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15. 10. 4(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아홉째 주일 - (2015년 40주)
제목; “예배는 잘 들음, 경청입니다!”
성경; 롬 10:16-18(p. 253) (요 4:23-24, 540<219>, 446<500>)
<예배의 부름>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와 추수의 달 10월 첫 주일에 우리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제자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한 금년도 우리 교회의 중점 목표를, 교회의 5대 사명인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 중 “예배”에 두고 예배의 회복을 통한 우리의 신앙 성숙을 성취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지난 번 나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1월 마지막 주(1/25) 그 첫 시간은 “예배의 회복”(요 4:23-24)에 관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1.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며, 2. 우리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임을 분명히 알고 예배드려야 하며, 3.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참된 예배를 드리고, 예배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2월(2/22)에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시 51:6-12)라는 제목으로,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처절하게 회개하는 모습의 본문을 통해서 1. 우리는 다윗의 죄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데, 1)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며(1-3), 2)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고(7,9), 3)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고, 주의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10-12). 2. 죄 용서함을 받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므로 영이 새롭게 된 성도가 해야 할 일은? 1)그 구원의 감격을 이웃에게 전해야(전도해야) 하며(13-15), 2)회개하고 용서함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19). 마지막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결론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5월(5/31)에는 “어떻게 예배드릴 것인가?”(출 20:22-26)라는 제목으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어떻게 예배드릴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1. 오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은금으로 신상 만들지 말라, 23). 2. 나의 생명을 내어주어야 합니다(번제, 화목제를 드려라, 24). 내가 죽어야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3. 거짓이 아닌 진실함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다듬지 않는 돌로 제단을 쌓으라, 25). 4. 불순한 동기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하체를 드러내지 말라, 26). 결 :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 나의 생명을 내어놓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24).
6월(6/28)에는 “예배는 번제를 드림입니다!”(대하 1:1-6)라는 제목으로, 예배를 잘 드리므로 왕위가 견고해지고 심히 창대케 된 솔로몬을 통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1.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고 처음 한 일이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고(2-3a), 2. 기브온 산당으로 간 이유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했던 광야 신앙을 회복하겠다는 뜻이며, 3.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듯이(6), 모든 힘과 정성을 다 하여 하나님을 섬겼으며, 결. 제일 먼저 예배를 드리고, 광야 신앙을 회복하고, 정성을 다해 번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11-12).
7월(7/26)에는 “예배는 잔치입니다!”(사 25:6-8)라는 제목으로, 예배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천국 잔치, 곧 우리 주님이 베푸신 풍성한 축복의 잔치입니다. 1. 영혼을 기름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되는 잔치이며(6), 2. 이 예배의 잔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잔치이고, 3.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베푸신 잔치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9월(9/6)에는 “예배는 순종입니다!”(대하 3:1)라는 제목으로, 솔로몬이 다윗에게 보여주었던 모리아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의미는, 1. 모리아 산에 성전을 세운 것은, 예배는 순종이라는 것이고, 2.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세운 것은, 예배하는 자는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며, 3. 오늘날의 모리아 산과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어디일까요? 예수님 자신과, 지금 예배드리는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신앙의 성공자요, 인생의 성공자’라는 말이 있듯이,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고, 예배 잘 드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 성령의 은사와 복을 받아누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II.
*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말의 뜻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예배학에서 예배를 정의하기를,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예배란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인 신자들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음과 뜻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을 돌리며 내 온몸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영적인 의식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가장 엄숙하고도 경건해야 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예배학에서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예배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①하나님께서 역사하심과 ②인간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준비하고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는 인간들의 잔치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신 잔치입니다. 그러기에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예배에 우리 성도들은 올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 응답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보다 알기 쉽게 번역하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 예배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배자의 자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자세가 바로 올바른 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예배(드리다)는 원어를 찾아보면 히브리어로, ‘아바드, 솨하’,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 라트레이아, 레이투르기아’ 등이 있으며, 영어로, ‘worship, service’ 등이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 ‘몸을 굽히다, 굴복하다, 절하다,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 봉사하다, 섬기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우주 만물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유일한 대상은, 곧 우리 인간들에게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으셨으며 지금도 섭리하고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십계명」 중 제2계명). 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수그리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므로 참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의 공통된 소원은 좋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금보다 더 귀한 변치 않는 믿음,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 불같은 시험을 이기는 믿음, 이러한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요?
1. 예배는 잘 들음, 경청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잘 들으므로 믿음이 생겨나고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상고하고 있는 “예배”에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 이것을 ‘경청’이라고 하는데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경청은 대단히 중요한 품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개발해야 할 품성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경청하는 것입니다. ‘잘 들음’, 즉 ‘경청’이란 ‘정신적으로 집중하는 능력이나 힘, 세밀하고 주의 깊은 관찰과 들음, 사려 깊고 정중하고 생각이 깊은 행위’를 말합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경청입니다. 경청의 반대는 ‘산만함’입니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서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이 산만함입니다.
‘경청’은 히브리어로는 ‘카솨브’(בשׁק)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말이 귀를 쫑긋 치켜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말은 몸집이 크지만 대단히 섬세하고 예민한 동물입니다. 특히 좋은 말일수록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인의 음성에 집중합니다.
경청을 헬라어로는 ‘에파쿠오’(ἐπακούω)입니다. 이 말은 ‘말하는 사람의 입술에 매달린다’, ‘자세히 듣다’란 뜻입니다. 듣는데 말하는 사람의 입술에 매달리듯 열심히 주의를 집중하여 관심을 가지고 듣는다는 말입니다. 특히 경청에는 주의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마음과 영혼을, 몸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 설교 : 입으로 하는 것 아니다, eye contact
이 말은 라틴어로는 ‘텐데레’(tendere)입니다. 이 말은 ‘온몸을 앞으로 내뻗치는 것’입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것으로 말이 달릴 때 그 몸을 앞으로 내뻗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경청의 품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청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시편 78편에 “내 백성이여 내 율법(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각기관 중에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이 듣는 청각 기능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까지 남는 기능이 듣는 기능이라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식물인간도,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귀는 열려있어서 듣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환자나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찬송을 들려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듣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2. 예배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된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예배가 잘 들음, 즉 경청이라고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 곧 하나님을 경청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된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먼저 ‘기록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늘 읽고 있는 ‘성경’을 말하며, 다음으로 ‘선포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를 말합니다. 예배는 바로 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묵상과 선포된 말씀인 설교가 동시에 이뤄지는 자리이며,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본문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고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무런 믿음의 기대가 없이 하나의 기록으로만 읽을 때와, 믿음을 가지고 선포할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인 믿음만으로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말씀을 직접 받았던 것입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는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은 “오라”(29)고 말씀해 주셨고,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물 위로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이 항상 개인에게 믿음이 부여된 ‘선포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체험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포된 말씀’은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말씀을 성령께서 감동시키시거나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시는 말씀이 될 때에 ‘기록된 말씀’은 ‘선포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 성철 종정 유품: 불경 없고 성경 있음. 성경 읽고 연구했다고 그리스도인 된 것 아니다.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개인에게 ‘선포된 말씀’, 곧 설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포된 말씀’은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선포된 말씀으로 되살릴 때까지 주를 의지하고 기다리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3. ‘선포된 말씀’, 곧 ‘설교’를 잘 듣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차원의 영성을 이야기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은 예배를 통해서 나에게 체험되어지는 “선포된 말씀을 받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단계 기다림 : 첫 단계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철저히 회개하여 사죄의 체험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마음을 전진도 후퇴도 아닌 중립기어에 놓고 완전히 고요한 상태에서 주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 “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영이 당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립니다.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갈 것이며, 주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주께서 제게 향하신 뜻에 따라 결정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게 좋든 나쁘든, 저는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선포된 말씀을 받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금식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비우고, 가장 순수하고 겸손한 모습이 되어 기다려야 합니다.
2단계 거룩한 소원 : 나의 소원을 통해 주님의 뜻을 나타내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의 거룩한 소원을 통해 여러분에게 다가오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행할 의지를 우리 안에 두시고,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이제 당신의 뜻에 따르는 소원을 제게 내려 주십시오.”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소원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소원들이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소원이 자리잡을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조금 기도하다가 일어나서 “아 나는 모든 해답을 얻었다”라고 말하고서 급히 나가 버리지 마십시오. 좀 더 주님을 섬기며 기다리십시오.
왜냐하면 소원은 때때로 사탄이 가져다주는 생각이나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른 것은 성령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 문을 열고 주님 앞에서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큰 평안과 함께 한 가지 소원만이 다른 생각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우리 자신의 소원과 사탄의 소원은 점점 희미해지고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만이 점점 강하게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그리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받도록 하십시오.
3단계 성경에 기초한 검증 : 자신의 마음에 임한 소원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기도를 한다면 사탄이 우리에게 악한 생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조심스레 성경에 비추어 검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 성령의 은사: 갈 5:22-23 성령의 열매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4단계 신호로 나타나는 증거 : 하나님께 나의 환경으로부터 오는 징표를 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우리의 환경에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5단계 신성한 순간의 포착 : 이 단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시기를 알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는 우리의 때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참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한 후에도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면 때가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적신호가 바뀌고 청신호로 바뀔 때 우리의 마음속에 참된 평안이 밀려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즉시 일어나 출발해야 합니다. 최고의 속도로, 축복과 선포된 말씀을 가슴에 안고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이 하나하나 여러분을 뒤따를 것입니다.
※ 결혼 배우자, 직장, 사업 : 기도해서 불안하지 않고, 평안하면 응답이 온 것이다.
※ 대구제이교회 원로 김창진 목사님: 6.25전쟁중 사모님 밤새도록 기도, 목사님은 전투중.
마가복음 11:22-23절의 영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러나 헬라어 성경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그리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선포된 말씀을 받았을 때 그 믿음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산더러 던지우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받지 않고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공부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데 필요한 말씀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대로 행동했을 때 엄청난 기적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에도, 우리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기적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십시오. 결코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년 내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단 한순간에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섬기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결(結) : 항상 경청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합니까? 경청의 자세여야 합니다. 말씀을 펴기 전에 ‘주님, 이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경청하겠나이다.’ 말씀에서 듣고자 하는 자세로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 구구절절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 예배 전 본당에서 잡담하지 말고, 예배를 위한 준비 기도, 말씀, 찬양 아멘으로 받음.
※ 강구교회 1부예배: 새벽기도 참석하는 항존직분자, 교사들 중심-수는 적지만, 은혜 충만
※ 스펄전 목사님-지하에서 기도하는 성도, 무디 집회- 2.3주전 기도팀 들어가서 준비함.
우리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들리라”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이 외롭고 힘든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느낄 때 어찌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인가요? 선포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게 됩니다. 말씀이 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갖는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전하는 이가 인간적으로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할지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고백하며 경청해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바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불순종, 명령 불복종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그러나 간교한 사탄이 뱀의 탈을 쓰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하와에게 물으니 하와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3)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가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어졌습니다.
왜 그런가요? 아담이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아담이 전하는 것을 하와가 잘못 들었거나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경청했으면 결코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실 때 모세가 반석을 홧김에 두 번 내리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거듭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는 예배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배를 ‘천국 잔치’라고 하는데 천국 잔치를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요? 그것은 ‘들음’을 통해서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드림’이며 동시에 ‘들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배 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예배 시간에 주님은 경청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경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헌금을 드립니다.’ 그러나 드리는 그 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드리더라도 경청하는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또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이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란 서로 주고받음입니다.
내가 말하고 주님이 응답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내가 대답하고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쌍방통행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기도를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일방통행만하고 있습니다. 기도에서 하나님의 대답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고 끝나버립니다. 내 말만 하고 끝나는 기도가 나에게 심리적 해소는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의 능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먼저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게 됩니다.
※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 ‘우리 기도는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받습니다.’
※ 한국 목사: 하나님께서 새벽기도후 응답해주려고 하면 가버림,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라
사무엘은 말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님은 엘리 집안에 내릴 일과 이스라엘의 장래를 말씀하실 때 어린 사무엘은 이를 경청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중 여호와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또 주의 음성을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경청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잘 들음, 경청이라고 했는데, 경청이란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믿고 확신하는 마음입니다.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아멘’ 하는 마음입니다. ‘옳습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고백하는 것이 경청입니다. 경청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위로하시고 갈 길을 보여 주시고 힘을 주시고 상한 마음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태중의 생명에게 찬송을 들려주고 말씀을 읽어 주는 그 어머니보다 더 고귀한 행위가 어디 있습니까? 태중의 귀한 생명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란 그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촌인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잉태된 요한이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어 놀았습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놀람과 감격으로 성령 충만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42-45) 하고 찬양합니다.
IV.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석 명절 잘 보내셨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차례, 혹은 제사 드리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제사(祭祀)’를 사전에 찾아보면, ‘신령(神靈)에게 음식을 바치며 기원을 드리거나, 돌아간 이를 추모하는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죽은 이의 ‘지방’을 쓰고,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하며 제사상을 차리게 된 것이 불과 200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거에 가을이면 풍성한 수확을 준 하늘에 감사하는 풍습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에게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원래 반상이 유별했던 조선에서 양반의 비중은 1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기를 지난 후기로 오면서 전란과 부역이 심화되면서, 이 군역과 부역이 면제되는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후기로 오면 양반의 비중이 3-40% 정도 되었고, 원래 양반이 아닌 이들이 자신이 뼈대 있는 집안이란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성대하게 제사상을 차리면서 오늘과 같은 제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사라는 것이 원래 양반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 과시를 위해서 거창하게 차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져서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잘 된다’고 하는 이상을 논리를 펴며 제사를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잘 합니다. ‘죽은 귀신이 먹고 가나 이고 가나, 결국은 산 사람이 다 먹는 것을...’
그렇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제사도, 장례도 산 사람을 위한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는 잘 먹지 않는 제사 음식하느라고 힘들어 하지 말고 우리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해서 맛있게 먹고, 온 가족이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 받고, 서로 축복해 주는 명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잘 들음, 경청입니다. 경건함으로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경청합시다. 위로의 말씀을 경청하여 “아멘” 합시다. 찬송 중에 주시는 음성을 경청하고 기도 중에 주시는 음성에 경청합시다. 말씀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며 “아멘,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고백합시다. 이럴 때 이 예배가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경청함 외에 웃어른에게 경청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경청할 것도 요구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경청할 것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용주에게도 경청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경청하는 곳에 그리스도인의 경건함과 신실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떤 소리를 듣는가? 수없이 많은 말과 소식들, 정보와 자료의 홍수 속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말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 우리를 악하게 하는 말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경청하는 아름다운 품성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아멘’으로 수용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믿고 확신하며,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전부가 예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나의 삶에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축복을 여는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교회에 나와 선포된 말씀, 곧 설교를 경청하므로,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권능, 복을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