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덕천리의 우물
경산학연구원장, 2.28횃불 편집위원장 김 약수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는 6·25 전쟁 이전까지 용성면소재지였다. 무장공비에 의해 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가 전소되는 바람에 면의 중심이 당리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전통적 풍수지리에 의해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뒷편 덕봉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동네 앞엔 금호강 지류인 오목천이 흘러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동네명이 덕봉산의 德 과 오목천의 川을 따서 德川里가 되었다. 대략 임진왜란 전부터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는 김해 김씨·청도 김씨·경주 이씨·밀양 박씨·영천 최씨·창원 황씨·제주 고씨 등 타성과 함께 살고 있다.
현재 77가구 143명이 살고 있지만, 산업화의 離農이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에는 80여 호에 450여 명이 정겹고 살겹게 살았다. 아직 우리의 고유문화인 洞祭(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전통이 배어있는 내 고향마을이다.
또한 마을 공동우물·두 집 공동우물·단독 우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식수시설을 지혜롭게 조성해왔음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식수를 위해 많은 고심을 해 왔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마을 앞에 흐르는 도랑물을 식수와 각종 생활용수로 이용하다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혜를 모은 끝에 마을 중심의 마을 공동우물을 파서 모두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을 삶들이 증가함에 따라 물의 소비량이 많아지고 불편을 덜기 위해 점차 골목공동우물, 두 집이 함꼐 투자하여 두 집 공동우물, 형편이 좀 나은 집은 단독우물을 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물 위치가 변화한 것은 우물을 파는 데 토목기술이 동원됨에 따라 많은 경비가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6년 운문댐이 완공된 이후 수돗물을 먹을 때 까지는 골목 및 두 집 공동우물과 단독 우물에 의존했다.
이렇게 마을의 우물의 변화한 모습을 한 마을에서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마을은 덕천리 이외에선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생각한다.
수도가 들어오고부터는 우물은 대체로 방치되거나 식수로 사용하지 않고 허드레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의 집 바로 앞에 공동우물이 있지만 용도 폐기 상태이고, 집안에 단독우물이 있어 텃밭을 가꾸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식수시설로 샘(泉)과 우물(井)을 팠다. 샘을 지표면에서 그리 깊지 않는 곳에 물이 솟아나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물을 먹을 수 있었던 반면에, 우물을 수맥을 찾아 깊이 파서 지표까지 돌을 쌓아 올려야만 하는 토목공사의 전문기술과 비용이 적잖게 투자해야만 했다. 형태면에서도 샘은 울타리가 없어도 규모가 작고 깊이가 비교적 작고 깊이가 비교적 얕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으나, 우물은 직경이 크고 깊이가 깊어서 위험하기 때문에 우물은 울타리가 있다. 우물을 뜻하는 한자 井은 우물 울타리 모양의 상형문자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전설을 간직한 나정(蘿井)이 기록상 제일 오래된 우물이다. 이 밖에 『삼국유사』에 우물이 여럿 있다. 우물이름을 명기한 것으로 분황사정(芬皇寺井)·금광정(金光井)·궁정(宮井)·재매정(財買井) 등이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대표적 옛 우물로 芬皇寺井을 들 수 있다. 이 우물은 팔각의 돌 울타리가 있는‘芬皇寺石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이며, 신라 선덕여왕3년(634)에 창건한 분황사와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 財買井은 경주재매정길 47(교동)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터에 있는 우물로서 조선 고종9년(1872)에 세운 비석(신라 대대각간 개국공신 김선생 유허비)과 함께 이 일대를 사적 제246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경주 쪽샘지구 발굴조사에서 울타리가 망실된 신라시대 우물이 발견되었고, 대구 시지지구에서도 울타리가 없어진 신라시대 우물이 발굴 조사된 바 있다. 문헌 및 고고자료로 살펴볼 때 우물은 삼국시대부터 지배계층에서는 두루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샘은 표면으로 넘쳐흐르기에 바가지로 그냥 쉽게 떠먹을 수 있으나 우물은 반드시 긴 줄이 달린 두레박으로 퍼 올려야만 먹을 수 있다. 샘은 대부분 산골이나 산성 안에 위치하고, 우물은 마을이나 민가에 있다. 필자가 조시한 20여 개소의 산성유적에는 반드시 셈이 한 곳 이상 있으며, 봉수(烽燧)유적 주변에도 샘이 있었다. 산성은 비상시에 사용된 국방시설이기에 빨리 쉽게 바로 바가지로 퍼 먹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샘이 우물보다 더 적합한 식수시설이다.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신리 마을 뒤편에 위치하는 용산산성(경상북도 기념물 제 134호) 안에 무지개 샘이 있다. 1998년경 문화재지정을 위한 복원 및 정비공사 때 샘을 우물로 바꿔버린 사건으로 아직까지 돌로 쌓아올린 울타리 위에 녹슨 양철 드레박이 놓여있다. 용산산성의 잘 못 복원된 울타리를 허물고 샘으로 제 모습을 찾아줘야 한다. 문화재 복원과 문화재재지정을 위한 복원이 이렇게 근거없이 변형시키는 그 자체가 문화재훼손이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담당부서에 잘못 복원되었음을 알렸으나 아직도 그대로이다.
우물의 변천을 일목요연하게 한 마을에 조성되어 사용하고 남아있다는 것은 식수시설을 남달리 중시한 결과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도들에게는 좋은 연구대상이 될 것 같아서 몇 몇 문화인류학자에게 제보했더니 관심을 보였다. 머잖아 답사를 통한 연구보고서가 학계에 알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덕천리 마을의 변화한 우물들이 흔치않기에 장차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자원으로 주목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도서: 경산문학 제35호(2019) 한국문인협회 경산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