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예수도 만나기만 하면 시비붙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두가이들입니다. 예수를 모함하고, 백성들을 선동해 고발했습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의 길, 골고타 언덕을 올라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
바리사이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쁘고, 수백 개의 조문에 얽혀 있는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대신해서 율법과 정결례를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을 직업으로 했던 이들이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종교인들입니다.
반면 율법학자들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아온 10가지 계명을 613개로 확장했습니다. “하라”는 긍정의 형태로 된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의 형태로 된 금지 계명 365개를 만들어 그 법을 해석하고, 확장하면서 법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놓고 있는 검사,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등이 바로 율법학자들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로 ‘산헤드린(의회)’에서는 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금의 입법 국회의원들이나 행정부의 총리, 행안부장관, 법무부 장관 등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언제나 문제
율법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이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욕망을 위해 쓰일 때 항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김남국의 욕망을 질타하며 자신들의 더러운 탐욕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권력 안에 있는 권영세의 탐욕은 쓰지도, 말하지도 않고 외면했습니다. 대장동에서 돈을 받아먹은 사실이 여기저기 드러나도, 언론에서 욕먹고 있는 사람은 이재명입니다. 업적이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대통령 경선 때부터 시작된 마타도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50억 클럽의 주인공들은 모두 언론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씨가 은행 잔고를 위조하여 부당한 이익을 실현한 죄의 대가로 법정구속 되었습니다.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1년이라는 선고는 이전에 정경심 교수를 표창장 위조 혐의로 4년 동안 옥살이를 시킨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형량입니다.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통정매매는 수사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이는 300번이 넘게 압수수색을 했어도, 공범들은 모두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갔어도 ‘대통령 부인’은 성역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회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라 욕했습니다. 멱살을 잡았습니다.
바리사이들, 오늘날 종교인들은 더 큰 문제
바리사이들은 오늘날의 종교인들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통령 집무실과 공관을 이전하는데, 천공인지 백모 교수인지 도술과 풍수지리에 능통하다는 사람들이 입도마에 올라옵니다. 누군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한 나라의 정교한 ‘콘트롤타워’를 이전하는데 왜 무속이나 도술, 풍수지리에 기대어 결정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온갖 사이비 종교인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고, 기성종교와 교구, 교단의 책임자들은 입을 ‘앙’ 다물고 있습니다. 오히려 변방에 있던 사제들과 승려들,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윤석열 퇴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갔던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앞 상인들에게 휘두르고, 성전에서 환전하고 장사하던 이들의 가판을 둘러 엎어버렸습니다. 예수는 분노했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입니다. 성전은 더이상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성직자들과 기득권 세력들의 이익 실현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가톨릭교회 안에는 약자들의 연대가 많이 있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자회, 가톨릭청년회, 가톨릭대학생회, 천주교도시빈민회 등 그런데 요즈음 이런 단체들은 모두 유명무실해지고, 가톨릭법조인회, 가톨릭의사회, 가톨릭한의사회, 가톨릭교수회, 가톨릭국회의원회 등 힘 있는 기득권들의 카르텔이 번성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들고, 제도 종교에서 벗어난 민중들이 사이비 종교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성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며 발언하고, 풍자와 해학을 재치있게 하던 신부는 정직을 시켜 산속에서 신음하게 하며, 온갖 교회 재산과 형제들의 재물을 훔치고 빼돌리는 성직자들은 휴양이라는 솜방망이 처벌로 은폐하고 도주로를 열어주는 윗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이권카르텔’의 전문가
오늘날의 사두가이들은 누구입니까? 권력에 빌붙어 꿀을 빨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물었던 이상민 행안부장관 탄핵이 결국, 기각되었습니다. 이로써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져야 마땅했던 서울시장, 용산구청장을 비롯하여 책임 있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곳에 갔었던 사람들의 책임으로 문제는 종결되는듯합니다. 대통령 부인 일가가 가진 땅으로 서울-양평고속도로 종점을 이유 없이 옮기면서, 국민저항에 당면하니, ‘사업 전면 백지화’를 선언하는 치기 어린 국토부 장관은 권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구차한 변명과 궤변으로 국민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수해로 오송 지하차도에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는 ‘이권 카르텔’이 문제입니다. ‘이권 카르텔’의 보조금을 환수해서 수해 재난 지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맥락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살짝 비켜서며 갈라치고, 국민 간 싸움으로 몰아가며 정작 자신들은 슬쩍 빠져나갑니다. 아주 교묘하고 교활합니다. 국민이 수해로 재난 상황을 맞이하며 피눈물을 흘리는데,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서 심각하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고 혀를 차고 있는 대통령을 바라봅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지금 문제가 되는 카르텔은 법조 카르텔 아닙니까? ‘법’ 하는 자들이 담합을 해서 대장동을 말아 먹은 것 아닙니까? ‘법’ 하는 자들이 이권을 위해 사방팔방에서 카르텔을 주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약자들의 조합은 ‘연대(solidarity)’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보장된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이며 세계만민 노동자들의 권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면 끝날 줄 알았던 대사제와 율법학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그다음에 벌어진 믿기 어려운 일들을 도무지 막아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의 생을 가로막았던 무덤 앞 커다란 바위가 밀려 나갔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수천수만, 수백 만의 작은 예수가 부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이어 살아가며, 정의와 평화, 사랑과 평등,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통해 공명하는 선하고 작은 예수들, 작은 부처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절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교회로, 세상을 사찰로, 아스팔트 길 위에 제단을 만들고, 촛불을 밝혀 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촛불집회를 통해 하느님의 선하심과 공정하심을 외치고 있습니다. 참된 종교인들은 세상의 어둠을 모른척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고통받고 있는 억울한 민중들과 함께하며 작은 예수로 작은 부처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C.G.융의 ‘분석심리학’을 통한 인간 마음 치료의 시작은 ‘기억’하는 일이다. 즉,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작업이 치료의 시작이다. 그 다음은 내담자가 말하게 한다. 자신의 기억을 말하게 하고, 상담자는 그 기억이 만든 불안과 분노, 그리고 우울을 안전하게 표현하도록 돕는다. 과거의 불편한 기억들은 내담자와 그 가까운 이들이 ‘지금 여기’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게 하며 장애(disorder)를 만들고, 때로는 지옥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미래’마저도 절망으로 만들어 살아갈 의미와 가치를 숨겨버린다. 그래서 치료해야 한다.
치료의 핵심은 ‘재해석’이다. 과거의 불운했던,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그러나 이미 지나간, 변경할 수 없는, 변화시킬 수 없는 사건들을 다시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온전히 ‘지금 여기’를 살면서, 다가올 ‘다음 저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치료하고 치유한다. ‘치료’는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치유’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다.
어디가 성전(聖殿)인가?
한 사람 삶의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역동은 민족, 국가, 공동체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우리가 끊임없이 역사를 돌이키는 이유는, 그 역사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역사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 수 있는 마음 ‘의식’을 통해 자각하는 ‘부조리’한 상황과 상태 안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 ‘천벌과 지옥’, ‘영생과 천국’ 등을 팔아먹는 부정직한 종교적 희망을 통한 비약이나,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삶을 종결하는 것은 지혜로운 해결책이 아니다.
세상과 인간의 부조리는 우리가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조리와 투쟁하는 의식의 공간은 ‘광야’이며 ‘성전(聖殿)’이다. ‘광야’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사유하고, 깨달음을 얻으려 몸부림친다. 선한 영향력을 펼쳐내기 위한 작은 ‘떨림’과 ‘울림’의 진동이 성전에서 꼬물꼬물 흘러나온다. 성전은 근사하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한복판이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모여들어 촛불을 밝히는 이들은 아스팔트 거리를 성전으로 거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록한다. 영상으로, 사진으로, 글로, 말로 역사를 저장하고 있다. 제단 위에는 갈수록 많은 촛불이 타오른다. “로마가 불타는 동안에도 수도원 안에서 영원을 찾으려고 애쓰던 수도승”을 연상했던 제프리 바라클로프를 돌이키며, 대한민국이 불타고 무너지는 동안에도 성당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찰 안에서 ‘사랑과 희생’, ‘해탈과 열반’이라는 고상한 말들을 꿰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기억, 세월호에 대한 기억,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기억,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 일제 강점기에 대한 기억 등은 고스란히 우리의 유전자 안에 기록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그 기억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부조리들과 불의들이 현실 세계에서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속 깊은 물음을 던져놓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치권력을 통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들이 심각한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소위 ‘뉴라이트’라 불리는 궤변론자들의 주장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역사학자 주진오는 장 세노의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번역하면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깊어 갈수록, ‘역사에 대한 깊은 갈망’은 솟아오르고, 부정직한 왜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적 행동이 요구된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의 시작이다. 지난 역사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했던 독일은 서서히 그들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졌고 치유되어, 동서독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이제 유럽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반면, 끊임없이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은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태평양으로 핵폐기 오염수를 방류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고, 또다시 지구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떠넘기려 전쟁범죄 이상의 끔찍한 지구파괴라는 환경범죄를 기획하며 전 세계의 비난을 받고 있다. 역사를 지우려는 뉴라이트의 노력으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해군 일제 전범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있어서도 죄를 지은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니라, 국내 재단이 국내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공식 발표했다. 후쿠시마에서조차 어민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일본 정부가 애를 쓰고 있다는데, 정작 우리나라 어민들의 정당하고 당연한 분노는 ‘괴담’이 되어버렸다. 해양 생물학자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학문적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그는 '괴담 유포자'가 되어 고발되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는 미래의 문을 열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된다. 미래가 없는 과거는 지배자들의 것이다. 그러한 과거는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며, 또 다른 장애(disorder)와 피해를 양산한다. 역사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소환하는 것은 치료를 위한 전제이며, 미래를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상상(想像)을 일상(日常)으로
지금 우리는 정권을 교체하는 것 이상의 상상(想像)을 일상(日常)으로 가져와야 한다. 희망과 대안이 적절하지 못하니 민중은 방향을 잡고 싸움에 투신할 수 없게 된다. 자극적인 선동이나 일회적이고 단기적인 방편이 아니라, 대의와 명분을 바로 세우고, 미래를 향한 위대한 비전과 방향을 줄 수 있는 리더를 세워야 한다. 보스와 리더는 엄연히 구별된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하지만, 리더는 앞에서 이끈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하지만, 리더는 “가자!”라고 말한다. 보스는 겁을 주며 복종을 요구하지만, 리더는 희망으로 힘을 끌어낸다. 보스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지만, 리더는 대화하고 타협한다. 보스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쉽게 번복하고 부인하지만, 리더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 우리는 지금 어리석은 보스를 뽑았고, 리더를 할 수 있는 자들은 줄줄이 우리 곁을 떠나갔거나,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여있거나, ‘젊잖은(젊지않은)’ 언론들의 횡포에 초죽임을 당한 상황이다.
발악(發惡)하는 자에게는 발선(發善)으로
전주, 서울, 마산, 수원, 광주, 춘천, 의정부, 인천, 원주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원주 시국미사 성명서의 마지막 부분의 울림이 크다.
“슬프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꿈. 너만 목숨이 있다더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들, 물속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것들도 제각각 귀한 목숨을 가졌으니 다 같이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이루자는 아름다운 꿈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사람이 사람답기란 이토록 힘든 일일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비극과 몰락의 시간 속에 환희와 영광의 때를 간직하는 무덤의 비밀을. 발악(發惡)하는 자에게는 발선(發善)으로 맞서자. 사랑은 지치는 법이 없다. 꺾이지 않는 사랑을 나누어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