줄을 걷어 올려 이번에는 진짜오징어다리를 끼우되 다리를 관통하여 낚시바늘이 나오도록(앞에는 숨겼었다.)했다. 그래놓고는 한참을 달려 오후3시경이나 되었을까 고무줄이 쭈욱 늘어났다. 낚시 줄을 잡아채고 보니 달아나려고 버티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잡아당기던 낚시줄을 놓아주고(줄이 풀려나가며 오른손에 화상입음) 조타기를 조정해서 배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속도를 완전히 줄였다. 그리고는 장갑을 찾아 오른손에 끼고 낚시줄을 당겨올렸다. 배가 거의 서있는 상태여서 녀석의 저항이 거칠긴 했어도 서서히 딸려왔다. 고기가 배에 다와 갈 무렵 녀석을 찍어서 올리기 위해 갈고리가 장착된 막대기를 준비했다. 배에 가까이 끌려온 녀석은 다랑어였다. 한눈에도 덩치가 제법 커 보였다. 낚시줄을 바짝 잡아당겨 녀석의 입이 수면밖으로 들어나게했다. 그리고 공기를 한숨 들이켜 힘이 빠져 있을 때 올리던 줄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갈고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라이프라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녀석을 향해 내려찍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콕핏에 앉아있는 자세도 엉성하고 대물을 놓치면 어떻게하나 하는 마음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끼워서 쓸수는 없는법, 자세가 좋지 않으니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고기가 걸린 왼손도 무겁고 배는 파도에 출렁거리니 내려치는 갈고리가 녀석의 머리를 툭툭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히 바로 잡고 있었는데 갈고리도 반대로 되어있어 몇 번을 찍어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벌써 수분이 지났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갈고리를 고쳐 잡고는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찍었다. 각도는 좋지 않았지만(콕핏에 앉아서 배쪽에 바짝붙은 고기를 내려보는 각도)겨우 뒤통수쪽을 갈고리가 파고 들었다. 이제 갈고리를 들어 올려야 하는데 오른손이 라이프라인 아래쪽에 있어서 왼손으로 막대를 옮긴 다음 다시 오른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몸을 일으켜야 고기를 갑판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왼손은 낚시줄을 잡고 있었고 갈고리가 제대로 박힌 것같지도 않고 해서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고기가 한번 퍼더덕 거리더니 갈고리에서 빠져나가버렸다.
‘아앗!’
왼손에 힘을 주어 낚시줄을 당겨보니 아직 녀석이 걸려있었다.
‘휴우~ 간떨어지줄 알았네!’
‘안되겠다 그냥 끌어올려야 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줄을 당겨올리는데 녀석은 무겁고 낚시줄은 미끄러우니 몇 번이고 고기가 물에 빠졌다 올라왔다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녀석이 콕핏으로 끌려올라왔다. 길이가 80센티에 몸무게는 6킬로쯤 되는 참치였다. 녀석은 콕핏에 내려지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해 뒤통수에 난 갈고리에 맞은 상처로 비가 마구마구 솟구쳤다. 얼른 수건을 덮어 녀석의 머리통을 눌렀다. 손을 통해 녀석이 몸부림이 온몸에 느껴졌다. 몇분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녀석이 잠잠해졌다.
칼과 도마, 그리고 고기를 담을 그릇을 콕핏으로 가져다 놓고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아가미 바로 뒷부분을 칼로 잘라 머리를 몸통과 분리시켰다. 그런뒤 머리쪽은 아가미를 제거하고 몸통은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집어 내었다. 간이며 허파며 고기가 크다보니 제법 내장이 형상을 다 갖추었다. 그런데다 아가미부터 내장 끝까지 두줄로 노란 알들이 자라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고기가 클수록 녀석들을 처치하는데 마음에 부담이 컸다.
‘아 이 친구야 알을 뱃다고 말을하지!’
‘뭔 말이여! 몸을 두동강내고 배까지 갈라놓고! 시방! 나를 죽여서 먹는 것은 좋지만 가지고 놀지는 마라!’
내장과 알은 그리고 아가미는 바다로 버리고 몸통을 두 동강을 내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 바닷물을 퍼올려 도살장의 흔적을 지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콕핏을 다 정리하고 난 뒤 다랑어 살점을 좀 베어내어 회를 떳다. 거친 일들을 해치운 뒤에 술 한 잔 없을소냐! 사모아에 ‘숙스시’ 사장님께서 선물로 주신 죠니워크 블랙 위스키를 한잔 쭉 나르고 회와 함께 먹었다. 독한 알콜이 위장을 훑고 내려가면서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워버린다. 해가 슬슬 저물어 가려니 시를 한수 읊조린다.
태평양이 넓다해도 이렇게 넓을수가
가도가도 끝이없네 어디가 끝일련가
뒤돌아서 왔던길을 다시금 돌아보니
추억되어 지난길은 짧게만 느껴지네
힘들었던 이항해도 언젠가 끝이나고
오대양의 기억들을 그리워 하겠지
혼자서 하는 항해는 특별히 그런 상황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타고난 인간이 아니라면 즐겁게 항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오히려 쓸쓸하고 외로운 그런 순간을 덜 느끼려고 노력 할 뿐이다. 이제는 끝을 향해 시간과 거리를 줄여나가는 그런 생각으로 나를 격려하며 다독거린다.
5월2일(월 항해거리 138마일, 나우루까지 162마일)
엷은 중층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아침을 맞았다. 바람도 북풍으로 바뀌어 배가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각도에 건건히 턱걸이 했다. 오후부터는 바람이 아주 미약해져서 돛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5월3일(화, 나우루에 도착하다. 그러나)
길이 6킬로 너비 4킬로미터인 나우루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중의 하나이다. 인구는 11,300명이고 영어와 나우루어를 사용하며 호주 돈을 사용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남동쪽으로 3,000마일 떨어져있는 섬이다.
8시쯤부터 나우루 섬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섬의 둥글게 생겨서 높은 산이 중심에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거의 평지에 가까운 섬이었다. 이 나라는 인산염을 수출하는 나라라고 하는데 섬이 작다보니 그것도 10년이면 동이 난다고 한다.
나우루 서쪽 해안에 도착하여 정박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야적장 같은 작은 포구 안에 작업을 하고 있는 배만 몇 척 보일뿐 어디든 밀고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포구 밖에는 묘박을 위한 무어링부이가 있긴 한데 지름이 2미터나 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외항에 배를 대어놓고 딩기를 타고 상륙을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하루 머물렀다 가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고무보트를 세팅하고, 입항수속, 출항수속을 하다보면 짧은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았다. 그래서 항만관리소에 무전으로 연락하여 마땅한 정박장소가 없어서 그냥 통과했으면 한다고 했더니 미안하다며 흔쾌이 동의해주었다.
나우루부터 폰페이까지는 적도무풍지대에 속하는 지대여서 바람이 미약할 것으로 예상되고 기상예보도 그러하였다. 연료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바람이 약간만 있어주면 그럭저럭 갈수 있을 것 같아서 가 보기로 하였다. 폰페이까지는 700마일을 더 가야한다.
나우루를 지나서 부터는 약한 바람에 사용하는 제네커를 끌어올려 활짝 펼쳤다. 속도가 6노트를 오르내렸다.
19시17분, 시속6.5노트의 속력으로 적도를 통과하여 남태평양에서 북태평양으로 넘어왔다. 바다위에 그어진 선은 없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고향바다에 온 것 같다. 큰 비구름들이 보이지 않고 안정적인 날씨 같아 보여 제네커세일을 올려놓아도 마음에 부담이 덜했다.
5월4일
새벽까지만 해도 이상이 없었는데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속도가 3노트대로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약해졌나?’
갑판으로 나가보니 바람이 좀 약해진것도 있지만 제네커가 포어스테이에 챙챙감겨 있었다. 2시간동안 제네커를 풀어보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풀지 못했다. 마스트에서 세팅되어 있는 여분의 줄로 제네커가 포어스테이에 감겨있도록 했다. 하루 동안 제네커 덕분에 잘 달렸는데 트러블로 이어졌다. 제네커를 늘 감시하고 지켜보지 않으면 어디엔가 감겨서 곧잘 문제를 일으킨다. 단독항해자에게 제네커는 늘 위험부담이 따르는 세일이다. 잘못하면 큰 사고(낙수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고 세일링을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오늘아침만 하더라도 바람이 조금만 강했다면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폼페이에 도착하여 제네커를 풀어 내리기로 하고 메인세일과 안쪽 보조 돛만 사용해서 바람이 충분하지 못할 땐 엔진을 함께 사용해가며 나아갔다.
오후2시경 비를 동반한 다소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감겨있던 제네커가 조금씩 삐져나오더니 마침내는 3미터쯤 빠져나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 펄럭임 때문에 마스트며 와이어가 어찌나 흔들리는지 배가 분해되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였다. 2시간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바람이 잦아들었을때 배를 풍하로 가게 한 다음 밧줄을 감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다시 풀려나올 가능성이 크다. 세일을 내리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데 육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다. 북반부에 올라온 기념으로 하는 푸닥거리가 좀 세다.
저녁 무렵 다시 비구름이 몰려와 가까스로 묶여있던 제네커가 삐져나와 바람에 펄럭였다.
5월5일
서늘한 북동풍이 배를 잘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바람에 펄럭이는 제네커 때문에 앞쪽지지대가 흔들려 그 진동으로 배 전체가 떨었다. 하루 종일 몰려다니는 비구름에 시달렸다.
5월6일(하루항해거리 166마일, 폰페이까지 267마일)
아침부터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었다. 바람이 예보보다 좀 강한 편이었다. 덕분에 배의 속도가 7노트를 오르내렸다. 오후에는 바람이 약해지면서 앞바람으로 바뀌었다.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약해지니 제네커의 펄럭임도 거의 없어졌다.
5월7일
밤부터 바람이 일어나 아침에는 바람이 강해지서 주돛을 2단으로 축범했다.
저녁에는 섬에 40마일까지 근접했다. 속도를 줄여서 날이 새기까지 배를 서서히 달리도록 조정하였다. 적도를 넘어서 바람이 약할 것으로 예상했어나 예보보다 강한 바람이 불고 비도 많이 내리는 그런 날씨였다.
5월8일(폰페이에 도착하다)
폰페이는 마이크로네시아의여러섬중에 하나
8시경 입구에 도착하여 산호초사이에 있는 수로를 따라 진입
항로표시가 잘되어 있어 무난히 항구에 도착
검역(54달러) 세관(10달러) 출입국(40달러) 항만사용료(65달러)
한국 참치어선 기관장이 와서 감겨있는 제네커를 내리는 것을 도와줌
라면 30개 받음...책한권증정
입항절차후 1마일쯤 안쪽에 있는 묘박지로 이동
10여척 묘박중
미국, 벨기에, 네들란드, 일본
닻을내림...
고무보트로 상륙
물가에 민가...친절...
인심좋음
아이들 많음...물에서 잘논다...40년전의 한국과 비슷
카드구입
김치구하러 부두에 감...한국에서 오는운반선이 안와서 김치 없음
일본인 세일러가 운영하는 스시집 찾아감
라군41피트와 모노헐38피트 소유
전직 치과의사...지금은 폰페이에서 노후를 보냄
자그마한 호텔과 스시집 운영
현재 일본에 가서 1주일후에돌아온다고함
식사...
저녁시간에 배로 돌아와 인터넷좀 하다 취침
5월9일
연료구입, 식수보충, 오후 마트에 가서 식료품 약간 구입
일찍 취침
5월10일
아침에 일어나서 배 외부에 찌들어 있는 이끼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세미와 페퍼를 동원해서 작업...외부에 때가 너무 많다.
현지인 2명의 도움을 받음 하루 1명당 10불씩
세척후 스폰서 로고 부착‘협성르네상스’
선체외부 청소...스폰서로고부착
오후 한국마트 찾아감
새우젓, 냉면1봉(2인분),된장1개
다른 상점
하와이에서 만들었다는 김치 200그램짜리 3개, 사과 9개, 배추2포기,
저녁에 인터넷...카드구입 파일전송...30분만에 10달러짜리 다 씀
다시 5달러 1개구입
8시경 한국마트 조사장님 방문
소주 1 1/3 병 마심...안주 햄과 김치
조사장님 37년전에 폰페이 이민...자동차부속상회와 자동차수리소, 그리고 슈퍼마켓을 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항공회사가 취항할 예정이라고 함...
5월11일(폰페이를 출발하여 사이판으로)
비많이 내림
10시30분경 출발
부슬비로 바큄
바람약하고 너울...
886마일
19일경 사이판 동쪽 해상에서 저기압발생
8일후의기상이어서 확실치는않지만 빨리 발생하면 낭패...
어제 출발했으면 더 안전할뻔
17일 도착예정이지만 날씨변화에 불안...
올해 첫 태풍이 필리핀부근에서발생하여 대만을 거쳐 일본 동해안으로 빠져 나갔다.
필리핀 북단에서 일본까지 불과 이틀만에 통과 ..항해중에 이렇게 빠른 태풍이 덮쳐온다면 요트는 달아날 수가 없다. 특이하게 빠른 태풍이었다.
오후부터 동풍이 잘 불어줌...6-7노트로 달림
19시 한국과 시차가 1시간대로 진입
밤에는 바람이 약해짐
5월12일(140마일항해, 사이판까지746마일)
아침에는 바람이 약간 약했지만 북동풍에 이어 동풍이 불어왔다. 폰페이에서 산 배추중 1포기로 김치를 담았다. 나머지 한포기는 라면이나 된장국을 끓일때 넣어서 먹고 있다. 낮에는 기온이 34도 밤에는30도였다. 낮은 비구름은 낮이고 밤이고 자주 출몰하여 비를 뿌렸다. 그러나 비구름 아래에서는 바람이 강해 속력이 8노트에 달했다. 북두칠성의 각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5월13일(173마일항해, 사이판까지 573마일)
날씨맑음, 기압1010,동북동풍13노트,
기상예보...20일쯤 발생할 저기압이 없어졌지만 20일을 전후로 나쁜 날씨는 예보..16일 저녁이나 17일 아침에 도착예정으로 최대한 달려감..
달이 제법커져서 항해에 많은 도움...
5월14일(158마일항해,사이판까지 415,일본 찌찌지마까지 1075마일)
날씨맑음, 오후에 기상예보확인, 날씨좋음, 21일까지 동풍 13-17노트로 파고는 1.5-2.3미터로 예상되는 돛달리기에 최상의 날씨이다. 찌찌지마부근은 변풍대여서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힘든항해가 될수도 있다. 생각 끝에 일단 찌찌시마로 항로를 바꾸었다. 하루정도 330도 코스로 달리다 내일 다시 기상을 확인하여 별다른 변수가 없어면 계속 찌찌지마로 향해서 올라가고 날씨가 좋지 않으면 그걸 핑계삼아 사이판으로 방향을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5월15일(142마일항해, 찌찌지마까지 933마일)
날씨맑음,괌섬에서 270마일 동쪽해상 통과하여 북북서쪽으로 낮동안 찌찌시마 야마다네트와 교신을 하게 되었다. 항해 중 처음으로 아마추어 무선으로 교신성공, 아마추어 장비설치 후 처음이다. 찌찌지마 도착 때까지 매일 교신하기로함, 파나마 발보아에서 갈라파고스로 항해중인 요트와 교신하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 무선이 이렇게 멀리까지 되는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시도를 해보는 것인데 그랬다. 교신참가자는 나가사키 사카이씨, 히메켄 하세씨, 찌찌지마의 야마다씨 그와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수신상태가 좋지않아 잘 들리지 않았고 성능좋은 무전기를 갖춘사람들것만 들리는 것 같다. 기상예보가 좋아 사이판에는 들리지 않고 바로 찌찌지마로 가기로 하였다.
5월16일(150마일 항해, 찌찌지마까지 783마일)
새벽3시30분경, 달이 저물었다. 사이판에서 동쪽으로 약180마일 떨어진 해상을 평속6.5노트의 속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오전에는 낮은 비구름이 수시로 다가와 배를 눕혀놓았다. 오후에는 안정적인 바람과 맑은 하늘...오늘도 찌찌지마 야마다네트와 무전으로 교신...세계일주 출발할 때 일본 요트잡지 카지에 항해계획이 소개된 적이 있어서 몇몇 세일러들은 인트레피드의 항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내일은 북해도 시갈네트와도 교신하기로 하였다.
오후 5시경 뒤따라 오는 배한척 포착...바다에서 배를 만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사모아를 출발하여 며칠 후 어선 한척과 교행한 후 처음 만나는 선박이다. 항해코스비슷..속도 13.3노트로 선명 그린호프(green hope) 일본 히메지로 가는 상선..교신함...일본선주...선원은 선장을 비롯하여 전원 중국인..우리나라가 해왔던 부분을 이제는 서서히 중국이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5월17일(154마일항해, 찌찌지마까지 629마일)
날씨맑음,가끔 비구름접근, 아침기온 31도, 사이판으로 갔으면 지금 도착할 시각이다. 그곳에서 2일정도 쉬었다. 다시 출발하면 찌찌지마까지는 750마일로 5일간의 항해거리지만 사이판으로 가던 중간에 항로를 꺽었기 때문에 4일만 더 항해하면 찌찌지마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이판에 들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날씨가 좋을 때 찌찌지마로 갈 수 있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
부드러운 동풍에 배의 속력이 6-7노트를 오르내린다.
9시경. 4미터쯤되는 고래 2마리가 인트레피드를 접근한뒤 멀어짐.
오후에는 야마다네트와 교신했는데 일부 세일러들은 일본 친구인 고사카씨는 물론 구복요트장까지 알고 있었다. 인터넷의 힘을 새삼느낀다. 요트의 세계는 좁고 좁아서 한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여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5월18일(151마일항해, 찌찌지마까지478마일)
5시경. 날이 밝아오자 밤 동안 바다를 밝혀주었던 달님은 니웃니웃 서녁 하늘 아래로 내려앉는다. 군데군데 큰 구름덩이가 있고 바람은 약해졌다. 가끔 지역에 따라 속도가 떨어질 때는 엔진을 가동해서 배를 밀어주었다. 아직 한국과 시간대가 같은 지역까지 가려면 며칠 더 가야하지만 편의상 시간을 한국과 같은 시각으로 맞추어 놓았다. 이제 더 이상 시계를 조절할 필요가 없다.
낮 동안 교신으로 찌찌지마 입항에 관해 소식을 전해왔다. 찌찌지마는 개항이 아니어서 비상시만 입항할 수 있고 특히 토, 일요일에는 입항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무전으로 며칠 전부터 연락이 되어 찌찌지마의 야마다씨가 당국에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상태여서 오히려 그것이 안좋게 되어 가고 있다. 사전에 연락없이 입항하여 연료부족이나 선체트러블등을 이유로 피난하여 들어가면 별 어려움이 없을것인데 지금은 찌찌지마를 목적지로 가고 있는 상태로 인식되어서 당국에서 입항에 대해 회의적이다고 한다.
처음으로 교신이 되어서 좋아했는데 그것 때문에 되려 일이 좋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 세상만사 세옹지마라고 혹시 찌찌지마에 입항을 못하게 되면 이일로 또 다른 좋은 일이 생기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만월이다. 초저녁부터 스프레더에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서 쉬기 시작했는데 밤을 샐모양인지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녀석을 쫒아보려고 고양이소리, 개소리, 까마귀소리까지 내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않았다.
‘어이! 자고 가는 것은 좋은데 똥은 싸지마라! 부탁한데이!’
잔잔한 호수에 일어나는 잔물결 같은 파도를 일으키는 약한 바람에도 방향이 좋다보니 속도가 6-7노트(해류가 1노트정도)에 달했다. 선실에 앉아 있을 때는 배가 달리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서 속도를 확인해볼 때가 가끔있다.
5월19일 목요일(157마일 항해, 찌찌지마까지 321마일)
시각을 미리 한국에 맞추어 놓았더니 4시 반쯤 일출이 시작되었다. 간밤에 하룻밤을 묵어간 갈매기는 동이 터자 숙박료 대신에 물똥 한덩이를 남겨놓고 날아 가버렸다. 상선소요(SHOYO)호와 교행하였다. 나고야를 출발하여 호주 브리즈번으로 가는 배였다. 일본 선박 인듯하여 불러보았지만 필리핀 선원이었다.
아마추어 교신도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 같았는데 몇 마디 하기 위해서 한참동안 잡음을 듣고 있는 것이 영 취미와 맞지 않다.(원래 이렇게 소음이 심한 것인지?) 그러는 동안 콕핏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찌찌지마 해상보안청에서 여권과 선적증서 복사본을 팩스로 넣어주면 토요일에도 상륙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한국외양요트협회에 연락해서 그 일을 부탁해두었다.
오후에 입수한 기상정보에 의하면 5일후인 24일경 사이판과 필리핀사이에서 중대형태풍이 발생해서 일본 동해쪽으로 올라와 28일경에 찌찌지마를 벗어날 것이라고 한다. 장기예보여서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잘못하면 찌찌지마에서 발이 묶여 도착예정일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 내일 다시 기상을 받아본 후 찌찌지마를 들릴 것인지 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것 같다. 만약 찌찌지마에서 태풍을 피항하더라도 지도상으로 볼 때 초대형 태풍만 아니라면 포구는 비교적 안전한 것 같다.
5월20일 금요일(항해거리 141, 찌찌지마까지 180마일)
바람이 약해져서 간밤부터 기범주상태(돛과 엔진을 동시에 사용)로 달렸다. 그러다가 새벽부터는 바람의 방향이 남동쪽으로 돌아서서 돛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너울은 1.5미터정도 있지만 파도는 거의 없다. 평소 엔진 회전수가 2000RPM이면 속도가 보통 4.6노트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6노트가 넘게 나왔다. 해류가 1.5노트이상 같은 방향을 흐르는 것이 틀림없다.
점심 무렵부터 북동풍으로 바람이 바뀌면서 강해졌다. 잠시 돛 달리기를 했지만 얼마 후 바람이 약해져서 다시 엔진을 가동하여 나아갔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였다.
저녁부터 다시 바람이 살아나서 엔진을 멈추었다. 일본 어선으로 보이는 배한척이 남으로 지나갔다.
5월21일 토요일 찌찌지마에 도착하다.
새벽4시경부터 바람이 약해지고 북쪽으로 돌아서서 배가 계속 다가오는 파도에 저항에 밀려 나아가지 못했다. 엔진을 걸어 도와주었다. 밤사이에 내린 이슬로 콕핏이며 데크가 촉촉이 젖어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밤에도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더웠었는데 이불을 덮고 자야했다. 아침기온이 25도까지 내려갔다.
날이 밝았지만 안개가 자욱했다. 찌찌지마까지 45마일 남았다. 하하지마(엄마섬)부근에 도착하니 어선도 몇척 레이더에 잡혔고 어선이 내려놓은 부표도 간간이 보였다. 엄마섬이 제일 남쪽에 있고 그위로 아빠섬, 형아섬, 손자섬, 며느리섬, 사위섬등이 있다. 가족군도이다.
일본지명은 오가사와라(OGASAWARA)군도이다. 오후가 되어서도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입항하려면 애를 먹겠다 생각했는데 찌찌지마를 2마일 쯤 남겨두고 거짓말처럼 안개가 싹 걷혔다. 15시경 입항하여 검역, 출입국, 세관, 해상보안청순으로 입항절차를 밟았다. 저녁에는 아리랑이라는 선술집을 찾아갔다. 주인장은 이곳에서 15년째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먼 오지에 한국사람이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반가웠다.
5월22일
이곳 요트클럽에서 방문록 가져옴, 두꺼운 공책이 3권, 30년전부터 이곳찌찌지마를 방문한 요트들의 기록들, 아는 사람도 몇 명있고 아는 요트도 몇척있었다. 1달앞에 이곳을 거쳐간 문선장부부의 기록, 인트레피드가 되기전 프라잉(Flying)이란 이름으로 이곳을 방문한 흔적, 세계일주를 한 보헤미안호의 와타나베씨, 오키나와에서 만난 홍콩요트 제이드, 등등
오전에는 이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와타나베씨가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때는 일본식 레스토랑에 가서 돈부리(뜨거운 밥위에 양념에 버무린 참치회)를 먹었다. 오후에는 이 섬에 살면서 아마추어햄을 취미로 하는 야마다씨의 다이빙숍에 가서 인터넷을 좀 했다. 야마다씨는 항해하는 요트들에게 서포트하는 무선클럽인 오케라네트의 주장이다.
저녁에는 이곳 요트클럽 회장 칸도씨, 공동오너인 누구씨, 누구씨부인, 누구씨 형, 와타나베씨 와 함께 배에서 파티를 열었다. 모두가 올때 음식과 술을 가져왔는데 내가 내어놓은 소주, 위스키외에 그들이 가져온 막걸리(와타나베씨가 좋아함),맥주, 과일주, 아마미오시마특산 럼주, 일본이모소주등등 술종류만 거의 10가지가 되었다. 6시쯤 시작한 파티는 밤 11시가 되어서 끝이 났다.
칸도씨는 자신의 요트 무슨호(30피트)를 타고 20년전에 남태평양의 섬들을 돌고 왔다고 하였다. 태풍은 29일쯤 일본동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
찌찌지마를 출발하여 종착점인 부산으로
6월1일
찌찌지마에 도착한 후 잠시 쉬었다 떠나려 했지만 느림보 태풍 ‘송다’에 발목이 잡혀 11일간 섬에 피항해 있어야 했다. 6월6일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월31일에 떠나야 했지만 4미터의 높은 파도와 북서풍 때문에 결국 출발을 미루었다. 가능하면 휴일에 도착하여 그 동안 응원해주었던 사람들과 세계일주를 마감하는 기분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늦어버렸다. 도착 일을 미리 잡은 그 오만함을 나무라듯 바다는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5시쯤 일어나 출발준비를 했다. 아침 일찍 배웅 나온 찌찌지마 세일러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포구 안은 잔잔했지만 밖을 나서자 북쪽에서 3-4미터가 되는 높고 긴 너울이 끊임없이 일어섰다간 남쪽으로 멀어져갔다. 아침에는 북북동풍이 불었지만 오후로 가면서 북서풍으로 바뀌었다. 배는 옆바람을 받아 잘 나아갔다.
이제 종착역인 부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세계일주를 끝내고 돌아가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디쯤 가면 그 느낌이 다가올까? 내가 뭔가를 해내긴 해낸 것인가?
6월2일 (부산까지 698마일)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어 순풍을 타고 나아가고 있다. 실내온도는 26도, 기압은 1018미리바로 높아졌다.
정오부터 속도가 뚝 떨어졌다.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속도는 변함이 없는데 GPS 속도만 갑자기 떨어져 해류의 영향을 받는 것인가 했지만 다시 속도가 되살아났다.
저녁 무렵 지난 5월16일 사이판 동쪽해상에서 인트레피드를 추월해 일본으로 갔던 일본상선 그린호프(Green hope)가 다시 남쪽으로 향해 내려갔다. 날씨가 흐려지고 기압계가 1016으로 떨어졌다. 자정무렵부터 가는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6월3일 (부산까지 남은 거리 550마일)
새벽3시경 상하이로 가고 있는 상선 하루에스트 레젠드(Haruest Regend)호가 동쪽에서 다가와 앞을 가로질러 경도선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두 선박이 그대로 코스를 유지하다가는 근접할 위험이 있어 무전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지 체크했다. 비구름이 간헐적으로 다가와 레이더 알람이 울려대었다.
날이 밝고 나서부터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어 거센 바람이 일어 바다가 온통 백파로 변했다. 덕분에 속력은 빨라졌지만 비속에서 돛과 윈드베인을 조정하느라 옷을 홈빡 젖었다. 이제 점퍼를 입지 않으면 쌀쌀함을 느낀다. 실내온도는 25도이다. 기압계를 보니 1010미리바까지 떨어져있다.
오후 들어서 좀 개이는가 했더니 저녁이 되자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북동풍에 풍속은 18노트, 파고는 2미터에 백파가 일고 있다. 메인세일은 2단축범한 상태로 짚세일을 활짝 펼치고 평속 6.5노트로 고향인 부산을 향해 북서진하여 나아간다.
비는 밤9시경까지 가늘게 뿌리다 그쳤다. 자정 무렵, 일본에서 출발하여 필리핀으로 가는 상선 트로피칼 스카이(Tropical sky)와 근접하여 지나갔다. 이때쯤 바람이 약해져서 메인세일을 모두 올려 항해했지만 속도가 점점 떨어져서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6월4일(부산까지 남은 거리 마일)
아침이 되어서는 바람이 완전히 사라져 해면이 거울처럼 되었다. 선실온도가 다시 30도까지 올라갔다. 상선들의 출현이 많아졌다. 오전에만 3척의 상선과 2척의 유조선을 만났다. 해면이 잔잔해서 배도 별로 꿀렁이지 않아 선실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하기 좋았다.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은 챙겨서 넣고 배에 두지 않을 것들도 따로 분리했다.
오후에 들면서 구름이 많아지면서 동풍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오후에도 상선 몇 대 지나감, 더욱 많은배가 오키나와쪽 동남아쪽 항로로 내려갔다. 해가 지고 나선 오사카쪽으로 가거나 그쪽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길을 잡고 내려가는 배들이 남동쪽으로 혹은 북서쪽으로 향해 나아갔다. 그중에서 고베로 향하고 있는 상선 비비씨하렌(BBC Haren)과는 1마일 정도로 근접해서 지나가게 되었다. 무전으로 연락해서 서로가 각도를 조금씩 왼쪽으로 꺽어서 위험반경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6월5일
자정을 넘어서면서 배들이 더욱 늘어났다. 20마일 반경에 늘 네 다섯척은 항해중이다. 낮은 비구름이 자주 다가와 비를 뿌렸다. 바람이 동풍이어서 배가 상승각의 끝자락을 잡고 나아가지만 속도는 4노트대로 떨어졌다. 쿠로시오해류가 강한 지역으로 들어온 것같다.
흐린 아침이다. 가는 비를 뿌렸다. 여전히 일본 근해에는 항해하는 배들이 많다. 기압이 1008까지 떨어졌다. 뒤쪽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 포진해있다. 간밤에 속력을 좀 낸 덕분에 짙은 비구름대를 만나지 않았다. 일본 본토까지는 30마일을 남겨두고 있다. 배들이 늘어나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멍하다. 해도에는 쿠루시오 해류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고 표기 되어있었지만 아침부터 속도가 살아나 잘 달리고 있다. 바람은 북풍으로 바뀌었지만 돛만으로 항해하면 속도가 3노트를 넘지 못한다.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고 찌찌지마에서 산 김치로 찌개를 만들어 아침을 먹었다. 배들이 더욱 늘어났다. 오늘밤은 일본내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배들이 더 많이 늘어나서 제대로 자기는 걸렀고 내일 밤은 대한해협을 건너야 하는데 종착점에 도착한다는 기분 때문에 들떠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 3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자면 머리가 멍하지 않을까? 어떻게해서든 조금씩 잠을 자야 한다.
7시부터 북동풍이 강해져서 돛만으로도 평속 7노트의 속도로 항진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11시경 일본 본토에 접근하여 내해쪽으로 향했다. 비구름으로 시야가 2마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16시경 비가 그치고 동풍이 불어왔다. 20마일 감시판내에 수십척의 상선들이 다니고 있다. 밤이 되면 더 신경써서 견시를 해야한다. 졸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19시경 내해인 수오나다에 진입하였다. 입구는 조류로 인한 파도와 와류가 발생하여 거칠었다. 삼각파도에 배의 선수가 들썩였고 와류지대를 지날때는 배가 제 마음대로 돌아가버렸다. 20분쯤 거친바다를 지나자 다시 잔잔한 바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낚시배 4-5백여대 출현, 경광등을 밝혀놓고 고기를 낚고 있는 낚시선, 그물로 조업하는 어선들, 또 자리를 옮기는 어선들, 이렇게 많은 배들을 보기는 처음이다. 이곳에 어장이 형성되어 마을의 배란 배는 죄다 나온모양이다. 어선들은 특이한 항해등과 작업등을 동시에 달고 다녀서 수 많은 어선들 사이로 통과하느라 진땀이 났다.
23시경, 히메시마를 안쪽으로 돌아 관문대교 방향으로 선수를 맞추었다. 실내온도는 22도, 기압은 1007미리바였다. 예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딜리버리 항해를 할때는 몰랐는데 AIS(선박항해정보 송수신장치)를 통해서 보니 배가 정말 바글바글하다. 이렇게 많은 선박을 보면 일본의 경제규모는 상상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 어느 곳도 이렇게 많은 배들이 다니는 곳은 없었다.
6월6일(부산까지 남은 거리 115마일) 부산으로 가는 세계일주 마지막 밤
졸음이 와서 견디기 힘들었다. 작업하는 어선들도 간간히 있고 항로에서 벗어나 항해했지만 이곳역시 상선들이 수시로 다녀서 5분도 마음편히 졸수가 없었다.
새벽 3시30분경 우베앞바다에 도착하여 다시 키타큐슈쪽으로 항로를 조금 꺽었다.
아침 6시경 관문교 앞에 도착 , 그러나 관문교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껴있었다. 5노트의 역류을 거슬러 관문해협의 수로 안으로 진입했지만 정말 한치앞이 보이지 않았다. 해협갓쪽으로 붙어 겨우 올라가고 있는데 모지항에서 나온 어선 한척이 다가왔다.
‘안개가 짙어서 못갑니다. 모지항에 들어가서 쉬었다 가세요.’
그 어부의 말대로 배를 돌려 모지항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여기서 잘못 지체되었다가는 다시 한국도착도 연기 될것 같아 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항으로 가기로 했다.
‘부-웅, 부-우-웅’
엔진출력을 높여 해협을 건너는데 기적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시정이 채 100미터가 안되었기 때문에 보이는 배는 없었지만 배를 일단 돌려 후퇴했다. 그리고 수초후 거대한 상선의 선수마루가 안개속에서 괴물처럼떡하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다시 방향을 돌려 상선의 뒤꽁무니에 부딪힐듯 다가갔다. 그래서 다음 배가 오기전게 해협을 안전하게 건널수 있기 때문이었다.
‘씨부렁, 씨부렁’
어디서 많이 듯던 욕지거리가 들린다. 한국배였다.
‘아저씨들 미안합니다.’
선미루에 나와 있는 선원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랬더니 미안한 듯 손을 흔들었다.
해협을 건너 안벽을 따라 시모노세키항으로 내려갔다. 항으로 들어가는데 큰 상선한척이 항에서 나오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한듯했다. 배를 멈추고 그배를 보낸다음 항안으로 들어갔다. 방파제에 가까이 붙자 낚시하는 사람들이 안개속에서 나타났는데 그 사람들에게 한마디 했다.
‘뭐가 보여야지!’
배를 항 안쪽에 배를 붙여놓고 출항수속을 하러 갔다. 출항수속과 출국수속을 모두 마치니 11시경이 되었다. 찌찌지마에서 다시 꼼꼼히 부착한 ‘협성르네상스’ 스폰스 로고가 일부 뜯겨나가 투명테이프로 단단히 붙였다. 그러나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또 떨어져 나갈까 걱정이다. 글자중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스폰스 회사에 보답하려다 오히려 큰 실례를 범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쉬었다가도 시간을 충분했지만 항안에도 해협을 왕래하는 대형선박이 만들어내는 파도로 쉴새없이 꼴랑거렸기 때문에 12시경 계류줄을 풀고 해협으로 나섰다. 그 동안 조류가 바뀌어서 순류가 되어 출렁거리는 파도와 함께 넓은 바다로 나섰다. 대한해협이다.
‘아! 대한해협!’
‘이런 순간이 온단 말이지!’
안개는 다 걷혔고 바다는 비단을 덮어놓은듯 매끄러웠다. 인트레피드가 남기는 물자국이 길게 꼬리를 만들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까지도 바다는 조용했다. 불을 밝히기 시작한 오징어배의 조명이 대한해협을 길잡이가되어준다. 또한 시정이 좋아 항해하는 선박의 불빛이 잘 구분된다.
‘이렇듯 편안한 바다를 내게 보여주는 것은 왜일까?’
‘또 다른 유혹은 아니겠지!’
21시경 시모노세키와 쓰시마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섬 오키노시마를 12마일쯤 떨어져서 부산을 향해 나아갔다. 시모노세키와 부산까지 115마일 거리이다. 넓은 대양에 비하면 짧은 거리이지만 날씨가 험악할 때 거친 삼각파도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할 때도 많았다. 오키노시마는 그때 나와 배를 보호해준 해준 고마운 피항처였다.
지난 이틀동안 잠을 제대로 못자 자투리 잠이라도 자야 했지만 오징어 배가 워낙많아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들 어선들은 내가 잠이 들어 충돌위험지역까지 들어가더라도 그들이 피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다.
6월7일 드디어 한국에 도착하다.
밤 사이 날씨는 계속 좋았다. 아침이 되자 가벼운 서풍이 불어와 주돛고 보조돛을 모두 끌어올렸다.
아침5시경 대마도 북단까지 마중 나온 윈드스타호와 교신하였다. 윈드스타호는 김덕우씨의 30피트요트로 이번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까지 태평양을 횡단한 배이다. 구복요트장에 정박중인 해그리드호 선주인 이선생과 같이 나왔다고 하였다. 윈드스타호 역시 현재 구복요트장에 정박중이다. 내게는 식구 같은 사람들이다. 윈드스타호는 부산쪽으로 8마일쯤 앞에 항해중이라고 했다. 2시간쯤 후에는 만나게 될것이다.
9시30분경 옅은 안개속에 나타난 광안대교를 발견했다. 꿈속에서도 그리던 고향이다. 거친풍랑속에서 홀로 항해하는 절대고독의 많은 시간들을 보내며 대자연앞에 놓여진 나와 나의 작은 범선 인트레피드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하찮은 미물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고비를 넘고넘을때마다 언제가는 도착하게될 고향 부산의 풍경을 상상하며 버티어왔다. 그 고향의 심벌인 광안대교가 거리가 줄어듬에 따라 점점 선명하게 다가 왔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과연 도착할 날이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 오는것일까? 20개월의 긴 항해기간동안 늘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어릴적의 막연했던 꿈이 요트딜리버리라는 직업을 하면서 구체화 되었고 그 꿈을 간절하게 그리게 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요트 단독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도대체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지?’
항해를 하면서 수없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 어떤 말도 아내와 3남을 둔 40대 후반의 남자가 홀로 세계일주를 나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그 이유를 알아가는 항해가 되었다. 오늘 항해를 기나긴 장도의 항해를 마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꿈을 꾸고 조금씩 그 꿈을 향해서 나아가면 언제가 그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처음의 설레임을 꾸준히 유지하는 자가 꿈을 이룬다고 했다. 지금 나는 배를 타고 세상을 한바퀴돌아온 단독 세계일주자가 되었다. 어렵고 힘들었든 항해의 순간들도 이제는 아름다운 기억이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오면서 나는 도전하지 않는 자는 결코 가질 수 값진 추억을 갖게 되었다.
11시경 2011년 6월7일 세계일주 성공을 축하해주는 가족, 요트동호인, 메스콤 매체가 기다리고 있는 부산요트경기장으로 입항하였다.
그동안 부산일보에 격주로 항해기를 올리면서 언제부터인가 이 항해는 나 혼자만의 항해가 아니었다. 지면으로 항해기를 읽으며 함께 마음조려준해준 부산일보 독자분들과 함께 한 항해였다.
‘부산일보 독자님! 그동안의 응원 대단히 감사합니다.’
‘
물건찾기 숨바꼭질...얘들아 숨어 이번에는 드라이브다.....야 이번엔 드릴날이다...어딘 꼭꼭 숨어라...
어쩌다가 찾는 물건이 제자리에 있을땐 기쁘다.
요트의 명칭과 간단한 바다용어
요트의 명칭 두 페이지
간단한 바다용어 두페이지(전부 4페이지 마지막으로 가도 좋을듯)
협성르네상스(출발할 때 사진을 찾아서 넣으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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