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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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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포항의 역사 및 유적 / 7 Ⅱ. 문화재 / 10 1. 국보 264호 영일 냉수리 신라비 1기 신광면 토성리 국가 지정 / 10 2. 보물 252호 보경사 원진국사비 1기 송라면 중산리 국가 지정 / 12 3. 보물 430호 보경사 원진국사부도 1기 송라면 중산리 국가 지정 / 13 4. 사적 386호 영일 장기읍성 장기면 읍내리 국가 지정 / 15 5. 민속자료 187호 모포줄 1쌍장기면 모포리 국가 지정 / 15 6. 천연기념물 371호 영일 발산리 모감주 300본 동해면 발산리 국가 지정 나무 및 병아리꽃 군락지 / 15 7. 무형문화재 93호 전통장(김동학) 학산동 국가 지정 / 15 8. 민속자료 80호 애은당 고택 2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 15 9. 민속자료 81호 사우정고택 2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 15 10. 유형문화재 203호 보경사 오층석탑 1기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 15 11. 유형문화재 243호 용계정 1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 16 12. 유형문화재 249호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5기 흥해읍 칠포리 경북도 지정 / 16 13. 유형문화재 254호 보경사 적광전 1종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 16 14. 유형문화재 290호 상달암 3동 연일읍 달전리 경북도 지정 / 16 15. 기념물 11호 보경사 탱자나무 2주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 16 16. 기념물 20호 법광사지 22필 신광면 상읍리 경북도 지정 / 16 17. 기념물 21호 흥해 이팝나무 군락 34주 흥해읍 옥성리 경북도 지정 / 16 18. 기념물 39호 장기곶 등대 1기 대보면 대보리 경북도 지정 / 16 19. 기념물 57호 우각 향나무 1주 신광면 우각리 경북도 지정 / 16 20. 기념물 70호 입암서원 일원 죽장면 입암리 경북도 지정 / 16 21. 기념물 71호 입암서원 향나무 1주 죽장면 입암리 경북도 지정 / 16 22. 기념물 95호 영일 냄수리 고분 1기 신광면 냉수리 경북도 지정 / 16 23. 기념물 96호 남미질부성 54필 흥해읍 남성리 경북도 지정 / 16 24. 문화재자료 1호 연일향교 대성전 1동 효자동 경북도 지정 / 17 25. 문화재자료 87호 흥해향교 대성전 1동 흥해읍 옥성리 경북도 지정 / 17 26. 문화재자료 88호 오어사 대웅전 1동 오천읍 항사리 경북도 지정 / 17 27. 문화재자료 201호 봉강재 1동 기계면 봉계리 경북도 지정 / 17 28. 문화재자료 202호 달전재사 1동 연일읍 달전리 경북도 지정 / 17 29. 문화재자료 205호 기천고택 2동 기계면 현내리 경북도 지정 / 17 30. 문화재자료 206호 이원돌 가옥 1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 17 31. 문화재자료 224호 장기 척화비 1기 장기면 읍내리 경북도 지정 / 17 32. 문화재자료 231호 보경사 대웅전 1동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 17 33. 문화재자료 250호 제남헌 1동 흥해읍 성내리 경북도 지정 / 17 34. 문화재자료 267호 분옥정 1동 기계면 봉계리 경북도 지정 / 17 Ⅲ. 관광지 / 18 Ⅳ. 인 물 / 22 Ⅴ. 향교 및 서원 / 24 |
Ⅰ. 포항의 역사 및 유적
포항의 역사는 넓게는 영일군(迎日郡), 좁게는 연일(延日)과 흥해(興海)를 모태로 하여 형성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옛 부터 같은 생활(生活)ㆍ문화권(文化圈)속에서 행정적(行政的)인 이합을 거듭 하였다.
이 고장에 언제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는지 지금으로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일만의 바닷가와형산강(兄山江)을 끼고 있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아직까지 구석기(舊石器)유적지나 신석기(新石器)유적이 공식적으로 발굴되지 않아 당시의 삶의 형태가 규명되지 않았으나, 주변의 곳곳에서 무문토기(無文土器)를 사용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문화(文化)흔적이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음은 이 고장 역사의 시원을 밝혀줄 실마리가 되고 있다.
흥해읍의 용곡동(龍谷洞), 흥안동(興安洞), 남성동(南成洞), 대송면의 호동(虎洞), 동해면의 도구동, 흥해읍의 흥안2동의 선돌(立石), 그리고 석부(石斧), 석도(石刀), 석검(石劒), 석족(石鏃),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방추차(紡錘車), 맷돌 등 다양하게 발굴되는 유물 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이 지역에 인류가 서식하며 문화생활(文化生活)을 영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유적과 유물로 보아 오늘날의 포항(浦項)지역에는 형상강(兄山江)하류를 중심으로 동남 쪽의 일월동(日月洞), 남서쪽의 효자동(孝子洞), 서쪽의 이동(梨洞)과 득량동(得良洞), 북쪽의 장성동(長城洞)과 양덕동(良德洞) 등의 주변 구릉지대에 가장 먼저 선사문화인(先史文化人)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이 고장은 신라(新羅)건국을 전후한 진한부족사회(辰韓部族社會)때에는 소읍국(小邑國)인 동자국(動者國)에 소속된 촌락(村落)으로 성장되고, 157년(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4년)경에는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으로, 757년(신라 경덕왕(景德王)16년)에는 임정현(臨汀縣)(또는 오천(烏川))으로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연일(延日)((영일(迎日))현(縣)으로 개칭된 현명(縣名)의 행정구성(行政區城)의 마을로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포항시(浦項市)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일만의 중심 해안지역에 영일(迎日)(연일(延日))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현명(縣名)의 연혁을 보면 그 명칭의 변화가 이두식의 포기(表記)상 '음(音)'으로나 '뜻'으로나 무리가 없이 연결되고 있다.
① 音 : 勤耆 = 근거 근오기 斤烏支 烏良友(支?) 烏支(?) 烏川
② 뜻 : 迎日(延日), 都祈野, 斤烏支, 日月, 延烏(迎烏), 烏川
도기야(都祈野)는 도지들(해돋이의 '돋이'를 '도기'(都祈)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로서 해가 돋는 들을 뜻하고, 그것은 영일(迎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신라시대의 이름인 근오지현(斤烏支縣)의 '斤'은 '도끼근'자로 이것과 '烏'를 붙이면 '도'가 되고 앞에서 '都'로 나타낸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斤烏支'도 역시 '도지' 즉 '해돋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연오, 세오, 오천의 '烏'는 태양을 나타내는 글자로 옛날부터 해 속에는 세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일중유삼족오(日中有三足烏) 태평어람(太平御覽)권 3日上&고금운회(古今韻會)그래서 해를 '金烏'라고 불러 왔으며'靈烏'라고도 했고, '日烏'라고 칭한다. 따라서 延烏는 해를 오래 비치게 하는 뜻이 되고, '迎烏'는 해를 맞이하는 뜻이 된다.(延烏와 細烏는 일월지(日月池)에서 제의(祭儀)를 주제하는 사제자(司祭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영일권(迎日圈)에 유별나게 많이 나타나는 '烏'字가 든 지명(地名)들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迎日(延日)의 지명은 공식적으로 고려 초부터 호칭되었으나, 뜻으로 본 迎日의(해돋이,해맞이)의 지명, 즉 비공식적 지명은 훨씬 이전부터 호칭되었으나, 뜻으로 본 迎日의 치성(治城)은 오늘날의 영일읍(迎日邑)지역 뿐만 아닌 오천(烏川),대송(大松),동해(東海),포항(浦項)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고장과 주위 고을은 주로 해안지역이므로 왜(倭)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서울을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모든 문물(文物)이 미개하고 풍토(風土)가 척박했던 섬나라 사람인 왜倭寇의 노략질을 받을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타난 왜인(倭人)의 수많은 동해안(東海岸) 침입(侵入)의 경우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북형산성(北兄山城)을 축조한 경우는 그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일차사료(一次史料)가 되고 있다.
북형산(北兄山)은 예로부터 이 고장의 관문(關門)으로서 형상강(兄山江)이 포항(浦項)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兩山미기( 매기 : 목 )' 중 동남쪽의 해발 265.5m의 산을 말하는데, 신라 때에는 北兄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부터는 兄山이라고 불러왔다. 서북쪽의 마주 보이는 산은 兄山보다 조금 낮고, 兄山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弟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北兄山은 신라 때부터 國防의 要塞地로서 주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神聖한 곳으로 지목된 곳이다. 「兄山은 신라 때에 北兄山이라 불렀으며, 中祀에 들었다」(<新增東國興地勝覽) 卷21<慶州府山川條>),「四瀆祭를 北兄山城에서 지냈다」(<三國史記> 卷42 <雜志> 祭祀倭),「守令이 가서 제사 지낸 곳이 셋 있다. 大王의 神을 모시는 東嶽, 西嶽ㆍ兄山인데, 兄山은 府의北쪽 30里거리에 있다」는 등의 기록이 이를 밝혀 주고 있다.
現在 王龍時의 작은 암자자리에서 出土되는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신라 때의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中祀를 베풀던 곳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北兄山城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음을 유적지에 뿐 아니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烽燧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유서 깊은 형산(兄山)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경주군(慶州郡)에 속해 있으나, 이 고장의 역사적ㆍ지리적 발전으로 보아 弟山ㆍ兄山江과 함께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兄山江은 浦項의 생성(生成)과 발전(發展)의 젖줄로서 兄山과 弟山은 兄山江의 중요 길목인 '양산목'으로서 浦項의 關門으로 상징된다면, 문화재(文化財)가 많은 경주군(慶州郡)에 속해 있는 것보다는 크게 발전하는 浦項市 지역에 편입시켜 그 현장을 보호하고 가꾸는 장래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될 것으로 본다.
Ⅱ. 문화재
1. 국보 264호 영일 냉수리 신라비 1기 신광면 토성리 국가 지정
< 영일 냉수리 신라비 >
- 시 대 : 고신라 [443년(눌지왕 27)또는 503년(지증왕 4) 추정]
- 재 질 : 화강암
- 크 기 : 전면 하변너비 73cm, 좌변 높이 47cm, 우변높이 66cm, 두께 30cm, 부정형 4각형, 하단이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너비가 축소.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 지정번호 : 국보 제264호
영일냉수리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이상운 소유 밭에서 밭갈이를 하던 중 평소 걸림돌이 되어온 것을 파헤쳐서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운반하여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행정기관에 신고하여 학계에서 현지 조사한 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고구려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은 안강·청하·흥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 동인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고비는 고르지 못한 네모꼴의 화강암 자연석 앞·뒤·위 3면에 새긴 삼면비로서 앞면은 글씨를 새기기 위해 다듬었으나 뒷면과 윗면은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글씨를 새겼다. 따라서 매행별 글자의 수와 간격,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데 앞면에는 12행 152자, 뒷면에는 7행 59자, 윗면에는 5행 20자 등 총 231자가 새겨졌으며 하단이 넓고 상단의 폭이 축소되는 형태로 앞면과 뒷면은 가로 65㎝ 내외, 세로 44~69㎝ 내외이며 윗면은 가로 66㎝ 내외, 세로 27~30㎝ 내외이다. 비문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마모됨이 거의없고 육안으로 거의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자체는 대체로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서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국보 제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전면의 가장 큰 글씨는 길이와 너비가 각 5cm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cm이며, 후면과 상면의 가장 작은 글자는 5~7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앞면에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지증왕(智證王)의 즉위 전 호칭을 썼고,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로 미루어 443년(눌지왕 27) 또는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여 이제까지 신라 최고(最古)의 비로 알려졌던 경북 울진군 죽변면(竹邊面) 봉평리(鳳坪里) 고비(524년 건립)보다 81년 또는 21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阿干支) ·나마(奈麻)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있다.
2. 보물 252호 보경사 원진국사비 1기 송라면 중산리 국가 지정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3. 보물 430호 보경사 원진국사부도 1기 송라면 중산리 국가 지정
보경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승탑. 보물 제430호. 높이 450cm.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부도이다. 하대석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밑의 2단은 8각이며 아무런 조각이 없고, 상단은 32엽의 단판(單瓣) 연화문을 조각한 복련석(覆蓮石)이다.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의 밑에는 1단 굄이 있고, 옆면에는 32엽의 단판 연화문이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돌기둥과 같은 탑신을 받치기 위한 높은 굄이 있다. 탑신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기고, 한 면에만 문틀이 없는 자물통을 모각했다. 옥개석의 모서리에는 우동선(隅棟線)이 새겨져 있고, 그 끝에는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거의 완형으로 복발(覆鉢)·앙화(仰花)·보주(寶珠)가 차례로 얹혀 있다. 이 부도는 탑신이 길고 폭이 좁아 고준(高峻)한 느낌을 주며, 각 부의 조각기법도 섬약한 편이다. 원진국사비에 의해 1224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노계시비
입암서원 도로건너편 아래에는 2001년 11월에 세운 노계 박인로의 시비가 있다.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의 규모로 세워졌는데 까만 오석에는 노계의 시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2001년 노계시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세워졌다.
시비의 글은 문인협회 포항시지부장 김일광씨가 지었으며 글씨는 학정 이돈흥, 조각은 김두환씨가 맡아 제작하였다.
◆ 입암
무정히 서난 바회 유정하야 보이난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부기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굴리 고칠 적이 업나다
입암 29곡은 노계 박인로(1561∼1642년)의 작품으로 입암의 절경을 노래한 시조로 1629년경 여헌 장현광(1554∼1637)선생과 같이 노닐면서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전해오는 29수 가운데 <입암>과 관련된 것이 10수이며 이 연시조에 등장하는 경치는 28경 가운데 19종, 28경 이외에 <정사>가 한 수이다.
박인로 선생은 이 고장에 머물던 여헌 선생과의 교분이 각별하여,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임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29곡인데 노계문학 중.
박인로 선생은 무관 및 시인으로 1561년 영천 북안 도천에서 태어나 1642년까지 여든 두 해를 살았으며,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이다.
선생은 3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달려갔으며, 3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의 명을 받아 무인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을 정성껏 보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은 의병활동과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의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유학자로 전력하는 한편 성인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노계의 문학은 일상어를 통한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질박하면서도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체, 구성의 웅장함으로 일찍이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문학의 한지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8차례나 죽장을 방문하여 입암을 배경으로 가사<입암별곡>과 시조<입암29곡>을 지었으며, 문집 [노계집]에는 조흥시가 외 64수의 시조, 선상탄, 누항사 외 7편의 가사를 남겼다. 회재 이언적 시비
대지 뻗어나 동해에 닿았는데
천지간 어디에 삼신산이 있느뇨
비속한 티끝세상 벗어나고자
추풍에 배띄어 선계를 찿고 싶네.
4. 사적 386호 영일 장기읍성 장기면 읍내리 국가 지정
5. 민속자료 187호 모포줄 1쌍장기면 모포리 국가 지정
6. 천연기념물 371호 영일 발산리 모감주 300본 동해면 발산리 국가 지정 나무 및 병아리꽃 군락지
7. 무형문화재 93호 전통장(김동학) 학산동 국가 지정
8. 민속자료 80호 애은당 고택 2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9. 민속자료 81호 사우정고택 2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10. 유형문화재 203호 보경사 오층석탑 1기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11. 유형문화재 243호 용계정 1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12. 유형문화재 249호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5기 흥해읍 칠포리 경북도 지정
13. 유형문화재 254호 보경사 적광전 1종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14. 유형문화재 290호 상달암 3동 연일읍 달전리 경북도 지정
15. 기념물 11호 보경사 탱자나무 2주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16. 기념물 20호 법광사지 22필 신광면 상읍리 경북도 지정
17. 기념물 21호 흥해 이팝나무 군락 34주 흥해읍 옥성리 경북도 지정
18. 기념물 39호 장기곶 등대 1기 대보면 대보리 경북도 지정
19. 기념물 57호 우각 향나무 1주 신광면 우각리 경북도 지정
20. 기념물 70호 입암서원 일원 죽장면 입암리 경북도 지정
21. 기념물 71호 입암서원 향나무 1주 죽장면 입암리 경북도 지정
22. 기념물 95호 영일 냄수리 고분 1기 신광면 냉수리 경북도 지정
23. 기념물 96호 남미질부성 54필 흥해읍 남성리 경북도 지정
24. 문화재자료 1호 연일향교 대성전 1동 효자동 경북도 지정
25. 문화재자료 87호 흥해향교 대성전 1동 흥해읍 옥성리 경북도 지정
26. 문화재자료 88호 오어사 대웅전 1동 오천읍 항사리 경북도 지정
27. 문화재자료 201호 봉강재 1동 기계면 봉계리 경북도 지정
28. 문화재자료 202호 달전재사 1동 연일읍 달전리 경북도 지정
29. 문화재자료 205호 기천고택 2동 기계면 현내리 경북도 지정
30. 문화재자료 206호 이원돌 가옥 1동 기북면 오덕리 경북도 지정
31. 문화재자료 224호 장기 척화비 1기 장기면 읍내리 경북도 지정
32. 문화재자료 231호 보경사 대웅전 1동 송라면 중산리 경북도 지정
33. 문화재자료 250호 제남헌 1동 흥해읍 성내리 경북도 지정
34. 문화재자료 267호 분옥정 1동 기계면 봉계리 경북도 지정
Ⅲ. 관광지
- 입양서원일원
▶ 위치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산 21외
▶ 개요 : 조선 효종8년(1657)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라닛 이 지방에 피난와서 살다가 죽은 문강공 장현광을 봉안하고 지방우림인 동봉 권극립, 우현정사상, 윤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고 순종원년91907)에 묘우가 손실되었다가 1913년에 복원되고 1972년 묘우를 복원하였다. 입암서원은 목조와가의 ㄱ 자형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만활달, 일재당이 있다.
- 일재당
조선 선조33년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 수암 정사진, 운암 손우남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92년 노계, 박인로 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벽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 사건으로 왜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던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
- 만활당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때 피난 와서 기거하던 은숙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 영일만 온천
▶ 위치 : 포항시 남구 대송면 대각리 358
▶ 온천수 특성 : 옛날부터 온정재, 왕어골, 가마골에서 온수가 솟았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1974년 석유 탐사시 영일만 일대 지열이 전국 최고임이 확인되었고 1988년 (주)영일만 온천에서 개발하여 대규모 온천휴양지로 조성하고 있다.
◎ 온천수의 성분
온천수 온도 35。C, PH 9.43의 알칼리성 중탄산 나트륨 형천이며, 국내에서 가장 젊은 온천으로 체감적으로 매우 매끄럽고 부드럽다.
- 국립등대박물관
▶ 문의 : 054-284-4857
▶ 개관시간 : 연중 10:00~18:00
(관람권의 매표시간은 종료 30분 전까지)
휴관일 : 설날 및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관람소요시간 : 약 1시간.
전시자료 : 항로표지 관련 자료 320종 3838점.
전시관 안내 : 제1전시관(해양수산관), 제2전시관(등대관), 기획전시관, 테마공원, 야외전시장, 전망대 및 휴게실.
등대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해양안전에 기여하는 역할과 해양사상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국내유일의 등대전문박물관으로 동해안의 푸른 바다와 일출광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 환호해맞이공원
▶ 위치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두호, 환호동 일원 (환호주공APT 맞은편)
▶ 개요 : 해맞이 공원 41만 4천여평중 환호주공APT 맞은편 15만 6천여평을 오는 2001년까지 4백 11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첨단과학공원, 해변공원, 물의 공원, 전통놀이공원, 어린이 공원이 조성되었다.
- 첨단과학공원은 포항시의 첨단산업 이미지와 밝은 미래를 표현, 체험 할 수 있도록 과학박물관, 야외공연장, 대폭포, 프로그램분수, 바람개비동산을 설치.
- 해변공원은 바다 전망의 전경이 양호한 해안 남사면 구릉지에 야외무대, 피크닉장, 해변전망광장등을 조성.
- 물의 공원은 물과 함께 휴식을 즐기며, 각종행사 및 지역주민의 그린공원으로서 역할 등 다기능 시설지로 벽천, 빛의 분천, 행사 공연장을 설치.
- 전통놀이공원은 포항시민과 인근주민의 휴식위락공간으로 전통놀이마당, 야외공연장, 정자등을 조성.
- 어린이공원은 소규모 자투리 공간을 인근지역의 어린이 및 노인을 위한 어린이 놀이 시설, 게이트볼장 등 운동시설을 설치함.
- 영일민속박물관
▶ 위치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39-8 ☎ 054)261-2798
▶ 개요 : 향토풍습 및 민속유물을 영구보존하고자 지역 주민등의 뜻을 모아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헌종원년(1835년)건립된 당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이었던 제남헌을 수리하여 1983년 10월 29일 개관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여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 부터 주 박물관으로 지정됨.
◎ 소장품현황 (총 4,604점)
- 토기류 : 실그릇, 도자기, 귀대병 등 591병
- 관혼상례 및 의관류 : 상례복, 혼례복 등 240점
- 기타 : 제남헌, 골패, 비석 등 610점
- 생활용구류 : 베틀, 토기항아리, 디딜방아 외 1,771점
- 농어업기계류 : 지게, 도리깨, 절구, 새우잡이통, 부망그물 등 1,142점
- 고서적류 : 조선건국사집, 칙명, 교지, 시집 등 250점
- 보경사
▶ 위치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 개요 : 송라면의 서북쪽 4Km되는 내연산 기슭에 일조대사가 8면경을 동해 가까이 내연산 아래 용담호에 30m 깊이로 파묻고 절을 세웠다하여 보경사라 하는데 경북 8경의 하나로 일컫는 빼어난 주위경관과 12폭포가 저마다 기이한 절벽에서 웅장하게 떨어지는 광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 등산코스
① 보경사 → 문수암 → 내연산정상 → 향로봉(9.9Km)
② 보경사 → 문수암 → 문수산 → 정상 → 시명리 → 청하골 → 내연골 → 보경사(20Km, 도보 5:30소요)
③ 보경사 → 관음폭포 → 은폭 → 복호폭 갈림길 → 시명리 → 향로봉 → 정상 → 문수산 → 보경사
Ⅳ. 인 물
- 역사적 인물 조사 -
△정 몽 주
고려말의 충신 초명은 몽란,몽룡,자는 달가 호는 포은,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영일로 정습명의 후손이며 관의 아들, 공민왕 9년(1360) 삼장시험에 연달아 장원급제 1364년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의 삼선,삼개를 격퇴하였고 1372년 서상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귀양갔다.1380년 일본사신으로 가서 해구를 금지토록 교섭하고 돌아와 1384년 두 번째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하고 돌아왔으며 1386년 또 명나라에 들어가 세공을 면제토록 청하고 돌아와 영원군에 봉해졌다.
1389년 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의호를 받으며, 1392년 대명률을 새로 찬정해 바쳤다. 당시 이성계의 힘이 날로 커져서 조준, 정도전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하매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했고 성리학에 매우 밝아 5부학당, 향교를 설치 유학을 진흥시켰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이며 이 지방 오천읍이 공의 고향이다.
△황보 순
충정공 황보 인의 7세손이며 황보 억의 손자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중군, 많은 공을 세워 훈련원사평을 제수받았고 학문이 뛰어나 여헌 장현광 선생과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헌선생이 제문을 지어 슬퍼하였다.
△김 기 락
자는 학원, 호는 일계, 본관은 경주로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더니 긍암 이돈우공에게 사사받아 문장이 대성하여 유고집을 남겼다.
△김 익 노(1905~1962)
호는 죽곡, 본관은 수원으로 연일읍 택전2리에서 출생하여 영일을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제헌의원에 당선한 후 4대 의원을 역임하였다. 국회의원 재임시에 오천읍 오어지를 국비로 준공하여 농업용수개발에 공헌하였고 제3대 의원시절에는 국회 정계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1951년 영일교육재단을 만들어 영일중학교, 영일고등학교, 장기중학교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여 지역개발과 교육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Ⅴ. 향교 및 서원
- 흥해향교(興海鄕校)
흥해향교는 포항시내에서 영덕방향으로 가는 7번 국도변의 향교산에 있으며, 조선의 건국 초기인 태조 7년(1398년)에 유교의 뿌리를 찾아 교육하는 오늘날의 중등교육과정(중설위)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연혁에 관한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창건연대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건물은 6.25전쟁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서재, 동재, 수복실, 태화루 등을 갖춘 총 99칸 규모였으나, 6.25전쟁때 대성전과 동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을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에 명륜당, 수복실을 그리고 뒤이어 동무, 서무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에는 태화루를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지어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향교 주위에는 기념물 제21호인 50년에서 100여년 된 이팝나무 30여 그루가 집단 군락을 이루어 있어 매년 늦은 봄이면 흰 꽃이 피고 그 향기가 멀리까지 퍼져 장관을 이룬다. 또 가을이면 보랏빛 열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 청하향교(淸河鄕校)
청하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북구 청하면 고현리에서 창건하였다가 오늘날의 서정1리(옛 금정리)로 옮겼으며, 숙종 39년(1713년) 현감 노세환이 현청이 있던 현재의 덕성리 190번지로 옮겨 공사에 착수한 후, 숙종 42년인 1716년에 대성전, 명륜당, 동재, 2층 천화루, 신삼문, 열호재 등을 완성하여 준공하였다.
이 청하향교는 불행하게도 70여년전에 대성전 서편 열호재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6.25전쟁때는 향교 뒤 성지 나무숲에 공산군 탱크 부대가 주둖는 바람에 미군의 함포사격을 받아 천화루가 파손되었으나 1964년에 명륜당과 함께 중건하였고, 연무정도 이때 불타 없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현재 향교 뜰에 연무정비 반쪽과 현감 임택고열호제창건비, 현감 노세환흥학비, 그리고 향교 앞에 6.25전쟁 이후 새로 만든 하마비가 서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봄,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나 요즈음에는 8월 중 하루 날을 잡아서 인근의 여러 문중이 참여하여 제사(향사)를 지내고 있다.
- 연일향교(延日鄕校)
남구 효자동 407에 있는 연일향교는 조선 태조7년(1398년)에 현재 남구 장흥동에 창건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연혁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숙종때 대송면 정좌리에 중창하였다가, 고종 8년에 현감 원우상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일제때는 명륜학교로 사용된 바 있고 1983년 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항시에 편입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현과 송조의 2성현 우리나라 현철 18분의위해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 하루 날을 잡아서 향제를 올리고 있다. 특히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겹처마의 집으로 주심포계 외일출목의 조선후기 특지을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로, 1985년 8월 경북문화재 자료 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 장기향교(長기鄕校)
남구 장기면 읍내리 동악산(해발252.5m) 장기읍성 부근에 있는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명장리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때 병하로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년)에 중건했다가, 정조 9년(1785년) 지방의 유교의 정신과 학문을 부흥하기 우해 현감 황익진이 오늘날의 장기초등학교 동편에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문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향교에 봉인해 오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권안사키고 의벼을 일으켰기 때문에 건물을 소실되었으나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으며, 새로 옮겨 지을 때는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희사하여 향교를 옮겨 짓게 했다고 한다.
그 후 1931년에 군수 김영수가 향사들과 함께 읍성내로 있던 구 객관을 수리하여 명륜당을 만들고 대성전을 새로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하였다.
장기향교는 인근의 여러 문중에서 참가하여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사(향사)를 지내 오다가, 최근에 와서 8월 중 하루 날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향교에는 대성전, 명륜당, 신삼문, 동재, 장경각, 대문 등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 향교 앞의 하마비를 새로 만들어 세워 놓았다.
※ 이 글은 포항시사 등을 참고하여 쓴 글입니다.
- 호미곶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하여, 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으로 일찍이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따라서 정치망 어업이 활발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성게 등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1903년에 만든 국내 최대규모의 등대와 1985년 준공한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위치한 이 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볼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이자 청정해역을 보유하고 있어 호미곶(대보면) 자체가 자연공원이라 할 만큼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의 웅장하다.
- 호미곶 해맞이 광장
이곳 해맞이 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축전 개최장소로 13,920평의 부지에 기념조형물(상생의 손), 성화대, 영원의 불씨함, 채화기(천년의 눈동자), 캐릭터상품특판장,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광장 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단지에는 매년 4월~5월경에 유채꽃이 만개하고 있다.
특히 이곳 광장의 기념조형물은 사람의 양손을 청동 소재로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하여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으며 변산반도의 천년대의 마지막 햇빛,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의 새천년 첫햇빛, 이곳 호미곶 새천년 첫햇빛 등이 합화안치된 성화대의 불씨는 각종 국가대회 성화의 씨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연오랑과 세오녀
▶ 규 모 : 전체높이 8m, 상의 높이 3m
▶ 작품설명 : 조각상좌대 - 두사람을 일본으로 싣고 간 바위.
바다 조형물 -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
원형의 둥근 조형물 - 이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달을 상징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 - 일본에 전파 선진문물인 비단(일월정을 상징하는 국가제천행사의 재물).
- 내연산(보경사군립공원)
▶ 위치 : 송라면 중산리
내연산은 태백준령이 빚어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산으로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십이폭포를 간직하고 있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깊은 감탄을 자아낸다. 정조 16년(1792년) 보경사에서 일생을 보낸 동봉은 내연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남쪽의 신구산과 북쪽의 내연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합하여 한 곳으로 흐르는데 그 수원이 30리나 되며 폭포와 절벽과 층벽, 기암괴석이 굽은 소나무와 함께 면면이 진열되어으니 이곳 사람들은 소금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내연산의 명소를 나누어보면 상생폭포, 기화암, 용바위, 학소대 등 28경이 있다하나 명확히 알 수가 없고, 20여개의 명소가 알려져있다.
- 내연산계곡 : 옥수가 사시사철 흐르며 수원이 30리나 된다.
- 폭포, 바위
․ 12폭포 : 내연산 계곡에 위치, 연산폭포, 상생폭포, 관음폭포, 은폭포 등
․ 바위 : 내연산 계곡에 위치, 기화대, 학소대, 선바위 등
- 보경사 = 아름다움이 빼곡 들어찬 보경사
▶ 문의 : 보경사 종무소 (054)262-1117
보경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중남산을 등에 업고 좌우로 뻗어난 내연산 연봉에 둘러싸여 있으며, 12폭포로 이름난 그윽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을 껴안고 포근하게 배치되어있다.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대덕지명 법사가 왕께 아뢰어 「동해안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장차 삼국을 통일하리라」하자 왕이 기뻐하며 포항을 거쳐 해안을 타고 올라가는데 오색구름이 덮힌 산을 보고 찾은 곳이 내연산이며 그 연못을 메우고 팔면보경을 묻고 절을 창건하여 보경사라 하였다 한다.
- 토속음식단지(먹거리특산물) : 도토리묵, 더덕, 산채나물, 송이버섯, 토종닭, 동동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