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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세계의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리는 것에는 열 가지 번뇌가 있다. 쌓임의 진리에 헷갈리는 것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살가야견과 치우친 소견만은 제외된다. 쌓임의 진리에 헷갈리는 것처럼, 사라짐과 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윗 세계의 모든 진리에는 다 같이 성냄은 제외되며, 따라 헷갈리는 차례는 욕심 세계에서의 설명과 같다.
무엇이 괴로움에 헷갈리는 열 가지 수면인가. 요약하여 다섯 가지 취하여 쌓임[五取薀]을 통틀어서 괴로움이라 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이 다섯 가지 취하여 쌓임에서 스무 귀절[二十句]2)의 살가야견을 일으키는데, 다섯 귀절[五句]3)은 나[我]라고 보고 그 나머지는 내 것[我所]이라고 본다. 이것을 괴로움에 헷갈리는 살가야견이라고 한다. 곧, 이러한 살가야견으로써 의지를 삼아 다섯 가지 취하여 쌓임에 대하여 나[我]가 아주 없다[斷] 항상하다[常]라고 보기 때문에 치우친 소견 역시 괴로움에 헷갈린 것이다. 또, 모든 삿된 소견으로서 보시[施] 따위와 미묘한 행에 이르기까지의 것과 나쁜 행의 업의 과보 및 이숙이 없다고 하는, 이것도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다.
또, 삿된 소견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바꿔 나기의 유정들을 부정하는 이와 같은 삿된 소견은, 일부는 괴로움에 헷갈렸고 일부는 쌓임에 헷갈린 것이다. 또, 모든 외도들은 괴로움의 진리를 비방하면서 큰 삿된 소견을 일으키니, 그들은 말하기를 “사문 교답마종(喬答摩種)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괴로움의 진리를 시설하였지만, 이것은 결정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삿된 소견이야말로 역시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다. 또, 모든 소견으로서 망령되이 자재천이거나 세상지기[世主]거나 제석ㆍ범왕 및 그 밖의 종류들을 헤아리면서 항상함이라 하고 변하거나 바뀜이 없다고 하는 이와 같은 삿된 소견도 역시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다. 또, 소견들이 있으니, 가가 있고 가가 없다[邊無邊]고 헤아리는 이와 같은 것도 역시 괴로움에 헷갈린 삿된 소견이라 한다.
또, 사문이거나 바라문으로서 죽지 않음에 교란되는[不死矯亂] 삿된 소견이 있으니, 일부분은 역시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다. 또 소견의 고집[見取]으로서 괴로움에 헷갈리는 온갖 소견을 망령되이 고집하며 첫째라 여기고서, “맑고 깨끗한 해탈이며, 벗어남이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을 괴로움에 헷갈린 소견의 고집이라 한다. 또, 이 소견에 따르면서 이 소견의 법을 따라 받은 계금(戒禁)을 망령되이 고집하며 첫째라 여기고서, “맑고 깨끗한 해탈이며, 벗어남이다”고 하니, 이 계금에 대한 고집은 바로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다. 또 어떤 외도로서 이 모든 소견에 대하여 결정코 믿어 받지 아니하고, 또한 한결같이 여래께서 세우신 괴로움의 진리를 비방하지는 않으나 괴로움의 진리에 대하여 마음에 망설임을 품으면서 이것과 그 밖의 괴로움에 대해서도 망설일 뿐이니, 이것은 괴로움에 헷갈린 의심이다.
만약 이와 같이 스스로가 일으킨 소견을 보배처럼 사랑하면서 이러한 소견에 굳게 집착하는 탐냄이면, 이것은 괴로움에 헷갈린 탐냄이다. 만약 다른 부분에서 다른 이가 일으킨 소견에 대하여 어기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이것은 괴로움에 헷갈린 성냄이다. 만약 이 소견을 믿고서 높은 체 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괴로움에 헷갈린 난체이다. 또, 지혜가 없어서 이 모든 소견과 의심ㆍ탐냄 따위의 번뇌와 상응함이 있거나 괴로움에 대해서만 홀로 행함의 무지[獨行無智]이거나 간에 이와 같은 것은 다 같이 괴로움에 헷갈린 무명이라 한다. 이 열 가지 번뇌는 모두가 괴로움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며, 견도의 괴로움에서 끊을 것이다.
무엇이 쌓임에 헷갈리는 여덟 가지 수면인가. 모든 사문 또는 바라문들이 원인을 비방하는[謗因] 삿된 소견이다. 또 사문 또는 바라문으로서 자재천 등이 바로 온갖 물건을 내는 이며, 변화시키는 이이며, 짓는 이라고 헤아리는 이 나쁜 원인을 논하는 온갖 삿된 소견이다. 또, 삿된 소견이 있으니, 보시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으며 제사지낼 것도 없고 아름다운 행도 없고 역시 나쁜 행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삿된 소견이 있으니, 죽지 않음에 교란되는 외도의 사문이거나 바라문들이 일으키는 것의 일부분이다.
또, 삿된 소견으로서 쌓임의 진리를 비방함이니, 모든 외도들은 헤아리기를 “저 사문 고답마종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쌓임의 진리를 말하였으나, 이것은 결정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소견은 쌓임의 진리에 헷갈려서 일으키는 삿된 소견이다. 또, 소견의 고집이 있으니, 저 모든 소견을 고집하며 첫째라 여기고서 “맑고 깨끗한 해탈이며, 벗어남이 된다”고 하는 이것은 쌓임의 진리에 헷갈려서 일으키게 되는 소견의 고집이다. 또, 이 소견에 따르는 모든 법과 받은 계금에 대하여 첫째라 고집하고서 “맑고 깨끗함을 얻는다”고 널리 말하니, 앞에서와 같은 것은 쌓임의 진리에 헷갈린 계금에 대한 고집이다. 그 밖의 의심과 탐냄 따위는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번뇌의 수면은 쌓임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니, 견도의 쌓임에서 끊을 것이다.
무엇이 사라짐에 헷갈린 여덟 가지 수면인가. 모든 사문 또는 바라문들의 가가 있고 가가 없음[邊無邊]과 죽지 않음에 교란됨[不死矯亂]을 헤아리는 모든 소견의 일부이다. 또, 사문과 바라문으로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을 말하는 이들의 온갖 삿된 소견이다. 또, 삿된 소견이 있으니, 세간의 참된 아라한을 부정하며, 나아가 저 아라한은 두 가지 덕(德)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른바 끊음[斷]과 지혜[智]이다 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끊음을 비방하는 삿된 소견만을 취한다. 또, 삿된 소견으로서 사라짐의 진리를 비방함이니, 모든 외도들이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와 같다.
또, 제멋대로 모든 삿된 해탈을 헤아리는 온갖 삿된 소견이 있으니, 이와 같은 모든 소견은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려서 일으키는 삿된 소견이다. 또, 소견의 고집으로서 저 모든 소견을 고집하며 첫째라 여기고서 널리 말하니, 앞에서와 같은 것은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려서 일으키게 되는 소견의 고집이다. 또, 그 소견에 따르는 모든 법과 받은 계금에 대하여 고집하며 첫째라 삼고서 널리 말하니, 앞에서와 같은 것은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린 계금에 대한 고집이다. 그 밖의 탐냄 따위는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하니, 성냄의 것만을 제외한다. 사라짐의 진리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성내며 괴로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성냄은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리는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번뇌의 수면은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리는 것이며, 견도의 사라짐에서 끊을 것이다.
무엇이 도에 헷갈리는 여덟 가지 수면인가. 세간의 참된 아라한을 부정하며 나아가 이 가운데 있는 온갖 지혜[一切智]를 인도하여 우두머리로 하는 함이 있고 번뇌가 없음[有爲無漏]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 소견은 도의 진리에 헷갈려서 일으키게 되는 삿된 소견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사문 또는 바라문들의 죽지 않음에 교란되는 삿된 소견의 일부도 역시 도에 헷갈린 것이다. 또, 모든 외도로서 도를 비방하는 삿된 소견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문 고답마종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벗어남의 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진실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두 다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으며, 부처가 시설한 나 없음[無我]의 소견과 받아 지니게 되는 계금에 따르는 법은 나쁘고 삿된 도이어서 바르고 미묘한 도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 역시 도에 헷갈린 삿된 소견이라 한다.
또, 저 외도들은 헤아리기를, “우리들이 행한 행과 도가 참된 행과 도이어서 온갖 괴로움을 다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 역시 도에 헷갈린 삿된 소견이라 한다. 또 소견의 고집으로서 저 삿된 소견을 고집하며, 첫째라 하고서 “맑고 깨끗한 해탈이며, 벗어남을 얻는”라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을 도에 헷갈린 소견의 고집이라 한다. 만약 저 소견에 따르는 모든 법과 받은 계금에 대하여 고집하며 첫째라 하고서 “맑고 깨끗한 해탈이며, 벗어남을 얻는다”라고 하니, 이것을 도에 헷갈린 계금에 대한 고집이라 한다. 그 밖의 탐냄 따위로서 도에 헷갈리는 번뇌는 사라짐의 진리에 헷갈리는 도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번뇌의 수면은 도의 진리에 헷갈린 것이며, 견도의 도에서 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견도에서 끊는 모든 번뇌[漏]를 설명하였다. 무엇이 수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漏]인가. 욕심 세계의 성냄과 3계(三界)의 세 가지인 탐냄과 난체와 무명은, 오랜 동안에 바른 도를 닦고 익혀야 비로소 끊을 수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한다. 또, 저 번뇌는 세계와 자리마다 모두 세 품류가 있으니, 하ㆍ중ㆍ상이 그것이다. 능히 끊음의 도[能斷道]에도 세 가지 품류가 있으니, 하품의 도는 상품의 수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漏]를 끊으며, 중품에서는 중간의 것을 끊으며, 상품의 도는 아래의 것을 끊는다. 또 저 수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漏]는 번뇌가 있음[有漏]의 일에 대하여 저절로 굴러서 오랜 동안에 견고하게 된 것이어서 스스로가 헷갈린 일에 대하여 해탈하기가 어렵다. 이것을 번뇌의 섞여 물듦에 관한 헷갈림을 끊는 차별을 세움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은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의 모든 번뇌[漏煩惱]에는 요약하여 다섯 가지 반연할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삿된 분별로 일으키는 일의 경계를 반연함이며, 둘째는 소견의 경계를 반연함이며, 셋째는 계금의 경계를 반연함이며, 넷째는 스스로 분별을 일으키는 이름[名]의 경계를 반연함이며, 다섯째는 저절로 견고해지는 일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괴로움과 쌓임[苦集]의 일의 경계를 반연하는 온갖 번뇌[漏]는 삿된 분별로 일으키는 일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소견의 고집과 탐냄 따위의 견도에서 끊는 모든 번뇌[漏]로서 의심만을 제외한 이것은 소견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계금에 대한 고집은 계금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사라짐과 도[滅道]의 경계를 반연함과 동분 아닌 계[不同分界]의 경계를 반연하는 온갖 번뇌[漏]는 스스로 분별을 일으키는 이름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 번뇌는 사라짐과 도를 반연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동분이 아닌 계를 반연할 수가 없으나 반연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에서 끊을 번뇌[漏]는 저절로 견고해지는 일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무엇이 번뇌의 섞여 물듦에 관한 다스림[對治]의 차별을 세움인가.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속성숙의 다스림[相續成熱對治]이며, 둘째는 근단의 다스림[近斷對治]이며, 셋째는 일분단의 다스림[一分斷對治]이며, 넷째는 구분단의 다스림[具分斷對治]이다. 성문지(聲聞地)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열세 가지 자량도(資糧道)를 상속성숙의 다스림이라고 한다. 성문지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 것과 같이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결택분(決擇分)의 착한 뿌리를 근단의 다스림이라고 한다. 견도(見道)를 일분단의 다스림이라고 하며, 수도(修道)를 구분단의 다스림이라고 한다.
【문】견도에 오른 성인으로서 지혜와 행[智行]은 어떠한 모양이 있는가. 몇 가지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견도의 마지막[究竟]이 되는가. 어떻게 견도에서 끊을 미혹[惑]을 버려야 하는가. 단번에 버리는가. 점차로 버리는가.
【답】견도에 오른 성인으로서 지니는 지혜와 행은 뭇 모양을 멀리 여윈다. 그 때에 성인의 지혜는 비록 괴로움을 반연한다고 하나 괴로움의 일에 대하여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괴로움의 모양을 취하면서 구름이라 말한다. 괴로움의 진리에서와 같이 쌓임과 사라짐과 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 때에는 곧 먼저 세속지(世俗智)로 살핀 진리 가운데 온갖 생각의 모양[想相]에 대하여 모두 해탈을 얻고 쓸모없는 이론을 끊으며, 지혜[智]는 다만 그 뜻에 대해서만 진여(眞如)의 이치를 반연하고 모양을 여의면서 구른다.
그 때에 지혜와 행의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견도를 세우는 것은 두 가지 도리로 말미암아서이다. 첫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유포하는 도리로 쓸모없는 이론이 있으면서 세움이며, 둘째는 훌륭한 이치를 안으로 증득하는 도리로 쓸모없는 이론을 여의며 세우는 것이다. 첫째 세움의 뛰어난 힘에 의하는 까닭에 법지품(法智品)에 네 가지 마음이 있고 종류지품(種類智品)에 역시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때에 따라 여덟 가지의 마음이 구르니, 곧 그러한 때를 통틀어서 한결같이 끊임없는 데로 드는 순수한 사마타에서 나타나는 마음[一無間所入純奢摩他所顯之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통틀어 말하면, 아홉 가지 마음이 있어서 견도의 마지막이 된다. 그러한 때에 따라 시설하는 것과, 같이 괴로움의 진리 모양을 분별하여 알며 마치는 것이니, 곧 그러한 때를 말하여 한 마음[一心]이라 한다. 둘째 세움의 뛰어난 힘 때문에 한 마음이 있다고 말하니, 하나만의 진여를 증득하는 지혜와 상응하는 마음의 종류에 의하여 견도의 마지막이 된다. 이 가운데에도 역시 사마타의 도가 있으니,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두 가지 부분의 견도에서 끊을 번뇌의 수면을 세우니, 첫째는 맑고 깨끗한 색[淸淨色]에 붙따름이며, 둘째는 임자 마음ㆍ딸린 마음[心心所]에 붙따르는 것이다. 견도 가운데에는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성스런 제자들은 같은 때에 지관의 두 가지 도로 끊을 수면을 능히 버린다. 첫째는 관으로 끊을 것[觀所斷]이며, 둘째는 지로 끊을 것[止所斷]이니, 이 때문에 견도를 말하여 마지막[究竟]이라 한다.
만약 관품(觀品)에 포섭된 모든 지혜[智]가 견도에서 끊는 수면에 붙따라서 난다고 하면, 다스림의 체성[對治體性]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아야 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박가범(薄伽梵)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을 따라 행하는 이와 법을 따라 행하는 이가 견도에 드는 때를 여섯째 모양 없는 행[第六無相行]을 행하는 보특가라라 하지만, 신승해(信勝解)와 견득(見得)과 신증(身證)과 혜해탈[慧脫]과 구해탈[俱脫]인 다섯 가지의 그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니니, 그는 사라짐에서 고요한 생각[寂靜想]에 머무름으로 말미암아서이니라”고 하셨으니, 이 때문에 그들을 모양 없음[無相]에 머무른다고 한다.
이를테면, 마치 어진 의원이 독화살을 뽑는 것과 같으며, 종기가 다 곪은 줄 안 뒤에는 날카로운 칼로 먼저 따면 고름이 점차로 나오기는 하나 단번에 다 나오지는 못한다. 그 뒤에 더 째서 주물러 짜면 고름이 나오고 진물까지는 다하지만 아직 완전히 깨끗이 된 것은 아니다. 상처 구멍이 열려진 것을 오므리게 하기 위하여 혹은 기름 뭉치로써 하거나 혹은 기름 헝겁으로써 붙여 막으니, 이 때문에 점차로 피부와 살은 오므리게 되는 것과 같다.
뜻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이런 비유를 들었다. 이 가운데 뜻을 말하면, 이미 다 곪은 종기와 같아서 견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漏]에 따르는 처사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날카로운 칼로써 째는 것과 같아서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 포섭된 견도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두루하게 주물러 짜는 것과 같아서 사마타품(奢摩他品)에 포섭된 견도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고름과 같아서 온갖 견도에서 끊을 수면의 번뇌[漏]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상처가 아직 깨끗해지지 못하고 아직은 오무라들지 않은 것과 같아서 수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漏]와 번뇌에 관한 일[漏事]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기름 뭉치와 헝겁과 같아서 수도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범부로서 욕심 세계의 욕심이나 형상 세계의 욕심을 여의는 것은 수도만을 말미암아서이며, 견도에서가 아니다. 그는 욕심 세계에서 욕심을 여윌 때에는 탐냄ㆍ성냄 및 그 법을 따르는 이웃의 전체함이거나 모든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 현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모두를 말하여 끊음[斷]이라고 하며 견도에서 끊는 살가야견 따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저 모든 미혹[惑]은 이 몸 가운데에 머무름으로 말미암아 선정에서 일어나고 나면 때때로 현행하니, 위에 난 것[生上者]이 아니면 그것은 다시 나타나 일어난다. 이와 같이 범부로서 형상 세계[色界]의 욕심을 여의는 것도 그에 알맞은 대로이며, 성냄이 제외된 다른 번뇌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제 자리[自地]에 있는 견도에서 끊은 모든 번뇌[漏]는 선정이거나 일어나거나 태어나거나 간에 온갖 때에 있어서 나는 인연[生緣]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그 앞에 나타나게 된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두 가지의 추중[麤重]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추,중[漏麤重]이며, 둘째는 번뇌가 있음의 추중[有漏麤重]이다. 번뇌의 추중은 아라한 등이 수도에서 끊을 번뇌를 끊은 때에 모두가 다 영원히 여의니, 이것은 수면이 있는 이[有隨眠者]의 식이 있는 몸[有識身] 가운데 안온하지 않은 성품[不安隱性]과 감당해 낼 수 없는 성품[無堪能性]을 말한다. 번뇌가 있음의 추중이라 함은, 수면을 끊을 때에 번뇌[漏]로부터 나며 번뇌[漏]로부터 훈발(熏發)하는 본래 얻은 성품[本所得性]과 안온하지 않은 성품과 괴로움에 붙좇는 성품[苦依附性]과 그와 비슷한 가당해 낼 수 없는 성품으로서, 모두가 미세하고 희박하게 된다. 또, 번뇌가 있음의 추중을 번뇌의 습(習)이라 하니, 아라한이거나 독각으로서는 아직 끊을 수 없는 것이며, 여래만이 마지막에 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을 말하여 습기(習氣)를 영원히 끊는 특수한 부처님의 법[不共佛法]이라 한다. 이것을 번뇌의 섞여 물듦에 관한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는 차별의 세움이라 한다.
【문】세존께서 “망령된 분별과 탐냄[妄分別貪]을 사부(士夫)의 욕심이라 하느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무슨 인연 때문에 번뇌의 욕심[煩惱欲]만을 말하여 욕심이라고 하고, 일의 욕심[事欲]에서는 그렇지 아니한가.
【답】번뇌의 욕심은 성품이 더러움에 물듦[染汚]이기 때문이며, 또 번뇌의 욕심만이 일의 욕심을 욕심내기 때문이며, 또 번뇌의 욕심은 일의 욕심을 발동시키면서 갖가지 섞여 물듦의 허물을 내게 한다. 온갖 망령된 분별과 탐욕을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먼저 욕애[欲愛]에 불타듯 괴로워하고, 욕애가 불타기 때문에 모든 욕심을 추구하며, 욕심을 추구하기 때문에 갖가지로 몸과 마음의 고달픔을 받는다. 비록 공들여 힘쓴다 하더라도 이룩하지 못하면, “나는 이제 그 공을 헛되이 버렸구나”라고 하면서, 수고한 결과가 없는 괴로움을 받는다. 설령, 이룩하게 되면 깊이 연모하고 집착하여 지켜 맡는 인연으로 막고 보호하는 괴로움을 받으며, 만약 수용할 때면 탐욕의 불에 타고 속에서는 고요하지 아니함의 괴로움을 받으며, 만약 그것을 잃거나 파괴되면 근심과 걱정하는 괴로움을 받으며, 따라 기억함으로 말미암아서 추억하는 괴로움을 받는다. 또,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뜻의 나쁜 행을 일으킨다.
또, 출가자로서 욕심을 버리는 때에는 비록 다시 번뇌의 욕심을 버리고 여읜다 하더라도 욕심함으로 인하여 도로 일어난다. 또, 번뇌의 욕심의 인연 때문에 욕심 세계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나쁜 갈래 따위의 괴로움을 초래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들의 섞여 물듦의 허물은 모두가 번뇌의 욕심으로써 인연이 된다. 이 때문에 세존은 번뇌의 욕심만을 말씀하여 욕심이라 하셨고, 일의 욕심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다.
【문】욕탐(欲貪)을 내는 허망한 분별에는, 무릇 몇 가지가 있는가.
【답】요약하여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끌어냄의 분별[引發分別]이며 둘째는 깨달음의 분별[覺悟分別]이며, 셋째는 합쳐 맺음의 분별[合結分別]이며, 넷째는 모양 있음의 분별[有相分別]이며, 다섯째는 친함의 분별(親昵分別)이며, 여섯째는 기뻐하고 즐김의 분별[喜樂分別]이며, 일곱째는 침범하여 핍박함의 분별[侵逼分別]이며, 여덟째는 극히 친근함의 분별[極親昵分別]이 있으니, 『범문경(梵問經)』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끌어냄과 깨달음과
그리고 나머지의 화합하여 맺음과
모양이 있음과 친함과
또 여러 가지의 기뻐하고 즐김과
침범하여 핍박함과 극히 친근함을
허망한 분별이라 이름하나니,
욕탐을 능히 내는 것이라
지혜로운 이는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끌어냄의 분별이라 함은 좋은 방편의 마음이 계속됨을 버리고서 모든 욕심 가운데에서 뜻 지음[作意]을 일으키는 것이다. 깨달음의 분별이라 함은 화합하지도 않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경계에서 탐욕의 얽음[纏]으로 말미암아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합쳐 맺음의 분별이라 함은 탐욕의 얽음에 얽매였기 때문에 모든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다. 모양 있음의 분별이라 함은 화합하고 앞에 나타난 경계에서 그의 모양을 붙잡아서 따라 좋아하는 것이다. 친근함의 분별이라 함은 화합하고 앞에 나타난 경계에서 탐욕의 얽음으로 말미암아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김의 분별이라 함은 이와 같은 탐욕에 얽매였기 때문에 한량없는 받을 것의 욕심 거리를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침범하여 핍박함의 분별이라 함은 한결같이 그 공덕을 보고서 모든 욕심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갑절 더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극히 친함의 분별이라 함은 가장 지극한 탐욕의 얽음에게 얽매이게 되는 그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욕심 세계의 모든 번뇌 가운데에 탐냄[貧]을 드러내 보이어 욕심 모양[欲相]으로 삼는다.
【답】 만약 이 원인[因]으로 말미암아 탐애를 드러내 보인다면, 쌓임의 진리[集諦]의 모양이 되니, 바로 이 원인으로써 이 모양을 알아야 한다.
【문】무엇 때문에 분별과 함께 하는 탐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욕심 모양으로 삼는다.
【답】 이 인연은 탐냄으로 하여금 앞에 나타나게 하고 탐냄을 일으키므로, 만약 이 인연으로 일의 욕심을 수용하면 통틀어 나타내서 하나의 망령된 분별의 탐냄이 된다. 또, 일부분의 욕심들을 버리고서도 출가자는 오히려 모든 욕심에 대하여 망령된 분별을 일으키기도 한다. 허망한 분별이 역시 욕심인 줄 분명하게 안 뒤에야 다시 버릴 것을 찾아 구하기 때문이니, 분별은 역시 욕심의 모양임을 나타낸다.
【문】무엇 때문에 탐애(貪愛)만을 말하여 쌓임의 진리의 모양으로 삼는가.
【답】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첫째는 탐애는 바로 원함과 원하지 아니함[願不願]의 의지할 곳[所依處]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탐애는 두루하게 일으키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저 탐애로 말미암아 몸과 재물 따위의 알맞은 것을 원할 것에 대하여는 실제로 껴잡아 들이기 위하여 소원하게 되고, 원할 것이 아닌 다스림의 착함 가운데에서는 원할 것이 아니어서 실제로 껴잡는 방편 때문에 원하지 않게 된다. 이 원함과 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사에 헤매면서 끊어짐이 없게 된다. 두루하게 일으킴에는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위치[位]에 두루함이니, 온갖 느낌[受]에 의하여 차별되게 구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다섯 가지 문(門)으로 말미암아서이니, 기쁨과 화합하기 때문이며, 기쁨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기쁨이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기쁨이 어기고 떠나기 때문이며, 언제나 제 몸을 따르면서 간직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때[時]에 두루함이니,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 세상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계[境]에 두루함이니, 현재 법과 후생 법의 안 몸[內身]을 반연하여 일으키고 또한 이미 얻었고 아직 얻지 못한 경계를 반연하여 일으킨다.
문 무엇
무엇 때문에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여의는 마음은 욕심 여윔[離欲]을 얻는다고 말하고 색ㆍ느낌[色受] 따위의 번뇌의 일을 여윔은 여윈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을 여윔으로 말미암아서 역시 그것을 여의기 때문이다. 또, 모든 번뇌는 성품이 더러움에 물드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이것은 허물이 많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 일에 대하여 허물을 일으키면 모두가 번뇌가 짓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허물은 앞의 쌓임의 교묘함[薀善巧] 가운데에서 착하지 아니함의 온갖 허물을 자세히 살핀 것과 같다.
또,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모든 일에서 온갖 번뇌는 피하고 벗어날 수 있지만 온갖 일은 그렇지 아니하다. 또, 부정관(不淨觀) 등 모든 세속의 도(道)를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비록 그 일을 싫어하고 욕심 여윈 자리[離欲地]에 든다 하더라도, 그러나 욕심 여윈 자리에는 번뇌가 붙따르며, 번뇌는 마음에서 아직 욕심 여윔을 얻지 못하였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번뇌만을 여의면 마음은 욕심을 잘 여윈 것이지만, 그 일을 여위는 것은 아니다. 이 처소에 대한 그 밖의 결택하는 글은 다시 더 나타내지 아니한다.
【문】어떤 인연 때문에 모든 경전에서, 다른 번뇌로부터 나와 내 것이라는 소견과 젠체함[我慢]과 집착함[執着]과 수면(隨眠)을 간추려 취해서 더러움에 물든 번뇌품[汚染煩惱品]이라 하는가.
【답】 세 가지의 원인 때문이다. 첫째는 삿된 행에 향하기 때문[向邪行故]이다. 나와 내 것이라는 소견의 두 가지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몸에 대한 소견에 의지하여 근본이 되어 예순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며, 여기에 의탁하기 때문에 해탈이 아닌 것을 헤아려 해탈이라 하는 삿된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른 행에 배반되기 때문[背正行故]이니, 젠체함과 집착함의 두 가지이다. 왜 그러한가. 젠체함과 집착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바른 법과 비나야(毘奈耶)가운데의 온갖 착한 벗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며 참되고 착한 장부에게 나아가 무엇이 착함이며 무엇이 착하지 아니함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와서 질문한다 하여도 역시 사실대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훌륭한 자리에서 물러나기 때문[退勝位故]이니, 수면의 한 종류를 말한다. 왜 그러한가. 비록 유정천(有頂天)에 이른다 하더라도 아랫 자리[下地]의 수면에 붙쫓기기 때문에 도로 물러나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차별이 있다. 알 것에 통달하여 사라짐[滅]을 증득함에는 두 가지 법이 극히 장애가 되니, 첫째는 삿된 행의 인연[邪行因緣]이며, 둘째는 괴로움이 나는 인연[苦生因緣]이다. 삿된 행의 인연이라 함은 예순두 가지 소견이다. 이들을 원인으로 하여 집착하는 까닭에 모든 유정들이 몸과 말과 뜻으로써 삿된 행들을 일으킨다. 괴로움이 나는 인연이라 함은 수면(隨眠)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업에는 두 가지의 인연이 있다. 삿된 행의 인연의 인연이라 함은 나와 내 것을 헤아리는 살가야견이다. 괴로움이 나는 인연의 인연이라 함은 처음과 나중의 두 가지 자리에서 바른 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젠체함[我慢]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바른 법을 듣지 아니하고 뛰어난 체함[增上慢]으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바른 행을 닦지 아니한다.
다시 차별의 법이 있다. 착한 말씀[善說]의 법과 비나야 가운데에 네 가지의 법이 있으니, 으뜸이 되고 위가 되고 가장 지극하고 가장 미묘하여서 외도에 공통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진리를 간택(簡擇)함이며, 둘째는 자기와 맑은 행[梵行]을 같이하는 이에게서 즐거울 만한 법을 닦음이며, 셋째는 이론을 달리 하는 이에게 미워하거나 시새우지 아니함이며, 넷째는 맑고 깨끗한 품류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악한 말의 법과 비나야 가운데에도 네 가지의 법이 있어서, 이 네 가지의 법에 대하여 지극한 장애가 된다. 첫째는 나와 내 것을 헤아리는 살가야견이며, 둘째는 젠체함이며, 셋째는 진리를 망령되게 집착하는 고집이며, 넷째는 수면을 끊지 아니한 것이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비록 유정천에 가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로 떨어진다.
또, 두 가지 집착이 있다. 첫째는 감관과 경계의 집착[根境執]이니, 나와 내 것이라 함을 집착한다. 둘째는 차츰차츰 유정에 대한 집착[展轉有情執]이니, 젠체하며 나를 헤아리면서 훌륭하다고 하는 따위이다.
【문】스스로 탐애(貪愛)가 있으면 뭇 괴로움의 원인이 되거늘, 무엇 때문에 다른 데서 세존은 다시 욕심[欲]을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였는가.
【답】이것이야말로 현재 법에서 괴로움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유정으로서 욕심이 있고 탐냄이 있거나 친근함이 있거나 간에 그것이 만약 변하고 달라지면 곧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따위의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거북[龜]이라고 하는가.
【답】다섯 갈래[支]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니, 닦고 익히는 이치대로의 뜻 지음[如理作意]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어떠한 연유 때문에 분냄[念]을 말하여 어미 낙타[母駝]라 하는가.
【답】그의 성질과 비슷하기 때문이니, 나쁜 말을 하는 이는 다른 이의 말에 대하여 견뎌 참아내지 못하는 뛰어난 힘 때문에 가르쳐 줌과 가르쳐 경계함을 얻는 것을 막는다.
【문】무엇 때문에 아낌과 시새움을 말하여 엉기어 뭉쳐진 피[凝血]라 하는가.
【답】허망하고 얄팍한 의미 없는 이끗에 대하여 현행(現行)하기 때문이며, 좋아할 만한 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모든 욕심을 말하여 육간 도마 위의 고기라고 하는가.
【답】주장하는 이에게 매여서 결정됨과 진실이 없기 때문이며, 끝없이 착한 법 닦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무명을 말하여 늑대[狼者]라 하는가.
【답】그의 성질과 비슷하기 때문이니, 들음의 지혜[聞智]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어떤 연유 때문에 의심을 말하여 갈림길이라 하는가.
【답】그의 성질과 비슷하기 때문이니, 생각함의 지혜[思智]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젠 함을 말하여 수레바퀴 둘레라 하는가.
【답】그의 성질과 비슷하기 때문이니, 닦음의 지혜[修智]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다시 그 밖에도 나쁜 행을 일으키는 한량없는 번뇌가 있거늘, 무엇 때문에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가려 취하여 착하지 않은 뿌리[不善根]로 세우는가.
【답】업을 일으키는 인연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맛을 사랑하는[愛味]의 인연 때문이며, 다른 이를 손해하는 인연 때문이며,삿된 법을 집착하여 세우는 인연 때문이니, 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위의 인연으로써 알맞게 배대하여 해석해 보라.
이 가운데의 것을 올타남으로 말하리라.
욕심과 사랑함과 욕심을 여읨과
나를 헤아리는 따위의 욕심과
거북과 어미 낙타 따위며
그리고 탐냄ㆍ성냄 따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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