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짐 홀트
1. 수수께끼와의 만남
과학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최초의 물리적 상태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다. 데카르트에게 세상은 두 종류의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물질로서, 확장된 본질로 정의된다. 다른 하나는 정신으로서, 생각하는 본질로 정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 현상을 네 가지 원인으로 설명했다. 작용의 원인만 우리가 생각하는 편협한 과학적 관념에 들어맞는다. 과학과 가장 먼개념은 목적의 원인이다. 현대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 목적론을 엄격하게 배제한다. 우주론적 증명에서는 세상의 존재 이유는 오직 모든 사물 존재의 필수적인 근원이 되는 신성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과학은 우주의 모든 물질은 중력장의 음에너지로부터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2. 철학적 개관
흄은 어떤 독립적인 존재도 순수한 논리의 문제로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존재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존재성은 결국 모순으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신도 예외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인생은 진지하지만 예술은 가볍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의문을 무의하다고 일축한 논리적 실증주의는 1960년대 소멸되었다. 철학에서 순수 논리는 존재의 문제를 다 루는데 무기력하다. 초기 기독교 시대 이단으로 몰린 그노시스파는 세상이 자비로운 신성과 사악한 조물주 양쪽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스피노자는 모든 실체가 단일한 무한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추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러한 무한한 물질을 '신 즉 자연'이라 불렀다. 스피노자는 신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은 스스로 신성하며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 스스로의 존재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랍비가 아인슈타인에게 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스피노자가 믿는 신을 믿습니다.' 우주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세상은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는 세상을 창조했다.
어떤 유한수를 더하든 무한수를 넘어설 수는 없다. 따라서 유한수에서 무한수를 연결할 수는 없다. 등식 0=1-1은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가? 이 과정을 역으로 생각하면, 1-1이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0이 나뉘어 1-1이 된다. 일단 무가 존재하고 무는 두 개의 유로 나타난다.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 물질과 반물질, 음과 양 같은 정반대되는 것들의 만남이다. 피터 앳킨스에 의하면,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느냐로 구분된다. 시간의 부재 안에서 -1과 1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둘이 합쳐져서 0이 될 뿐이다. 시간은 반대되는 둘이 갈라지도록 만들며, 이러한 분리가 결과적으로 시간의 출현을 나타낸다. 우주의 자발적인 창조가 진행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0 =1-1에서 시작되었다. 이 등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존재론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공집합의 존재는 우주에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집합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집합론의 공리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담고 있는 집합은 반드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공집합 Ø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담는 집합 {Ø}가 존재한다. 그리고 Ø와 {Ø}를 담는 {Ø, {Ø}}가 있다. 그 다음에는 새로운 집합은 담는 {Ø, {Ø}, {Ø, {Ø}}}가 생겨난다. 그리고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실체의 본질은 무로 이루어진 공집합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3. 무에 대한 간략한 역사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무란 실존적 존재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고 선언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무에 대해 생각할 때면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는 불안감으로 드러난다.' 공포는 실체가 있는 반면 불안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모호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존재는 무의 심연에서 드러나며 죽음의 무에서 사라진다. 루돌프 카르나프는 실존주의자들이 ‘무'라는 개념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주장했다.
무라는 말이 마치 명사처럼 행세하고 있다. 무가 명사라면 어떤 실체, 결국 유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존재를 대신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앙리 베르그송은 완전히 사라진 우주를 상상하려고 했을 때,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바로 자기 내면의 자아였다. 베르그송은 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삭제논증은 무를 인정하고 찬성하는 것이다. 삭제논증에 따르면, 각각의 사물은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삭제논증은 독립성에 대한 가정을 이끌어낸다. 어떤 존재의 비존재성은 다른 어떤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한성, 우연성, 독립성을 통해 세상에는 결국 무가 존재한다. 만일 세 가지 전제가 사실이라면 절대적인 무는 가능하며 동시에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찻잔에 담긴 커피 한 잔에서부터 하나의 가능한 세상까지 모든 시스템은 'N개의 다른 상태' 안에 존재할 수 있다. 그 최대 엔트로피는 logN과 같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단순한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는 하나의 상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대 엔트로피는 log1 = 0이다. 결국 무는 모든 가능한 실체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가장 대칭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형태의 엔트로피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무의 최대 엔트로피는 0과 같다.
4. 위대한 거부파
17세기 후반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시간의 진정한 본성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뉴턴은 절대주의자 입장에서, 시간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고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모여든다고 주장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관계주의 입장에서, 시간은 단지 여러 사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변화도 없고 사건들도 없는 정지된 세상에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5. 무한 또는 유한
칸트는 시작이 없는 세상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만일 무한한 수의 나날이 먼저 지나갔다고 한다면 어떻게 현재가 도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틀렸다. 무한한 과거가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아침이 오기 전에 일출의 무한한 연속이 존재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가능하다. 1965년 빅뱅의 잔류물인 우주배경복사의 존재가 확인됨으로써 우리의 우주는 결국 시작이 있었다.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방식을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존재론적 기초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논리적인 확인을 해주는 실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 실체가 오직 신밖에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합리주의자인 사르트르 역시 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모순과 자가당착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재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냥 사물이 아닌 ‘대자존재'이다. 만일 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즉자존재’로 고정되고 완료된 사물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신은 대자존재인 동시에 즉자존재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의성과 불변성을 함께 지닌 신과 같은 존재는 여전히 우리 인간이 열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다. 그에게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싶은 우리 인간의 욕망과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싶은 상반된 본성은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욕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원죄의 한 종류인 ‘자기기만'이다. 의식에는 본질이 없다. 웨이터노릇이나 신성도 마찬가지다.따라서 신은 개념상 부조리다. 그리고 인간은 '쓸모없는 열정'이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절망은 조금 초점을 벗어나 있었다.
결국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더 위대한 철학자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발적인 존재인 이 세상은 안전하고 필연적인 존재론적 기초 위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사르트르가 생각한 세상은 감상적이고 부조리했으며 무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6. 옥스퍼드의 논리적인 유신론자
신이 '자기원인적 존재라는 말은 사실상 신은 아무런 원인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뜻이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은 실패한 논증이다. 존재론적 논증이 실패한다면 신은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일반 논리학은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관련되어 있는 반면, 양상논리학은 무엇이 실체여야 하고 무엇이 실체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실체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괴델은 양상논리학을 존재론적 논증을 더 강화된 형태로 되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주 위대한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 신은 존재하는가? 거의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최소한 신이 존재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러셀이 말처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찻주전자가 돌고 있을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찻주전자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어떤 가능한 세상에서는 지금 정말 찻주전자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어딘가에서 정말로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 어떤 가능한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 신은 모든 가능한 세상에서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 여부가 가능해지면 필연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소한 양상논리학의 틀 안에서는 완전히 타당한 결론인 것이다. 만일 신의 존재가 가능하다면 신은 필연적 존재이며, 따라서 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두가지 가능성을 열어둔다. 최고로 위대한 존재가 존재하 지 않는다는 가정에서도 본질적인 자기모순은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에 의해 전혀 위대하지 않은 존재가 증명되는 가능한 세상이 반드시 있게 된다. 그렇지만 신이 어떤 가능한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신이 모든 가능한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7. 다중우주 문제의 현자
입자와 반입자는 진공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무에서 유가 탄생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떤 물리학 법칙도 왜 다중우주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대답해줄 수 없다.
8. 궁극의 공짜 점심
물리학자에게 무는 아무런 입자가 없는 곳, 모든 수학적 상황의 값이 0인 곳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르면 무는 모든 장의 가치가 시간에 관계없이 0과 같은 상태다. 그렇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원리는 만일 장의 가치가 정확히 알려져 있으면 그 변화율은 완벽하게 임의적이라고 말한다. 즉 변화율은 정확하게 0이 될 수 없다. 변화가 없는 무의 수학적 표현은 양자역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는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양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에너지 0의 우주를 가정하자. 그러면 하이젠베르크의 원리에 따라 정해진 대로 에너지와 시간 사이의 불확실한 균형 때문에 시간 범위의 부정확성이 무한대로 커진다. 다시 말해 일단 우주가 공허 속에서 하나의 존재로 나타나게 되면, 그 상태를 잘 유지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 진공의 공간도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다. 양자 진공은 물리적인 실체이며 작은 태초의 우주 그 자체이다.
소수에 대한 페르마의 정리에 따르면, 소수는 두 개의 제곱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령, 소수 13을 선택 한다. 그리고 4로 나누면 1이 남는다. 13=4+9이며 4와 9는 각각 2와 3의 제곱이다.
9. 최종 이론을 기다리며
칼 포퍼가 과학이론은 반증이 가능해야 한다는 설명은 잘못되었다. 양자역학은 반증할 수가 없다. 양자역학은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집합이 스스로를 포함한다면 누군가 스스로를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집합 R이라 부르자. R은 자신을 포함하는가? 정의에 의해 R은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만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정의에 의해 R은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은 러셀의 역설이다. 만일 모든 가능성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어떤 가능성에 그 스스로가 포함된다면, 모든 스스로를 포함하는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가능성은 반드시 스스로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스스로를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처럼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세상은 그 안에 존재하는 유형들보다 먼저 존재했다. 이러한 내부의 유형들은 세상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이용될 수 없다. 동시에 그 어떤 설명도 존재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줄 수 없다.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질문은 최종 이론의 영역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략적인 계산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와 똑같은 우주는 (1010)28미터쯤 밖에 떨어져 있다. 다중우주는 필연적이지 않을지라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그 안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다중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인 세상들의 특징은 다양하지만 같은 한 가지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법칙이다.
10. 플라톤 학파의 주장
유클리드 기하학의 20번째 명제에 따르면,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소수가 존재한다. 이는 존재의 주장처럼 보이며 논리적으로도 사실로 보인다. 분명 유클리드는 무한히 많은 소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곧 모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세상에 소수가 유한하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숫자를 모두 곱하고 거기에 1을 더하면 모든 소수보다 크지만 그중 어떤 숫자로도 나눠지지 않는 새로운 숫자를 얻게 된다.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 개의 원자를 함께 누르기 위해 우리는 두 원자 안의 전자들을 숫자상으로 구별되는 양자 상태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것은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원리에 따르면, 두 개의 전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할 때만 각각의 위에 직접적으로 위치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것들의 고체성은 파울리의 배타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합쳐진 것이다.
1928년 에딩턴은 '물리적 세상의 본질'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이란 정신적 물질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의식이 실체에 스며든다는 주장은 이른바 범신론으로 불린다. 두뇌를 구성하고 있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는 나머지 세상을 구성하는 있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우주 전체의 구성 물질에는 반드시 의식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입자가 양자 얽힘의 상태 안으로 들어서면, 각각의 개별적인 특징은 사라지고 하나의 통일된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된다. 양자 얽힘이 발생하면 그 전체의 모습은 각 부분이 합쳐진 것 이상이 된다.
11. 무엇인가 존재하기 위한 윤리적 필요성
다중우주 모형은 전자기력의 세기가 우주에 따라 우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만 말해준다. 흄은 객관적인 선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저 우리 감정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내 손가락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는 세상 전체를 파괴하는 일이 이성에 반하지 않는다.’
헤겔의 '논리학'에 따르면, 순수한 존재는 시작을 만들어낸다. 순수한 존재는 단순하면서도 불확실하다. 이 단순한 존재는 따라서 마치 단순한 추상적 개념처럼 완전한 부정이다. 이 순수한 존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존재와 무는 서로를 자기 안에서 품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변증법적인 쌍둥이다.
그렇지만 개념적인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무는 서로 모순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둘은 반대편에 서 있다. 헤겔은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고유함을 파괴하는 일 없이 영원한 차이를 없애는 통일이다. 그리고 파괴를 치유하는 것은 '생성'이다.
여기서부터 위대한 헤겔 변증법이 시작된다. 정: 실체는 순수한 존재이다. 반: 실체는 무다. 합: 실체는 생성이다. 순수한 생성은 순수한 존재나 순수한 무처럼 텅비어 보인다. 헤겔에게 세상은 궁극적으로 개념의 유희이고 스스로를 알게 되는 정신이다. 정신은 헤겔이 ‘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절대이념’이라고 부르는 스스로 생각하는 사고이다. 절대이념은 주체이념과 객체이념의 통일로서 이념의 개념, 즉 그것의 대상은 이념 자체이고 이에 대한 객체는 이념, 그러니까 그것의 통일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대상의 개념이다.
12. 다시 무로 돌아와서
흄은 태어나기 이전의 비존재가 중음 뒤에 찾아오는 비존재보다 훨씬 더 두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케로는 철학적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죽는지를 배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 이 글을 읽고 개인적으로 느낀 점: 절대무는 없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시작도 끝도 없다. 이 세상은 양자역학적으로 그냥 존재한다?그래서 다중우주론이 필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