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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2) - 수학여행기
우리가 고 2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체험을 적어 보려고 한다. 사춘기 시절 모두를 들뜨게 하였던 꿈의 여행을 리바이벌 해 보련다. 1971년이었으니까 금년이 2002년으로 꼭 31년이 지났다. 몇 군데 동기들에게 전화를 하였지만 기억들이 일치하지 않아 그냥 틀리더라도 쓰기로 했다. 참고 글을 삽입하여 내용이 좀 길어진 것 같은 데 시간 많은 친구들은 찬찬히 읽어보기 바란다. 고칠 부분이 있다면 답글(답장)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 상동고등학교 제 15 회 졸업예정자 수학여행 △ - 일 정 : 1971. 10. 9 - 11 ( 2박 3일 ) - 행선지 : 강릉 경포대, 설악산 일원 1일 : 상동 - 영월 - 평창 - 월정사 - 대관령 - 오죽헌 - 경포대 숙소 2일 : 경포대 - 설악동 - 비룡폭포 - 울산바위 - 비선대 - 설악동 숙소 3일 : 설악동 숙소 - 양양 낙산사 - 강릉 - 대관령 - 영월 - 상동 - 목 적 : 자연학습, 역사탐방, 심신단련, 단체활동 - 참가자 : - 인솔교사 →교감 최점숙, 교사 이태건, 이기응, 천병호 - 학 생 →약 60 명 - 교 통 : 대절버스 2 대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 8시에 문화관 앞으로 갔다. 구역별 임시승차장소로 문화관, 지서, 영림소, 학교 등으로 정하여 가까운 장소에 모여 대절버스를 나누어 탔다. 차에 오르는 표정들이 기대에 부풀어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영재와 국섭이가 아침부터 특히 낄낄거렸다. 경덕이의 입이 평소보다 배나 더 커 보였다.
차림은 남학생들은 교련복에 베레모였지만, 여학생들은 사복에 빨간 모자를 착용하였다. 남학생들은 얼룩무늬의 교련복에 검은 베레모로 통일이 되어 있었고, 여학생들은 사복 또는 등산복에 꼭지 달린 빨간 화가모자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모자가 빨간색이어서 눈에 잘 띄었다. 도시에서 자란 아가씨들처럼 보였다.
탑승은 남학생 한 차, 여학생 한 차 이렇게 분리하여 탔다. 남녀학생이 너무 친하여지면 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남녀를 구분하였다. 1호차에 최점숙, 이기응 선생님이 타시고, 2호차에 이태건, 천병국 선생님이 타셨다. 학교에 남은 선생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는 유유히 학교를 출발하였다.
하늘은 맑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10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어서 어지간히 단풍이 들어 보기 좋은 때였다. 산은 울긋불긋 모닥불처럼 타올라, 보는 이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였다. 우리는 가을의 풍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이번 수학여행이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를 빌었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희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려갔다. 차가 내덕분교를 지날 무렵 2호차에서 " 여고시절 "이 흘러나왔다. 여학생들은 셋만 모여도 입을 맞추어 노래를 한다. 그런데 그 열 배나 탔으니 목소리는 제철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가냘프지만 음이 잘 맞아 감미롭게 들려왔다. 우리 남학생들도 그냥 바라만 볼 수 없어 천우가 일어나서 리더를 했다. " 보리 밭 "을 불렀다. 굵은 목소리로 나름대로 공을 드렸다. 남학생들 노래는 끊어질 때가 더러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다음 노래가 쉬지 않고 이어져 나왔다. 그래서 우리를 주눅들게 하였다.
당시에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대략 이러하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하숙생, 고향이 좋아, 여고시절, 머나먼 고향, 아침이슬, 나는 어떡하라구,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대머리 총각, 경상도 사나이, 님은 먼 곳에, 당신의 마음, 월남의 달밤, 돌아가는 삼각지, 동숙의노래, 미워도 다시한번, 바닷가에서, 빨간 구두 아가씨, 산까치야, 산 너머 남촌에는, 서울의 찬가, 소양강 처녀, 동백아가씨, 이별, 안개낀 장충단 공원, 자주색 가방, 찻집의 고독, 그 얼굴의 햇살이, 해변의 여인 등.
그 당시 대절버스는 완행버스 수준이었다. 그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마이크시설도 안되었으니 에어콘, 오디오, 비디오, 노래방 등은 아예 이름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터덜거리는 대절버스를 타고 녹전, 수라릿재, 석항, 연하를 지나갔다. 산에는 보랏빛 들국화가 고개를 흔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영월역이 기와집처럼 우람하게 보이더니 다리를 건너며 동강의 푸른 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영월 시내를 지나갔다. 약간 도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은 장릉을 지나면서 10 m 나되는 소나무들이 신기하게도 단종 무덤을 향하여 쓰러지듯 감싸고 있었다. 차는 그 솔밭의 낮은 고개를 돌아 연당 삼거리로 갔다.
연당에서 우회전하여 평창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양 길가로 나란히 피어 우리의 여행을 반겨주는 듯하였다. 평창길은 낯설었다. 대개 영월, 제천, 원주 이런 식으로 주로 다녔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단편소설 " 메밀꽃 필 무렵 "의 작가 이효석을 배출한 평창을 지나갔다. 차는 평창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평창강은 서강으로 흘러 영월, 단양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개울에는 징검다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맑디맑은 물이 돌다리와 큰 바위 사이를 비껴 매끄럽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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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평창에 왔으니, 이효석의 " 메밀꽃 필 무렵 "을 소개한다. 봉평장의 파장 무렵, '왼손잡이'인 허 생원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서 속이 상한다. 조 선달에 이끌려 충주집을 찾는다. 거기서 나이가 어린 장돌뱅이 '동이'를 만난다. 허 생원은 대낮부터 충주집과 짓거리를 벌이는 '동이'가 몹시 밉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계집하고 농탕질이냐고 따귀를 올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나귀에 짐을 싣고 다음 장터로 떠나는데, 마침 그들이 가는 길가에는 달빛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메밀꽃의 정경에 감정이 동했음인지 허 생원은 조 선달에게 몇 번이나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한때 경기가 좋아 한밑천 두둑이 잡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노름판에서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평생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메밀꽃이 핀 여름 밤, 그날 그는 토방이 무더워 목욕을 하러 개울가로 갔다.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다. 성 서방네는 파산(破産)을 한 터여서 처녀는 신세 한탄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허 생원은 물레방앗간에서 처녀와 관계를 맺었고, 그 다음날 처녀는 빚쟁이를 피해서 줄행랑을 놓는 가족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끝에 허 생원은 '동이'가 편모(偏母)만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발을 빗디딘 허 생원은 나귀등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고 그걸 '동이'가 부축해서 업어 준다. 허 생원은 마음에 짐작되는 데가 있어 '동이'에게 물어 보니 그 어머니의 고향 역시 봉평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동이'가 자기처럼 '왼손잡이'임을 눈여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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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꽃 필 무렵 "에서 허생원이 젊은 장돌뱅이 동이와 함께 개울을 건너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실은 서로 길손이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대화 속에서 밝혀진다. 허생원이 어느 늦은 여름 메밀꽃 필 무렵에 봉평의 물레방앗간에서 동네 처녀와 밤을 보낸다. 하루 밤 달콤한 꿈으로 끝나버린 첫사랑의 불씨가 자라나 장돌뱅이가 되어 동행을 하고 있다. 동이는 모르지만 허생원은 그의 외모를 보아도 자기 자식임을 알아차린다. 한 때의 불장난이었지만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낙타등 같은 산들은 사방에 우뚝 솟아 장승처럼 마을을 지켜 주고 있었다. 곡예를 하듯 산들은 어깨를 맞대고 병풍처럼 이어졌다. 차는 진부마을에서 오대산 월정사를 향하였다. 골이 좁은 계곡을 따라 가더니 아담한 월정사에 도착하였다. 진입로와 주변에는 전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절을 지켜주었다. 그 때는 마당에 울타리가 없었다. 절 마당에서 우리는 커다란 돌 항아리를 만났다. 맑은 물이 가득하였다. 약수라고 생각하여 돌아가며 물맛을 보았다. 개울에는 열목어, 피라미, 쉬리, 치리 등의 물고기가 눈에 띄었다. 물고기는 월정사의 분위기를 말해 주듯이, 유유히 한가롭게 떠다녔다. 우리는 월정사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준비해간 도시락을 펴놓고 삼삼오오 냇가와 전나무 그늘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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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습니다. 636년 당나라로 들어간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석상(文殊菩薩石像)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 끝에 나타난 노승(老僧)은 부처님의 가사와 바루, 불사리(佛舍利)를 전해주면서, 신라 땅의 오대산이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머물러 계시는 곳임을 일러주었고, 반드시 찾아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 뒤 6년 동안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도력을 기른 자장율사가 귀국하려 하자, 오대산 태화지(太和池)에 살고 있다는 용이 나타나 6년 전에 만났던 노승이 문수보살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토록 만나기를 열망했던 문수보살, 자장율사는 귀국 즉시 홀로 오대산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임시로 초암(草庵)을 얽고 7일 동안 머물렀지만,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밀히 사리만을 모시고 하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산골에다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뒤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이곳에 머물렀고,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제자였던 두타승(頭陀僧) 신의(信義)가 자장율사가 초암을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습니다. 신의스님이 죽은 뒤 암자는 오랫동안 황폐하여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지금의 명주군 낙가사)의 장로 유연(有緣)스님이 암자를 다시 짓고 머무르면서 점차 큰 절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뒤 1377년(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而一)스님이 중창하였고, 1833년(순조 33)에 다시 불타 버리자 1844년(현종 10)에 영담(瀛潭), 정암(淨庵)스님 등이 중건하여 대찰(大刹)의 모습을 회복하였으며,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였습니다. 그러나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완전히 소각되었습니다. 특히 애석한 것은 오대산 북쪽 양양 땅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1949년에 발굴된 신라시대의 범종이 불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경주 봉덕사종보다 주조연대가 앞섰다는 귀중한 문화유물이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폐허가 된 월정사는 1964년 탄허(呑虛)스님이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을 중건한 이래 현재의 주지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오늘날의 월정사로 복원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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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와 전나무 밭을 뒤로하고 차는 대관령을 향하여 고개를 힘겹게 올라갔다. 당시에는 영동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지 않은 때였다. 차는 대관령에 힘겹게 올라섰다. 말로만 듣던 대관령에 올라와 있다. 해발 1000 미터 고지대에서 차가 멈추었다. 갑자기 누군가 " 저기, 동해바다 봐라 ! " 소리쳤다. 아마 권영식 목소리 같았다. 모두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처음 보았으므로 감격스러웠다. 강릉 시가를 넘어 동해가 길게 펼쳐졌고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았다. 눈 밝은 우리는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를 구분하려고 애를 썼다. 눈앞에 열린 장엄한 광경을 보자, 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 천하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는 착각에 빠졌다. 감추어졌던 세계를 만난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손오공이 발견한 동굴 속의 또 다른 세상 같았다.
휴식 후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 차는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차는 산굽이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사님은 대관령 아흔아옵 구비를 헤아려 보라고 하였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그 굽이를 하나, 둘, 셋 ---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삼십쯤 되었을까 ? 계수하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다음 숫자를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멀리 강릉시와 동해가 보이다가는 또 산에 가려지고, 또 보이다가 사라지고 그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 차의 고도가 낮아졌다. 뒤로는 여전히 뿌연 먼지가 차가 달린 만큼 안개처럼 날리고 있었다.
차는 오죽헌 앞에 도착하였다. 저 유명한 유학자 이율곡의 생가였다. 검고 두꺼운 기와가 지붕을 장식하였고 그 너머로 대나무 숲이 보였다. 그런데 대나무 색깔이 좀 틀렸다. 푸른 빛 속에 검은 반점이 눈에 뜨였다. 관광객 중에 누군가가 저게 " 烏竹 "이다고 말했다. 그 말은 대나무 줄기가 검다는 뜻이다. 실제 그런 나무가 있었구나 우리는 의아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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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오죽헌의 약사를 아래에 옮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의 집이었던 것을 무남독녀 이씨 부인이 상속 받았다. 이씨부인은 서울 신명화공과 결혼 다섯 딸을 두었으니 그중에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서울 이원수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이곳 친정에서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선생(1536~1584)은 이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외조모 이씨 부인이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분재기에 따라 율곡의 이종제 권처균에게 상속 되었으며, 오죽헌이란 명칭은 집주위에 오죽이 많아 권처균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1788년 율곡선생의 친필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을 건립하였다. 1961년 11월 제1회 율곡제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 매년 10월에 봉행하고 있다. 오죽헌은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10월)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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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음은 경포대를 향하였다. 입구에는 경포대호수가 보였다. 잔잔한 수면이 거울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 호수를 돌아 해송 밭 속으로 차가 들어갔다. 우리가 머무를 숙소인 서울여관은 소나무 숲 사이에 있었다. 친구들은 각각 방을 배정 받아 여장을 풀었다. 방문을 활짝 여니 동해가 탁 트이게 보였다. 태평양으로 뻗어나간 푸른 바다가 벅차게 시야에 들어왔다. 베이지색 같은 백사장이 문 앞에 바로 이어졌다. 우리는 파도가 신기하여 그것을 구경하려고 해변으로 나갔다. 파도는 하얀 물살을 몰고 다가왔다. 파도를 밟으며 우리는 매우 즐거워하였다. 맑고 푸른 바다를 만질 수 있어서 가슴이 뛰었다. 처음으로 바다와 파도를 밟아 보기 때문에 친구들은 모두 신기한 듯이 뛰어다녔다.
저녁 식사에는 해물이 나왔다. 싱싱한 해물요리가 얼큰하게 입안을 감돌았다. 주로 나물만 먹던 우리의 입맛에는 해물이 맛깔스러웠다. 식사 후 오락시간을 가졌다. 이태건 선생님은 손수 오락프로를 준비하셨다. 여관 앞 백사장에 장작불을 피웠다. 소위 켐프파이어를 즐기게 되었다. 선생님의 진행에 따라 모닥불 주변에 우리들은 원을 그리며 둘러앉았다. 그리고 교가를 시작으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수건돌리기로 술래잡기를 하였다. 술래가 되면 독창을 하였다. 감추어둔 노래가 어설프지만 밤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달빛은 유난히 밝아 머리 위에서 비추고 있었지만, 바다에도 그 환한 달이 떠있었다. 그리고 경포호수에도 그 달이 떠 보였다. 우리가 술잔을 들고 있었다면 그 위에도 저 달이 떠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인의 눈동자에서도 그 달이 보였을 것이다. 경포대에는 달이 5개라드니 바로 그 말인 것 같았다. 경포대에서 당나라 시선 이태백이 같은 시인들이 풍류를 즐겼던 그 순간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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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의 시를 한 수 소개한다. 그리고 두보가 바라 본 이백이 주태백이 된 이유를 소개한다.
정야사(靜夜思) - 이백(李白)의 시
머릿맡에 밝은 달빛 / 床前明月光, 땅에 내린 서리인가 / 疑是地上霜 고개 들어 명월(明月)을 보곤 / 擧頭望明月 다시 숙여 고향 생각 / 低頭思故鄕
( 달빛을 땅에 서리가 내린 모습으로 생각하며,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 두보(杜甫)의 시
이태백은 술 한 말에 시가 백편이라더니 장안(長安) 저자거리에 술 취해 잠들었다 천자(天子)가 불러도 꼼짝하지 않으며 이 몸은 하늘의 주선(酒仙)이라 전해주오
( 술 취한 이태백이 시를 읊다가 잠들은 모습이 주선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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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남학생들은 감추어둔 소주를 한두 잔은 하고 지금 앉아 있었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듯이 우리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도 타오르고 있었다. 남학생, 여학생이 학교에서 함께 생활은 해 왔지만, 이렇게 오락을 하며 가까이에서 어울려 보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우정적인 분위기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엄연히 친구이지만, 이성이라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경포대 불놀이의 하이라이트는 짝짓기였다. 남학생은 밖에서 돌고, 여학생들은 안에서 반대로 돌며 " 바닷가에 추억 "을 부르다가 진행자가 " 스톱 "하였을 때 마주친 짝이 " 경포대 파트너 "였다. 그 때 파트너는 이러하다. 권경찬 - 주인순, 홍종진 - 이영숙, 강상덕 - 정해옥, 이종호 - 백남옥, 홍재근 - 이화자, 신영재 - 김연숙, 이동명 - 김경자 등등. 여름밤이 아닌 가을밤에 우리는 모닥불 앞에서 그리고 환하게 달이 뜬 밤에 파트너까지 구하여 기분이 괜찮았다.
그 때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내게 들려주었다. 대식이, 상덕이, 국섭이는 경포대 해수욕장을 배회하다가 초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한 하사가 나타나 막 소리쳐 혼이 났다고 한다. 근무 중에 무슨 헛소리들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숙이, 해옥이도 해변 끝으로 가다가 해안을 지키던 군인을 만나 밤 8 시 이후 통행금지라며 주의를 받았다고 전한다.
늦은 밤에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신기해 친구들은 해변가를 서성거렸다. 그 날 여관방은 한 방에 십여명씩 투숙되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남몰래 유입된 술병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영식이, 인수, 경찬, 윤환, 국섭, 대식 등은 얼굴이 거나한 모습이었다. 이태건, 이기응 샌님들도 얼굴이 붉은 빛깔이었고,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그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불놀이의 흥이 아직도 남아, 간혹 방에서 노래 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시에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처럼 " 경포대의 잠 못 이루는 밤 "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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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송강 정 철의 관동별곡 중 강릉지방에 대한 언급을 현대어로 살펴보자. 저녁 햇살이 비껴 든 현산에 철쭉꽃을 잇달아 밟으면서 새깃으로 뚜껑을 꾸민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희고 깨끗한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호숫물이 큰 소나무 울창한 숲 속에 마냥 펼쳐졌으니, 물결이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의 모래알을 헤아릴 만하구나. 외로운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를 넘어선 곁에 큰 바다가 바로 거기로다. 조용하도다. 이 (경포의) 기상, 너르고 멀도다. 하늘과 맞닿은 저 바다(동해) 끝, 여기보다 더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과연, 고려 말 강릉 기생 홍장과 감사 박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야단스런 옛일이 있었을 만도 하다. 강릉 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기도 좋구나. 충신·효자·열녀들을 표창한 정문이 마을마다 널렸으니, 집집마다 효자·충신이 많아 천거할 인재들이 많았다던 요순 시대의 태평 성대가 지금도 있다 할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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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하늘은 맑았다. 쪽빛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바다가 신기하여 파도를 밟으러 나갔다. 아침 햇살에 하얗게 파도가 밀려 왔다. 우리는 조개껍질과 잔돌을 주웠다. 모래톱을 밝으며 뛰어 다녔다. 그리고 보트를 탔다. 보트는 앞에 보이는 오리바위, 십리바위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보트 꽁무니에서는 물결이 뿜어져 나와 길게 선을 그었다. 내 곁에는 남기숙이 앉아 있었다. 처음 타 보는 배라서 재미있으면서 또한 두려움이 생겼다. 배가 원을 그릴 때는 뒤집히지 않을까 조바심이 생겼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경포대 해수욕장은 솔밭을 뒷 배경으로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가 평화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이틀째 여정을 위해 설악산을 향하였다. 오른 쪽으로는 탁 트인 동해를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달려갔다. 백사장과 해수욕장이 연실 이어졌다. 간혹 해안 가 둔덕 위에는 우산 같은 소나무 숲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드문드문 바위섬들이 바다에 떠다녔다. 그런데 해안선을 따라 철책선이 이어지며 바다와 차도를 갈라놓았다. 그 옆으로는 자갈돌을 나란히 연결해 놓았다. 공비의 침투를 확인하려는 듯 모래밭을 골이 지게 고무래로 긁어 놓았다. 차는 연곡, 주문진, 38선, 하조대를 지나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높고 우람한 산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가파른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깍은 듯 뾰족한 바위와 절벽이 여느 산과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벌써 들었다.
차에서 내려 매표소를 통과하였다. 설악산 소공원이었다. 소공원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가파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다. 말로만 듣던 설악산 등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략 수학여행 코스는 다음과 같이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등산코스 : 1) 설악동 - 육담폭포 - 비룡폭포 (2.6㎞, 1:00소요) 2) 설악동 - 신흥사 - 계조암 - 울산바위 (3.8㎞, 2:00소요) 3) 설악동 - 비선대 - 금강굴 (3.6㎞, 1:40소요)
오전에 비룡폭포, 울산바위를 가고, 오후에는 비선대에 오르기로 일정이 잡혔다. 산은 단풍이 절정이었다. 노랑, 주황, 빨강이 주종을 이루면서 녹 푸른 소나무가 곁들여 산은 알록달록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금강산이 뛰어나다지만 설악산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일 것 같았다. 빨간 모자의 우리 여학생들을 선발로 그 뒤를 남학생들이 뒤따랐다. 비룡폭포로 가기 위해 비룡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가파른 길을 따라 갔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일반 단풍객들도 산을 오르고 있었다. 힐긋 오고가는 단풍객들을 바라보았다. 단풍도 보고 이웃 동네 사람들도 구경하고 괜찮았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좁은 길에서는 서로 도와주며 가야 하였다. 길가에는 음식점들도 있었다. 계곡길을 따라 가다니 6개의 담과 소로 되어있는 육담폭포가 나왔다. 폭포 주변은 물보라가 일었다. 좀 습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폭이 좁은 다리와 비탈길을 돌아 골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한 30분 걸려 비룡폭포에 도착하였다. 10여m 절벽 위에서 폭포가 떨어졌다. 가을이어서 물이 많지 않아 장관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래는 물이 괴여 있었다. 말대로라면 비룡폭포는 그 형상이 용이 물줄기를 타고 승천하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인 물에서 용이 올라와 승천을 하였다는 말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흩어지면서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우리는 절벽으로 둘러 싸여 있어 마치 항아리에 갇혀 있다고 느껴졌다. 다음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이번에는 울산바위를 향하여 신흥사로 갈 차례다. 설악산 소공원을 경유하여 본 계곡을 따라 올라 갔다. 물이 흐르는 하천 쪽은 둥글고 매끄러운 바위 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등산로에는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전나무, 낙엽송, 북나무 등이 산재하여 방문객들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30분 후에 설악산 본사인 신흥사에 도착하였다. 신흥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법당, 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향성사지3층석탑·사천왕상 등이 눈에 띄었다. 불교의 전성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임을 보여주었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문장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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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神興寺)는 강원 속초시 설악동 설악산에 있는 사찰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고 불렀다.
古記에 자장이 637년(선덕여왕 6) 왕명으로 唐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에 수천 칸(間)의 대 사찰이 하루 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 후 의상대사가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能仁庵)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禪定寺)라고 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연옥·혜원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논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으로 부터 神人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선정사 때 봉안된 것으로 의상이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이다. 당시 지은 법당·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한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3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靑銅)시루와 범종(梵鐘), 경판(經板) 227장,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신흥사의 입구는 거구의 사천왕상 조각상이 좌우 네 구가 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보통 검(劍)을 든 지국천왕, 비파(琵琶)를 든 다문천왕, 탑(塔)을 든 광목천왕, 용(龍)을 든 증장천왕 등, 지물(들고 있는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천왕상은 이곳 신흥사뿐만 아니라 경남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상, 경남 경주 석굴암의 석조 사천왕상이 유명하다.
신흥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목조기와 집이 있는데 절에서 운영하는 전통 찻집이다. 그곳을 바로 지나면 거대한 청동좌불상이 있는데 높이가 10여m 나 되는 청동좌불상으로 화강암으로 축대를 축조하고 조성한 넓은 화강암 위에 조성되었다.
불상의 모습은 보통의 불상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하대석은 복련을 새기고 그 위에 중대석을 올리고 안상을 조각했으며 상대석에는 앙련을 새기고 그 위에 불상을 앉혔다. 불상은 납의를 걸치고 나발은 육계로 되어 있으며 광배는 타오르는 불꽃을 조각해 놓았다. 또 불상 앞에는 청동 제단과 촛대 상자와 향로를 갖추고, 오르는 층계 좌우에는 청동등과 사자상이 있는데 모든 것이 크게 만들어져 있다.
불상을 지나 우측으로 돌아가면 계곡을 건너는 화강암 현수교가 새로 만들어졌고 다리를 건너면 엄청난 돌로 쌓은 돌담 한 곁에 천왕문이 나 있어 절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담을 따라 올라가면 울산바위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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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로 가는 길은 각이 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완만한 길이었지만, 길이 일어나 경사가 졌다. 다리에 힘이 들었고 숨이 찼다. 10분 후에 계조암에 도착하였다. 암자가 큰 바위 속에 있었다. 특이한 경우가 될 것 같다. 잠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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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조암은 설악산 울산바위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흔들바위가 나오는데 바로 그 뒤쪽의 커다란 바위에 조그만 암자가 있다. 바위 속에 법당을 마련했는데, 바닥엔 온돌까지 놓여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수도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데, 그 뒤 원효·의상·지각·봉정 등 여러 조사(祖師)들이 대를 물려 수도하였다고 하여 이름이 계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조암이 들어앉은 바위가 목탁 바위인데이 암자는 목탁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다른 절에서 10년 걸릴 공부도 5년이면 끝낼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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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조암 앞으로 그 유명한 흔들바위가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흔들바위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인수가 " 흔들바위 봐라 ! "소리쳤다. 우리는 차례를 기다려 받침돌 위로 올라가 보았다. 가만가만 흔들바위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일렁일렁하며 그 바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병찬이가 말했다. " 우리 흔들바위 떨어뜨리자 ! " 모두가 " 그래, 그렇게 하자 ! "고 했다. 그래서 계속 흔들었다. 우리의 작정은 탄력을 이용하면 언젠가는 떨어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열 명쯤 붙어서 일렁거렸지만 바닥이 맞닫는 한계에 와서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녀갔을 것이다. 흔들바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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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는 일명 쇠뿔바위(또는 우각암)라고도 하며 한 사람이 흔드나 여러 사람이 흔드나 똑같이 흔들리기 때문에 설악산 팔기(八奇) 가운데 하나다. 설악산을 찾아 울산바위나 계조암에 오르는 사람은 꼭 한번씩 들러 이 바위를 흔들어 보고 내려간다. 바위의 크기는 사람의 키보다 조금 더 크고 네댓 사람이 팔을 벌려 감싸안을 수 있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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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를 뒤로하고 울산바위로 갔다. 울산바위는 말대로 산 하나가 거대한 바위 돌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장엄함에 놀랐다. 어떻게 산 위에 이 큰 바위가 존재하게 되었을까(?)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울산바위는 둥근 바위로 일반 관광객이 오를 수 있도록 철 계단이 꼭대기까지 설치되었다. 우리는 이어지는 줄을 따라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계단에 오르고 내리는 등산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 큰 바위 암벽에 누가 이렇게 공들여 철 계단을 설치하였을까(?) 고마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위로 오를수록 공포감이 들었다. 여학생들은 무서워하며 남학생들의 써빙을 받고 싶어했다. 매너 좋은 정욱이가 연숙이를 부추켜 주고 있었다.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동해 바다와 속초시가가 산 너머로 보였다. 그러더니 울산바위 정상에 올랐다. 김성숙이 " 저기 속초 좀 봐라 ! "소리치며 손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 보았다. 속초시가지와 동해가 눈에 들어왔다. 정상은 둥글게 철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사방이 넓게 트였다. 바위 너머로는 미시령이 보였다. 권금성, 대청봉 등도 남쪽으로 눈에 띄였다. 그리고 온통 산들은 단풍이 짙게 물들어, 정교하게 수를 놓은 듯 화려해 보였다. 울산바위 정상에 서있는 우리는 마치 설악산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주위를 자신감에 넘쳐 바라보았다. 경이로운 울산바위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잠시 소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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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가장 멋진 암괴가 설악산 울산바위이다. 울산바위로 오르는 길은 설악동 소공원의 신흥사 옆으로 나있고 중간에 흔들바위가 있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도 보이고 외설악 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소공원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 왕복하는데는 서너 시간이 소요된다.
해발 873m의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km이며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울산바위의 명칭은 3 가지설이 있는데 하나는 울타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과 경남 울산의 지명을 딴 전설적인 이름, 또 하나는 우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등이 있다. 울산바위 허리에 구름이 휘감기면 흡사 구름 꽃송이가 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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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계단을 한 칸씩 밟으며 울산바위를 내려왔다. 등산객들로 붐벼 실제 시간보다 더디었다. 다시 신흥사로 와, 절 주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경포대의 서울여관에서 준비해준 도시락이었다. 나무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였다.
이 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용기, 승태, 종덕(3명)이 나타났다. 그 친구들은 당초에 수학여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 별도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설악산까지 남몰래 온 것 같았다. 그랬다가 우리 주부대를 만난 것이다. 이태건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으며 우리와 합류하였다. 그 후 함께 남은 일정에 따라 동행을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가끔 엉뚱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오후에는 비선대를 향하였다. 연실 오고가는 관광객들과 수학여행학생들로 길이 분주하였다. 설악산의 주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도중에 노점상들이 군것질거리를 팔았다. 그리고 기념품도 눈에 띄었다. 힘들고 땀이 났으므로 우리는 음료와 번데기를 사 먹었다. 힘을 얻어 다시 계곡을 따라 차근차근 걸어 올라갔다.
30분 후 비선대에 도착하였다. 넓은 바위가 바닥을 덮었다. 그 위로 물이 흘렀고 또 웅덩이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종착역처럼 비선대에 모였다. 우리 뒤에 올라온 검은 교복차림의 남학생들이 서울기계공고생들이었다. 수적으로 많은 그 남학생들이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남자학교였고 우리는 남녀공학이라서 비교가 되는 모양이다. 남학생들은 교련복에 베레모를 썻고, 여학생들은 사복에 빨간 모자를 착용하여 돋보였던 것 같다. 특히 여행생들 차림이 내게는 괜스레 자랑스러웠다. 마치 주목을 받던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게다가 이태건 선생님이 마련한 단체놀이는 남녀 학생들이 섞여 하는 풍선 터트리기였다. 그 시절 남녀학생들이 함께 오락게임을 하고 있다니, 타교 학생들에게는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때 게임에서 최후까지 남았던 친구는 인순과 남옥이었다. 결승은 인순이의 체력이 약한 남옥이를 눌러 승자가 되었다. 인순이의 표정은 개선장군처럼 빛나 보였다. 비선대에 모였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이 되어, 우리는 마치 창경원의 원숭이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서울기계공고 남학생 하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 발을 헛디뎌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금강굴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갔다. 급경사여서 매우 힘이 들었고 또 발을 헛디디면 굴러 떨어질 것 같아 위험도 하였다. 체력과 담력이 요구되었다. 좁은 길을 따라 사투 끝에 금강굴에 도착하였다. 굴은 한 5 m 밖에 안되었다. 작은 부처와 촛불이 켜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금강굴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절경이었다. 낭떨어지 같은 가파른 바위층과 사이사이 단풍이 곱게 어우러져 풍광을 더했다. 신선이 따로 없이 금강굴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며 하루해를 보내면 신선이 곧 될 것 같았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비선대에서 화려했던 " 원숭이 가족 " 같은 분위기를 뒤로하고, 구경꾼들 속을 헤집고 나와 하산을 하였다. 가을의 태양이 이미 높은 대청봉을 너머 갔다. 주변이 서서히 산그늘로 들어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계곡에는 찬 공기가 휘돌면서 냉기가 주위에 내려앉았다. 설악계곡이 저녁 무렵이라 잠잠해 지면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고산지대 새들도 낮게 뜨면서 숲 속으로 찾아 들었다. 뾰족한 설악의 영봉들이 아련히 저녁 하늘을 지켜 주었다. 푸르고 맑았던 하늘도 쪽빛바다처럼 짙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져서 간신히 설악동 여관에 도착하였다. 큰 길 가에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여관에는 이미 단체손님들이 들어와 있었다. 예술대학생들이 이층집으로 되어 있는 객실을 거의 차지하였다. 우리는 인원이 작아 여분의 방들을 배정 받았다. 이층 방이었다. 등산으로 지쳐 시장하였지만 저녁식사가 미리 준비되지 않았다. 식사가 준비될 동안 우리는 세면을 하였다. 식당은 지하에 있었다. 목로주점처럼 긴 목재 식탁과 긴 목재 의자였다. 대충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는 자유시간이었다. 우리는 기념품상점을 맴돌았다. 그 당시 우리들 분위기는 수학여행을 가서 관광지에서 " 한 건하기 "가 운동처럼 팽배해 있었다. 한 건하면 서로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였다. 마치 영웅이 된 양 뽐내었다. 작전은 이러 하였다. 여럿이 상점에 들어가 기념품을 사면서 기회를 잡아 물건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때 " 설악산 사진첩 "을 슬쩍 들고 나왔다. 불로소득이어서 기분이 통쾌하였다. 자신의 실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자만하였다. 우리는 방에 돌아와 그 날 소득을 자랑하였다. 웃기는 짓(?)이었는데도 ---
자유시간 후 다시 지하식당에 모였다. 오락 게임을 위해서였다. 이태건 선생님을 비롯 인솔선생님들은 그 때 술기가 있었다. 여관 측으로부터 특별 식사대접을 받으신 것 같았다. 식당에서는 긴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해 놓고, 그 주위를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 5 명 ! "하면 5 명만 짝이 되어 앉으면 된다. 짝이 없으면 탈락된다. 탈락자는 벌로 노래를 하였다. 남녀학생이 어울려 게임을 이렇게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흥미진진하였다. 술래가 되지 않으려고 의자에 히프를 밀고 들어갔다. 아마도 남녀학생들이 생사가 걸린 게임이라서 히프를 서로 막 밀어댔다. 그 때 살아남은 히프는 주인순, 김옥자, 이화자, 남숙희, 방춘애, 이성옥, 권순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히프가 작은 준삼, 양옥, 기숙, 영자, 영숙 등은 밀릴 수 밖에 - . 그 게임이 끝나자 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 여관 안마당에서는 대학생들이 불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닥불 주변을 돌며 남녀 대학생들이 재미있는 게임을 하였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학생들이 되면 " 저렇게 노는 거구나 ! "하고 존경 어린 눈치로 바라보았다. 그 후 방으로 돌아왔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우리는 숨겨 들여온 술을 마셨다. 아마도 고량주를 마셨던 것 같다. 어지간히 취하여 우리(4명)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열을 견딜 수 없었다. 거기서 국섭이는 우리에게 춤을 지도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설악산에서의 하루 밤도 밤을 잊은 듯 지나갔다.
수학여행 셋째 날이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집을 나와 이틀 밤을 밖에서 보냈다. 불과 두 시간은 잤을까 아침이 되어 기상, 세면, 식사를 순식간에 마치고 차에 올랐다. 여전히 맑은 하늘이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차는 설악산을 빠져나갔다. 30분 후 양양 낙산사에 도착하였다. 푸른 동해를 눈앞에 두고 낙산사는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화단에는 국화를 비롯 다양한 꽃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경내외를 둘러보았다. 특히 의상대는 바로 바다를 접하여 멋진 해송과 함께 풍광이 뛰어났다. 탁트인 바다를 직접 볼 수 있어 전망이 좋았다. 달력 사진으로만 보던 의상대에 우리가 와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친구들은 사진 촬영에 열을 올렸다. 잠시 낙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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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의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서 대한 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末寺이다.
낙산사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의 자리이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관음상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하고 이곳으로부터 약 8 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 왔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낙산사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하며,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국사가 중건을 하였으며 이를 비롯하여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3년에 다시 창건한 것이다. 이 절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 및 홍예문(虹霓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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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산사를 둘러본 후 동해를 좌로 하고 강릉을 향하였다. 양양을 지나자 남대천을 따라 차가 달렸다. 매년 10월이면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이다. 연어는 원래 남대천에서 부화되어 모천을 떠나 알레스카 앞 바다인 벨링해로 가서 성장기를 보낸다. 3 년동안 자라나면 회귀본능에 따라 알을 낳기 위해 남대천을 다시 찾아온다. 모천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으면 생을 마친다. 이 때를 기다려 어민들은 연어를 건져 소득을 올린다. 연어는 3 년이 되어 모천으로 오지만, 우리는 3 일만에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다. 자연은 이미 정하여 진 법칙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원래 그가 태어났거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젊어서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결국 노년에는 고향을 찾아온다. 철새들도 결국에는 그들의 고향을 찾아간다. 만물은 처음 시작했던 자리가 가장 안전한 곳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원점은 결국 종점이 된다는 말이다.
차는 남대천을 지나 다시 동해를 끼고 하조대, 38 선, 주문진 그리고 강릉으로 왔다. 강릉에서는 잘 익은 감을 파는 행상인들이 많았다. 잠시 창 너머로 감을 사서 감맛을 즐겼다. 농촌마을 담장 위로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탐스러워 보였다. 이제 차는 다시 대관령을 올라가고 있었다. 차안은 조용하였다. 이틀 전 대관령을 넘어올 때는 동해를 보며 떠들썩하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내가 조용하였다. 수면 부족으로 다들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예 노래 소리는 들어가 버렸다. 창 밖으로는 차가 달리는 만큼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지나온 마을들은 먼지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운전사의 눈빛은 전방을 향하여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71년 고 2 때 우리를 들뜨게 하였던 수학여행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기억과 상상 속에서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으로 긴 여운을 남길 뿐이다. 지금도 그 푸른 경포대 앞 바다와 백사장을 거닐 던 친구들의 모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특히, 여학생들의 그 신기한 빨간 모자가 --- ? - 이제 그만 꿈에서 깨야 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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