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찰산책>
밤은 다시 오고
밤은 다시 오고 바람이 붑니다.
나는 집을 떠나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었습니다. 이미 예고되었지만 그토록 쏟아지던 장맛비는 내 허술한 삶의 틈새를 들춰 보다가 아예 통째로 가재도구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끌고다니다가 냉장고는 가볍게 밀어트리기 한판으로 제압했으며 들고양이도 들어오지않던 안방의 침대도 스스로 가라앉았다합니다. 물은 단순한 부력만 있는게 아닌 모양입니다. 빈곳을 채우다 세상의 수평을 찾아 흐르면서 걸림되는 것을 밀어 제낍니다.
닷새가 지났습니다. 봉사대원들이 면사무소와 연락이 되어 도우미로 찾아온답니다. 오후에 다시 사천리로 갔던 안해가 며칠째 물난리 뒤치닥거리다 돌아와 밥을 얹힙니다. 점심 때는 고심 끝에 중국집에 연락, 나는 순두부각자 취향에 따라 주문해 서로 나누어 들기도 했습니다. 흰밥을 넣어 말아먹으니 맛이 제법이었습니다.
한낮 옥상에 가득한 빨래옷 널고 둘러보니 학교 앞 한가한 거리가 5단계 거리를 넘어섭니다. 북산의 절과 숲은 가깝고 길은 멀다. 스님의 법명은 ‘도훈’이라했다. 속명은 한종이다. 돌을 잘다루고 양봉에도 기술이 있다. 나는 도행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늦은 식사뒤 아내의 부탁에 아들이 흔쾌히 설거지를 시작! 퍼펙트하게 마무리해주어 깊은 감동 먹으며 기분도 상승. 이 삭막한 공간.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그릇과 냄비를 닦았다. 늘 취해 들어오는 이 집에 웃음소리는 별로 없었다. 늘 자판소리만 넘나들었습니다.
연약해진 나를 데리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연민이 아니다. 나의 글속에는 진정한 내가 없다. 나를 경멸하거나 나를 옹호하거나 하는 듯한 표현도 왼쪽과 오른손이 바뀐 거울 속의 모습에 불과하다. 일자가 되지 못하는 눈썹. 고통은 자국을 내지 않으려 침묵하거나 취하고 만다. 프리다칼로가 메스를 들고 다가와 내 배꼽을 판다. 아무것도 들리지않는 또 하나의 귀를 주저없이 도려내버린다. 서른 여섯 번째로 내가 누운 것이다.
송군포 앞바다 말간 원추리꽃이 흔들리는 듯 뒷모습 중3의 큰아들. 이제 하루가 다르게 힘이 부쩍 붙어 아내의 연락을 받으면 시장바구니를 끌고가 차에서 짐을 가득 받아 3층까지 들어올린다. 숨소리가 거칠어지지 않는다. 나는 누워서 반사적으로 내 팔둑을 바라본다. 나무 집게처럼 여위고 마른 팔. 집의 계단은 가파르고 살아남은 소금가마니, 철지난 신발, 화장지, 병풍 모든 것이 장애물로 다가온다. 거실로 돌아와 신문기사를 찾는다.
다은 김미경씨의 글은 길다. 나는 길고 아예 너저분하다. 그녀의 글엔 사진이 꼭 딸려온다. 차덖음 자료. 그녀는 전형적인 저널리스트다. 진도의 우리 차 이야기지만 향은 좀 바래진 듯하다. 사회적 전망선을 오가는 배달부를 두 번 부를 수는 없다.
벌써 도시는 폭염이라는데 도쿄경기장은 무관중이라는데 우리집은 쓰레기정리중입니다. 늘 속으로 다짐하지만 내가 하루라도 얼른 일어나 좀 오만하게 도도하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제몫을 할 그날이 언제일까? 아내는 아직도 기대를 품고 있을까? 어서 오너라 그날이여.
내 버림받은 영혼 구해주소서 뒤늦은 기도를 합니다.
3년 전 처음으로 대도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우연히 거울속에서 바라본 너무 깊이 패여버린 눈. 실려갈 때부터 두꺼비가 된 아랫배.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이뇨제를 먹었는데도 이래요”아내가 담당의사에게 하소연하듯 알렸다. 의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혼잣말을 하듯 ‘조금 더 늦었으면’까지만. 나는 그날부터 거울을 마주하지 않았다.
아내의 동창지인의 배려로 늦은 오후에 병실을 배정받고 옷을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집에서처럼 잠은 여전히 멀고 내가 만들어온, 나를 키워온 세상은 납작한 스마트폰 속에 담겨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순열도 향기도, 강열한 집착력과 연민도 없이.
나는 벌써부터 고향을 걱정하였다. 무엇보다 신문사가 걱정스러웠다. 술집동료들이 떠올랐다. 아내와 막내처제가 가까운 서점에서 사온 시집 빈 란에다 일기를 썼다. 병상마다 달린 티브이를 새벽까지 보았다. 눈이 어두워져 밤에는 책읽기가 힘들어졌다. 다산(마지막 공부)과 백범일지. 물과 밥을 열흘 넘게 끊었다. 살려면 그렇게 하라! 담당의사와 간호사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체중계와 주기적인 채혈, 주사와 조제약이 다였다.
그 때가 예순이었다. 사월의 봄이었다. 병원 마당에는 매화가 피고나서 하얀 목련꽃이 피기 시작했다. 사천리 옛집에도 커다란 목련나무에 꽃이 피었다 졌으리라. 애숙이는 한 번 다녀온 뒤 다시 운림예원 사무장 근무로 돌아갔다.
철도청에 다니며 수원서 사는 학이가 자주 들렸다. 옛날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리운 것들은 다 등뒤에 있는 것일까. 복도 걸어가기. 류현진의 선발연승. 인천일보를 병원 접수처에서 얻어 읽었다.
운동겸 병원을 돌다 와 누우면 병실 옆 침대에 있던 환자가 옮겨갔다. 산소호흡기 줄이 뽑혀지만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창문쪽 침실. 말을 못하는 환자 남편과 늘 대화를 하던 보호자 부인. 그녀는 책을 읽어주는 여자였다. 나도 가끔 꿈결에 듣는다. 아내는 전화가 뜸해졌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기는 점차 편지가 되어갔다. 한 달이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막내처제와 함께 퇴원수속을 했다. 목련꽃이 다 지고 있었다. 인천백운역 뒤 처갓집으로 우선 옮겨갔다. 날은 여전히 추웠다. 눈에 익은 거리. 고가다리 성당 아래 복개천고골목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도 함께 덮어졌다. 31년 전 나의 직장은 남동 지하공장이었다.
데자뷰와 스물아홉번의 경고법칙.
아내가 먀칠 앞서 와 짐을 덜어갔다. 처갓집에서 운동을 하며 책방도 다녔다. 마침내 처갓집에서 나와 광주행 버스를 탔다. 신문을 ㅂ다 잠깐 졸기도 했다. 여산역을 언제 지났는지 기억이 없다. 내리니 짐이 조금 무거웠다. 어깨가 소년시절 할아버지가 맞춰준 지게처럼 좁았다. 등가방이 자꾸 벗겨 흘러내렸다. 그래도 오늘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혼자서 퇴원해 가는 길이아닌가. 어디선가 자신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애숙이네 꽃밭에는 모란이 한창 피었으리라.
휴대용 전화기 충전이 약해진다. 목포행을 선택했다. 화장실도 문제였다. 오월이었다. 누구에게도 연락하기가 주저해졌다. 거울을 외면한지도 오래다. 어쨌든 가야한다. 가서 이발이라도 하자. 내복도 벗어던지자. 버스표를 자꾸 확인한다. 그날은 그봄 그해는 무릎과 무릎, 어께죽지도 지금보다는 훨씬 유연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광천동터미널에서의 추억은 늘 뒤섞인다. 가방을 맨다. 입찰구로 직진한다. 목적지를 크게부르는 사람도 없다.
목포로 갔다. 누군가 등을 떠밀었던 듯하다. 너무 오래 헤어졌던 그 여자였을까. 종환이형의 간곡한 부탁도 지나쳐갔다. 어머니의 흰옷의 영정사진이 언뜻 떠오르다 사라졌다.
단한번이라도 인생을 관통하는 사랑은 없었다. 그러나 내게도 ‘불멸의 여인’으로 다가왔던 시절의 사월의 봄은 있었다. 스스로 돌아서 방항하던 청춘의 길도 선택하고 퇴락해 갔다. 노래를 술에 담아 발화해버렸다.
진도는 나의 꽃이자 나의 관이 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등에 자서전과 관을 지고 다닌다. 조주선사는 이미 ‘오는 자나 가는 자가 다 당당하다’고 갈파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두려움과 초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도는 예전부터 석곽을 쓰지 않았다 합니다. 아마 치창조가 예견했던 ‘도시혈’이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명당을 고집해도 흘러내려가는 시신. 어쩌면 이게 공평하고 ‘사람의 지라학’과도 맞아떨어지는 이치로 봅니다.
아무리 달콤한 문구가 차려진 식탁, 손목을 풀지않는 리자 데 지오꼰다부인 모나리자나 목이 길어 눈이 먼 모딜리아니의 소녀와 껄떠구와 볼락 숯불구이. 금방이라도 싸락눈이 내릴 듯한 조금리 장터 가을전어구이는 금노 다시래기 홍림이형이 늘 함께 있었다. 나는 눕기위해서 나는 살기위해서 진도로 가는 중이다. 아내가 마중나왔는지 잘 생각이 나지않는다. 나는 아직도길병원 긴 복도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걸음수를 헤아리며.
나는 운림산방에서 가진 결혼축하곡을 푸른 잔디에 깔고 행진을 하지않았다. 아버지의 손에도 장구채가 들려있지 않았다. 화병에 꽂힌 운림동 동백꽃은 저홀로 도도하게 엣사랑의 붉은 정을 내보일 뿐이었다.
시는 매복병이었다. 부비트랩이었다. 둠벙 속의 붕어떼였다. 비늘이 반짝거릴수록 내 낚시에는 걸리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헤엄쳐 다가오기도 했다. 잡힐 듯 매끄러운 물고기처럼. 나는오히려 시에 걸려든 영원한 초보낚시꾼의 미끼에 불과했다. 차고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시향골 갯바위와 명싸고둥. 자운은 그의 소설속에서 또 다른 토방을 짓고 사는 중이다.
그 많은 충고, 정거장에서의 인사말로 가을잎으로 떠나보낸 날들. 두 번의 시집을 내고 한해가 또 지나갔다. 입원할 때마다 날마다 채혈을 해갔다. 달고 부드러운 빵이 먹고싶었다. 인천에서 도우미는 처제였다. 진도에서는 김양동이었다. 초코파이. 퇴원 때는 당당히 걸어나왔다.
이제는 회복이 더디다가 멈추고 기억의 다른 쪽에서 이런저런 후유증이 각질로 벗겨나오고
창자를 자르며 배꼽도 사라져 몸 중심이 안보이네요. 배속의 물이 좀체 빠지지 않는다. 자꾸 몸을 뒤로 제치게 만든다.
나의 호기심은 언제부터 병속에 빠진 중독성이 되었다. 새가 되지 않은, 부화를 두려워하는 알이 되었다. 왜 나는 부리를 갖고 태어났는가. 오직 단 하나의 세계. 은하도 하나. 고향도 바다도 하나였다. 모든게 터널이었다. 술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비밀의 문이 열리고 신과의 대화는 늘 거부되었다. 오히려 습기에 젖은 욕망이 엎질러져 밤 열한시의 탁자. 석구형이 민휴와 함께 와 5년 정도는 술을 끊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알렸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 쓰러지면 최소한 한달에서 한달 반. 회복기는 갈수록 길어진다. 배에 가스가 차오르면 숨도 쉬기가 힘들어집니다. 간경화말기. 뱃살이 아닌 뱃물이 좀 빠져야 홀가분하니 가끔 저자도 다니고 팔굽혀보기도 하며 아니 실하지못한 아래랫도리나 제대로 살펴볼 터인데.
인생은 누구나 한 모작이라 하지만 이몸의 이빨은 동남아 아열대나라 농사처럼 삼모작이 임플란트 식으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소화력은 갈수록 약해지는데 이빨도 없어 우물주물 나물반찬도 잇몸으로 살멧돌 갈아가며 겨우 삼킨다. 조금은 익숙해졌다. 처제가 보낸 소고기장조림속의 고추를 골라먹는다. 부드러워진 소고기도 들며 고마워했다.
7월 23일 어제는 뜽금없이 경기도 오산서 사는 후배가 찾아와 큰 수박 하나를 사주고 갔습니다. 일어서 반기지도 못했습니다. 또 술에 대한 충고가 딸려온다. “고맙다.” 제대로 못한 채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아내도 아들도 무덤덤하니 인사를 할 뿐. 어딜 못 나가니 늘 면구스럽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억지로 민폐만 끼치면서 음료를 마십니다. 혼자 있을 때 자위적이지만 티브이채널을 돌리듯 설거지를 합니다. 손은 자주 움직여 쉬이 가능합니다. 그을린 냄비에게도 수세미로 도전하다 제풀에 그만하고 말았습니다.
옥주서점. 나경수교수의 100번째 저서 신간 ‘진도’의 책장을 펼쳐봅니다. ‘신들의 섬 진도’ 칼럼을 보내오신 학고 김정호선생도 떠오릅니다. 그러다 아내가 보는 경제신문 다산칼럼 오피니언 등을 골라보며 오후를 보냅니다. 몇 줄을 읊조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창은 그 프리즘이 다채롭고 의심스러워지기도 하면서 아 아직도 나는 이런 관계로 세간과 마음을 나누는 구나 생각합니다. 분노하고 헐덕거리고 비난하고 편을 가르고 아집을 키우는 시절을 쌓아왔습니다.
늘상 거실에서 누워 소화라도 좀 되라고 발구르기를 하다 힘들면 손목쥐었다 펴기하고 어후를 보낸다. 옥상을 다녀온다. 곰팡이 냄새가 빠지지 않는 액자들. 금봉선생의 산수. 석천임봉길선생의 천자문 병풍. 전정 박항환 화백. 조약돌의 화가 일주 이경모의 근교풍경. 고은 박종복. 무궁화의 청전 박채배. 중용지도를 지침으로 내려주신 고산 김민재님.
언제부터 글쓰며 살다가 차향에 취해 전의이씨 진도유배자가 쓴 상두지를 읽었다는 금골산자락에 새롭게 둥지를 튼 어느 여성작가. 군내면 출신으로 진도강강술래의 명인 최소심씨의 약전을 펴내기도 했다. 그녀는 편집과 창작의 뛰어난 능력자이다. 탄탄한 한문실력.
나는 문득 어느 멕시코 출신 화가를 떠올립니다. 열여섯의 교통사고로 서른다섯번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자화상을 그렸던 프리다칼로의 목과 허리를 칭칭 감은 철의 붕대. 사랑했던 남편이 사랑했던 또 한명의 여인은 여동생. 그녀의 정면성. 그녀의 치마는 여전히 비의성을 자랑하지만 나의 하반신은 장대나 석고로 균형과 직립의 위대한 진화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나는 겨우 썩어가는 창자를 조금 잘라냈을 뿐이다. 마음속의 오랜 두려움과 내 자신에 대한 불신, 애착을 잘라내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손으로 아무도 몰래 장딴지를 눌러봅니다. 누르는 팔목을 봅니다. 숨어버린 핏줄처럼 내 생도 그렇게 숨어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윤기형님은 광주 5.18기념 서예휘호대전에서 결선까지 올랐다 합니다. 수묵으로 친 매화나무가 100년을 넘은 듯 그 기개와 꽃의 아취가 압도적입니다. 나는 언제 이몸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려는가. 하루가 짧다. 밤은 길다.
그녀는 나도 한달 넘게 가지 못한 네거리 우리들의 예향신문사 사무실에 음료와 막걸리를 사놓고 갔다더랍니다.(조갑연 사장 전언) 미리 연락도 없이 자랑스럽게 거울에서 겨울로 가는 피닉스처럼 뒤뚱거리면서.
또 무슨 소문날라고 걱정입니다. 쌍계사 주지 정상스님. 박주언 문화원장. 일휴 김양수 화백. 그녀는 지금 금골산아래 마을에서 찻집을 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여인을 닮은 5층석탑. 학교 운동장 위에 선 탑신.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무단으로 싣고 가려다 하늘에서 천둥이 울려 놀라서 포기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집에 돌아았지만 몸무게는 아직도 42kg를 넘지 못합니다. 작년 봄 진도한국병원에서는 39키로까지 내려간 적도 있지요. 관절의 힘이 중요합니다. 정성숙씨가 위로해주고 갔더랩니다.
나도 저렇게 다시 서고싶다. 김미경작가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산철쭉처럼 색과 향이 짙어지는 듯 하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낡은 빌라 계단앞에서처럼 다리가 후들거린다. 몸은 장마철 사랑방 벽지처럼 빛깔은 퇴락하고 꽃무늬는 뭉게지고 말았다. 사천리를 다녀오면 아내가 꼭 알려주는 그림내용입니다.
7월첫째 주 비가 내리던 날 목포에서 퇴원하여 혹여 밥이라도 땡길까 복수나 시원하니 빠져줄라나 바라며 나대경의 ‘산정일장’(山靜日長) 소년의 하루는 해와 같이 길고 이끼 덮인 석무동 숲길을 걷는 은퇴한 화가는 차내음에 끌려 집으로 간다. 아내는 고사리와 봄나물을 준비해 놓았으리라. 아내는 김치찌개를 한다. 아들을 소고기 즉석 불고기를 후라이팬에 데웁니다.
부러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호일이 후배. 그는 우리가 빗속에서 퇴원하던 날 병문안 간다며 연락을 했다. 비가 내리고 진도터미널에서 말렸다.
그래도 안부를 묻는 애숙이동생. 재봉이와 김권옥이가 목포까지 갔다니. 양동이형은 밥벌이로 바쁘다. 여기까지 땀냄새, 바닷내음이 풍겨온다. 모두가 멀어지는 것을 나는 왜 혼자 알지 못했을까?
다시 선배의 간절한 부탁을 되새겨봅니다. 어디서 감나무잎이 물드는 것을 모른채 위장에 둥둥 뜨는 막걸리에 연연했을까. 후회는 그림을 남기지 못한다. 시는 더더욱 그렇다.
어찌보면 편하게 열흘넘게 집에서 못 나가고 신경이 더 예민해진 아내가 사천리집에 가서 오늘도 정리 물건 그 성격 한마디 거들지않고 그저 도움준 분들 고마운 마음뿐 내가 면목이 없답니다. 손발은 너무 여위어 내놓을 수도 없어 핑계삼아 주방을 돌 뿐이지요. 하니 눈과 손가락만 살아 입과발을 대신하니 이젠 곧은 기둥 아들에게도 못미치니 반성하고 기도를 하고 반드시 이 자리에서 일어나리라. 지금은 책상과 소파를 짚고 힘들게 일어나지만 이 또한 치유와 전진으로 삼아 반복할 일이다.
내가 나를 위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기도는 언제나 집중과 열정, 순수를 잊지말자는 다짐이다. 우리사회가 이제 단순한 공동체에서 필연적인 공동운명체로 살고 있음을 확인디고 있습니다. 아픔과 각성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이 자문하듯이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입니다. 대한민국은 금방이라도 절단이 날것 같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는 예지자들이 넘쳐납니다. 고향타령이 나옵니다.
나는 늘 약봉지 한 입! 낮에 오이썰어 냉국 만든다했는데 난 간장만 넣어선지 맛이 잘 안나네요. 애숙이가 파래국 가져온답니다. 해미원 진엽이의 생선국도.
흙탕물속에서 아내가 광개토호태왕비 건져왔네요. 함께하는 세상. 팔색조(파랑새)가 산다는 첨찰산. 참가시나무, 삼색싸리 군락아래 좋은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또 해가 뜨고 나는 나의 가슴에서 뜨는 희망을 키워가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진도에서 박남인도행 올림.
첫댓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