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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기업과 분깃 (시16:1-6절)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날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입니다. 말하자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유교를 숭상했던 우리 민족은 이 날에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일가친척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고 한 해의 복을 받기 위하여 세뱃돈과 함께 덕담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은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그 비결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섬기기도 하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복을 빌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이러한 모든 행위는 참 복의 의미와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이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기를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인간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특별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전율을 느끼고 있는 위기는 이 세상에서 받는 고초가 아니라 그의 영육의 평안에 대한 불안입니다.
*시16:9-10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이 절규하고 고통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죽음의 문제 즉 영혼의 구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려질 수 있다고 하는 불안감과 염려 속에서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주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며 그 보호 속으로 그의 몸을 피하고 있습니다. ‘주께 피하나이다.’라는 표현은 완료형으로 그가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여 왔고 그 의지를 지금도 계속하면서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를 항상 요청해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친구가 백악관에 초대되었습니다. 그 날은 ‘불런 전투’의 전날이었기 때문에 백악관은 몹시 분주했고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친구는 밤이 되자 자기의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는데 그 이유는 한 밤에 링컨의 침실에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키가 큰 링컨 대통령이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던 그 날 밤에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위대하신 하나님, 나도 솔로몬처럼 이 백성을 인도할 수 없사옵고,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국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 나라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링컨은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했고 마침내 그는 복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새로운 미국, 위대한 미국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은 고난이 닥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올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온 마음과 모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기도를 드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도울 자를 찾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은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생애 가운데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방백들과 신하들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을 의지했을 때 그 인간의 도움은 처음에는 확실한 것 같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커다란 실패와 좌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하나님만 의지했을 때는 처음에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 같았지마는 그는 완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는 이러한 내용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146:3-4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가 먼저 주께로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피한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기만을 간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 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도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완전히 떠난 자들이 아니었고 여호와도 섬기도 다른 우상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도 함께 섬기라.’고 종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그의 견고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주는 주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즉 ‘주’라는 말 ‘아도나이’는 ‘주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내가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날이 되면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 모이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냅니다. 즉 죽은 영혼에게 음식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친척들은 말하기를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조상은 섬겨야 한다면서 절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죽은 신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 때에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만 신앙하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하는 다윗의 말처럼 참된 행복은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마치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고백과 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구주로 받아들이는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이것은 간사한 혀에서 나오는 위선적인 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신적인 감동에 의한 신령한 고백인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기대해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복을 희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민속 종교가 기복적인 성격이 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복을 갈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이 창조함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이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복 대신에 저주가 임했고 인간이 정복하고 누려야 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수고와 땀은 헛된 것이 되고 슬픔과 좌절과 고통이 삶의 전반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창조 때의 복을 회복하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복을 찾는 길을 알려주어도 그 길로 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길을 찾아다니며 그 마음의 어리석음 대로 우상에게 가서 복을 빌기도 하고,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재물을 모으기도 하며, 높은 권세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진정한 복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신30:15-16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 복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시115:12-13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115:15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비록 땅에 거하지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본래부터 거룩한 무리들이 아닙니다.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존귀한 자들이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존귀함은 세상의 권세나 영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에서 영광과 존귀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령한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들리지 않는 세게, 그러나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빛의 세계입니다. 진리의 세계요, 자유의 세계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를 부르신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포하고 선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를 하나님은 즐겁게 보시고 더욱 존귀하게 여길 것이며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성경을 거짓된 책으로 비웃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놀려대는 사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아침에 교회 학교에 다녀오는 학생을 길에서 만난 그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그러면 사과를 하나 줄게.’ 그는 학생의 믿음을 깨뜨려 보겠다는 속셈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학생은 대답하기를 ‘아저씨,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면 내가 사과 두 개를 드리지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어린 학생은 무신론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참으로 멋지게 반박하고 선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은 성도들은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종교 혼합주의자들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 제 1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므로 형벌이 임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윗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신을 섬기며 그 신에게 피의 전제를 드렸습니다. ‘피의 전제’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제사 의식으로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제물을 드리는 중에 피를 마시는 의식입니다.
둘째,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생명을 드리는 인신제사입니다.
이런 더러운 일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금하시는 것으로 반드시 피의 보복을 받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우상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에서 철저히 금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출23;13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신12: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경배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그것들의 이름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도 없이 우상들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미국의 관문이라고 부르는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신상을 이야기하고 당연한 것처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우상입니다. 그 여신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조상과 부모의 제사를 지냅니다. 성묘도 하며 효도를 다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식을 미풍양속이라 하여 후대에 전하고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의 얼을 기리고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려는 마음은 착하고 좋은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돌아가신 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부르고 그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 번 만난 직공의 이름까지 기억했다가 그를 만날 때에 불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고 항상 부른다면 하나님께서 큰 관심을 가져 주실 것이며,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부부가 그들의 갓난아이에게 139가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트레이시’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름이고 그 이름에 이어서 ‘트레이시 마리 크레아 리사 태미 사만사 크리스틴 알렉산드라..’등등 얼마나 길고 복잡한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긴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딸아이가 자라는 동안 무엇인가 비상하고 특별한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문에 난 이 기사의 제목은 ‘그 이름 속에 무엇이 있나 아이에게 묻지 말라.’였습니다. 이 여자 아이의 부모들은 딸아이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미도 없는 이름이지만 길게 지어 특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수없이 많지마는 그 이름 하나 하나에 매우 신중한 의미와 능력과 권능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 그 이상이며 하나님의 특징과 성품과 영광에 대해 말해 주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엘 엘르욘’ ‘엘 샤다이’ ‘여호와 이레’ ‘엘 올람’ 등으로 불렀고, 야곱은 ‘엘 벧엘’ ‘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라 불렀으며, 모세는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 ‘여호와 메카디쉬켐’ 이라 불렀고, 다윗은 ‘여호와 로이’라 불렀습니다. 기드온은 ‘여호와 살롬’이라 불렀고,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 삼마’ ‘여호와 마케’ 라 불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치드케누’라 불렀으며,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 체바오트’라 불렀습니다. 이 중에 ‘여호와 치드케누’라는 이름의 뜻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여호와 체바오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마케’는 주권의 하나님을 말하고, ‘여호와 메카디쉬켐’은 ‘은혜의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의인들의 아버지’ ‘살아계신 아버지’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등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름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인 권능과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며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역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헬라어 ‘데오스’는 영어로 ‘God’이라고 하는데 모든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의 근본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주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많은 권능과 위엄과 능력을 베푸셨으며,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세계에 그의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알게 하셨습니다. 온 세계에 ’데오스‘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으며 그 이름 아래 모든 열방이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데오스‘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성도의 영원한 분깃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며 죽은 신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업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분깃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과 하나님의 뜻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항상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고 필요하고 타당해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지극히 어리석고 무가치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 있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최대의 축복이며 영광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시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이러한 선택이야말로 참 생명을 얻는 길이며, 참 행복을 받는 길이며, 참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생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거할 때만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약속대로 오직 하나님만 자기의 분깃으로 삼고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는 나의 산업을 지키시고, 나의 잔을 넘치게 하시고, 나의 분깃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기업과 잔을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아름다운 구역을 그 기업으로 할당 받습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역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 아름다운 곳을 만났을 때 그곳을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시오, 나는 하나님의 분깃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마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항상 임재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그 교제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평안할 때나 피곤할 때나 모함을 받을 때에도 항상 하나님께 대한 변하지 않는 신앙을 고수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다윗의 우편에 계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고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평안으로 안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예수 안에 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5:4-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그 영혼이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결단코 멸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시16:9-10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다윗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을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한 육체도 안전히 사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더러운 영을 섬기는 자들은 괴로움이 더할 것이지만 자신은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며 육체도 안전히 거하는 영육 간에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부활의 즐거움은 세상에서 잠시 잠깐 맛보는 그런 즐거움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영혼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 부활을 통하여 얻는 인생의 즐거움을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날입니다. 음력으로 하면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해가 바뀌면 인생도 바뀌고 역사도 바뀝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성도들 역시 놀라운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안에서 하나님의 분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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