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魔)의 하늘 아래
둘레가 십 리에 달하는 거대무쌍(巨大無雙)한 성(城)이 있다.
마화성(魔花城).
장동(長冬)인데에도 성 주위에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었다.
화향이 감도는 거대한 성의 주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오락가락했다.
하나같이 무복을 걸친 사람들, 눈에서 야망의 빛을 발하고 있는 무사들은 지금 등 뒤에서 검(劍)을 길게 끌어내고 있었다.
"대총수(大總帥), 천천세(千千歲)!"
"속하들, 대총수께서 하사하신 휴가를 반납하고 밤을 새워 팔만사천(八萬四千) 검진(劍陣)을 연마했습니다. 하오경, 속하들의 군검무(群劍舞)를 보시며 즐겨 주십시오!"
"와아아! 대총수를 위해 검을……!"
차앙- 창-!
수천 자루의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온다.
일사불란한 발검(發劍)!
잘 갈린 날(刃)은 작살처럼 떨어져 내리는 눈보라를 갈랐고, 검의 예기(銳氣)는 거대한 성의 문 앞을 번쩍번쩍 빛나게 했다.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팔천 검사(八千劍士)들!
무사들은 백석도(白石道) 좌우를 뒤덮고 있다.
이들은 여섯 종류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격전을 치를 때 행동하기 편하게 몸에 맞게 만들어진 무복들인데, 모양은 모두 같고 빛이 각기 달랐다.
흑(黑), 제일위검대(第一衛劍隊).
백(白), 제이비검대(第二秘劍隊).
황(黃), 제삼천병검대(第三天兵劍隊).
적(赤), 제사비천검대(第四飛天劍隊).
녹(綠), 제오나찰검대(第五羅刹劍隊).
자(紫), 제육해검대(第五海劍隊)…….
열반(列班)한 고수들 사이.
"하하… 나 때문에 이리들 고생이로군! 다음부터는 내가 나타나도 발검지례(發劍之禮)를 하지 않아도 되네!"
웃음소리가 들리며 신형 하나가 나타났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성문을 향해 다가서는 회의청년.
봉황(鳳凰)의 눈과, 태산 같은 콧날!
나이는 이십 세 정도인데, 남이 흉내 내지 못할 신기(神氣)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마무정, 그는 새벽녘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단신으로 천도봉 위에 갔다가 지금 마화성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무정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 안으로 들어섰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총수! 대총수께서 너무도 자유분방하신 탓에 수하제자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제가 지나가는데도 입가에 웃음을 짓는 자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천하의 마박사 앞에서 웃다니? 이백 년 전이었다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요."
마박사 후백, 그는 마무정이 성 안으로 들어서기를 한 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다가는 마무정이 다가서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그는 전 마도제일의 세력인 마화성의 제자들이 마무정으로 인해 타락한다고 늘 걱정하는 상태였다.
그는 마화성의 군사(軍師), 그는 제자들의 예법과 의전을 담당한다.
"속하 마박사는 제자들이 대총수를 신(神)으로 섬기지 않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난밤을 새워 다섯 가지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립하며 뒤따랐다.
마무정은 평상적인 걸음으로 자신의 거소를 향해 갔고, 마박사는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컬어 철혈오칙(鐵血五則)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해 보시오. 재미있겠구려."
"재미를 따지시면 아니 되십니다. 대총수는 위엄과 신위를 따지셔야만 합니다!"
마박사는 정색을 한다.
그는 법도에 있어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하들이 마무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늘 걱정하다가 간밤에 묘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무정은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훗훗… 사실, 휘하제자 중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 짜증이 나던 참이었소. 마박사의 충고를 들어 법을 고쳐서라도 그를 다스려, 항차 그가 나를 겁내게 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이라면 대총수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아니 되며, 감히 대총수의 얼굴을 쳐다봐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마박사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걸어다니는 서재(步書齋), 그의 눈썹은 전과 같이 탐스러웠다.
마무정을 지혜에서 능가하겠다고 맹세하며 한쪽 눈썹을 밀었던 마박사는 고서를 천 권 섭렵하며 다시 눈썹을 기른 것이다.
철혈오칙(鐵血五則)!
마박사 후백이 내세운 다섯 가지 법은 이러했다.
첫째, 전 제자는 위계질서(位階秩序)를 숭상해야 하고 이후부터는 철혈오칙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만 한다.
둘째, 전 제자는 언행에 배전의 조심을 해야 하며 대총수가 나타나시면 즉시 오체투지를 해야 한다.
셋째, 연장자나 상위자의 명은 바로 하늘이며 그것을 거역하는 자는 즉시 죽는다.
넷째, 대총수의 존귀하신 얼굴을 감히 쳐다보는 자는 눈을 뽑는다.
다섯째, 대총수의 이름을 더러운 입에 올려 마구 말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
마박사는 다섯 가지 철혈의 법을 말한 다음, 마무정을 봤다.
마무정도 그를 보고 있었다.
"좋소. 정말 좋은 규칙이오!"
"물론입지요."
마박사가 득의해 하였다.
"지금 그 법에 저촉되어야 할 자가 하나 있소!"
"누구인지요?"
"훗훗… 마박사!"
"흐으으… 윽!"
마박사는 기겁을 하며 입을 딱 벌렸다.
마무정은 자지러지는 마박사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한다.
직후, 그는 뿌연 안개로 화해 대전(大殿) 안으로 사라졌고 마박사는 볼을 실룩실룩하다가 중얼거렸다.
"수하들이 대총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존경하는 이유를 이제 알 만하다!"
정오경, 대총수가 주도하는 대회의가 최초로 거행되었다.
본시 대회의에는 십 장로(十長老)가 모두 모여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모인 사람은 여섯에 불과했다.
마병야(魔兵爺) 호연굉(胡延宏),
마박사(魔博士) 후백(侯伯),
천마탁탑(天魔托塔) 흑강(黑剛),
비천연(飛天燕) 백수란(白水蘭),
화야(花爺) 소몽몽(蘇夢夢),
사해황(四海皇) 탁수룡(卓水龍).
여섯 명은 의자에 앉았고, 마무정은 그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단상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잔풍 검비군(劍飛君)이 천뢰전룡검(天雷戰龍劍)을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마도총사회(魔道總師會)!
이 회의는 그야말로 전 마가의 운명을 좌우할 회의였다.
본시 이 자리는 살기로 누벼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화기애애했다.
미소는 전염성을 띤 듯, 마무정의 신묘한 미소는 육 장로들의 입가에도 드리워졌다.
마무정은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심(幽深)한 눈빛!
어쩌면 그러한 눈빛이야말로 가장 전율스러운 눈빛일 것이다.
"강호에 나가 살펴본 결과, 현재 가짜 마가조직은 전 백도와의 결전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마무정은 취의청 안에 눈길을 두지 않았다. 그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무화과 나뭇가지 위로 서설(瑞雪)이 내리고 있다.
마무정은 눈길을 나뭇가지에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마 대 정(魔對正)의 결전은 봄이 되기 이전에 천하 도처에서 벌어질 것이오."
육 장로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무정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절대마가의 하늘(天), 그의 뱃심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
"내게는 개인적인 일이 있고, 공적인 일이 있소. 그 중 중요한 것은 물론, 공적인 일이오. 나는 대총수가 해야 할 일에 헌신할 것이오."
"으음……!"
"아아……."
"나는 여러분을 믿고 있소. 여러분들의 손 아래 천년대업이 이루어지기를 나는 바라고 있소! 하지만……!"
마무정의 목소리가 고조된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천천히 취의청 안으로 돌려졌다.
그의 눈빛은 뜨겁지 않았다. 마치 비수(匕首)처럼, 그는 눈빛으로 여섯 장로의 가슴을 가르고 있었다.
'눈이 빠지는 듯하다.'
'저분의 내공은 일신우일신(日新又一新)이다.'
'저분의 눈빛을 대할 때마다 전율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저분이 신기(神氣)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사람은 일순, 석상처럼 뻣뻣해졌다.
그리고 마무정의 목소리는 느릿느릿 이어졌다.
"나는… 천하가 피로 씻기는 것을 바라지 않소."
"혈세(血洗)를 바라지 않다니요?"
마박사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훗훗… 병법 중 이런 것이 있소. 가장 뛰어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
"으음……!"
"나는 며칠 간 번뇌하다가 내 나름대로 마음을 정했소. 그것이 무엇인지는 차차 알 것이오. 나는 제장로(諸長老)들이 나를 따르기를 바라고 있소. 만에 하나, 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가차없이 그를 벨 것이오!"
철검이 휘둘러지는 듯 강인한 어조였다.
많은 말은 아니나, 한 자 한 자 심금을 끊는 그런 말이었다.
"그 이전,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밝히겠소. 그것은… 이후, 나의 의사에서 벗어나는 짓을 할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서 나의 휘하에서 떠나라는 것이오!"
"예에?"
"그,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이 흠칫흠칫 놀랐다.
"나는… 반골(反骨) 기질이 강한 녀석이오. 즉, 나는 영웅(英雄)이기보다 소인(小人)에 가까운 자란 말이오."
"어, 어이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속하들은 자의로 대총수를 선택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었으니, 속하들을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사람들의 목소리가 잇따라 고조되었다.
마(魔)이기 이전에 인(人), 그리고 마무정과 이들 사이에는 마가의 법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어떠한 끌림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나의 말뜻을 모를 것이오. 아마도……!"
마무정은 말을 맺지 않았다. 그는 번뇌가 심한 듯 인상을 가볍게 찡그리며 신형을 틀었다.
그는 아주 느릿느릿 문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숙연한 기분에 휘감겨 말도 하지 못했다.
마무정은 문을 지나 눈 내리는 정원에 이른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기에……!"
그는 가벼운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십여 보 갔을까?
평소에는 말이 없던 잔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대총수께 그늘이 생긴 듯합니다!"
"그늘……?"
"그것은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대총수는 한 곳에 이르실 때마다 기세를 흩트리시곤 했습니다!"
"내, 내가?"
"예."
잔풍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위치상 마무정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처지였다.
마무정의 그림자와 같은 수석비위(首席臂衛), 그는 마무정이 가는 모든 장소를 뒤따른다.
그는 마가의 법에 따라 어떠한 경우라도 마무정에게서 백 보(百步) 이상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속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알지!"
"속하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동요도 잘 느낍니다!"
"인정하네!"
"속하는 최근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
잔풍은 말을 하지 못한다.
마무정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말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무슨 말이든 좋네!"
그가 차분히 물었다.
"속하, 죽을 것을 각오하며 말하겠습니다. 속하가 느낀 것은 대총수께서 최근 즐겨 웃으시나, 사실은 번뇌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번뇌는 무화과나무 아래 이를 때마다 더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무, 무화과나무 아래?"
"그렇습니다. 대총수는 무화과나무를 보실 때마다 기세를 흩트리셨습니다. 벌써 수백 번! 속하는 늘 그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으음……!"
"송구스럽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아니야. 자네 말은 정확한 말이네. 그러니 송구스러워하지 말게!"
마무정은 천천히 얼굴을 쳐들었다.
눈송이가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흰 메밀꽃이 흐드러진 듯,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 눈은 천하에 고루 내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 떠나가야만 할 곳에 머무르는 기분이다.'
이틀 후 새벽.
"강호에 나가시기 이전, 속하가 분석한 현세의 정세도를 보셔야만 합니다. 속하가 천하정세를 사려해 본 결과……!"
마박사는 쉬지 않고 축지성촌(縮地成村)을 시전하며 말을 해 댔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마무정과의 사이를 좁힐 수는 없었다.
마무정은 홀홀단신으로 마화성을 떠나가고 있었다. 어찌나 빨리 몸을 날리는지 수석비위 잔풍이라 하더라도 그를 뒤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대총수, 마저 들으셔야 합니다!"
마박사가 고래고래 소리칠 때였다.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하세, 마박사.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 백장로(白長老)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나 많이 해 주시오. 그녀가 최근 고독해 하는 눈치이니까!"
마무정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이 들렸다.
그는 벌써 십오 리(里) 밖에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만리전음술(萬里傳音術)에 따라 바로 곁에서 크게 말하는 듯 정확히 들리는 것이었다.
눈(雪)… 산봉우리에도, 숲에도, 마박사의 어깨 위에도, 마무정을 뒤쫓아가는 잔풍을 비롯한 비위들의 어깨 위에도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어떤 겨울의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눈은 희게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
"아무도 알지 못할 분이다, 대총수는. 어쩌면 대총수 자신도 자신을 모르실 것이다. 그분에게는 잃어 버린 한쪽 마음이 있다. 그것을 찾기 이전에는 늘 저렇게 번뇌하실 것이다. 대총수는……!"
마박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총수는 영원한 나의 우상이 되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달라지신다면… 패도적 처세를 통해 단시일 안에 지금보다 몇 배 더 큰 세력을 얻으실 수 있어도, 나 마박사를 비롯한 전 제자들의 진짜 승복은 받아 내지 못하실 것이다.'
* * *
패황봉 기슭, 눈발이 희끗희끗 내비치는 가운데 준험한 기개로 흑궁(黑穹)을 향해 치솟은 패황봉은 하나의 거검(巨劍)이었다.
검은 하늘을 길게 베어 버릴 듯, 날카롭게 갈린 장검의 날 마냥 섬뜩하게 솟아오른 패황봉 위.
귀무(鬼霧)가 자욱이 흐르는 분지(盆地)가 있고, 그 안에는 그 누가 세웠는지 모를 석성(石城)이 하나 서 있었다.
둘레가 거의 오 리(里), 성곽(城廓) 위에는 피를 바른 듯 붉은 기폭들이 무수히 걸려 있는 거대한 성!
그 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였다. 그 문은 마왕두(魔王頭)의 형용을 하고 있었다.
아가리를 딱 벌린 악마의 얼굴, 입 안에는 이빨이 칼처럼 솟아 올라 있다.
스으으… 스으으…….
마왕문(魔王門) 안팎으로는 싸늘한 바람이 오가고 있다.
자욱한 혈무(血霧)가 흐르고, 온갖 독충들이 스물스물거리는 죽음의 성.
삶이 부정되고, 세상의 미학(美學)이 침뱉어진 장소!
이 일대에는 현재 수만여 고수가 은신해 있었다.
석고처럼 굳은 얼굴을 한 무사들, 이들은 최소한 다섯 가지의 병장기를 지니고 넙죽 엎드려 있다. 이미 죽어버린 눈으로 사위를 살피고 호흡 소리마저 감춘 채 바위 아래 달라붙거나, 나무 뒤에 달라붙거나, 혹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쪼그리고 있는 수만 고수들.
이들의 눈에는 생명의 빛이 없었다. 이미 부패한 시체들처럼.
수만 고수들은 거대한 마왕의 성을 포위한 채 나는 새라 하더라도 안으로 들어서지 못할 철통의 보호망을 펴고 있었다.
내성(內城), 이 안은 외성(外城)과는 격이 달랐다.
우선 흐르는 공기의 내음이 달랐다.
아아, 흐드러진 천자만홍(千紫萬紅)이여!
여명의 빛살과 더불어 온갖 꽃이 자욱한 향무를 흘리고, 희귀한 봉접(蜂蝶)이 짝을 찾아 날아다니고, 도처에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석교(石橋) 아래에는 맑디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그리고 영롱한 햇살 아래 빛나고 있는 혈와(血瓦)의 누각이 하나 서 있다.
높이가 무려 삼십삼 장(丈), 거대한 그림자를 수 리 넘게 드리우고 있는 핏빛의 대루!
아아, 선경(仙境)이 여기인가?
외곽지대의 살풍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절대적인 요지경.
하지만 이 안에는 지금 살기(殺氣)가 흐르고 있다.
대루의 주위, 포검(抱劍)한 호장(護將)들이 화려한 옷소매를 펄럭거리며 돌아다니고 있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파공성이 숲 안에서 들려 왔다.
보이는 사람의 수만도 일천(一千),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수는 구천(九千).
거대한 누각 일대 역시 천라지망(天羅之網)에 휘감겨 있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대전(大殿).
바닥은 우윳빛의 대리석이고, 세 아름은 넘어 보이는 홍철석주(紅鐵石柱) 열 개가 반원형의 아름다운 벽색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백색 대리석 바닥 가운데에는 아주 거대한 핏빛 주단이 깔려 있고, 주단 위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혈옥탁(血玉卓)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주위, 열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중 아홉 개의 은의자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머물러 있지 않은 의자는 가장 거대한 크기의 황금 의자였다.
침묵(沈默).
그리고 아홉 사람의 호흡 소리는 거칠어지고 있었다.
색색 다른 옷을 걸친 사람들, 이들의 특징이라면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은사(銀紗)인데, 은사 가운데에는 하나의 표상이 그려져 있었다.
달(月), 번개(閃), 두꺼비(蟾), 꽃(花), 거미(蜘蛛)…….
매우 기묘한 모임이다.
아홉 명의 면사인과, 아홉 개의 텅 빈 찻잔과, 아홉 줄기의 쓰디쓴 숨소리와, 거대한 하나의 텅 빈 황금 태사의(黃金太獅椅)!
"못 참겠군. 신년하례를 하기 위해 온 우리 구마존(九魔尊)을 이리도 박대하다니……!"
침묵을 깬 사람은 번개의 표상이 그려진 은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었다.
체구가 장대한 황포인, 그의 가슴에는 한 자루의 장도(長刀)가 안겨 있었다.
철혈광상도(鐵血狂想刀)!
그것은 피로 제련했다는 저주스러운 전설을 갖고 있는 마도(魔刀)였다.
"벌써 칠 일째, 마화삼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뿌드득-!"
그가 차게 내뱉을 때.
"우, 우리는 호랑이를 길러 호환(虎患)을 입은 것이오. 으으, 과거… 우리는 그를 잘못 봤소."
이번에는 궁장부인이 말했다.
호접천탈편(蝴蝶天奪鞭)이라는 마병을 허리에 둘둘 감고 있는 여인, 그녀는 손을 꽉 쥐고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것은… 고의요. 그는 우리 구마존을 무시하는 것이오."
"계획적인 거세(去勢)요. 그는 우리를 얕보며 조롱하는 것이오. 크으……!"
"그는 이제 우리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음을 우리에게 과시하는 것이오!"
"그는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북황(北皇)의 고수들을 외인검대(外人劍隊)로 끌어들였소."
"과거, 우리는 유정공자(有情公子)라 믿고 그를 전폭 지지해서 마화삼으로 만들었소!"
"한데, 그는 장성해서 우리를 깔아뭉개는 것이오!"
"제기랄, 절대마가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여전하오. 절대마가의 아성(牙城)에서 벗어나고파 했던 우리들의 꿈은 박살나고 만 것이오!"
"그… 그는 너무 강해졌소. 우리가 환락에 취한 사이, 그는 세력을 착실히 일으켰소. 그는 거인(巨人)이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소인(小人)이오!"
그렇다. 이 자리는 완전한 모독의 자리였다.
신절대마가(新絶代魔家)!
이 곳을 세운 사람은 바로 구마존이었다.
철혈지존(鐵血至尊),
호접부인(蝴蝶夫人),
뇌정마마군자(雷霆魔魔君子) 화중양(華重陽),
월영지존(月影至尊)…….
아홉 명의 종사(宗師)들은 의례적인 신년하례를 하기 위해 칠 일 전 여기 모였다.
십대마가(十大魔家), 이들은 다리가 열 개인 문어와 같다.
이들은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고,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각자의 부귀를 길렀다.
과거, 구마존은 절대마가가 자신들의 전리품을 빼앗아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었다.
결과는 대성공! 그들은 욕심 많은 마유정을 허깨비 마화삼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마유정은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인 악마(惡魔)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제 손으로 죽여 버린 양모가 했던 것 이상으로 구마존 휘하세력을 다스려 나갔다.
지난 칠 일 동안 구마존에게 대접된 것은 한 잔의 차뿐이었다.
맛도 없고 지극히 밍밍한 엽차 한 잔.
그리고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화삼이 언제 나타난다는 기별도 없었다. 구마존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아홉 명의 마도고수들은 과거와는 달리 비대했고 눈빛이 흐릿했다.
혈화삼이 죽은 후, 이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가운데 무공수련을 게을리했다.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창고 안의 황금이 얼마냐 하는 것뿐이었다.
절대마가의 권위를 거부했던 구마존! 이들은 지금 크게 물리고 만 것이다.
"그는… 쑥맥이 아니었다!"
"으으, 그를 추대한 것은 실수였다. 그는 우리를 동맹자(同盟者)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인(下人)으로 보고 있다."
"제기랄, 이제… 마유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인가?"
"다시 싸워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 크으……!"
구마존의 숨결은 거칠어졌다.
대루 외곽에는 그들의 수하 오천(五千)이 있다. 이들은 올 때 친위고수 오백여 명씩을 거느리고 왔다.
그들도 이들처럼 칠 일 내내 잠 한숨 못 자고,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립시다, 조금만 더! 그가 대체 무엇을 바라는지를……!"
호흡 소리가 거칠어질 때, 마군사(魔君師)로 불리는 마마군자(魔魔君子)가 한숨을 섞어 말하자 주위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다시 하루, 회의장 안에서 아무런 기별도 받지 않고 꼬박 팔 일이 지난 셈이다.
마화삼은 온다 간다는 통지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퉁기는 것이 분명한 마금(魔琴)의 소리만이 요란했다.
따앙- 땅-!
"하하… 좋아, 무선(巫仙)! 너의 나무(裸舞)는!"
마유정은 화원에서 환락을 즐기고 있었다.
"북황이 보낸 외인검대들의 검무(劍舞)도 좋군! 핫핫! 곪아 버린 구마존의 수하들보다는 천 배 낫다. 그들은 모리배나 장사꾼, 떠돌이 약장사들일 뿐이지, 진짜 고수는 아니거든?"
대전 안까지 들리는 비웃음소리, 구마존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아야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거대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으으, 우리가 방심하다가 물린 것이다. 제기랄, 그는 우리를 배반했다."
"놈은… 역시 악마의 피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다."
거친 목소리들이다.
"놈은 과거 혈화삼보다 더한 권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노쇠해 그를 거부할 수조차 없다."
구마존은 치를 떨며 당장 뛰쳐나갈 기세였다.
"우, 우리는 그에게 자금을 주었고… 그는 그것으로 외인검대를 조직해 백도를 치기 이전, 우리를 기죽게 하는 것이다. 우라질!"
욕설은 거칠다. 하지만 정작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꼬박 열흘, 구마존은 원탁 둘레에서 열흘을 보내야 했다.
지금, 이들의 눈은 분노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슬프게도 우리들에게는 힘이 없소."
"우리는 진 것이오. 마화삼과의 싸움에서……."
"그는 우리가 절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동맹자로서의 사이가 아니라, 주종관계가 성립되기를 그는 기다리는 것이오."
구마존의 눈은 한 곳으로 모였다.
흑도를 좌지우지하는 아홉 명의 노고수들에게는 무수한 역경을 헤쳐 온 경륜이 있다.
현재에도 이들에게는 엄청난 부귀와 환락이 있다. 가히 인간 세상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이들의 눈빛은 정녕 오랜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껏 마유정을 애송이로 보아 왔었다. 만에 하나, 그가 반기를 들면 죽이리라!
네놈 정도가 무엇을 하겠느냐? 쑥맥 같은 놈!
?구마존은 마유정을 코흘리개 정도로 알고 그가 무엇을 하든 등한시했는데, 그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마유정은 거대한 세력을 조직했고, 젊은층의 고수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호법조직을 이룩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십만 외인검대를 사기까지 했다.
흔들리는 눈빛들, 떨리는 숨결들, 그리고 누군가 쓰디쓴 투로 내뱉았다.
"나는… 사실 오래 살고 싶소. 용서하오. 또다시 혈전(血戰)에 들기는 싫소. 그리고 이 곳은 절대마가요. 비록 우리가 세우기는 했으나, 주인은 마화삼이오!"
한 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는 천천히 무릎을 대리석 바닥에 댔다.
너무나도 비굴한 자세.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마화삼과 투쟁하다가 잃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 주위에는 십만고수가 있다. 싸워 봤자 승산은 없다."
그 역시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댔다.
"그, 그가 바라는 대로 해서라도 살겠소. 나는……!"
"으으, 죽느니 굴복하겠소."
또 한 사람, 한 사람, 은의자에 앉아 치를 떨던 구마존은 하나하나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천리지존(千里至尊) 적지황(赤地皇)!
그가 각혈을 하며 눈물과 더불어 몸을 숙일 때에야, 십오 일 내내 닫혔던 문은 활짝 열리고 있었다.
끼이이- 익-!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마화가 가득 수놓아진 곤룡포(袞龍袍)를 걸친 청년 하나가 미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어르신네들, 오랜만이군요? 한데, 왜 절을 하고 계시는지요?"
웃는 청년, 바로 마유정(魔有情)이었다.
'미친 늙은이들, 내가 너희들에게 농락당할 줄 알았더냐? 이 일은 너희들이 나를 선택하는 그 날, 예정된 일이다.'
그는 속으로 앙천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게 칼 가는 법을 일러 주었었지. 나는 너희들의 꿈을 베어 버린 것이다.'
마유정도 이제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는 권모술수(權謀術數)와 귀계마병학(鬼計魔兵學)을 능수능란하게 써서 구마존을 무혈(無血) 항복시킨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저의 동맹자 지위에서 속하(屬下) 지위로 강등 되심을 자청하신다는 것은 천하대업(天下大業)을 눈앞에 둔 전 마가(全魔家)의 일대경사입니다. 연로하신 구마존이 제게 이런 솔선수범을 보이시는데, 어떤 세력이 감히 마화삼의 신위에 거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기뻐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마유정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어선다면 죽고 만다.마유정을 따르는 세 명의 인자(忍者)에게.
해태랑(海太郞),
천태랑(天太郞),
그리고 화접(火蝶).
이 셋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구마존은 그것을 알기에 감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참자, 어떻게든 살자.'
'그래도 인간이니, 은혜는 잊지 않겠지. 무엇인가 요구하겠으나, 그리 큰 것은 아니겠지.'
구마존은 치를 떨면서도 악착같이 참았다.
그리고 마유정은 아홉 사람이 자신에 부축함도 뿌리치고 계속 절하는데 감명을 받은 듯,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외치고 있었다.
"오오, 마의 하늘이시여! 이 곳을 내려다보십시오. 전 마가는 천하일통이라는 대업을 위해 이렇듯 장엄히 뭉쳤습니다. 오오, 위대한 마의 하늘이시여!"
구마존은 초췌한 얼굴로 시립했다.
마유정은 거대한 황금 태사의에 앉았고, 만면에 자비를 가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쳐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천하일통뿐입니다!"
그는 진짜 웃고 있었다. 이 순간으로 그는 전 마가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비웃으며 환락에 취해 살던 구마존의 아성은 이제 마유정의 손바닥에 철저히 장악된 것이다.
"저는… 미천한 재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 마가 충신들이신 아홉 어르신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으음, 협조……!"
모두 몸을 떤다.
"……!"
마유정의 요구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입니다!"
마유정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손뼉을 친다.
손뼉 소리가 나는 찰나, 배전의 문 밖에서 구 인(九人)의 홍의인들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구마존의 앞으로 다가섰다.
북방무림계의 고수들, 이들은 마가 사람이라기보다 마유정의 사병(私兵)들이었다.
마유정은 백도를 친다는 구실로 타세력과 손을 잡았고, 그 세력을 빌려 제일 먼저 자신의 동맹자들을 거세해 버리는 것이었다.
제이(第二)의 반역(叛逆).
이것은 어쩌면 정해진 반역일 것이다. 그것을 가르친 사람은 바로 구마존일 것이고!
아홉 사람의 홍포인은 하나씩의 첩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화삼이 구대마가의 지존들에게 전하는 신년의 축사였다.
"약소한 내용입니다!"
마유정은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있고, 아홉 사람은 마가의 전통에 따라 밀지를 그 자리에서 개봉해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아홉 군데에서는 거의 동시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흐으으… 윽! 너… 너무하시오."
오물을 씹은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는 아홉 마두.
대체 밀지 안에는 어떠한 글이 적혀 있단 말인가?
아홉 장의 밀지와, 아홉 마디의 비명 소리, 그리고 마유정의 당연하다는 표정과, 홍포인들의 무뚝뚝한 얼굴.
<휘하의 재물 중 구 성(九成)을 천하대업(天下大業)을 위해 기증하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마가의 지존!>
밀지 안에는 그런 글이 일률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홉 사람은 기가 막히는지 말을 하지도 못했다.
돼지간처럼 시뻘개진 얼굴들을 하고 마유정을 보는 아홉 사람들은 치를 떨면서도 입가에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당, 당연히 해야지요."
"모, 모든 것이라도 바쳐야 하는데… 일 성(成)은 남겨 주시니, 정말 은혜로우십니다."
신년하례식(新年賀禮式)은 이렇게 마무리지어졌다.
구마존은 털(毛)을 모두 뽑힌 늙은 돼지같이 되어 사지를 덜덜 떨며 땀만 쭉쭉 흘렸고, 마유정은 사악하고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다 가르침 덕분이오. 훗훗, 배운 대로… 하는 것이외다!"
그 날, 중원(中原)은 천 년 만의 대설국(大雪國)을 이루었다.
산(山)에도, 강(江)에도, 그들의 어깨 위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