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강론(요한 20, 19-31)
강이냐시오 부제
찬미 예수님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느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 하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향해 과연 예수님이 주고자 하신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엠마오때 형제들과 함께 배틀 쉽이라는 미국영화를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미국과 일본의 해군이 힘을 합쳐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봤던 미국대통령이 지구를 구하는 내용의 “인디펜던스데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땐 저도 모르게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의 우주선 심장부로 돌진하는 미국대통령의 용기와 비장한 모습에 그만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하면 다른 건가요? 배틀 쉽을 본 어느 수사님의 감상평 한 마디 “와! 도끼로 탱크 잡는 영화다!” 아무리 영화가 허구라지만 정말 미국이 하면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왜 지구는 맨날 미국이 지켜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연 미국이 말하는 악의 세력과 싸워 이 지구를 지키는 평화와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주시려는 평화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미국식 평화를 생각하면 예전에 읽었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가 생각이 납니다. 반장이요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는 엄석대, 그는 일 년 동안 거의 아무에게도 저항 받지 않고 학급을 지배해왔으며, 주먹 싸움, 성적 등에서도 남보다 월등하여 학급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반대로 미국이 부르짖는 평화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악의 축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한병태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절대 권력에 아첨하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았던 한병태는 엄석태에게 도전하기 시작하였고 이기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 결과 한병태에게 돌아온 것은 '불량한 아이'와 '외톨이'라는 급우들의 따돌림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엄석대에게 복종을 하게 되고 그의 보호를 받아 편안하게 지내게 됩니다.
엄석대처럼 미국에 의해 주도되어지는 세상적인 평화는 분명히 강력한 힘과 경제력을 동반하여 유지하게 되지만 모든 이가 이 평화를 공평하게 누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약소국들은 마치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만을 바라보는 개처럼 전락하게 되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는 파괴한 채 오직 인간의 편리한 환경만을 개선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에 몰두하는 것 또한 세상의 평화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 모두가 주체이며 목적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란 바로 인간 스스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는 정의의 실현이며 사랑의 결과임을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물질적 조건들을 갖추어 나가고자 애쓰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는 조건 없는 나의 선택만을 희망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는 아버지만 없으면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할 텐데! 라며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늘 꿈꿔왔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 평화라는 것을 어른이 되어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내 행복과 평화가 구속당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평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온전히 내 안에 존재하며 외부의 자극에 동요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는 나치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언제 닥쳐올지 모를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기다립니다. 빅터는 자신이 입은 죄수복 안에는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성경말씀이 적혀 있는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본 빅터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조건과 환경에 의해 안정이 형성되는 것은 세상적 평화일 뿐입니다. 빅터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자서전을 통해 우리들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며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어느 누구도 평화를 원하지 폭력과 전쟁을 원한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평화를 파괴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평화를 파괴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불순명과 탐욕으로 인한 원죄로 하느님의 모상성(image of god)을 잃어버리고 변질되어 감을 교회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성 시스틴 성당의 벽화에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죄를 짓고 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 이 두 상황의 얼굴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에덴동산에 살 때 두 사람의 얼굴은 하느님과 닮은 젊고 밝고 미소 짓는 얼굴이지만 원죄로 동산을 떠나는 그들의 얼굴은 늙고 수심이 가득하며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미사 때 서로 나누게 되는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 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는 성경에 기초하며 그 어원은 샬롬이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닮고 일치될 때 갖게 되는 기쁨과 평화를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라고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행되는 무분별한 개발정책은 바로 인간의 불순종과 탐욕이 부르는 결과이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짐을 인식 할 것을 교회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소명으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치고 있는 평화지킴이들,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오늘도 그들은 미사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복음에서 토마 사도는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식하고자 합니다. 믿는다는 것, 곧 신앙은 나의 체험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설명될 수 없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더해지는 것을 또한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토마사도의 의심은 분명 우리 모두도 똑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진리들을 나의 인식 안에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면 안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식할 수 있는 나의 감각들은 오직 외부의 조건만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각들이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그분을 믿기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분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인간적 조건들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수 있으며 그 믿음을 청하는 것이 하느님 자녀로서의 권리이며 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보내는 오늘, 내 안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쳐흐르고 나의 믿음이 굳건해지도록 자비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니다. 아멘
첫댓글 토마 사도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렀기에 주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교회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행복이 있기에 더 없이 기쁠수가 있습니다... 묵상나눔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평화! 하느님의 자비를 제대로 깨달으면 인간적인 온갖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부활시기에 맞이한 하느님의 자비주일 묵상! 양식으로 받으며 감사드립니다 ( 언뜻 스쳐간 어린시절의 고백에도 감사!!)
주님, 저희가 매 순간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보통 성당을 찾는 분들 중에서는 정말 세상에서 이것 저것 해 보고 위로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분들도 많읍니다.
그리고 안타까운것은 이들이 성당에서 조차 위로를 받지 못할때도 있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어느정도 삶이 안정되면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기에 다시 성당을 잘 찾지 않거나 소홀이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하느님을 닮지 않는 부분들 살아온 인생동안 겪었던 모든 상처 욕망 욕심등으로 또 세상의 여러 부조리로 인해 상처 받고 그리고 마음까지 굳어지고 닫혀지고 왜곡된 이 마음들을... ...
이처럼 이들의 이러한 소위 약해진 마음안에 예수님은 서서히 노크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내면의 상처와 아픔 욕망 욕심
욕심들을 내려 놓을수록 하느님이 오묘한 섭리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 사랑의 지구를 체험하며 영적으로도 위안과 천국의 희망을 생각할 것입니다.
수사님께서 올리신 말씀대로요. 세상의 행복은 말씀대로요 그저 누가 먼저 이권을 잡느냐는 순환의 논리 입니다. 이는 또 다시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받은 상처를 아픔을 억울함을 하소연할때 없는 아픔을 고쳐주시고 하느님과 일치 속에 하느님을 다시 잘 알 수 있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글 좀 길었어요ㅠ_ㅠ;
엄석태, 빅터 프랭클...기억 속에 있는 이름들입니다...궁극적인 평화는 하느님 안에 있음을 요즈음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삶안에 체험할 수 있는 주제(영화)로 강론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의 평화에 대한 적절한 예와 삶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설명 감사합니다.
며칠 전, 친구와 본 영화제목을 집에 들어오면서 잊어버렸는데...베틀 쉽이었네요...고민이 있을 때, 뭔가 하고픈 말이 많아도, 같은 공동체안에서도 얘기나누기 쉽지 않음을 내어놓지 못하는 마음들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그저 침묵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묵상글 참으로 좋았습니다.
마음의 영성 가족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세상의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항상 머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