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목진객사(長木鎭 客舍) 이승철 기고
객사상량문(客舍上樑文) 원문(原文)
도괴 직전에 있던 건물을 하루속히 복원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 당시 거제군과 경남도의 예산으로는 부족하여 문화재 관리국 이한홍 기획관의 도움으로 국비 예산을 급히 확보 하여 긴급 보수를 하게 되었다. 1981년 11월 6일 장목진 객사를 해체(解體) 할 때 대들보 중간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오래되어 식별이 어려운 글자가 있었다.
御宇上樑
奧昔 壬辰地歲 相宅建宇 丁酉乙卯 地又不安
創設鎭陳 地理不吉 御宇且頽
옛날 임진년에 진을 창설 했으나 집 자리가 좋지 않아 정유년 이월달에 다시 터를 잡아 집을 세웠으나 어우는 또 무너졌다.
今玆 更擇吉地移建 巽坐乾向之原
이제 다시 좋은 길지를 잡아 옮겨 세운 집이 손좌건향이다.
築哉 天地始所東方爲首人世之間國君最上
천지가 처음 시작 될 때는 동방이 머리요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국왕이 최상이다.
蓋建國之莫過愛御宇之宏麗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데 막중한 것은 이 집이 화려하고 웅장한데 있다.
伏以獻誠玉殿更修華明
업드려 정성을 다해서 옥전을 다시 수축한다.
飛0雕樑貫於靑天之中三光逼今
層楹0謝洗於碧海之頭五龍於膝
춘세밑에 기둥과 보는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산광이 빛나도다. 기둥은 푸른 바다에 머리를 씻고 다섯 마리용이 무릅 아래 있도다.
宅神有步瀛州之岳天一園邊淸音觀
形局疑憑廣漢之殿雲干點外奇妙節
택신들이 뜰을 걷는 모습은 마치 영주산 신령과 같고 하늘에는 푸른 정원과 아름다운 소리가 장관이다. 형국은 한나라의 광한루 같고 구름은 점점이 괴괴 절묘하다
衆鷺歸江之聲國泰民安0歌聲高
萬峀矗大之色烟0看逢島之雲歸
萬民擊000000000000
백로들은 강가로 돌아오고 백성들의 태평가는 높이 들린다.높은 산 우거진 곳에 연기가 섬 자락에 구름인 듯 보인다.
淸溪叩琴靑彈琶花發玉泉竹0雲烟月芳稀世之名區
맑은 계천에서 거문고 타고 비파를 탄다. 꽃도 피었는데 옥같이 솟은 샘물과 달그림자에 비친 대나무 그늘도 세상에 드물고 구별키 어렵다
味佳解楹下紛船淸襟爽風前古寺
또 아름다운 것은 난간아래 뱃머리를 끓으니 상쾌하고 맑은 공기는 옛 절 맛이나 같다.
景勝於岳陽之樓望北天而通月川0
爽通於醉翁之亭倚西琅而應納仰方
御我堂上烈士竝出 捅氣0英雄雲集
경치를 말하자면 중국 악양루보다 낫고, 상쾌할 것을 생각하면 술에 취한 첨지의 집이로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 달은 은하수를 지나가고 서쪽을 지내다 보니 동방이 감응하도다.
中略
乾隆五十年乙巳孟春記
行別將禦侮將軍李瑨國
객사 상량문에 보면, 임진년에 진을 창설 하여 객사를 건립하였는데 자리가 좋지 못해서 정유년에 다시 옮겨 자리를 정하였으나 또 자리가 좋지 못하여 객사가 무너졌다. 그래서 이제 1785년 다시 좋은 자리에 이건 하였다. 그 방향은 손좌건향이다.
중략
건융50년 을사(1785) 봄에 행 별장 어모장군 이진국이 건립 하였다고 한다. 위의 조선신록과 객사에 내용과 상량문 내용을 보면, 임진년이 어느 시대인지? 임진년에 객사를 짓는데 자리가 좋지 못해서 정유년에 다시 자리를 옮겼는데 또 그 자리가 좋지 못하여 무너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임진년은 어느 때이며, 정유년은 어느 때 인지?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란이 나던 그 해와 정유재란이 있었던 해 였 다고 한다.
○ 관리상황
1981.11. 6 ~ 1982. 1.25 : 1차 공사(장목진객사 해체) 18,187천원
1982. 5.23 ~ 8.19 : 2차 공사(장목진객사 복원) 29,580천원
1982.12.21 ~ 1988. 6.20 : 3차 공사(삽문·협문 안내판 초가철거), 6,690천원(군비)
복원상량문(復元上樑文)
長木은 원래 長門浦라 稱하여 앞은 鎭海灣에 臨하고 祭釋峰이 聳立하여 고요하고 기다란 푸른 바다 長木灣을 이루니 四方 地形이 調和되여 巨濟 北端의 要塞地이다. 일찍이 壬辰倭患의 機微가 있을 때 이곳에 別鎭을 設置하였고, 亂後의 當分間 荒廢하였으나 다시 陣營이 復舊되었으며 官衙가 整備되어 客舍建物도 時宜를 따라 마련된다. 舊上樑文에 乙卯 移建設과 瓦當 康熙 五年, 康熙 五十年 銘等이 보임은 이를 立證하는 것이라 하겠다. 現在 客舍建物은 乾隆 五十年 乙巳 正祖 五年 西紀1785년 正月 二十日 申時에 이곳 巽坐乾向으로 移建하였는데 當時의 主幹者 行別將 禦侮將軍 李珍國임도 舊上樑文에 傳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庚戌國恥後 西紀1914年 甲寅부터는 本客舍는 部落民에 그 管理를 委任하였다. 年年歲深한 古建物은 날로 頹落하여 가는데 部落民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한갖 懷古의 情과 復元의 뜻을 품은 채 袖手傍觀할 수 밖에 없는 實情이었다. 西紀1971年 3月 部落代表인 金德允, 鄭南植은 面長 金顯沂에게 補修를 建議하였던 바 金面長은 이 事實을 卽時 上級 官廳에 要請하였으나 豫算事情으로 遲延되어 오던 중 海東病院 金鍾石院長이 文化財的 價値가 있음을 認定하고 이를 慶尙南道 文化財保護廳인 東亞大學校 博物館에 調査를 依賴한 結果로 西紀1980년 1月 14日 慶尙南道文化財委員會에서 地方有形文化財 第189號로 指定되었던 同年 9月 5日附로 文公部에서 道知事에게 補修指示가 下達되었다는 通報를 接하였다.
西紀1981年 11月 2日 巨濟郡廳에서 工事入札이 있었고 同 8日 着工, 同年 12月 8日 午前 10時 盛大한 上樑式을 擧行하게 되었다. 長木面 壹萬二千 面民은 本客舍 復元을 위하여 誠心誠意 努力하였으며 東亞大學校 總長 鄭樹鳳博土, 同 博物館長 丁仲煥博士, 同 敎授 金東浩 先生, 文化財委員 李容玹先生, 同 出版部 朴善福先生, 巨濟郡 公報室 李承哲諸位께서는 本鎭 客舍 復元에 絶對的으로 협조해 주신 誠意에 對하여 感謝의 禮를 드리는 바입니다.
上樑 後에는 地靈에 監護하시고 海龍歸德하시여 길이 保存되시기 祈願하는 바입니다.
上樑日時 西紀 1981年 辛酉 12月 8日 午前 10時 上樑
東亞大學校 總長 鄭 樹 鳳
慶尙南道知事 崔 鍾 鎬 해석
慶南文化財委員會 委員長 丁 仲 煥
慶南文化財委員會 委員 李 容 玹
東亞大學校 敎授 金 東 鎬
巨濟郡守 李 奉 牧
巨濟郡公報室長 金 章 旭
長木面長 朴 錫 燁
長 木 面 文化財復元推進委員會 委員
委 員 長 金 鐘 碩
副委員長 徐 斗 元
副委員長 孔 良 萬
總務幹事 金 顯 沂
技術監督 鄭 相 澈
工事請負會社 大邱東伸建設株式會社
現場監督 金 相 琪
都 木 手 崔 全 甲
木 手 劉 鉉 淳
선조신록의 기록문.
장목포진은 거제부의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효종7년(1656)병신년에 통제사 유혁연이 장계를 올려 장목포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별진장은 무종 九품이고, 군관 8인, 진무9명, 지인 6명, 사령6명, 전선 한선기비관 5인,도훈도 1인, 좌우포도 2인, 사부18명, 화포수 10명, 포수 24명, 타념정수3명, 능조군 120명, 병선 선장1인,사부10명, 포수10명,타공1명, 능노군 14명, 일하후선 사공 1명, 능노군 4명, 이하후선 사공 1명, 능노군 4명, 요망은 없다. 순영미 583석4두5서8합4석, 콩299석6두5서3합2석, 조199석6두6합, 피모 158석1두6서7합5석, 통영미(통제영 소속)122석5서9합7석, 콩5석4두9합,2석, 조 64석7두3서1합1석, 피모 45석5두3합, 청도미 8석3두3서3합3석, 조31석12두6서4합, 밤15석11두9서, 피모 42석10두3합9석 대변미 14석5두, 찐쌀 3석, 미식 2석
* 合홉, 夕작
4)「長木浦鎭 在府北六十里無城 孝宗七年丙申 統制使柳赫然狀聞建置 別將武從九品 軍官八人鎭撫九名知印六名使令六名 戰船 翰船旗牌官五人都訓導一人左右捕盜二人射夫十八名火砲手十名砲手二十四名舵拈碇手三名能櫓軍一百二十名 兵船 船將一人射夫十名砲手十名舵工一名能櫓軍十四名 一伺候船 舵工一名能櫓軍四名 二伺候船 舵工一名能櫓軍四名 瞭望 無 巡營米 五百八十三石十四斗五棲八合四夕 太 二百九十九石六斗五棲三合二夕 租 一百九十九石六斗六合 皮牟 一百五十八石一斗六棲七合五夕 統營米 一百三十二石五棲九合七夕 太 五石四斗九合二夕 租 六十四石七斗三棲一合一夕 皮牟 四十石五斗三合 淸道米 八石三斗三棲三合三夕 租 三十一石十二斗六棲四合 栗 十五石十一斗九棲 皮牟 四十二石十斗三合九夕 待變米 十四石五斗 蒸米 三石 味食 二石」
역사적인 기록
장목진 객사 상량문에 奧昔 壬辰年이란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볼 때는 옛날 임진년이다. 그 임진년이 1592년 임진년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이 거제북방의 요세지다. 영등성과 율포에 성이 있었다면 장목항은 內海를 방어 하는데 가장 좋은 지리적인 여건을 갖고 있다.
오래전부터 지역민의 口傳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말은 임진년 때 東區에 건립 하였는데, 여러 번 무너져서 새로 다시 세웠는데 또 무너져서 그 자리가 지리적으로, 陰陽五行적인 地理風水가 좋지 못하여 세울 때 마다 무너져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傳言되고 있다. 御宇란, 임금이 들렸던 곳이나, 중요한 방어 진지를 어우라 하였다. 장목의 어우는 장목진이 생기기 전에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집이다. 그 집을 중심으로 하여 방어진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처음에는 웅장한 기와집이 아닐 수도 있다.
정유재란 때의 기사를 보면,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치보(馳報)에 ‘10일은 일기가 온화했다. 저와 통제사(統制使)·경상 우수사가 일시에 전선(戰船) 63척을 거느리고 해뜰 무렵에 장문포(長門浦)에서 배를 띄워 미시(未時)에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니 왜적이 창황히 수선떨며 병력 3백여 명을 내어 저항하려고 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수군(水軍)이 절영도(絶影島)로 후퇴하여 정박하자 왜적들도 저희들 진으로 도로 들어갔다. 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들은 장문포가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장목진객사가 있었던 양쪽 산에 임진란이 일어난 그 다음해부터 왜적들이 성을 축성 하였다. 그때 장목진은 적의 손에 들어가서 방어진지로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부터 장문포에 우리해군이 자주 들락거린 것을 보면 이지역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 하게 한다. 장목진객사의 설립연대에 대한 확정은 이후 다시 좋은 자료가 발견되기 전에는 1777년의 임진년,1712년의 임진년, 1652년 임진년,1592년의 임진년인지 확정을 짓기는 어렵다.그러하나 장목진객사가 방어진지 역할을 한 중요한 어우(御宇)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979년 폭우로 한쪽 처마가 무너져 있었던 것을, 별첨 사진처럼 없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것을 필자가 문화재를 담당 하면서, 이 건물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보존 하기위해, 김종석 해동 병원 원장과 동아대학 이용현, 교수, 이굉지 경남도 사무관에게 협조를 요청 하여 문화재로 지정하고 문화재 관리국 이한홍 기획관의 국비 지원으로 없어 질 번 한 장목진 어우를 복원 보수 하게 되었다. 장목진 어우는 일본과 가까운 방어 진지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