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스님은 1905년 이후 주로 예산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림을 하는 동안 납자들을 제접했다. 1931년 유점사 금강선원 조실을 맡았으며 1933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다.
이 시기를 제외하고 스님은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만공스님은 1937년 3월 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31 본산 주지와 13도 지사가 함께 모여 미나미(南次郞)의 주재 하에 불교진흥책을 논의했다. 이때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이 단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만공 스님은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와 견성암(見性庵) 및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했고,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 )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열반일을 미리 선견하시고 전월사에서 홀로 달을 굴리시다가 목욕 단죄하신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하시니 때는 병술년 1946년 음력 10월 21일이었다.
다비를 마친 후 영골(靈骨)을 모아 만공탑에 봉안하고 진영은 경허 선사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진영각)에 봉안하니 세수(世數) 75세요, 법랍은 62세이시다. 1927년 그가 지은 <현양매구 (懸羊買狗)> 라는 글의 끝에 자신을 임제 32대 사문 만공(臨濟三十二代沙門滿空)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가 임제종풍을 계승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공 스님은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걸출한 제자로는 비구 보월, 용음, 고봉, 서경, 혜암, 전강, 금오, 춘성 등과 비구니 법희, 만성, 일엽 등이 있다.
<滿空法語>
1권 1책의 법어집으로 1983년 문도인 惠庵, 碧超, 圓潭등이 간행했다. 권두에는 혜암이 쓴 봉향송과 경봉이 쓴 序辭, 원담의 간행사가 있다.
본문은 상당법어(上堂法語 ) 42편, 거랑(擧場) 57편, 序文 3편, 발원문(發願文) 3편, 기타 3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말에 자세한 행장이 있다. 이 중 상당법어에는 세간상상주( 世間相常住), 무상보리(無上菩提), 천안불간(千眼不看), 일심만상(一心萬像), 탄진삼세제불(呑盡三世諸佛) 등 불교와 선의 중요 문제에 대한 법문을 독자적인 경지에서 설파한 것이다.
거량은 당시의 여러 선승들과 선지(禪旨)를 문답한 것으로, 당대의 고승 금봉(錦峯), 수월(水月), 혜봉(慧峰), 한암(漢巖), 보월(寶月), 성월(性月), 효봉(曉峰), 혜암(惠庵), 금오(金烏), 벽초(碧超) 등과의 선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선문답은 禪을 닦는 후학들의 공부를 점검하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
그리고 이들 문답을 통해 근대의 선사 중에서 격외의 선지를 가장 자유롭게 구사한 만공선사의 면모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게송 57수는 경허선사영찬을 비롯하여 달마영찬(達磨影讚), 때와 곳에 따라서 심경을 읊은 것, 법제자와 충가승려 및 재가신도에게 준시(時)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타 3편은 참선곡(參禪曲), 화두(話頭)드는 법, 훈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참선곡은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참선하는 한 가지 일만은 진실하다는 것을 밝히고 참선하는 법, 정진하는 법, 중이 되는 법, 화두 잡는 법 등을 조리있게 제시하고 있다.
<自 影 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