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부 산하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부사령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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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12월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혁명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조직으로서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 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선생은 부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처단 등 무장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선생을 비롯하여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김문학(金文學)․양하산(梁荷山)(본명 梁基瑕) 등 민족주의 이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할신․김석하(金錫夏)․이 웅(李雄)․현정경(玄正卿)․이성근(李成根)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赤衛軍)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주사변후 한중 연합부대를 편성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1%2F2011%2F8%2F17%2F156%2F7px.jpg)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선생은 동년 11월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新濱縣)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중앙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9․18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 부관장 박치화, 경위대 대장 이규성(李奎星),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어 부대를 재정비하고 군사양성에 힘쓰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1%2F2011%2F8%2F17%2F156%2F7px.jpg) 이 사건을 계기로 선생을 비롯하여 양기하, 고이허 등 조선 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혁군각지부대 수뇌회의(朝革軍各地部首腦會議)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선생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고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 국민부집행위원장에 김동산(金東山), 혁명군 참모장에 김학규(金學奎), 재정부장에 이상관(李相官),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에 홍심원(洪深元)이 각각 임명되었다.
총사령에 임명된 선생은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하여 제1사령에 박대호(朴大浩), 제2사령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령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령에 최윤구(崔允龜), 제5사령에 정광배(鄭光培)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하여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化興中學)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江甸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荷山), 총대장에 윤일파(尹一波), 교관에 한국신(韓國信) 등을 임명하고 선생은 명예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역량을 높이는 데 진력하였다.
한·중 연합군 조직, 200여 차례 항일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1%2F2011%2F8%2F17%2F156%2F7px.jpg)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녕 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하여 선생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金光玉)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槍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켰으며,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장종주(張宗周)․왕봉각(王鳳閣)․서대산(徐大山) 등도 이에 호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맺은 후 동년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뤘다. 1932년 3월 선생은 참모 김학규, 중대장 조화선․최운구․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왕동헌․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撫順 千金寨)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적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여 연합군을 총 공격하였다.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교전 1시간 만에 일군이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하자 30여리를 추격하여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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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5월 초 요녕민중항일자위군(遼寧民衆抗日 自衛軍)의 이춘윤, 왕동헌 분대와 함께 일․만군을 타격하기 위하여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병력 등의 부족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여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루었으나 공군력이 없기 때문에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당시 요녕민중자위군 중국측의 사령관이던 왕동헌의 기고문을 통하여 조선혁명군의 피 눈물나던 혈전을 되새겨 본다. 중경에서 발간했던 <월간 한민(月刊韓民)>에 수록된 내용 중 일부다.
민국(民國) 21년 2월 8일 한․중 민중으로서 총이 있는 사람이면 총, 총이 없는 사람은 호미, 낫, 괭이 심지어는 단도까지 들고 나와서 동지(同志)들을 모았다. 이와 같은 호소에 호응하여 적을 격멸하기를 지원해 나온 자가 한국사람이 8백 명, 그리고 중국측에서는 전 자위단(前 自衛團) 용사 5백 명을 빼고도 2천 5백 명이나 되었다. 곧 맹세해서 의거를 일으켰다.(중략)
슬프다! 산하(山河)는 그대로 있건만, 인사(人事)는 기대에 어긋났다. 양세봉․양하산 두 장군은 전후(前後)해서 전망(戰亡)하고 김학규 대표는 관내(關內 : 산해관 안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하략)
1933년 1월에는 중국 당취오 부대가 와해, 붕괴됨에 따라 왕청문 남의(南依) 목수둔(木樹屯)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를 개최하여 선생을 총사령에 재임용하고 부사령에 박대호(朴大浩)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軍規)를 제정하여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년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무대를 집안현, 임강현(臨江縣)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으며, 5월에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雙砬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1)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 범위확대 (2) 항일근거지 건립 (3) 일본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