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재잡기 2(寄齋雜記二)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2[歷朝舊聞二]
[DCI]ITKC_BT_1340A_0020_000_0010_2002_013_XML DCI복사 URL복사
중종
○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이 청성(靑城) 심순경(沈順經)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친밀하였고 정의가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적에 당해서도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설하지 않았었는데,
평성이 청성에게 술취한 것을 틈타 종묘 사직의 위태로운 형편과 당시 정사의 난잡한 것을 말하여 그의 속을
떠보자 청성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
평성이 그제야 강개하여 울면서 그 누이 월산부인(月山夫人)이 죽을 때에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 없이 말하였고, 청성도 또한 그 가문의 화가 참혹하였던 일을 들어 대꾸한 다음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결정하였다. 이때에 있어서는 비록 처자나 형제일지라도 거사를 알리지 않았는데, 거사하는 날 청성이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쏘기를 겨루려 하는데, 술을 마시고 얼큰한 기분에 가고
싶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따라 주었다. 또 술을 마신 다음 꿇어 앉아 술 한 잔을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가 웃으면서 받았으나, 실은 그것이 영결하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님은 종실 □군
(□君) 아무의 아내였는데, 그에게도 술잔을 드리고 떠나면서, 드디어 군기와 군장을 검열하여 평소에 예비해
두었던 것을 모두 가지고 갔는데, 해가 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샐 무렵 일이 거의 실마리가 잡힌 뒤에야 그의 누님이 비로소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그의 남편과 함께
이불을 둘러쓴 채 서로 붙들고 울면서
“우리는 죄을 많이 지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박정도 하지, 그 사람이 동기간으로
한 집안에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았으니.”
하였으니, 대개 종실로서 연산을 악한 데로 인도하여 요행을 얻은 사람인 것이다.
청성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민망하게 여겨 바로 사람을 시켜 공에게 일러 두었는데, 공이 평성에게 간청하
여 □군을 불러다가 일을 같이하였는데, 마침내 정국정훈(靖國正勳)에 참여하여 비단 화를 면했을 뿐만이 아니게 되었으니, 청성과 평성 두 분이 같이 지낸 교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 대장(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이 당초에 큰 계획을 의논하여 결정한 후에 이내 말하기를,
“아무 아무는 죽여야 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나왔었다. 대개 그가 문장이 화려한 것으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벼락같이 벼슬이 도승지에 올라갔고 통정대부에서 숭정대부가 되기까지 경질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청의(請議)에 죄를 얻은 지가 오래였다.
거사하던 날 세 대장이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순(柳洵)이 옛 정승이므로 불렀다. 문성이 드디어 달려가는
데, 아직 삼경도 되지 못한 판에 길에서 벽제 소리가 들리므로 누구냐고 물었더니, 하인이 대답하기를,
‘도승지다.’고 하였으니, 필시 강혼이 시간을 잘못 알고 대궐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문성이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일러 대궐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니요, 내가 가는 대로 공은 꼭 따라오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 못할 일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강혼이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그의 뒤를 따라 남소문동 어귀에 당도하여 멀리 훈련원을 바라보니,
사람과 말들이 들끓고 등불이 휘황하였으나 오히려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문성이 말을 멈추면서
이르기를,
“오늘은 내 뒤를 따라 잠시도 떨어지지 마시오. 큰일이 닥쳐 왔소.”
하자, 강혼이 그제야 몹시 두려워하였고 말에서 내리자 문성에게 바짝 붙어 따라갔다.
세 대장이 문성을 보더니 일어나 재삼 자리를 사양하였고 좌정되자 평성이 눈을 부릅뜨면서 강혼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누구요?”
하니 문성이,
“강혼인데 이 늙은 사람이 데리고 왔소.”
하였다. 평성이 말하기를,
“전에 약속이 있는데 반드시 먼저 죽이기로 하였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 문성이 두려워 위축되면서 말이 없었다. 청천(菁川 유순정(柳順汀)의 봉호)이 문성의 안색을 살피며
급히 평성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어수선한 시기에 서기 할 사람이 없으니 잠시 맡아보게 했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평성이 고함지르다가 그만두자, 강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아 이쪽 말 저쪽 말을
받아 쓰되, 기민하게 하므로 드디어 모두들 잘한다고 칭찬하였고 마침내 책훈되어 진천군(晉川君)이 되었다.
이때부터 문성을 부형과 같이 섬기어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찾아가 뵈었으며, 새로운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갖다 드렸으며, 안팎 종들에게까지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후하게 해주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그 부인
섬기기를 또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으며, 그 상사 때에는 더욱 정성들여 일을 치렀다.
이것으로 그 위인을 생각해 보면 재주가 넘치고 아첨으로 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니, 아마도 송조(宋朝)의
무리일 것이다.
판중추(判中樞) 구수영(具壽永)이 기괴한 기능과 교묘한 눈가림으로 임금을 종용하여 악을 유도하되 못할 것이
없이 하였으므로 조야(朝野) 옛 사람들이 흘겨보았었다.
세 대장이 거사하던 날, 광화문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한 건장한 종이 말하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각기 천명이 있는 것인데,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급히 술과 음식
을 준비하십시오. 내가 대감을 모시고 가서 요행히 모면할 데를 구하겠습니다.”
하므로, 곧 좋은 안주와 술을 잔뜩 마련하고 말과 종들을 대강 평일과 같이 하여 앞뒤에서 호위하고 나가
진을 치고 있는 군대 앞에 이르렀는데, 종이 초헌(軺軒)의 안석을 들어내어 세 대장이 앉아 있는 건너편에
앉았으나 세 대장 앞에 여러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으므로 구 수영이 와 앉아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가 바로 9월 초 이튿날로서 세 대장이 밤새도록 한데 앉았고 속이 비어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치고 한편
으로는 시장하였으나 감히 말을 못하는 판이었다. 이 때에 그 종이 찬합을 가져다 차례차례 바치고 또 큰 술
잔을 번갈아 올렸다. 여러 분들이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손에 닿는대로 마셔 너댓 번이나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것이 뉘 집 물건이냐?”
고 물으므로, 그 종이 구 수영을 가리키면서,
“구 대감께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였다. 세 대장이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는 찰라, 그 종이,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功)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께서 속이 비어 어떻게 큰 일을
끝내실 것입니까?”
하였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이 심히 옳다고 하였다. 구 수영이 이로 인하여 세 대장들과 말을 붙이게
되고 점차로 기회를 노려 계책을 마련하는 일이 있어, 드디어 책훈(策勳)되어 군(君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이
되었다.
구수영의 죄악이 임사홍(任士洪)보다도 더 한데, 비단 죽음을 모면했을 뿐아니라 도리어 전화위복하였으니,
그 당시 세 대장의 처사가 소홀하였던 것을 이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세 대장이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지혜가 넉넉하고 꾀가 많아서 창졸간에 쓰기에는 적당하나 헤아릴 수 없이 간사하고 교활하므로
또한 뜻밖의 변이 없을 수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 것인가?”
하니, 모두들,
“역사(力士)를 보내어 불러오되, 만약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으면 죽여버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드디어 불렀더니, 과연 즉시 바깥 문에 나와 바로 말에 안장을 갖추어 타고 와서 첫마디에 말하기를,
“오늘의 종묘사직에 대한 큰 계책이 누구에게 있소.”
하였다. 세 대장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말할 것도 없이 대군(大君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있소.”
하자, 형조 정랑(刑曺正郞) 장정(張珽)이 칼을 안고 앞으로 다가서면서,
“대군의 저택이 경비가 극히 허술한데, 어찌 호위하는 조치가 없소.”
하므로, 세 대장이 공수(拱手)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의 실수였소.”
하고, 바로 심순경(沈順經)을 선발하여 위사(衞士)들을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게 하였다.
장정이 뒤에 일등으로 책훈(策勳)되어 하성군(河城君)이 되었는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세 대장이 광화문 밖에 진을 치고 사복사(司僕寺)에 저장된 마초를 불피었는데 불빛이 대낮같아 궐안이 진동
되므로 입직했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뿔뿔이 달아나 숨는데 어떤 사람은 수채구멍으로 빠져 나가기
도 하고 혹은 대궐 담을 넘어서 도망치기도 하여 연산군이 당황하여 여러 관원을 불러 들였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활과 살을 절취하여 가지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승지 윤장(尹璋)과 이우(李堣)와 조계형(曺繼衡)이 대궐 담 위에서 군중(軍中)에게 외치기를,
“오늘 추대한 분이 누구냐?”
고 하니, 곧 응하기를,
“진성대군(晉城大君)이신데, 벌써 왕대비의 허락을 받았소.”
하자, 세 사람이 그제서야 밧줄을 타고 내려와 달려오므로 사람들이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연산이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미친듯이 난폭한 짓을 한 지가 10년이 넘어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된 것을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할 것없이 모두 알고 있었는데, 후설(喉舌)과 같이
가깝고 밀접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한 가지 일도 바로 잡는 말이 없다가, 변을 알게 되자 마자 처신할
의리를 생각지 않고 천명이 돌아간 것을 엿보아 비로소 궐문에서 나올 생각을 하였으니, 비록 활과 살을 훔치
고 수채구멍으로 나온 사람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마는 역시 한 때 화를 모면하려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세 사람이 모두 논핵당하여 파면되었다.
반정한 뒤에 귀양살이가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몹시 기뻐서 실소(失笑)하기도 하고, 혹은 반색하
면서 서로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까지 하였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도 아산(牙山) 배소(配所)에서 그 소문을 듣고 한숨을 내어 쉬며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고, 또한 고기를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옛 임금의 생사를 몰라 감히 먹을 수 없다.”
하였으니, 올바르게 처신하였다 하겠도다.
평성(平城)이 이미 큰 공을 성취시켜 바로 명상을 하게 되었는데, 중종이 특별히 후하게 상을 내리고 훌륭한
저택을 골라주어 살게 하고 또한 흥청(興淸) 3백을 내려 주어 장획(藏獲)과 보화가 풍족하게 되니, 의복, 거마
의 모셔 받듦이 분수에 넘친 것이 많았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예조 좌랑(禮曺佐郞)으로서 공사(公事)를 가지고 찾아가 통자하였더니, 즉시 부르
므로 대문을 3개나 지나서 들어가 대청 앞에 당도하니, 돌 다듬어 섬을 쌓았고 뜰에는 반송(盤松 가지가 옆으
로 퍼진 키가 작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뿐이었는데, 붉은 난간 푸른 창문 안에는 비단 자리
가 가득히 깔려 있는데 화려하여 눈이 부시었다. 한 대문을 더 들어서니, 날아갈 듯한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붉은 발이 땅에 닿도록 드리웠고, 말소리가 은은하여 마치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각 동쪽에서 한 여인이 머리에는 큰머리 장식을 하고 몸에는 노란 장삼(長衫)을 입고 붉은 치마를 땅에
끌면서 나와서 상공(相公)이라고 불렀다. 호음(湖陰)이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그 여인 앞에
이르니, 또 한 대문이 조그마한 당(堂) 밖에 있었는데,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드디어 그 문을 들어서니,
평성(平城)이 연못 동쪽 평상 위에 앉았는데 수놓은 베개와 화려한 자리에 두 계집종이 파리채를 들고
좌우에 서 있었으며, 당 위 발안에 앉아 있는 시녀가 또한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평성이 일어서서 맞으면서
호음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손을 들어 서쪽 평상 위에 앉혔다. 호음이 절한 다음 꿇어 앉으면서,
“이 공사(公事)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였으니, 대개 예문(禮文)에 관한 일이었다. 공이 그 공사를 받아서 자리 오른쪽에 놓으면서,
“내가 무부(武夫)로서 무슨 의리를 아는 것이 있겠나. 종묘사직의 덕으로 때를 만나 일어났다가 이런 과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를 뿐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공사에 참여하여 의논 할 수
있겠나? 본조(本曺)의 판서가 있는데, 어찌 잘 처리하지 않겠나? 좌랑(佐郞)의 젊은 풍채를 보니, 앞길이
지극히 원대하겠네. 이 늙은이의 술이나 마셔주게나.”
하고, 곧 술을 올리라고 외치니, 여러 시녀들이 일제히 꿇어앉아 대답하자, 벌써 네 시녀가 술상을 받들고
나왔는데, 진수성찬이 질펀하여 어디서부터 젓가락을 대야 할지 몰랐다.
여자 악공 수십 명이 각기 관현악기를 들고 못 위에 둘러앉아 풍류를 연주하는데 맑은 소리와 묘한 가락이
흥겹게 귀를 울렸다. 공이 자주 잔을 들어 권하면서,
“무부라고 싫어하지 말게.”
하므로, 호음이 일생 동안 크게 경계하는 것이면서도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취하게 마시고 일어서니,
공이 여러 시녀를 시켜 문 밖까지 부축하여 주게 하였다.
호음도 많은 저택을 두었고 자기 몸 봉양하기를 극히 사치스럽게 한 것이 대개 평성을 흠모했던 것이다.
말년에 가세가 대성하였는데도,
“어찌 그의 만분의 일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언형(曺彦亨)이 단천군수(端川君守)였고 강혼(姜渾)은 함경감사(咸鏡監司)였는데, 조와 강이 소시적부터
죽마고우(竹馬故友)로서 성장하여서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조의 성품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해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어울리지 않아 전랑(銓郞) 벼슬을 거쳐 집의
(執義) 벼슬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미끄러지기도 하고 여러 번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찍이 강이 연산조에
있으면서 하는 짓을 보고는 분개하고 미워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정묘(丁卯 1507, 중종 2) 무진년 사이에
단천(端川)에 있으면서 강이 감사로 순시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집안사람
들에게 일러 막걸리 한 통을 준비하게 하였다. 아전이 와서 말하기를,
“감사가 근방에 당도하니 예의가 당연히 조심스럽게 맞이해야 합니다.”
하자, 아프다고 핑계하여 놓고, 날이 어둡자 감색(紺色) 직령(直領)에 커다란 신을 끌며 종 하나를 시켜 술통을
메고 바로 상방(上房 그 관아의 우두머리가 있는 방)으로 찾아가 밖에서 외치기를,
“혼(渾)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강이 그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맞으면서,
“나 여기 있네, 나 여기 있네.”
하여, 매우 반가운 기색을 하였다. 조가 앉으며 미처 인사도 나누지 않고 먼저,
“날씨가 찬데 자네 한 잔 하겠나?”
하고는, 손수 큰 잔을 들어 마시는데 안주가 없었고, 강도 또한 제 손으로 부어 마시는데 세 순배가 지나자,
조가,
“자네가 지난날 한 짓은 개돼지만도 못한데 누가 그 먹다 남은 것을 먹겠는가. 자네가 젊었을 적에는
총명하고 민첩해서 사귈 만하다 했었는데 어찌 조그마한 기능을 부려 처신을 형편없게 함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는가?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만 같지 못할 것이네, 내가 글을 보내어 절교하고 싶은 지 오래었지만
옛 친구로서 정의가 아직도 연연(戀戀)하고 또한 한 번 만나 크게 꾸짖은 뒤에 절교하려고 하던 차인데,
이제 서로 만나 보았으니, 나는 내일이면 떠나갈 것일세.”
하고는, 다시 한 잔 더 하자면서 연거푸 석 잔을 주었다. 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시종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조가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뒤에 판교(判校) 벼슬까지 하고 돌아갔다. 이이가 곧 남명(南冥)
선생의 아버지이니, 그의 의기가 과격하게 드날리던 품이 대개 타고난 데가 있었던 것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젊었을 때 생원(生員)ㆍ진사(進仕)ㆍ회시(會試)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였었는데,
방을 내걸 때가 되어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장원을 할 수 없다 하여 진사에는 2등을 시키므로 이것을 평생
한스럽게 여겼었다.
공이 시관(試官)이 되자 김구(金絿)가 생원ㆍ진사에 모두 장원을 하였는데, 여러 시관들이 또 한 사람이
두 가지 장원이 될 수 있다고 하므로, 공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과 한퇴지(韓退之)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할 것이 있느냐.”
고 하여, 드디어 두 가지 장원이 되었다. 김 구의 문장도 이미 좋았거니와 초서(草書)는 당대가 추앙하여
제일이라 일컬었었다.
판서 한형윤(韓亨允)은 서평(西平) 계희(繼禧)의 증손자인데 헌출한 인품이 풍도가 있었다. 종족(宗族)들에게
돈독하여 널리 부모 없는 사람과 홀로된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그 혼례와 장사를 도와주었고, 여러 집안
자제들이 서당에 다니게 되면 멀고 가까움을 논하지 않고 매양 퇴근할 때면 반드시 몸소 나아가 글 짓는 것과
강독(講讀)하는 것을 보살피되 지성으로 하여 비록 바람 불고 눈 내릴 적에도 그만두지 아니하였으며,
종이와 붓도 많이 갖다 주어 장려하고 권면하여 기어코 성취하는 바가 있게 하였다. 그런데 전부터 농담을
몹시 좋아하여 그다지 검속(檢束)하지 않는 편이었다.
기묘(1519, 중종 14) 무렵에 항간에 「소학지(小學之)」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공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데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요즈음에 「세 가지 지〔三之〕」라는 말이 있는데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하였다. 모두들 못 들었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소학지(小學之)ㆍ보당지(寶唐之)ㆍ좌장지(佐藏之), 이것이 즉 「세 가지 지」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만히 있기도 하였다. 속담에 여자의 음부를 「보당지(寶唐之)」라
하고, 남자의 국부를 「좌장지(佐藏之)」라 하니, 대개 당시의 소학의 도리〔小學之道〕와 향약의 가르침〔鄕約之
道〕을 조롱한 것이다.
또한 정민공(貞愍公) 안 당(安塘)과 서로 좋아하였는데 안공의 여러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크게 경축연을 베풀었다. 공이 그 자리에서 정민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어찌 성사(盛事)가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안(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이런 까닭으로 선류(善類)들이 크게 미워하여, “한 아무개는
연산조 때에 일찍이 부모의 3년상을 단축하여 1년으로 하였고 공공연히 고기를 먹었다.”
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형조 판서가 되자 행실이 없다 하여 논박(論駁)하려 하므로 누군가가 해명하여
중지시켰었다.
공의 어머니는 공이 낳은 지 돌도 못 되어 돌아갔고 공의 아버지 부정(副正)은 병자(1518, 중종 11)에 세상을
떠났는데, 계모는 아직 탈없이 집에 살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스스로 취한 불행이라고 하였다.
무인년(1518, 중종 13) 무렵에 서당(書堂) 관원들의 큰 모임이 있었는데, 선배들도 많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파한 뒤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과 유 운(柳雲)이 함께 자는데, 밤중에 유 운이 술이 깨지 않아 벌거벗은
채 일어나 정암을 밟고 넘어가 난간 머리에서 오줌을 누고, 돌아올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자 정암이,
“종룡(從龍 유운의 자) 종룡, 이게 무슨 꼴인가.”
하니, 유운이
“이것이 좋은 걸세. 자네 같은 소학의 도리〔小學之道〕는 본받지 않으려 하네.”
하므로, 정암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풍채와 기골을 아껴 다만 검속(檢束)하기를 권할 뿐이었다.
정암 선생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나가는데, 고형산(高荊山)이 호조 판서로서 앞에 서서 공이 뒤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느릿느릿 하였다. 이것은 대개 그의 거드럼을 보인 것이다. 선생이, 그를 모시고 가던 아전을
잡아 가두었다가 하루만에 놓아 주므로 사람들이 그 온당한지 않은지를 묻자, 선생이,
“그의 행동은 사대부가 길을 양보하는 미풍을 크게 잃어버린 것이니 참으로 잘못이다. 백부(栢府 사헌부)가
비록 풍속을 단속하는 것이나 그도 대신이니, 내가 감히 단속할 사람이 아니다. 그 아전을 가둔 것이 지나친
것 같기에 곧 석방한 것이다.”
하였는데, 고형산이 그 말을 듣고 지극히 옳게 여겼었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형조 판서로서 일찍이 승지 윤자임(尹自任)을 방문했었는데, 혹은 부제학 김구(金絿)라
고도 하였음 그의 장인이 나와서 읍하고 말하기를,
“내 사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잠깐 들어오라.”
하고, 바로 맞아 올렸다. 앉은 다음에 그 사람의 이야기가 형조 공사(公事)에 언급하여 무슨 청탁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으므로 공이 바로 정색하고 한동안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는데 윤 자임이 돌아오자 그 사람이
사과하고 들어가 평생토록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공은 진실로 사사로운 것으로써 관계하지 않는 것
뿐인데, 그도 또한 조정의 관원이면서 이토록 공을 몰라 보았을까? 낭패를 당해 마땅하도다.
어느 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나에게 말하기를,
“공은 심청천(沈聽天 심수경(沈守慶)) 집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기묘년의 변 때 지정(止亭 남곤(南袞))과
여러 사람들이 서문(경복궁의 서문 연추문)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입직한 승지들이 간의대(簡儀臺 기상대)를
쳐다 보느라고 그것을 미처 몰랐던 것인데, 훗날 사람들이 그 종적을 찾아 내려고 하여 신무문(神武門 경복궁
북문)으로 들어 왔다고 하였던 것이라.”
고 하였다. 청천(聽天)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평소에 존경하여 사모하던 분이나 이 일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젊었을 적에 정존재(靜存齋) 참의 이담(李湛)에게서 직접 들었는데,
“내가 태학(太學)에 있을 때, 지정(止亭)이 죽은 지가 얼마 안 된 판인데, 심정(沈貞)의 제문(祭文)을 베껴온
사람이 있었다. 그 속에 북문(신무문)으로 들어간 일은 우리 두 사람(남곤ㆍ심정)이 함께 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심정의 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역력하게 남아 있으니 비록 효성스럽고, 인자한 자손일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는 자신이 그것을 공으로 여겼는데, 자손이 감추고자 한들 되겠는가.”
하였고, 나도 말하기를,
“《승정원일기》에도 모두 ‘신무문으로 들어 갔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오.”
하였더니, 오성이 말하기를,
“자손들이 한 말은 참으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만약 서문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면 그 일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금석같이 굳은 교분이 있는 사이였다.
문익공이 등대(登對)하였는데 중종이,
“경에게 친구가 있느냐?”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신은 친구가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 후에 문경공이 입대하였는데, 중종이 또 묻자,
“정광필이 신의 친구입니다.”
하니, 상감께서,
“경 두 사람은 ‘지기지우(知己之友)’라고 할 만하도다.”
하였었다.
기묘년의 변 때는 문경공이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들이,
“문경공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가라앉혀 변이 없게 했을 것이다.”
하였고, 문익공도 또한 그가 일찍 죽어 나 혼자 이 변을 당하게 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문경공이 천품이 호탕하고 뛰어나 탁월한 큰 절개가 있었으며, 성격이 술을 좋아하여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여 쓰러져야 그만두기도 하였다. 일찍이 국화 8분(盆)을 길렀는데, 한 가을에
활짝 피므로 대청 가운데 들여 놓으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았다. 공이 그 향기를 사랑하여 끊임 없이 완상하였
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좋은 손님이 여덟 분 올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
하였는데, 해가 저물어도 적적하게 손님이 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여쭙기를,
“벌써 술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자, 공이
“조금만 기다려라.”
하였다. 둥근 달이 떠 빛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꽃빛은 난만하고 달빛은 명랑하자 공이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며 8개의 국화분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나의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각각 그 앞에 좋은 안주를 차려 놓고 말하기를,
“내가 은도배(銀桃杯)에 술을 따르리라.”
하고 각각 두 잔씩을 따라 주고 파하였는데, 공도 또한 취하였다.
○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배가 크고 불룩해서 음식을 두 사람분을 먹었다. 사람들이 혹시 음식을 대접하면
좋고 나쁘고,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아 입이 놀 때가 없었으며, 주량은 더욱 한이 없었다. 호조에 있을 때인데,
하루는 아전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나의 아는 사람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는데, 내가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전송할 터이니, 장막을 치며
술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라.”
하였다.
이튿날 조반이 끝난 뒤에 가마를 재촉하여 나가보니 과연 관문(館門) 밖에 장막을 치고 그 옆에 술 3동이와
안주 상자를 상 위에 벌려 놓았다. 공이 앉자 한 아전이 바삐 와서 고하기를,
“소인이 대궐 문에서 보니, 단지 대포만호(大浦萬戶)가 하직하는데 동대문을 거쳐서 나갔을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가 내 옛 친구로서 일찍 약속이 있었는데 어찌 속였을까?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밥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목이 자못 마르니, 시험삼아 한 대접 마시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안주 상자를 열어 두어 젓가락 들고보니, 곧 그 절반이 없어졌고 연거푸 10여 잔을 마시니
한 동이가 다 비었다. 공이 말하기를,
“녹사(錄事)도 일찍 출근하여 필시 배가 고플 것이니, 한 잔을 권해야겠다.”
하고, 또,
“서리와 하인들도 여러 시간 분주히 뛰어다녔으니, 또한 마셔야 할 것이다.”
하고는, 공이 반드시 대작을 하였다. 아직 한 동이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공이 또한,
“어찌 주인에게 권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여, 관문의 첫째 기둥에서부터 잔을 들어 권하여 마치 대작하는 사람이 있는 것같이 하여 세 동이를
다 비우고 나서야 얼큰히 취하여 돌아갔다.
나는 생각건대 문경공의 행동은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데서 출발한 것으로 꽃을 보고 흥이 발동한 것이니,
그 기상이 진실로 치켜세울 만하나, 고형산은 주량을 채우려는데 지나지 않은 것이니, 어찌 술이나 마시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공유물과 사유물은 구분이 다른 것이니, 문경공은 호걸스럽고 고공은 거칠다
하겠도다.
○ 내가 일찍이 기묘년 사건의 당시 제현 정암(靜庵) 선생 이하 분들의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불과 두어 마디의 말로서 20여 자뿐이었다.
“신이 세상에 없는 대우를 받기로 배운 것을 전개시켜 기필코 당우(唐虞)의 태평시대와 같은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하였을 뿐, 별로 괴이하고 과격하게 세상을 현혹시켜 어지럽게 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을 뿐이었으며, 귀양가던 날 중종이 또한 승지를 보내어 금부 문밖에서 유시를 전달하였는데,
“너희들의 이번에 한 일이 그 마음이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괴이하고 과격함이 버릇이 되어 인심을
현혹시켜 어지럽혔으니, 여러 재신들의 아룀이 또한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아아! 제현들의 공사나 임금의 유시가 하늘과 땅, 해와 달이 함께 드리우고 함께 임하듯 하여 천년
후에 있어서도 진실로 남은 유감이 없게 되었건마는 여러 간신들의 여러 가지 음모가 엎치락 뒤치락 사건을
날조하여 끝내 문드러 없애 버리고야 말았으니 통탄스럽도다.
○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는 간사하고 교묘한 말재주로 박승문(朴承文)ㆍ신윤무(辛尹武)를 고해 바치고
당상관까지 되었었다. 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지평으로 있으면서 단독으로 그를 죽여야 할 죄상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비록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막개를 천하게 여기고 미워
하여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다. 그의 집이 사복시 냇가에 있었는데, 붉은 띠를 띤 조복(朝服)차림으로 일하고
아침 저녁에 시장 거리에 나서면 동네 아이들이 곳곳에서 떼를 지어 기왓조각을 던져 쫓으면서 큰 소리로,
“고변한 정막개야, 붉은 띠가 가소롭구나.”
하니, 막개가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기어 돌아 갔었다. 아이들이 항시 그러하였고,
사람들도 또한 침뱉아 욕하였는데, 마침내 굶어 죽었다.
○ 송당(松堂) 박 선생이 일찍이 김해 부사(金海府使)일 때에 동헌에 있다가, 동쪽 이웃 집에서 나는 계집의
울음 소리를 듣고 급히 형리를 불러 그 계집을 잡아 오게 하였다. 잡아 오자, 공이 묻기를,
“네 어찌하여 우느냐?”
대답하기를,
“제 남편이 아무 병도 없는데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재차 묻자, 또한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사이좋게 살아온 것은 이웃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뜰 아래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렇습니다. 천만 번이라도 다른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사람을 시켜 그 계집의 남편 시체를 들고 오라 하여 안팎, 위아래를 이리저리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여인이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면서 통곡하기를,
“하늘이나 내 속을 알지, 사또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의심하십니까.”
하니, 하인들이 속으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공이 힘센 군교(軍校)를 시켜 그 시체를 반듯이 눕히고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손에 힘을 주어 누르게 하였더니, 과연 배꼽 속에서 크기가 가운데 손가락 만한 대꼬챙이가 튀어 나왔다. 공은 곧 그 계집을 결박시키면서,
“내 네가 간통하는 자가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빨리 말하라.”
하자, 드디어 굴복하여 말하기를,
“아무 동네의 아무개와 동거하기를 약속하고 자는 틈을 타 죽였습니다.”
하였다. 군교를 급히 보내어 그 정부를 잡아 왔는데 그 말이 부합되므로 법대로 조처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처음에 그 울음소리를 들으니 슬퍼서 우는 소리가 아니기에 잡아 왔으며, 시체를 검사할 때 겉으로는 가슴을
치며 울지마는 실상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에 알았다.”
고 하였다.
하루는 들새가 동원 뜰 안에서 놀란 소리로 세 번 울고 남쪽을 향하여 사라졌었는데 공이 급히 가족들을 불러
행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짐을 미처 꾸리기도 전에 금오랑(今吾郞 금부도사)이 들이닥쳐 공이 반역을 모의하였
다 하여 잡아 갔다. 옥에 이르러 심문을 받아 뼈마디가 다 부서졌는데 공이,
“누가 고발한 것이냐?”
고 외치자, 심문하는 관원이,
“아무개가 고발한 것이다.”
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과 원한 관계는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이 나보다 더하니, 그 유인숙이
잡힌다면 나는 살아날 수 있다.”
하였다. 중종이 친히 국문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무슨 까닭이냐? 고 묻자, 공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논밭을 뺏으려고 김해(金海)에서 소송하다가 사리가 막혀 쫓겨났습니다.
경주 부윤이 그 간사하고 교활한 것에 노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원한
이 신보다 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유인숙에게 묻기를,
“너는 아무개를 아느냐? 너는 아무개의 고발로 이렇게 된 것이다.”
하자, 유가 비로소 그 경위를 알아차리고, 대답이 공의 진술과 같으므로 그 사람을 국문하니, 그가 솔직히
자복하여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의 학문이 조예가 정밀한 경지에 이르러 《주역》이치에 깊었고 또한 남의 말과 기색을 잘 살폈으며, 천문ㆍ
지리ㆍ성명(性命)ㆍ산수(算數)를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형을 받은 뒤로는 의학 서적을 널리 보아《경험방
(經驗方)》ㆍ《활인신방(活人新方)》등의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중종 때에 어떤 사람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아무개가 그 제자들을 거느리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하자 명을 내려 모두 잡았는데, 겨우 갓쓸 만한 사람이 수십여 명이요, 15~16세된 사람이 또
수십명이요, 12~13세된 자가 60~70명이요, 10세 이상이 또한 수십명이었다. 금부에 있는 수갑, 차꼬, 쇠사슬
등이 반 이상 모자라므로 모두 새끼로 목을 얽어서 종루(鐘樓) 아래에 앉혀 놓았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당시 나이가 열 살이었는데, 같이 공부하는 여러 아이들을 따라 나간 지 하루가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부모들이 찾아보니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문익공(文翼公)이 아뢰기를,
“신의 손자 옥수(玉壽)곧 임당(林塘)이다 가 열 살인데, 역시 죄수들 중에 끼어 있기에 감히 와서 죄를 기다립
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니, 청컨대 이 옥사를 살펴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감께서 추관을 시켜 조사하였더니, 여러 어린 아이들이 남산 위에서 옷을 벗어 깃발을 만들고 나뭇
가지를 꺾어 창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한 것이요, 다른 아무 단서가 없으므로 고변한 자를 도리어 죄주었다.
노영손(盧永孫)ㆍ정막개(鄭莫介) 이외에, 유중영(柳重榮) 이하가 고변하다가 도리어 죄를 받은 자들이 잇달아
나오는데도 오히려 시끄럽게 그치지 않으니, 그 심사를 과연 헤아릴 수 없다.
○ 중종이 경연에 임할 적에는 반드시 세자를 임금 자리 동쪽에 나와 앉게 하였는데, 하루는 경연관의 강론이
끝나고 막 글뜻을 논할 때인데 임금이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물었으나
좌우가 모두 잠잠하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돌아보며, ‘세자는 아느냐’고 말하자, 세자가 일어서
서,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데 그 뜻은 이러이러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상감께서도 재삼 돌아보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넘쳐 흘렀다. 이 당시의
거룩한 일이야말로 제왕가(帝王家)로서 천고에도 없는 일이었으며, 우리 나라 종묘 사직의 경사로서 훌륭하고
도 아름다운 일이었다.
○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이 갑자년(1504, 연산군10) 봄 강경과를 볼 때에 점장이에게 묻기를,
“금년에 내가 장원이 되겠는가?”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장원을 어찌 감히 바라겠소. 병인년에나 급제하겠소.”
하였다. 그는 강(講)에 나아가 점수 20분을 얻고, 아직 남은 경(經)이 있었다. 급히 점장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강에 합격했으니, 네 말이 망령된 것이다.”
하자, 점장이가 한참 동안 있다가,
“비단 급제를 못할 뿐 아니라 큰 액운이 당장 올 것이니 조심하시오.”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죄인의 제자라고 하여 하옥시켰다 귀양 보냈는데, 중종이 반정하자
바로 전시를 보게 하였으니, 점을 잘 친다고 하겠다.
○ 절효선생(節孝先生) 성수종(成守琮)은 충숙공(忠肅公)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일찍이 기묘년의 가을 과거를
보았는데, 정암(靜庵)이 대사헌으로서 시관에 임하여 있었는데 그 시권(試券)을 보고 병과에 합격시켰다.
그 뒤에 남곤이, ‘이는 정암이 사사로운 청탁으로 합격시켰을 뿐더러, 그 대책문도 문리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그는 드디어 그의 형 청송 선생(聽松先生) 수침(守琛)과 함께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평생 다시는 과거보러 가지 않다가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절효 선생이라고 불렀다.
후에 복과를 청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의 어머니가 듣고서 말리기를,
“설령 복과가 된다 하더라도 땅속에 있는 내 아들의 넋이 반드시 부끄러워 할 것이니 그러지 말라.”
하였고, 모재 선생(慕齋先生)이 그 묘비문을 지었다. 세간에는 그가 파방(罷榜)된 뒤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한화(閑話)속에 서술해 놓은 사람까지 있으니,
그 견문이 고루하여 진실로 한번 웃을 만한 것도 되지 않는 것으로,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 옛날부터 소인이 옳은 사람들을 해칠 적에는 비밀리에 정탐하여 먼저 필승의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그러므로 못된 책략을 다 부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조부(祖父 박소(朴紹))는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사간으로서 먼저 그 안로의 칼날에 걸렸다.
뭇 소인들은 먼저 사람을 시켜 자기와 마음이 다른 사람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 어디어디를 출입하는 것과
어떤 사람이 왕래하여 서로 통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는데, 우리 할아버지와 전한(典翰) 조종경(趙宗經)이 한꺼번
에 탄핵을 받았다.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밀양 부사로 있다가 대신 사간이 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
던 날, 먼저 우리 할아버지를 방문한 것을 정탐하던 자가 몰래 알리어, 회재도 갑자기 탄핵을 받았다.
우리 집에서 주인으로 섬기던 사람은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이었는데, 한동네였고 또한 일찍부터 친척의
분의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김안로가 귀양갔다가 풍덕(豐德)으로 가까이 옮겨지자 바야흐로 다시 쓰이기를 도모하는데 음모와 비밀 계획
이 못할 짓이 없었다. 이에 대사간 이빈(李蘋)이 동궁보호를 구실로 할 것을 교사하여 주자 기꺼이 좋은 계책
이라고 하고 그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희(禧)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좌상 이행(李荇)의 문앞에 가 서 있게
하였다가 과연 그 교묘한 꾀를 썩먹게 되어, 안로가 조정으로 들어와 사림에 해독을 끼치고 종묘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다. 소인의 난을 일으킴이 옛날부터 이러한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가 파직되어 남양(南陽)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가까운데 있는 것을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합천(陜川)으로 돌아가니, 합천에서 서울의 거리가 아흐레 길이었다.
일찍이 이상(二相) 김광준(金光準)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는데, 감광준에게 잘 달리는 종 하나가 있어 능히
3백 리를 갈 수 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혹 할아버지에 관한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이 종을 시켜 알렸는데,
사흘이면 도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박 아무와 김숙예(金叔藝 김광준의 자)는 기질이 서로 유사하지 아니하여, 그 사이는 비단 빙탄(氷炭) 정도가
아니었는데 교분이 이렇게 좋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합천에서 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 소리가 방에 가득하였으며, 큰아버지가
겨우 스무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진주(晉州)에 사는 생원 이광(李光)과 절친한 사이였다. 작고하
신 것을 알리자 미투리 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20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찾아 왔었는데, 할아버지 댁 뒷산
에 이르자 큰 소리로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너의 아버지가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찾으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찾았구나.”
하고, 이내 내려 와서 통곡하고 갔는데,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 준 곳으로서 뒤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東萊) 정씨(鄭氏)의 산소에 다음 간다고 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우리 할아버지와 다만 한 때만 좋아했을 뿐이 아니라 부고를 받자 술을 가지고
무덤에까지 와서 제사지내었다. 큰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올라갔더니 이미 끝나 돌아간 뒤였으니,
아마 연루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 문집 속에 제문 두 수가 있는데, 모두 제(祭) 지낸 뒤에 우리 집에 주지
않고 가지고 간 것이다.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이 우리 할아버지와 이성재종(異姓再從)간이었고 또 서로 친구 사이였다.
심연원이 부제학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제주 목사가 된 것은, 대개 우리 할아버지 때문에 누를 입은
것이다. 하루는 목이 메이도록 통곡하면서,
“어진 이가 죽었구나. 어진 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곳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사람 김세한(金世翰)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니 곧 우리 할아버지
의 부고를 받은 것이었다.
김세한은 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힘이 세어 무사의 일인자였다. 정랑 벼슬을 하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누를 입어 죄를 받고 제주에 귀양간 사람이었는데 그도 또한 슬피 울어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었고,
뒤에 병사(兵使)가 되었다.
○ 승지 민세량(閔世良)이 일찍이 수찬으로 어느 사위맞이 잔치하는 집에 갔다가 한 이름난 관원 장령(掌令)이
라 하였음 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야흐로 시사에 대한 논의를 부회하고 있었으니, 김안로의
집에 드나드는 자였다. 마침 여름 햇볕이 바로 내려 쪼이는 것을 보고 자리를 당겨 내려 앉으면서 말하기를,
“당양(當陽 햇볕이 쨍쨍하다는 말인데 권력이 한창이라는 뜻)이로군.”
하니, 그가 다만 돌아다 보며 무릎을 거둬들일 뿐이었다. 자리가 파하자 곧 말이 누설되니 공이 알아차리고
드디어 현령 자리를 원하여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었는데, 김안로가 경차관(敬差官) 김공간(金公幹)을
교사하여 문서를 뒤져 두 가지 것을 적발해 내니, 하나는 쌀 5말과 어물 5포를 김헌윤(金獻允)에게 보낸
것이요, 또 하나는 약과 한 그릇을 심순경(沈順經)에게 보낸 것이었다.
김헌윤은 젊었을 적에 사귄 사람으로 연산(連山)에 귀양가 있었고, 심순경은 처조부로서 나이 80이 넘은 분이
었는데, 죄인에게 사사로이 선물을 보냈다고 하여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문초한 끝에 곽산(郭山)으로 귀양보내
었다. 소인의 마음이란 한 번 그 뜻에 거슬리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두지 않는 것이니, 어지러운 세상
에서 처신할 때는 행동을 삼가고 말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지극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 영상 홍인재(洪忍齋 홍섬(洪暹)의 호)가 이조 정랑으로 있으면서 술에 취하여 이조 참판 허흡(許洽)에게
찾아 갔다가 이야기 끝에 자못 안로를 건드렸고 또 말하기를,
“〈진회전(秦檜傳)〉을 안로에게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하자, 허흡이 곧 말리면서,
“정랑이 취하였군. 무슨 말을 그렇게 경솔히 하오. 내가 비록 들었던들 어찌 차마 누설하겠소.
그러나 공이 많이 취하였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였는데, 홍인재가 말하기를,
“돌아가는 길에 또 계씨(季氏) 대사헌 영감을 만나볼 작정이오.”
하였다. 허흡이 깜짝 놀라면서
“나는 공의 직속 당상관이니 취중에 와 보아도 상관 없지마는 나의 아우와는 이미 교분이 없는 처지요, 또
그는 법관의 장이니, 혹시 조그마한 실례가 있게 되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부디 가지 마시오.”
하고, 이어 홍인재의 하인을 불러, ‘조심해서 집으로 모시고 돌아가지, 딴 곳에 들리지 말라’고 주의시켰다.
홍인재가 작별하고 나와 바로 허항(許沆)의 집으로 향하는데, 하인이 말릴 도리가 없었다. 허흡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과연 이미 와 있었다. 허흡이,
“내 잘못이다. 내 집 하인을 시켜 억지로라도 그 집으로 돌려 보냈더라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이제 큰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급히 말을 달려 가보니, 홍인재가 이미 돌아간 뒤였다. 허흡이,
“홍 정랑이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었는데 여기 와서 무슨 말을 하던가? 영감도 보면 취한 것을 알았을
것이라.”
고 하자, 허항이 다짜고짜,
“얼굴이 백옥 같던데 무엇이 취했어요. 다만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허흡이,
“겉은 비록 그러나 그 실상은 크게 취했으니, 비록 한 말이 있더라도 상대하여 겨룰 것이 없느니.”
하였으나, 허항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허흡이 할 수 없이 돌아 왔다.
허항이 그날 밤에 안로의 집에 갔다가 그 이튿날 일찍 단독으로 상감께 아뢰어 홍인재를 국문과 옥사를 생략
하여 하루에 곤장 1백 20대를 치자, 기운과 숨이 가물가물하여 곧 끊어지려 하는데 바닷가로 귀양보냈다.
옥문을 나오기 전부터 뼈마디가 모두 부숴지고 숨쉬지 않으므로 벌써 죽었다고 하여 담 밑에 갖다 두고 거적
을 덮어 두었는데, 까마귀 떼가 내려다 보다가 목을 움츠리고 도로 날아 갔었다. 그래도 가물가물하여 자는 듯
하였는데 갑자기, ‘위관(委官), 위관’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나므로 판부사이하가 급히 내려가 반겼다.
공이 눈을 뜨고 보니 위관이 바로 그 허흡 공이었다. 공이 가만히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오.”
하였다.
그 후 30년 만에 공이 재상이 되어 위관으로 금부에 앉았는데, 그 당시에 매를 잡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있었
다고 하였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본래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백 사람의 허항이 있었던들 한 사람
인재(忍齋)를 죽일 수 있을 것이며, 허흡이 허항을 그 노(魯)와 위(衛)로 볼 수 있었겠는가?
○ 문익공 정광필이 김해로 귀양간 뒤에 김안로가 기어코 죽이려고 대간을 교사하여 법에 따라 죄 주기로
논하게 하니,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아침 아니면 저녁에 박두하였다. 자제들은 모두 공의 적소(謫所)에 가 있고,
부인만이 혼자 집에 남아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판서공 원계채(元繼蔡)가 인척간이므로 하루는 부인이 계집종을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원계채
또한 아무런 계책이 나오지 않아, 장님 김효명(金孝命)을 불러 점을 쳤더니, 대답하기를,
“아직도 10여 년 복록이 있으니, 대간의 탄핵이 비록 준엄하더라도 종국에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오.
나를 믿고 안심하시오.”
하였다. 원계채가 그 계집종을 불러
“점장이의 말이 이러하니 희망이 있겠다.”
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이 와서 고하기를,
“대간의 탄핵대로 상감께서 이미 윤허가 내렸다.”
고 하므로 계집종이 듣고 있다가 점장이를 붙들고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울면서,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네 말이 웬말이냐.”
하였고, 원계채도 또한 말이 없이 어쩔 줄을 몰랐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내 점괘대로 본다면 뜻밖의 염려는 만무한데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난들 어떻게 하느냐.”
하고, 드디어 억지로 몸을 빼어 달아나 버렸다. 조금 있다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대간들이 윤허를 받고 해산한 뒤에 다시, ‘죽음을 감형하고 이미 허락한 것은 도로 취소한다.’고 전교하였다.”
하였으니, 대개 감히 재론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성인의 아량은 과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정유년
(1537, 중종 32)에 김안로가 죄를 받은 뒤 나라의 원로로서 임금의 지극히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세상에서 김효명이 점을 잘 친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천명이란 스스로 정해져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 정유년에 중종이 형조 판서 윤임(尹任)에게 비밀리 말하기를,
“네가 중궁을 폐하려 한다 하니 그랬는가?”
하자, 윤임이,
“이것은 반드시 안로의 흉계일 것입니다. 안로가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해치려면 반드시 동궁 보호한
다는 구실을 내세웁니다. 그리하여 먼저 옥사를 일으킨 다음에 여러 사람을 그 속에 몰아 넣으려고 하니,
안로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이 화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속히 그를 제거하옵소서.”
하였더니, 상감께서,
“네가 아니면 안로를 제거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드디오 대사헌 양연(梁演)과 의논하니, 양연이,
“임금의 밀지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안 된다.”
고 하므로, 드디어 전후의 밀지를 가져다가 보여주고 다시 말하기를,
“공이 아직도 의심한다면 상감께 아뢰어 정사를 하되, 승지로 우윤을 삼고 집의로 승지를 삼아,
이것으로써 증거를 삼자.”
하였다. 약속이 결정되어 양연이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중학(中學)에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의논할 큰 일이 있다.”
고 하니, 모두들, ‘무슨 일이냐’고 하자, 양연이 말하기를,
“내가 계초(啓草)를 만들 터이니 잠시 기다리라.”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안로의 아들 지(禔)가 장가드는 날을 노린 것이니, 안로가 손님들을 모아 놓고
있으므로 달리 의심할 일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어떤 서리가,
“오늘 정사의 어명이 내렸습니다.”
하므로, 많은 관원들이 그 계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연이 배가 아프다 핑계하고 썼다 지었다 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또 알리기를,
“승지 아무개가 특별 승진하여 우윤이 되었다.”
고 하므로, 양연이 또한 일어나 뒷간에 가는 체하여 짐짓 늦추고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또 알리기를,
“집의가 승지가 되어서 갔다.”
고 하였는데, 집의 채낙(蔡洛)은 안로의 족당이었다. 그제야 양연이 곧 주머니를 뒤져 계초를 내어 놓으면서,
“내가 망령이 나서 그런 것이니 여러분은 의심하지 마시오.”
하고, 드디어 한 차례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예로부터 소인을 제거하면서 먼저 임금의 뜻을 돌려 놓지 못하면 백 번 하여 백 번 실패한 것은 사세가 그런
것이었다. 송(宋) 나라의 왕증(王曾)과 정위(丁謂)의 일을 중론(衆論)이 통쾌하게 여겼고 당시에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양공의 한 일이 비록 왕문정(王文正)과는 차이가 있으나 자기의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종묘 사직의 화를 능히 제거한 사람이니, 한결같이 청의(淸議)만으로 책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정유년에 수찬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데, 찬성 소세양(蘇世讓)이 대제학으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압록강 가에 가서 그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수찬이 연도(沿道)에서 지은 작품이 잇달아
들어오는데, 그 문장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므로, 소 퇴휴(退休 세양의 호)가 명성에 흠이 날까 걱정되
어, 드디어 사퇴하였다.
이조 판서 심언광(沈彦光)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는데, 자신이 가고 싶어 안로에게 가서 청하니 안로가
말하기를,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될 수 없소. 정운경(鄭雲卿 사룡(士龍))이 지금 기성(箕城 평양)에 있으니, 그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고, 드디어 대신시켰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 송별시를 심언광만이 두 수를 지어 주었으니,
대개 자신이 시에 능한 것을 과시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떠벌여 과장하는 것을 비웃었다.
○ 무술년(1538, 중종 33)의 알성과에 정임당(鄭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이 장원급제하였는데,
중종이 즉시 내시를 달려 보내어 문익공에게 전유하기를,
“경의 손자가 장원이 되었으니, 내가 나라를 위하여 기뻐하며 또 경을 위하여 축하하오.”
하고, 이어 잔칫감을 내려 주며 당일로 창방(唱榜)하여 정언에 임명하고 일등 풍악을 내렸다.
임당이 사복시의 말을 타고 천동(天童)이 앞을 인도하였으며 기생 수백 명이 말머리를 둘러싸고 오니, 온 동네
의 구경꾼들이 문과 길거리에 들끓었다. 문익공이 학질로 몹시 신음하고 있다가 급히 일어나 보며 크게 기쁨
을 이기지 못하였다. 모인 손님들이 매우 취하였고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 마음에 흡족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질이 나아버렸다. 임당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참 효손(孝孫)이로다.”
하니, 자리에 가득 찬 사람들도 칭찬하고 축하하였다.
임당이 총각으로 원계채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 갔는데, 계채는 문익공과 벗이었다. 문익공이 원에게 부탁하
기를,
“글읽기를 권하되 부지런히 하지 않거든 종아리를 쳐도 좋네.”
하였다. 원이 공의 말대로 글읽기를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또 종아리를 치려 하면 공에게로 도망가 버리고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원계채가 언젠가 공에게 묻기를,
“요새는 글 읽는 것이 어떠하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유길이 글 읽는 것은 날마다 ‘아니 불(不)’ 자요.”
하였더니, 임당이 방안에 들어 누워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곧 대꾸하기를,
“할아버님 약주 드신 것은 아침마다 ‘사나울 맹(猛) 자’랍니다.”
하였다. 공이 기뻐하면서,
“자네는 염려 말게, 나중에 꼭 큰 인물이 될 걸세.”
하였다.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은 문익공의 큰 증손이었다. 임당의 창방(唱榜) 당시에 남봉의 나이 12세였는데,
공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는 부러워할 것 없다. 너도 급제하여 내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그 뒤 남봉이 임당보다 앞서 정승이 되었다. 공과 같은 큰 덕으로 이미 두 손자가 있으며 또 앞을
내다보기를, 마치 촛불을 비추고 수를 계산하듯 하였으니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는 말이
과연 미덥지 않은가.
○ 육조의 일을 해당 판서가 모두 결정하고, 그 조(曹) 안의 잡된 일은 참의가 맡아서 하는데 참판은 주관하는
일이 없었으며, 낭청은 모든 사무를 조사 좌랑 한 사람에게 책임지우고, 정랑은 행동을 제마음대로 하였다.
예조가 육조 중에서 조용하고 한가로워 일이 없으면서도 좋은 일은 가장 많았다. 출근한 날에는 음악을 검열
한다 핑계하고 남루(南樓) 위에 나앉아 아리따운 기생과 좋은 음악을 마음껏 골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면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때로는 조사 좌랑을 불러 벌주를 수없이 주는 짓이나 하되, 판서가 듣고서도 예사로
여겨 책망하지 않았다.
임당이 좌랑으로 있을 적에 정랑이 귀찮게 굴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는데, 판서가 불러 계초(啓草)를
쓰라고 하였으나 정랑이 보내주지 않아 한참 만에 들어가니, 판서가 웃으면서,
“좌랑이 필시 정랑의 괴롭힘을 받는가 보군.”
하므로, 공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말하기를,
“정랑이 비단 자기가 맡은 사물를 안 볼 뿐만 아니라 좌랑도 그 맡은 사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소인의 생각으로는 참판과 정랑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참판이 마침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좌랑, 좌랑,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마오. 용렬한 이 늙은이가 태평한 시절을 만나 육조의 아경(亞卿)자리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도, 어찌 태평성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자, 판서와 참의도 모두 껄걸 웃으므로, 공이 자기가 망발했음을 알고 송구하여 재삼 사과하였다.
악군(岳君 장인)이 예조 좌랑으로서 공사를 가지고 찾아갔더니, 임당 공이 좌상으로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 번 망발을 한 일이 있었다.”
하여, 드디어 그 이야기를 꺼내어 웃고 또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젊어서 경솔한 말을 했소마는 그대는 그럴 염려가 없겠지.”
하였다. 대개 악군의 나이 이미 50을 넘어 나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D001] 정국정훈(靖國正勳) :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 반정에 공이 있는 박원종ㆍ유자광(柳子光) 등 많은 신하들을 표창한 것. 뒤에 조광조
(趙光祖) 등의 신진사류들이 이것을 남훈(濫勳)이라하여, 심정(沈貞) 등 76명을 삭제했다. 이것이 뒤에 기묘사화
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음.
[주-D002] 송조(宋朝) :
미모만 갖춘 사람을 말한 것. 춘추시대 송(宋) 나라의 공자(公子)였는데, 미모로 이름이 났었다. 공자(孔子)의
말에, “송조와 같은 미모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면하기 어려우니라.” 하였음.
[주-D003] 남명(南冥) :
조식(曺植)의 호. 수차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하지 않고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상서원 판관(尙書
院判官) 벼슬을 받아 명종을 뵙고,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학문하는 방법을 말한 표(表)를 올리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 갔었다.
[주-D004] 북문으로 들어간 일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비밀 전교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남곤ㆍ심정 등을 불러들인 일.
[주-D005] 노(魯)와 위(衛) :
노 나라는 주공(周共)의 후손, 위 나라는 강숙(康叔)의 후손으로서 원래 형제의 나라였는데 같이 쇠약해지고
어지러워져 정사도 흡사하였다. 어떤 일이 유사하여 분간이 없는 것을 말하는 데에 사용됨.
공자가 “노 나라와 위 나라의 정사가 형제간이로다.” 말한 것에 근원함.
[주-D006] 왕증(王曾)과 정위(丁謂) :
송(宋) 나라 정위(丁謂)가 구준(寇準)을 귀양보내려 하므로 왕증(王曾)이 죄가 너무 중하다 하니, 정위가 한참
동안 쳐다 보다가 말하기를, “집을 빌려준 주인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이것은 왕증이 구준에게 집을
빌려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산릉(山陵)일로 인하여 정위를 귀양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