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
밀양읍의 노.농.청.학 4자연합의 봉기투쟁의 준비를 마치고, 이제부터 우리는 밀양고등공민학교 학생의 남조선 단독선거실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이를 4자연합투쟁에 결합시키는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자치회 회장인 강성호 동지가 자치회운영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하여 결의하고 투쟁조직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강성호 동지는 6일 오후 방과 후에 안건을 제시하고 임시운영위원회를 정식으로 소집했다. 강성호 동지는 평소 학생자치회에서 발휘한 헌신적인 노력과 인기로 운영위원회에서만 아니라 학생 전체는 물론이고 교사들에게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번 투쟁의 제안은, 전국적인 총파업의 일환으로써 미제의 남조선 분할책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당위로 만장일치의 동의로써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영위원회를 바로 투쟁위원회로 편성하고 거기에다 나를 밀양고등공민학교 봉기의 선전선동부문을 담당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봉기조직을 맡은 강성호가 학년대표 2명과 함께 동원소조를 결성하여 봉기당일 학교운동장으로 쓰고 있는 ‘동사’마당에서 전교학생, 모두 합쳐 150명 쯤 될까 하는 숫자이지만, 이들을 한데 모우고 남조선단독선거반대, 단독정부수립반대의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결의 대회에서 강성호는 사회와 대회사를 맡고 나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운영위원회 성원과 나를 포함한 대회집행 성원 이외는 7일 대회동원 소집 때까지 이러한 모든 결정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운영위원회, 즉 투쟁위원회를 마치자, 나는 성호 동지에게 구호선창용으로 종이나팔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하여 종이와 베를 사서 아지트로 간다고 했다. 성호는, “이사람 돈은 있나?” “걱정 말라고. 나 재정부장까지 맡을 테니. 하하.” 하고 일단 헤어졌다. 나는 시장 안 포목점으로 가서 광목 10마(야드)와 굵은 면사와 굵은 바늘 3개를 샀다. 마침 그 포목점의 한 곳에 재봉틀을 두고 한 아주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기에, 나는 부탁 말을 했다. “거기 바느질하시는 아주머니, 이 광목 베에 끝단을 좀 박아주시겠습니까? 삯은 넉넉하게 드릴 테니.” 라고 하자, 웃으면서 내 쪽으로 나오며 “까다로운 일이 아니면 해드리지요, 학생.” 그래서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설명을 했다. “광목 반마를 끊어내고 양 쪽에 2치가량의 각목이 들어갈 수 있는 단을 만들고, 끊어낸 반마의 광목으로 네 귀퉁이에 어디 묶을 수 있는 끈을 만들어 달면 됩니다.” 아주머니는 바로 알아듣고,“예, 현수막 할라고요?” “맞습니다. 산소에 산역이 끝나고 고사를 지내는데 오시는 분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할라꼬요.” “예, 잠깐만 거기 앉아 기다리소.” 하고 가지고 재봉틀 쪽으로 가더니 얼마 안 있어서 만들어 들고 나왔다. “이러면 되었는교, 예?” 나는 만든 것을 펴보니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잘 되었다. “아주머니, 자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게 주인을 보고 “긁은 바늘 한 쌈과 굵은 면합사실을 한 타래를 부탁했다.” 주인은 바느질이 다 됐는데 그것도 필요하나?” “예, 그것은 딴 데에도 필요해서요.” 베 값과 실, 바늘 값을 치르고, 바느질삯을 치르려고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알아서 주이소.” 라고 했다. 나는 좀 넉넉하게 드렸더니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반을 도로 주면서, “너무 많아, 이것만 받으면 됩니다.” “아닙니다. 그냥 받아서 갈치라도 사서 아이들 한태 주이소, 그만.” 하고 도로 주려는 손을 밀치고 나왔다. 그 뒤를 쫓아, “학생, 고맙습니데이.” 라는 말이 따라 나왔다. 여기다 물감을 사고 플래카드에 꿸 막대기를 사야겠는데 한꺼번에 사면 의심받을 수 있기에 일단 아지트에 갖다놓고 다시 나왔다. 도료상점에 가서 흑색, 적색, 청색 팽키를 샀고, 다시 하정수 집 나무공장에 가서 치 반 각목, 길이 6자짜리 2개를 샀다. 그리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할매에게, “할매, 오늘 저녁도 집에 못 오겠네. 동무들과 일이 좀 있어서.” 라고 하자, 할매는, “손자 놈하고 있다고 좋아했는데, 좋기는커녕 걱정꺼리만 늘었구나. 그래, 내가 말린다고 들을 너도 아이고(아니고), 그렇기나 말기나 조심해라이. 요즘 잽혀가면 뼈도 못 추린다더라.” 나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그냥 나왔다. 아지트에 갔더니 성호 동무가 와있었다. 나는 성호 동무를 보자 “내일 집회 준비는 잘되어가나?” “응 염려 말거라. 그런데 농잠학교가 잘되어야겠는데...... 거기는 그 빌어먹을 학련 놈들이 많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 생길 듯싶으면 경찰에 꼬아바쳐서(밀고를 해서)...... 우리처럼 의사를 모을 수도 없고...... 아무튼 잘해야 할 터인데. 그래서 우리하고 ‘밀중’(밀양중학교)하고는 농잠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하기로 하고 ‘농잠’은 한 5분 뒤에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은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집회도 아주 간단히 해서 바로 4자연합의 장소로 빨리 가야한다는 거다.” 밀양농잠학교는 친일기독교 목사였던 권태희(權泰羲)(주1) 목사가 당시 교장을 하고 있었는데, 권목사의 비호를 받아 밀양의 학련조직의 뿌리가 내렸다. 폭력과 위협으로써 당시 민주진영의 학생운동을 방해해왔고 여학생들을 마구 희롱하여 밀양사람들로부터 ‘돌 막나니’로 취급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잠’ 조직에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이들이 폭력을 써서 방해하면 이쪽도 폭력으로 대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들 때문에 군중조직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련 깡패들이 방해공격을 할 때 ‘밀중’ 조직에서 후원을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아지트에서 플래카드에 글을 썼다. 먼저 방바닥에 여러 겹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다 마름질한 베를 주름이 안 생기도록 좍 폈다. 그 베에다 30센티미터 자를 가지고 글짜 크기와 두 행으로 쓰되 행간 간격도 정했다. 그에 따라 글자 수를 안배하고 글자 칸을 베에다 희미하게 줄을 쳤다. 그리고 글자모양도 그려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린 글자 모양에 따라 팽키 칠을 했다. 글자는 위의 행은, 「궐기하자, 밀양인민들이어!」 이고, 아래 행은, 「남조선단독선거, 단독정부 결사반대!!!」 성호 동무는 내사 플래카드를 그리는 동안 두꺼운 도화지를 나팔처럼 말아서 펴지지 않도록 실 바늘로 꿰매고 입을 대는 좁은 구멍과 소리가 나가는 넓은 구멍을 가위로 잘 오려서 종이나팔을 20개를 만들었다. 다시 이를 한손에 끼어 입에 한손으로 갖다 대기 좋도록 종이를 풀로 붙였다. 작업을 마치자, 성호 동무는 학생복 안깃을 따고서 거기에 열려있는 갈피에서 미농지를 꺼내었다. 내일 내가 낭독할 선언문이었다. 나는 이 선언문을 세 번이나 읽었다. 내가 그것을 다 읽도록 기다렸다가 둘은 오래도록 정세발전에 관해 토론했다. 첫째는,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는 일치된 예측이었다. 당연히 유격전으로 될 것이고 그 근거는 산악지대라는 데도 같았다. 당에서 그 준비도 다 되어 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도 같은 바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믿음이, 신뢰가 .... 둘은 한참 생각하다가 나온 말은 역시 한 가지였다. 《우리가 믿을 곳은 당이다. 이것밖에는 아무 데도 없다.》 우리는 잠을 잤다. 이부자리는 경수집에서 갖다 둔 것이었다. 2월 7일의 날은 밝았다. 학교 상학시간 9시에서 30분 전에 둘은 학교로 갔다. 플래카드는 보자기에 샀고 종이나팔은 포개어 놓아서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동사마당으로 바로 갔다. 거기에서 보자기에 산 플래카드를 꺼내어 각목에 꿰어 둘둘 말아 한쪽 담 모퉁이에 세워두고 모두 다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9시가 다 되었는지 학생들이 동사마당으로 오는 골목이 미어지도록 나왔다. 그들 속에 성호 동무는 운영위원회의 성원으로 이루어진 투쟁위원회의 성원들로 둘러싸여 의기양양하게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선생님들이 함께 들어오셨다. 자치회 회장인 성호 동무가 서쪽 담에서 5미타 쯤 거리를 두고 놓여있는 단으로 올라가 사회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들 학생들은 먼저 미 제국주의를 규탄합니다. 미제는 통일임시정부수립을 파탄시키고, 38도선 이남에 일본군 항복을 받는다는 구실로 들어와서 조국의 이남 땅을 잘라 그들의 제국주주의적 침략으로 식민지화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앞잡이 이승만과 김성수로 하여금 미제의 꼭두각시로 해서 그들의 꼭두각시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제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유엔을 난데없이 끌어와 유엔헌장에 위배하면서까지 해서 그들 거수기로서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을 만들어 우리 땅에 들여놓고 총선거를 한다고 설치대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의도대로 총선거라는 놀음을 해서 정부를 만든다면 삼천리강산 우리 조국의 반으로 잘라서 나라를 반동가리 내는 것으로 됩니다. 우리 청년들의 끓는 피가 이를 어찌 그대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써 이승만은 이완용과 같은 만고역적이 되고 김성수는 그 공범자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 여러분, 우리는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온 몸, 옴 마음을 다하여 죽음으로써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1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의 소리라고 할 수 없는, ‘옳소!’라는 함성이 진동을 했다. 이어 자치회장 성호 동무의 소개를 받고 나는 어제 받은 『2.7구국투쟁선언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남조선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 「구국투쟁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미제는 조선반도를 분단 점령하여 여기에다 식민지.군사기지화하려는 음모로 그들의 앞잡이요 거수기나라로 구성된 「유엔조선위원단」를 만들어 남조선 단독선거로 미국의 꼭두각시정부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는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을 즉시철퇴하고 우리민족문제를 우리민족의 의사에 의하여 조국의 주권을 방위하고 통일, 자유, 자주독립을 쟁취하려고 일어났다. 이 투쟁이 아무리 희생을 요구하는 투쟁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국의 국토와 주권을 방위할 것이고 민족의 생명을 지켜나갈 것이다. 우리 조선인민은 모든 계급.계층, 당파와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의의 구국투쟁에 총궐기하여,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분쇄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인민이 일치단결해서 단선을 보이콧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내용을 가진 선언문이었다. 다음에는 2학년 대표 학생이 나와서 이번 투쟁의 10대구호를 선창하고, 모든 학생이 이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끝 구절을 두 번 씩 복창했다. 마지막으로 1학년 대표 2명이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서서 대오를 이끌었고, 어깨를 겪고 행을 이루었으며 열을 지어 좁은 동사마당을 나가 신작로로 빠져나갔다. 신작로로부터 행과 열을 다시 정리하여 짧은 구호를 외치며 남천강 밀양교로 나가다가 읍사무소 쪽을 향해 나갔다. 그곳에서 농민조합 청년들과 전평 밀양지부 청년들과 합쳐 그 앞 시목전 일대를 빙빙 돌며 “단선반대! 단정반대!”, “양군철수! 통일정부!” 이를 외치며 나갔다. 길가의 모든 시민들과 장에 온 모든 장꾼이 이에 따라 이 박수를 치며 구호를 따라 외쳤다. “단선반대! 단정반대!”, “양군철수! 통일정부!” 이상하다. 상당한 거리를 행진했는데 경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초동면 오방동(五方洞) 지서가 깨지고 무장해제 당했다. 또 청도면의 오산(吳山) 지서가 깨지고 무장해제 당했다. 본서 경찰이 응원 나갔다가 도로를 파서 만든 함정에 빠져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 ----------------------------------------------- <주>
(1) 권태희(權泰羲) 목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신사참배문제로 일제에 굴복했다. 8.15해방 후, 한때 「밀양군 건준」에서 기독교인 대표로 활동했다가 다시 우익 목사로 되었고 이로써 밀양농잠중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2년 후 김천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근 갔는데, 남조선 단독선거에 무소속으로 밀양에서 출마하여 이주형과 더불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의 수도결사사수의 방송에 속아서인지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들을 따라 월북했다. 월북해서는 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