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두었던 많은 발표집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했습니다.
단행본으로 모은 작품은 미련이 없는데, 조금 특별한 발표작은 책을 내다놓기 망서려집니다.
한 편씩 이곳에 올려 놓겠습니다.
누구에게든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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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한국수필 2018년 8월호 / 특집 – 나의 대표작 / 20매
탱자나무 울타리를 찾아서
류인혜
아침의 일상적인 일을 끝내고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펴놓고 펜을 꺼내 들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정신이 몽롱하다. 한참을 멀거니 앉아 있었다. 일없이 벽만 바라보고 있기가 답답하여 오래전에 사다 놓은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기 시작했다. 《언문 간독》에서 집자했다는 제목의 글씨가 할머니를 만난 듯이 편안해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저자 유홍준은 깡마르고 안경 쓴 모습이 동네 가겟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다. 기축생, 동년배다. 괜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미학과를 졸업했다니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과는 다를 것이라며 책에 대한 기대가 앞섰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시작하는 서문을 읽을 때 벌써 늘어져 있던 신경들이 팽팽히 긴장되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지닌 볼거리에 관한 생각을 그는 냉소 어린 시선으로, 혹은 깊은 연민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문화유산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이유와 함께 어울린 자연과의 조화까지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는 여유가 글을 따라가기 쉽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 박물관인 국토를 원형 그대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문화유산에 대한 작자의 애정은 가히 국보감이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이 가장 돋보이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시간에 얼마큼 떨어진 거리에서, 시선의 높이와 마음이 가는 깊이를 담아서 그리고 누구와 함께 보느냐가 그렇게 중요해지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또 그의 시선은 단연 목가적이다. 반쯤 무너져내린 토담이나 탱자나무 울타리, 개나리 담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있다. 돌반 흙반의 비탈길에서 토종 누렁이가 짖어대고, 모이 주는 아주머니를 따라 병아리들이 모이던 그런 시골 동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내 정신에 녹아 있는 촌스러운 향수를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그는 먼저 손을 내밀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사찰을 중심으로 얘기가 엮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내세울 문화유산이 절집과 그 변두리에 속해 있는 부속물뿐이라면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의 답사길을 따라가느라고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수덕사의 만공 스님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녹차 한 잔 만들었다. 불유佛乳라고 했다는 약수를 떠 마시는 기분으로 창문을 열고 바람도 함께 마셨다. 삼화경 아기 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된 이유를 알고서는 낄낄 웃음을 멈출 수 없어서 집안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외국 어느 곳에 있는 베드로 동상의 발등이 수많은 관광객의 손길로 닳아져 버렸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사람들의 호기심은 보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피부로 직접 느껴봐야 해결되는 것인가 싶었다.
바로 이어지는 감실부처 얘기 끝에는 아무래도 잠시 쉬어야겠다고 책을 덮고 앉았다가 문득, 이 사람에게 잘 읽었다고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도 저자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까, 아니면 의례적으로 답신을 보낸 것인가 슬그머니 염려되었다.
나는 드디어 그곳에서 종소리를 만났다.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소리를……. 저자는 에밀레종 소리를 이렇게 얘기했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그 모두를 갖추었다.’
그는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난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 반월성에 올라 키 큰 갈댓잎을 헤치며 무작정 거닐었다고 했다. 나는 종소리를 듣고 그것들이 내 속에서 빠져 달아날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남자는 이렇게 헤매는구나 생각했다.
옛날 경주 박물관은 아주 작은 집이었다. 마당에 머리 없는 부처들이 즐비한 사이를 줄을 서서 들어가 신라의 금관을 보고 쉼표를 키운 것 같은 옥고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이를 넣어서 만들었다는 그 신비한 종을 보았다. 무서움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흘끔거렸다. 세월이 흘러서 박물관을 새로 지어 커다란 종각으로 에밀레종을 옮겼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때의 일을 유홍준은 이 책에 적어 놓았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에밀레종을 옮긴다고 수만 명의 경주시민들이 역 앞 광장에 모였다는 대목부터 어깨가 들썩였다.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가자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하는 행렬이 눈앞에 선연히 잡혀 나도 그곳에 함께 있는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 일을 주관하던 소불 선생이 광목 열 필을 사다가 에밀레종에 세 가닥으로 매어 늘어뜨려 시민들이 그 줄을 잡고 2시간 동안 5㎞를 걸었다는 얘기를 읽고 나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 방바닥을 베고 누워버렸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두근거림을 진정시켰다.
세 가닥의 하얀 광목 줄과 그것을 잡은 수만 시민들의 긴 행렬을 상상해 보면 그 장엄함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리고 신이 난다. 흡사 마라톤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신작로에 줄을 서서 손뼉 치던 때와 같다. 한편으로는 장례 행렬을 보는 것 같은 비장함도 솟아올랐다.
에밀레종에 대한 경주시민들의 끈끈한 그 무엇이 내 마음속에도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다. 이것이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을 지켜가는 애국심이던가, 나는 갑자기 애국지사가 된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은 만물상회였다. 그의 속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어 이 답사기는 찐득찐득한 그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책 한 권 붙잡고 이렇게 몸살을 앓듯이 읽어 줄 그런 글을 쓸 것인가. 이제는 벽이 아니라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 《계간 수필》 1996년 (한국수필작가회 1996년 10집)
창작여적
1981년부터 쓰기 시작한 수백 편의 수필 중에서 어떤 작품이 대표작들이 될까. 첫 번째 수필선집을 만들 때, 40여 편을 신중히 골라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찾아서>는 그중의 한 편이다. 1990년대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수필은 지극히 복고적이다. 아직도 손바느질을 좋아하는 필자의 본성이 그러하니 당연하다. 당시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단어들이 즐비하다. 특히 경주시민들이 에밀레종을 옮기는 그런 잔치 분위기를 선호한다. 흥겹게 휘몰아가는 농악놀이에 참여하듯 어깨를 들썩이는 흥이 내 정신을 맑게 한다.
이제는 수필가들이 배우고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글을 이루어가고 있는데, 내 수필은 묵은 감성의 느낌이 만들어내는 글이라고 했다. 앞으로 그런 예스러운 감성으로 쓰는 글을 읽어보기 어려울 것이란다. 수필의 내용이 변하는 것이다. 점점 자연과 사람의 묵은 감성으로부터 얻은 원초적 예술의 정서가 학문의 논리적인 힘을 이기지 못할 예감이다. 이 수필을 소개하는 이유는 곳곳에서 휴대전화기를 치켜들고 외향의 재미를 추구하는 때에 문화유산을 보는 시선이 진실한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작품세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기회에 몇 가지 기준을 세우기로 계획한다. 평자들과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자신도 거울이 되고 싶다. 자신 있게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는 대표작들을 찾아내어 수정하며, 오래 쌓아 온 문학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고자 한다.
류인혜(柳仁惠)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우물> 추천완료. 한국수필작가회 고문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작품집: 《수필이 보인다》, 《나무를 읽는다》 외 8권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첫댓글 막바지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진지요?
단행본으로 묶어내지 못한 특집으로 발표한 글을 한편씩 올려놓으시겠다는 의도는
좋은 발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 작품은 대표작이거나 대표작에 버금가는 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류선생님의 작품을 감히 한말씀 언급한다면, 선생님의 글은 어떤 전적(典籍)를
바탕으로 하는 글을 썼을 때 한층 돋보이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작품도 그렇고요. 지난번에 문협에서 받은 작품상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느껴집니다.
놓치고 있었는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청석 선생님, 댓글로 작품에 대한 소감을 써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만큼 걸어와 보니 수필이 무엇인가? 오리무중을 헤매던 때가 생각나서
따라오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더위 잘 이기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