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1972앙띠장1절4AA
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1 욕망하는 생산 (La production désirantes, 7-15, 15-. [자연-생산]
2. 기관들 없는 신체 (Le corps sans organes - 15-22 (25-) [자연-산업] <등록>
3. 주체와 향유 (Le sujet et la jouissance - 22-29 [사회-자연] <소비>
*
[무의식(l’inconsient)을 실재성으로서, 내재의식이라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위하다고 하는 경우 무의식은 ‘습관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벩송이 말하는 내재의식(l’inconscient)은 습관적으로가 아니라 내재적 권능이, 창조적 진화에서 말한는 작동하는 권능 또는 약동처럼, 작동하는 것을 말했다. 들뢰즈는 이것을 욕망하는 생산으로 능동적으로 읽었다. 벩송은 권능의 작동을 낙관적으로 보았으며, 습관적 무의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신의 비관적 측면(없는 허무를 존재로 만들면서, 분노, 원죄, 속죄)을 보았을 것같다. (56QMG)]
[허무가 아닌 생성하는 욕망으로 된 질료, 즉 자연은 자기의 길을 표면 위에 다양하게 올려놓는다. 현실의 제도와 체제는 이 표면의 양상들(aspects) 어떻게든 하나의 질서 또는 배열로 만들어 언어로 문장으로 전환시켜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이 제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욕망하는 기계는 처음에는 마치 그 제도 속에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착각하며, 그 사다리를 오르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시간을 보내며, 그 목표를 따라가는 것만이 삶이라 여기며, 파라노이아의 삶을 산다. 현실의 평면에서, 체제상으로, 그 다음을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스키조들은 표면에서 이리저리 방랑할 것이다. 파라노이아는 이 표면에 다음 표면으로 이행이 자기의 성장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다음과 그 다음을 맞이하면서 각성할 경우에, 환상과 망상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위상을 바꾸려 할 때, 그 표면에서 기적같은 기계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노력과 정열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또는 탈코드하여 사는 독신기계로 전환은 어렵고 힘들다. 어렵다, 노력과 자치의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본 제국은 탈영토화를 재영토화한다. 현실 평면은 다음과 그 다음도 제국의 그물망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독신기계의 작업은 무엇인가? 표면위에서 이탈자로서 방랑자로서 산보자로서 지낼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답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자율성은 기억론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형이상학적으로 깊이 구멍을 파면서 실재성 접촉으로, 질료의 다이몬(방황하는 원인 또는 왕관을 쓴 무 권위자)을 만나 함께 욕망하는 생산을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저항의 시작은 필연이며, 여기서 시작하여 항거와 항쟁 그리고 간헐적인 혁명을 이룰 것이다. (56SLC)]
4. 유물론의 정신의학 Psychiatrie matérialiste - (29-43, 번 43-)
1.4.1. 무의식과 생산의 범주 [정신의학의 명제] - L'inconsient et la catégorie de production 29
끌레랑보(Clérambault, 1872-1934)의 유명한 테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을 지닌 망상은 세분되고 국부적인 자동적 현상들에 비해 2차적이다. ... 욕망은 기계들의 작동과 고장들에 비하면 2차적이다. (29) [역으로 생산은 1차적이고 정신의 자동적[습관적] 현상은 부차적이다.]
그래서 그는 망상(délire)의 상당한 부분을 (심정적) 자동증의 결과라 설명한다. 다른 부분 즉 “개인적” 부분에 관해서 그것이 반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고, “성격”에 관계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게다가 이런 성격의 [여러 이질적] 표출들은 자동증에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가령 편집증적 성격)
클레랑보는 맑스(1818-1883)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의미에서, 정신의학에서 포이에르바흐(1804-1872)이다. “포이에르바흐가 유물론자인 한, 역사는 그에게서 만나지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에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반대로 참으로 유물론적인 정신의학은 이중 조작에 의해 정의 된다: 매커니즘 속에 욕망을 도입하는 것, 욕망 속에 생산을 도입하는 것. (29)
1.4.2. 극장인가 공장인가? - Théâtre ou usine 29
거짓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형적 형식들 사이에 깊은 차이가 없다.
정신분열증의 이론은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세 가지 개념들로 주목받았다. 분해[분열](dissociation, 크래플린 Kraeplin), 자폐증(autisme, 블뢸러 Bleuler), 시간-공간 또는 세계에서 존재(반스빙거 Binswanger).
첫째 것은 설명적(explicatif) 개념이며, 소위 말해서 특수한 장애 또는 초기 결손을 지적하는 것이다. 둘째 것은 내포적(compréhensif) 개념이며, 효과의 특수성을 지적한다. 특수성이란 망상 자체 또는 절단이며, “실재성으로부터 분리이며, 내적 생활의 상대적 또는 절대적 우위를 동반되어 있다”. 셋째 것은 표현적(expressif) 개념이며, 망상하는 인간을 그의 특수한 세계에서 발견하고 또는 재발견한다. 이 세 개념은 ‘신체의 이마쥬’를 매개로 해서, 정신분열증을 자아와 관련시킨 것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다. (30)
신체의 이미지, (영혼의 마지막 아바타(화신)이며, 거기에서 유심론과 실증주의의 요구들이 혼동되어 있다.) 그럼에도 자아, 마치 엄마-아빠처럼 스키조가 믿지 않는 것은 오래전 부터이다. 그는 저넘어에 있고, 그는 뒤에, 그 아래, 다른 곳에 있으나, 거기-문제 속에 있지 않다. (30) [가족, 사회, 제도 속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자아는 자연(본성)속에 있는데도, 그 문제 속에 있다고 하니까, 문제가 잘 못 제기된 것이다. (56RNA)]
사람들은 스키조가 더 이상 자아를 말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에게 발설의 신성한 기능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다시 더럽혔다. “나는 나(자아)를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자아]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부 바보짓이야. 내가 그것을 들을 때 마다 나는 그 자리에 3인칭을 쓸거야. .. 그런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30).
프로이트도 자아의 좁은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를 가로막은 것은 자기에게 속하는 3원성의 정식 – 외디푸스적 정식, 신경증적 정식이며, 즉 아빠-엄마-자아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분석적 제국주의가, 스키조프레니에 적용된 자폐증이라는 곤란한 개념을 재발견하는 데로,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것을 보증하는 데로, 프로이트를 인도 하지 않았는지를 자문해야한다. 왜냐하면 결국 조금도 숨길 필요 없이, 프로이트는 정신분열증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외디푸스화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들을 짐승들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30)
충동들과 징후들, 상징과 상징된 것의 연관을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 관하여 가끔 사람들은 물어왔다. 그것은 원인 연관, 내포 연관, 표현 연관인가? 이 문제는 너무 이론적으로 제기되었다. (31)
정신분석학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하는 생산의 발견, 내재의식[무의식]의 생산의 발견이다. 그러나 외디푸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하여 금방 비의적(occultée)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장으로서 무의식 대신에 고대 극장으로서 무의식으로 대체하였다. 무의식의 생산적 단위들 대신에 표상으로 대체하고, 생산적 무의식 대신에 설명될 수 있는 무의식(신화, 비극, 꿈...)으로 대체하였다. (31)
1.4.3. 생산의 과정으로서 과정 - Le processus comme processus de production 31
정신분열증자의 문제가 자아에 귀착할 때, ... 분열증자(schizo)는 때로는 분해된(dissocié) 자아로, 때로는 절단된 자아로, 때로는 존재이기를 그쳐본 적이 없고 독특하게 자기 세계에 존재하는 자아[자폐]로 여겨졌다. 이것은 정교한 정신의학자, 포괄적 이해를 지닌 뛰어난 관찰자, 간단히 현상학자에게서 발견된다. (31)
여기서 맑스의 경고를 상기해 보자. 사람들은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를 알아맞힐 수 없고, 생산된 것에서 생산작업의 체제와 연관 맞힐 수 없다. 생산물(produit)을 원인, 내포, 표현이라고 하는 이상적 형상들에 관계짓고, 생산물이 의존하는 실재적 생산 진행(procès)에 관계짓지 않을수록, 그만큼 생산물은 특별한 것, 기묘한 특별한 것으로 보인다. (31)
크래플린(1855-1926)의 유명한 마지막 상태‥… 사람들이 반대로 생산 작업의 실질적[물질적] 과정을 할당하자마자, 생산물의 특수성은 사라지게 되고, 동시에 다른 “완성”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정신분열증은 자폐증에 갇힌 인위적이고 인격화된 분열증환자의 정성(affection, 감화)이기 전에, 욕망의 생산의 과정이며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과정이다. (31-32)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도 이점에 대해 가장 귀중한 지적들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그의 “관념론”이 오로지 틀에 박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정의 개념을 인격성의 전개 또는 발전에 대립시키면서, 과정을 단절, 즉 침입으로 생각한다. 이런 [단절의] 과정이 자아와 허구적 연관 밖에 있으며, 허구적 연관 대신에 자연 속에 있는 다이몬적인 것(le démonique) 연관을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그에게 모자라는 [부족한 것]은, 단지 과정을 경제적 물질적 실재성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연=산업, 자연=역사라는 동일성 속에서 생산과정처럼 그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모자란 점이다. (32)
1.4.4. 욕망을 결여로 보는 관념론의 개념작업 (환영)
- Conception idéaliste du désir comme manque (le fantasme) 32
어떤 면에서, 욕망의 논리가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그 대상을 놓쳤다. 플라톤(Platon, 전427-347)의 분할(division)의 첫발자국은 생산(production)과 획득(acquisition)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우리는 욕망에 대하여 관념론적(변증법적, 허무주의적)인 개념작업을 만든다. 이런 개념작업은 욕망을 처음에는 결여(maque)로, 대상의 결여로,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 규정한다. 다른 한편, 생산작업의 편은 무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욕망의 이론에서 비판적 변혁을 일으킨 것은 역시 칸트(1724-1804) 이다. 그는 욕망을 “그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들의 실재성을 이 표상들로 생기게 하는 능력”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이 정의를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칸트가 미신적 신념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하고 있는 것은 아자르에 의해서가 아니다. 현실적 대상이 원인성과 외부의 메카니즘들에 의해서만 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 또 이 앎은 이 인과관계를 욕망자체 속에서 표상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에서, 대상의 실재 성은 심리적 실재성(la réalité psychique)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비판적 변혁도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32) [코페르니쿠스 전회도 사실상 인식능력으로 대상을 한계 짓는 것이다. 칸트의 주체가 그 역할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욕망하는 생산을 환상(fantasme)의 생산에 환원 할 때, 관념론의 원리에서 모든 귀결을 끌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원리는 욕망을 결여라고 정의하고, 생산 즉 산업적 생산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33) [관념론자는 머리로만 (상징)생산을 하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실재(산업적, 기술적) 생산적 욕망을 무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끌레망 로세(Clément Rosset, 1939-2018)는 .. 욕망의 대상을 규정하기 위하여 욕망이 결여하고 있는 그 결여를 강조할 때마다, “세계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라 어떤 세계인지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또 하나의 세계와 더불어 이중의 세계가 된다. 대상이 욕망에게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모든 대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적어도 한 대상은 결여되고 있는데,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결여하고 있는) 욕망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다른 곳이 존재한다.”(33) [이 다른 곳이 기관 없는 신체, 심층의 내재(무)의식일 것이다.]
1.4.5. 실재와 욕망하는 생산: 수동적 종합들
- Le réel et la production désirante : comme synthèses passives 34
[들뢰즈의 욕망관의 성립]
욕망이 생산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재(le réel)를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라면, 욕망은 실재적으로 생산자이며, 실재성의 생산자이다. 욕망은 부분적 대상들, 흐름들, 신체들을 기계로 작동하는(machiner) 수동적 종합(synthèses passives)의 집합이며, 생산의 단위들[그게들, ça들로서] 기능하게 하는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실재는 거기서(욕망) 흘러나오고, 실재는 무의식의 자동 생산으로서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욕망을 갈망하는 것은 오히려 주체[환자]이다. 욕망은 고정된 주체의 결여이다. 고정된 주체는 억압(répression)에 의해서 나온다. (34)
욕망은 기계요,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따라서 생산물은 생산하는 활동에서 떼어내 지고, 생산하는 활동에서 생산물로 옮아가는 도중에 어떤 것이 이탈하는데, 이것이 노마드 주체 또는 방랑하는 주체에다가 잔여물을 곧 줄 것이다. 욕망하는 개관적 존재는 온실재(le Réel) 그 자체이다. (34)
맑스(Marx)가 말한 것처럼, 결여는 없고, 다만 ‘자연적 감각적 대상존재’로서 정념(passion)이 있다. 필요들(les besoins) 위에 받쳐져 있는 것이 욕망이 아니라, 반대로 필요들이 욕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필요들은 욕망이 생산하는 실재적인 것들 속에서 반생물(contre-produits)이다. 결여는 욕망의 반효과(un contre-effet)이며, 결여는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실재적인 것 속에 위탁되어 정리되고 빈칸으로 되었다(vacuolisé). 욕망은 언제나 객관적 현존이라는 조건들에 가까이 있다. (34)
사람들은 풀(herbe)이 아니라고 우리가 말해봐야 소용없다. 우리가 엽록소 종합을 잃은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 그러면 욕망은 모자라다(결여)의 비열한 공포(cette peur abjecte)가 된다. 그러나 이 구절[즉 먹어야 한다 것]을 밖으로 발설하는 자는 가난한 자들 또는 박탈당한 자들이 아니다. 반대로 이들은 자신들이 풀 가까이 있다는 것, 욕망은 아주 하찮은 “필요들(besoins)”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줄곧 빼앗겼던 것이라는 사물들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빼앗겨온 것이 주체의 심장에 결여(un manque)를 구성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대상성, 즉 인간의 대상적 존재를 구성했던 것이다. 그 인간에게서 욕망하다라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며, 실재로 생산하는 것이다. (34-35)
욕망은 주체 속의 그램분자량(molaire, 질량)을 이루는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램분자량을 이루는 조직이 욕망으로부터 그 대상적 존재를 빼앗는다. 혁명가들, 예술가들, 선견자들은 스스로 대상적인 것들로, 오직 대상적인 것들로 만족한다. 이들은 욕망이 생산적인 권능을 가지고서 생명을 안고 있으며,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그 만큼 생명을 더 강열하게 재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5)
“지금까지 나의 적은 독서양들로부터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생명 속에 가장 깊이 발판을 가진 자들은, 생명으로 만들어져 있고, 생명자체를 떠받들고 있으며, 거의 먹지도 않고, 거의 자지도 않고, 만일 그들이 가졌다 하더라도 거의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의무, 생식 등의 문제거리를, 가족을 영속시키고 국가를 수호하는 제한된 목적들에 맞게하는 착각들(illusions)을 품고 있지 않았다.‥… 환영들(les fantomes)의 세계는 우리가 정복하기에 완성하지 못했던 세계이다. 그것은 과거의 세계이지 미래의 세계가 아니다. 과거에 얽매이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은 갈리선 죄수의 발목에 잠쇠를 달고 자기와 더불어 가는 것이다” 그 살아있는 선견자는 나폴리의 혁명가의 옷을 걸친 스피노자이다. (35)
[들뢰즈의 결여관 비판: 욕망은 결여가 아니다.]
우리는 결여[부족]가 어디서 오는지 잘 알고 있고, - 그리고 주관적 상관관계로서 환영(fantasme)도. [어디서 오는지 잘 알고 있다.] 결여는 사회적 생산 속에서 배치되고 조직된다. 결여는 생산력으로 향하고[급습하여], 생산력을 전유하는[자기 것으로 만드는] 반생산(antiproduction) 심급의 대항-생산(contre-produit)이다. 결여는 결코 첫째[1 차적]가 아니다. 생산은 결코 옛 결여에 따라 결코 조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여는 이전 생산조직화에 따라서 자리잡고, 비게 되고(se vacuoliser), 번져나간다. (35) [결여는 앞선 조직화에 따라 생산하는 방식이 상부를 만들고, 그 상부가 지배계급의 기술이다. 이들은 환영을 생산한다. 즉 욕망의 생산을 규제한다.]
반면에 욕망의 생산은 환영(le fantasme)(환영이외 어떤 것도 아닌) 영역으로 넘어간다.(36)
1.4.6. 유일의 동일한 생산인,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 Une seul et même production, sociale et désirante 36
한쪽에 실재성이라는 사회적 생산이 있고, 다른 한쪽에 환영이라는 욕망하는 생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투입과 투사의 2차적 연결들(liens)만이 세워진다. ... 우리가 한편으로 화폐(돈), 황금, 자본과 자본주의 삼각형을, 다른 한편 리비도, 항문, 남근과 가족 삼각형을 평행으로 놓고서 만족하는 한, 우리는 기분 좋은 심심풀이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돈의 메카니즘들은 돈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하운에 투사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이 투사와는 상관이 없다. 맑스-프로이트의 평행론은 어디까지나 불모이고 무차별적이다. .. 마치 돈=똥(merde) 이라는 유명한 방정식에서처럼. (36)
진실로 사회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일정한 조건들 아래서 욕망하는 생산이다. ..리비도는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을 제공하기 위하여 아무런 매개나 승화도 아무런 심리적 작업도 아무런 변형도 없다. 욕망과 사회[터전으로서]가 있을 뿐 이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36)
따라서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5)가 제기할 줄 알았던 (그리고 라이히가 재발견한) 문제이다. “왜 인간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관한 것처럼 자신들의 예속(leur servitude) 때문에(pour) 싸우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외치게 되는가. (36-3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는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끌어대기를 거부하고, 욕망에 의해 욕망의 항목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때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인 적은 없다: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었다. 대중들은 그런 찰나에 그런 상황에서 파시즘을 욕망했으며, 설명해야 할 것은 이 모여진 욕망의 퇴폐(cette perversion)이었다. (37)
하지만 라이히는 충분한 답을 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 그는 사회의 영역에서 “부정적인 것”, “주관적인 것”, “금지된 것” 만의 설명을 정신분석학에 예약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합리적으로 생산된 실재 대상과 비합리적이고 환영적인(fantasmatique) 생산 사이에 이원론에 되돌아갔다. 그는 사회 영역과 욕망의 공통척도 즉 공연성(coextension)을 발견하기를 거부한다. (37) [기억과 생명의 공연성을 대비해보자.(42LLE)]
진실로 유물론적 정신의학을 기초를 놓는데 있어서, 라이히에게는 욕망하는 생산의 범주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 범주에 실재적인 것이 종속되는데, 소위 말하는 그것의 합리적 형식들 하에서도 그 만큼이나 비합리적 형식들 하에서도 종속된다. (37)
1.4.7. 집단 환영의 실재성 - Réalité du fantasme de groupe
사회적 압력의 대중적 현존은 생산 욕망하는 생산에서 지탱하고 있으면서, 그 현존은 우리의 원리에 어떤 원리에 어떠한 감화도 주지 못한다. 욕망은 실재적인 것을 생산하고 또는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다. 특별한 현존의 형태를, 즉 사회적 생산의 물질적 실재성에 대립되는 심정적 또는 심리적 실재성을, 욕망에 예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37-38)
[사회적 생산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환영적 기계나 몽환적 기계가 아니며, 이 후자들의 기계들은 기술적 사회적 기계들과 구별되고, 또 이 기계들(기술적 사회적 기계들)을 이중화[아바타 역할을 하는] 한다. 환영들은 오히려 2차적 표현들로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두 종류 기계의 동일성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한 환영은 개별적이 결코 아니다. 환영은 집단 환영(fantasme de groupe)이다. (38)
집단 환영에는 두 종류가 있다면, 동일성이 두 의미(방향)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그것들이 형성하는 큰 군집의 덩어리들(masses grégaire)로서 파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인 힘들(forces)에 연관지어지는 방향이다. (38)
(예를 들어, 19세기 위대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들은 이상적 모델로서가 아니라, 집단의 환영들로서, 즉 욕망의 실재적 생산성의 동인들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동인들은 욕망자체의 혁명적 기구를 위하여 현실적 사회 터전의 탈 공급 또는 탈 기구(desinstitution)를 가하게 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사이에는 본성[자연]상의 차이가 절대로 없다. 구별이 있지만, 크기의 연관들에(rapports de grandeur) 따른 체제(régime)의 구별일 뿐이다. 체제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동일한 기계들이다. 그것은 집단 환상들이 제시하는 것이다. (38)
1.4.8.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에서 체제의 차이들 - Les différences de régime entre la production désirante et la production sociale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사이의 평행관계는 두 생산 사이에서 연관(rapport)에 대해 어떤 예단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체계의 구별에 관하여 몇 가지 측면을 간추릴 수 있다. 첫째로 기술기계는 고장 나지 않는 조건 아래서만 작동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들 고유의 한계는 마멸이지 고장이 아니다. 맑스(Marx)는 이 단순한 원리를 근거로 삼아, 기술기계들의 체제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엄밀하게 구별되는 체제요, 그 구별의 덕택으로 그 기계는 생산물에다가 가치를 전달해주되 자기가 마멸됨으로써 잃는 가치만을 전달해 준다는 것을 밝혔다.(38-39)
이와 반대로 욕망하는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이 나며, 고장을 일으키면서 작동한다. 생산하는 것[활동]은 항상 생산된 것에 접목되어 있으며, 기계의 부품들은 또한 [기계를 움직이는] 연료(le combustible)이다. 예술은 가끔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진실한 집단 환영들을 창조한다. 이 환영들은 사회적 생산작업과 욕망하는 생산작업을 가까이 왕래시키고, 기계기술들의 재생산 속에 고장의 기능을 끌어들인다. (39)
아르만(Arman, 1928-2005, 조각가)의 불탄 바이올린
세자르(César, 1921-1998, 건축가)의 압축된 자동차들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조각 회화)의 비판적 편집병의 방법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프랑스 음악가) 음악에서 이미 마멸보다 고장을 선호했고, 느린 움직임이나 천천히 끝나는 것 대신에 갑작스런 정지들, 주저들, 진동들, 불협화음들, 파열음들을 사용했다.
예술가는 대상들의 [지배하는] 주인이다. 그는 부서진 대상들, 불탄 대상들, 고장난 대상들을 욕망하는 기계들의 체제 속에 도입하기 위하여, 대상들을 자기 예술 속에 통합하는데, 이때 욕망하는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룬다. 예술가는 기술기계들의 수 만큼이나 편집증적 기계들[1장 1절], 기적을 행하는 기계들[2절], 독신 기계들[3절]을 소개하는데, 이 때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술기계들을 침식하는(miner) 것을 개의치 않는다. (39) 게다가 예술작품 자체는 욕망하는 기계 그 자체이다. 예술가는 가까운 폭발을 위하여 자기의 보물들을 쌓는다. 그 이유로 그는 파괴가 아주 빨리 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9)
39 체제의 둘째 차이가 여기서 생긴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반(反)생산을 생산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를 통해서인데, 반면에 기계기술에 고유한 반생산은 오직 진행중인 재생산의 외적 조건들 속에서만 생산된다. (이 조건은 “나중에(par après)”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기계기술들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고, 언제나 사회체 즉 기술기계들과 혼동되지 않는 사회기계에 귀착한다. (39) ... 그러므로 사회기계는 원인이 아니라, 다만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형태의 지표(indice)일 뿐이다. (39)
욕망하는 기계들은 욕망의 경제학의 기본적 범주이며, 그것들 자체에 의하여 기관없는 신체를 생산하며, ...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술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욕망하는 생산은 본래적 억제(refoulement)의 장소이며, 반면에 사회적 생산은 억압(répression)의 장소이며,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에 “소위 말하는” 2차적 억제에 닮은 어떤 것이 실행된다. 여기서 모든 것이 기관들없는 신체가 내부의 결과인지 외적 조건인지에 따라 이 신체 또는 이와 맞먹는 것의 상황에 의존한다. (40)
1.4.9. 사회체와 기관들 없는 신체 - Le socius et le corps sans organe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두 기계, 욕망기계와 사회(기술)기계] 서로 다른 두 체제 아래 동일한 기계들이다. (40)
모든 사회적 생산은 일정한 조건들 아래서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으며, 즉 우선 자연인(Homo natura)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정확하게, 욕망하는 생산은 우선 사회적이고, 마지막에서야 스스로 자기를 해방하는 경향이 있다(우선 역사인Homo historia). (40) [자연인, 제도인, 해방인]
사회기계 즉 사회체(socius)는 대지(Terre)의 (신)체, 전제 군주(Despote)의 (신)체, 돈(Argent, 화폐)의 (신)체일 수 있다. 그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투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관들 없는 신체이며, 즉 탈영토화한 사회체의 궁극적[마지막] 잔여물이다. (40-41)
원시적 영토 기계가 더 이상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을 때, 전제의 기계는 일종의 과잉규준(surcodage)을 세웠다.(40) 그러나 자본주의기계, 그것이 전제군주 국가로부터 얼마간 먼 폐허들 위에 세워지는 한, 전혀 새로운 상황 속에 있다. 즉 흐름들의 탈규준화이며 탈영토화이다. (41)
자본주의의 극단적 생산과 억압은 그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자본주의는 두 개의 흐름, 즉 돈-자본 형태를 가진 생산의 탈규준화한 흐름과 “자유 노동자”의 형태를 지닌 노동의 탈규준화한 흐름 사이의 만남에서 생긴다.(41)
자본주의는 탈규준화(décodage)의 문턱(seuil)을 향한다. 그 문턱은 기관들 없는 신체를 이용하여 사회체를 파괴하며, 또 이 신체(cso) 위에서 탈영토화한 터전 속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키는 그런 문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치 조울증과 편집증이 전제군주기계의 산물인 것처럼, 히스테리가 토지기계의 산물인 것처럼,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기계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가? (41)
1.4.10. 자본주의 그리고 한계(상반된 경향)로서 정신분열증
- Le capitalisme, et la schizophrénie comme limite (la tendance contrariée)
흐름의 탈 규준화, 사회체의 탈영토와는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을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기의 한계에 접근한다. 그 한계는 소위 정신분열증적 한계이다. 자본주의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탈 규준화한 흐름들의 주체로서 분열증자를 생산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 그 주체는 자본주의자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보다 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이 경향 속에서 더 멀리 밀고 나가면, 마침내 자본주의는 그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로 보내질 것이다. (41-42)
사실 우리가 말하고자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그 생산의 과정에서 무서운 정신분열증의 폭약(une charge)을 생산하는데 그 억압의 모든 무게로 폭약을 눌러보려 한다. 그렇지만 이 폭약은 자본주의의 진행의 극한으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 경향에 반대하고 억제하며, 동시에 자본주의는 경향으로 서둘러 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자기 한계를 밀고 나가고 동시에 거절한다. (42)
국가들, 고향들, 가족들, 이모든 것이 다시 지나가거나 또는 되돌아온다. 이것이 자본주의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것이며,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이미 믿어왔던 것 전체의 잡다한 핵체의 회화”이다. 실재적인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점점더 인위적이다. 맑스가 이윤율 저하의 경향과 잉여가치의 절대양의 증가라는 이중 운동을 상반된 경향의 법칙이라 불렀다. 이 법칙의 파생명제로서, 흐름들의 탈코드화 또는 탈영토화와 흐름들의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재영토화라는 이중운동이 있다. 자본주의 기계가 여러 흐름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기 위하여 이 흐름들을 탈규준화하고 공리 체계화함으로써 탈영토화하면 할수록, 관료조직과 경찰기구 같은 자본주의의 부속 장치들은 잉여가치의 증대하는 부분을 흡수하면서 더욱 더 재영토화를 추진한다. (42)
1.4.11. 신경증, 정신병, 도착증 - Névrose, psychose et perversion
신경증 환자, 도착자, 정신병 환자(psychotique)에 대한 현실적인 충분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충동들과 연관을 통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충동들은 그저 욕망하는 기계 자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정의는 현대 영토성들(territorialités modernes)과 연관을 통해서 가능하다. (42)
신경증환자는 우리 사회의 잔여적 또는 모조적 토지들에 눌러 붙어 있는 채로 있으며, 또 이 토지들 모두들 궁극적인 토지인 외디푸스 위에 포개 놓는다. ... 도착자는 인위적인 것을 진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 분열증자(le schizo)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헤매며, 비틀거리는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거리로 보아, 그는 자신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사회체의 붕괴를 끝없이 추구하여 항상 탈영토화의 길을 더욱더 멀리 전진해 가는 사람이다. ... 정신분열증자(le schizophrène)는 자본주의 한계에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된 경향이며, 잉여생산물이며, 프롤레타리아이며, [자본주의를] 근절시키는 천사이다. 그는 모든 규준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욕망의 탈규준화를 운반한다. 실재적인 것은 흐른다. 과정(processus)의 두 측면은, 형이상학적 과정과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과정은, 서로 결합한다. 전자는 자연 속에 또는 토지[지구]의 심장 속에 다이몬(le daimonique)과 우리를 접촉하게 한다. 후자는 욕망하는 기계에게 탈영토화된 사회적 기계에 연관하여 자치를 회복하게 한다. (43)
욕망하는 생산 그리고 이 생산의 사회적 생산과 체제의 차이는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지, 처음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현실의 생성이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생성만이 있다. 그리고 유물론적 정신의학이 욕망 속에 생산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써 정의된다 할진 데, 그것은 분석기계, 혁명기계,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최종적인 관계의 문제를 종말론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43)
(옮, 8:29, 56QMG), (11:35, 56SKI), (12:23, 56SLC)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네델란드 철학자.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로이센 철학자. Critique du jugement, Introduction, §3.
1804 포이에르바하(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헤겔의 제자이며 이후에 비판자. 헤겔 좌파 계열(스티르너, 맑스, 엥겔스, 바쿠닌)의 선두였다.
1807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1807-1882) 이탈리아의 장군, 애국자. 공화주의자로 이탈리아의 통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에 공헌하였다. 그는 카보우르 백작인 카밀로 벤소(1810-1861), 이탈리아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 주세페 마치니(1805-1872)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조국의 아버지" 들 중의 한 명으로 여긴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역사가, 사회학자, 경제학자, 기자, 혁명이론가. 공산주의 혁명가. Marx, Le capital, III, 7, ch 25(Pléiade, II, p. 1435)
1849 스트린트베르크(Johan August Strindberg, 1849-1912) 스웨덴 작가, 극작가, 화가. 자연주의와 표현주의 두 흐름 가운데 위치한다.
1855 크래플린(Emile Kraeplin 1855-1926) 독일 정신과의사. [Robert 2, 1987:. 그는 정신의학에 자연과학의 엄밀성을 도입하고자 애썼다. 그는 정신병(psychose)을 병이 진화하는 방식과 끝나는 단계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한편 조울증(maniaco-dépressive)이 있으며, 국면에 따라 진화과정이 있으며 치료가능하다. 다른 한편 조발성 치매(démence précoce)가 있는데, 이 병에는 긴장증(catatonie), 정신분열증(hébéphrénie)과 편집증 양상을 띤 치매[착란](démance paranoïde) 등이 있으며, 치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구별은 자주 비판을 받았다. 저작, 정신병 개론(Traité de psychose, 1883) 있다. (38NMG)]
1857 블뢸러(Eugen Bleuler 1857-1939) 스위스 정신과의사.
- 실라미(Nobert Sillamy), Dictionnaire de la psychologie, Larousse, 1991.: 그는 쮜리히(Zurich)부근의 쫄리콘(Zollikon)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조발성치매와 정신분열증 집단에 관한 연구”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정신치료학에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라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이 개념은 이제 고전적 개념이 되었다. 그에 따르면, 정신질환자는 자신들의 무차별[무관심]적인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민감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호막(외적 표현이나 외모) 뒤에 강도 있는 내적 삶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 R2 1986: 스위스 정신과의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입은 그는 정신병환자의 치료 특히,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의 치료에 이 방법의 적용법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는 이 용어를 정신병리적 상태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1911년).이 병리 상태의 본질적 징후는 실재와 접촉의 “단절(rupture, gr, schizo-)”이며 심리기능의 분열(dissociation)이다.
- schizophrénie, n.f., {1911 gr, schizo(schizein, f. fendre)- phrên(esprit)} 정신의학 용어이다. 심리의 분산으로 특징지워지는 정신병(사유와 행동의 양면성 ambivalence, 역설적 행동, 품행), 실재(현실)와 접촉의 상실, 자기에로 숨음(replie sur soi) 등을 말한다. 참조개념: 자폐증(autisme) - 애정적 정신분열(schizophrénie affective)
- schizophrènen. {1920. schizophrénie로부터 나왔다) 정신의학 용어로서 스키조프레니로 발병한 환자. (38QLI).
- * 상관어: 자폐증(autisme) - 우리는 이 개념이 왜 블뢸러에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위 로베르 사전을 참조하면, [정신분열증이 현실과 접촉의 상실에서 오는 것인데, 자폐증은 자기 중심으로 타인 또는 타자와 접촉을 거부(상실)하고 자기 혼자로 남는 경우이다. 어쩌면 사회에서 배제된 것을 느낀 자가 아닌가 한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도 오띠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6RNA)]
1872 끌레랑보(Gaëtan, Gatian de Clérambault, 1872-1934) R2 : 프랑스 의사, 색(정)광(érotomanie)을 연구하고 서술했고, 정열적인 정신병들의 틀을 구성했으며, 특히 정신적 자동주의의 주제를 정식화했다. 그는 정신적 자동주의에서 (클로랄, 에테르, 하시쉬의 중독에 관한 연구에서) 약물의 신경 흥분(irritation)의 귀결들과 감염의 신경흥분의 귀결들을 보았다. 게다가 [이런 흥분의 귀결은] 소위 망상이 접합하여 자치적이고 자동적인 관념형성(idéation)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40LLG) [약물중독이 망상을 일으켜서 자동주의를 강화하는 쪽이라고? - 그렇다면 약물중독 망상의 고착화아닌가?]
1875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프랑스 음악가. 음악에서 마멸보다 고장을 선호(39). Daphnis et Chloé
1881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 1881-1966) 스위스 정신의학자(정신과의사).
Norbert Sillamy, Dictionnaire de la psychologie, Larousse, 1991. : 1881년 크로이쯔링겐(Kreuzlingen)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966년에 죽었다. / 그는 정신의학에서 몇몇 신경증의 묘사에서, 특히 조증(manie)에서 현상학적 방법의 적용 덕분으로 수술된 회복(renouvellement opéré, 수술에 의한 변신) 때문에 유명해졌다. 프로이트의 친구였던 그는 인간을 오직 충동적 매카니즘에 환원시킬 위험이 있는 개념화 작업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후설(Husserl, 1859-1938)과 특히 하이덱거(Heidegger, 1889-1976)의 생각에 매우 영향을 입은 그는 이론, 현존재분석(Daseinsanalysis, ananlysis existentielle)이론을 세웠다. 이 이론은 앵글로색슨 국가들에서 매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의학적인 주제로서, Le Phénomene psychogalvanique dans l'experience d'association(1907), Introduction a l'analyse exitentielle(1947), Le Reve et L'Existence(1954), Discours, parours et Freud(1970) Le Cas Suzan Urban (rééd. 1988), Mélancolie et manie(1988)
1883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 철학자. 정신과 의사. 스트린트베르그와 반 고흐(Strindberg et Van Gogh, Swendenborg, Hölderlin, 1953).
1891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미국 소설가, Tropique du Cancer, 1934 “나는 흐르는 모든 것을, ... 좋아한다.” (11) La Crucifixion en rose; titre original: The Rosy Crucifixion)(3부작: Sexus (1949), Plexus (1952) et Nexus (1959).)
1891 카디너(Abram Kardiner, 1891-1981) 러시아계 유대 가정출신, 미국 정신분석가, 정신과의사, 인류학자. 문화인류학적 전망에서 미국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The Traumatic Neurosis of War, 1941
189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유대계 오스트리아-헝거리 의사,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1933년에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당했다. 덴마크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1939년 미국으로.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analyse, 1929 파시즘의 대중심리학(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 1933: Psychologie de mass du fascisme (1933) The Murder of Christ, 1953.
1898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부유한 유대계 출신.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철학자, 맑스주의 사회학자.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1941),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1964)
1901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1903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러시아 아셰키나제 유대 출신의 아들, 프랑스 철학자, 음악학자. 라벨(Ravel, 1859)
1904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스페인 국적의 카탈란 화가, 조작가, 판화가, 시나리오 작가, 작가. 비판적 편집병의 방법
1908 드브뢰(Georges Devereux, né Győrgy Dobó, 1908-1985) 유대계 헝거리 출신 프랑-미국 정신분석가, 인류학자. 인종정신분석학 창설자. 인종정신의학 일반의 시론(Essais d'ethnopsychiatrie générale, 1970
1920 클라벨(Maurice Clavel, 1920-1979) 프랑스 작가, 기자, 철학자. 누가 혼이 나갔나?(Qui est aliéné ? Critique et métaphysique sociale de l'Occident, 1970)
1921 세자르(César, César Baldaccini, 1921-1998) 프랑스 조각가. 압축들(Les Compressions)로 유명하다. 압축된 자동차들(39쪽)
1924 르끌레르(Serge Leclaire, 1924-1994) 프랑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학자. "La Réalité du désir", in Sexualité humaine, Aubier, 1970. On tue un enfant, 1975
[바라카(Everett LeRoi Jones, 필명Amiri Baraka, 1934-2014) 극작가, 소설가, 단편작가, 시인, 수필가. 1965년 맬컴 엑스가 암살된 후 바라카는 그의 부인과 2명의 자식을 떠나 할렘으로 이주하였다. 이제 흑인 문화 국민주의자가 된 그는 백인들의 비트 세대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평화주의와 인종차별 폐지의 인권 운동에서 가장 비평적 인간이 되었다. 그의 혁명적이며 이제 반유대주의(반시오니즘)적 시가 논쟁이 되고 말았다. - Amiri Baraka, LeRoi Jones(동일 인물) : NY Harlem(1968년, NY할렘에서)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 너무 익숙해지면 / 놀랍게도 /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 쇠사슬을 서로 / 자랑하기 시작한다. //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 더 무거운가 등. ‥…”]
1928 아르만(Arman, Armand Fernandez, 1928-2005) 프랑스 화가, 조각가, 조형예술가, «누적들(accumulations) »로 유명해졌다. 불탄 바이올린(39)
1939 로세(Clément Rosset, 1939-2018) 프랑스 철학자. 가장 해로운 것의 논리학(Logique du pire : éléments pour une philosophie tragique, 1971) (AO 33)
(15:25, 56SLF)
***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 본명 LeRoi Jones, 1934-2014)
- - NY Harlem(1968년, NY할렘에서)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해서 정복하여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 [(56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