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1월 18일.
대구에서 사람살기에 가장 좋은곳이 두곳이 있다 하여
일파이무(一巴二無) 또는... 일무이파(一無二巴) 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수성구 파동(巴洞)과 북구의 무태(無怠)를 이르는 말이다.
대구 최고의 선사시대(先史時代) 유적지는 2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지로 달서구 월성동이고..
그 다음이 파동과 무태의 신석기 유적이다.
오늘도 애마 자장구를 타고 특정 문중의 재실이 가장 많이 산재 되어 있는 무태를 돌아 본다.
▲ 삼각주 둔치.
대구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의 신천둔치공원.
▲ 서변동 회연정사..
인천이씨 33세손인 회연(晦淵) 이순희(李淳熙)의 정자인 회연정사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영남일보 제3대 사장을 지냈다.
▲ 측면의 도곡산방(道谷山房)의 뒤로 돌아가면...
▲ 도곡저수지.
2~30년전... 전국적으로 유료낚시터가 유행할때
향어...잉어의 손맛에 끌려 일요일만 되면 찾아오던 유료낚시터였다.
▲ 망일봉아래로 서계서원(西溪書院)이 보인다..
▲ 서계서원(西溪書院)과 사적비.
무태 서변동 안마을과 연경동 대부분은 인천이씨(仁川李氏) 집성촌이다.
인천이씨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5대조 퇴은(退隱) 이말흥(李末興)이 연산군의 폭정에
창녕현감을 그만두고 파동에 정착하면서였다.
1556년 대구 파동에서 태어난 이주(李輈)는 15세 때 무태로 이거했다.
무태의 인천이씨는 태암 이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번성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문화(李文和)를 중시조로 한다.
▲ 굳게 닫힌 서계서원(西溪書院) 솟을대문에는 향의문(向義門) 현판이 걸려 있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781년(정조 5)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문화(李文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01년(순조 1) 이주(李輈)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이주(李輈)는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곽재겸, 채몽연, 박충후, 이종문 등과 뜻을 모아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그는 많은 전공을 세우고...전란이 끝난 후
무태로 돌아와서 대구 향교를 달성으로 이건할 때 상량문을 지었으며 연경서원을 복원하는 등
지역의 교육을 일으키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주는 1604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점차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서계서원은 1992년 5월에 복원한 것이다.
▲ 문이 닫혀 있어 담넘어로 보니 서계서원(西溪書院) 현판이 보인다.
편액은 조선말의 명필인 윤용구(尹用求)가 쓴 것이라 한다.
▲ 숭덕사.
▲ 인천 이씨가의 효부와 열부를 기리는 비각이다.
왼쪽부터 정렬각.. 창렬각.. 효열각.
1) 정렬각(旌烈閣)은 조선 영조때 인천 이씨가에 시집온 열녀 영양 남씨의 덕성을 기리는 정각(旌閣)...
2) 창렬각(彰烈閣)은 조선 선조때의 열부였던 밀양박씨의 효행을 기리는 정각(旌閣)이다.
3) 효열각(孝烈閣)은 조선 철종때의 효부 월성 최씨의 효행을 기리는 정각(旌閣)이다.
▲ 영회문.
▲ 환성정(喚惺亭)...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주(李輈)의 정각으로 환성(喚惺)이란, 늘 깨어 있겠다는 의미다.
그는 환성정 기문(記文)을 직접 썼는데, 거기에 옛날 서암사 승려의 이야기가 나온다.
승려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주인은 깨어 있는가(惺惺否)’ 묻고는, ‘깨어 있다(惺惺)’라고 대답했다.
이주는 이러한 끊임없는 자문자답이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방법(常惺惺法)이라고 밝히고 있다.
환성정(喚惺亭) 현판은 대원군(大院君)의 친필(親筆)이다.
▲ 백운정...
백운정은 조선말기 유학자 백운 이화상(白雲 李華祥 : 1842 -1915)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화상은 당대 영남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정이 짙은 시 98수가 전해진다.
▲ 정관정(靜觀亭).
▲ 인천이씨 32세손 묵재(默齋) 이병철(李柄喆)의 재실로
그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72년에 건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택와(擇窩) 우하철(禹夏轍),
중재(重齋) 윤봉주(尹奉周) 등과 함께 스승인 연재와 심석재를 모시고 상경해
조약의 부당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스승 연재가 자결하고 연이어 심석재가 순절하자 이병철은 울분을 토하며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 물소재(勿小齋)는 무태의 명문가인 능성구씨의 재실이다.
▲ 구재서(具在書)를 추모하기위한 재실이다.
구재서의 호가 물소재 이다.
▲ 심산의 단풍은 져버렸지만... 도심의 단풍은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 구 도청앞의 수양버들도 미장원에 다녀 왔는지... 초록머리에 노란 브릿지를 넣었다.
▲ 내가 좋아하는 자장구길 구간이다...
첫댓글 공부도하고
구경도하고
대단히 고마버유
열심히 공부하시는 자세가 타의 모범이 됩니다...ㅋㅋㅋ
가까우니 붕붕타고 함 다녀 오세요..
감사합니다.
자장구도 요즘은 중고차 한대값이니 보관에 어러움이 많지요!~
신경쓰이지요..ㅎㅎ
유유자적 작은풍경 하나 놓치지 않는 느림의 미학...
멋지게 사십니다
성격이 못되서
수박 겉핥기식은 아니함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지도를보니
함지산 자락 이군요,~~~^^
부지런하시네요,,
맞습니다.
무태 서변동입니다..
부지런은.....사나래님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구석기 유적지 설명과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에
서변동이 인천 이씨와 능성구씨의 집성촌이고
문중 재실이 단일동네에 그렇게 많이 있음을 첨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옛날에 서변동에 환자가 3명 있어 일주일에 한번씩은 무태길 따라 열시미 다녔내요
보리밥 정식도 먹고~~
서변동의 추억이 있었군요
보리밥 좋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촌에 보리밥집 많이도 다닌 생각이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