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신인시각(1) “침묵의 경계에 선 시” 야구의 영혼 외 4편 장 수 철 외야석에 앉으면 야구의 영혼이 느껴졌다 1992년의 모든 시즌이 끝난 홈구장의 외야석에 앉아 나는 시즌 첫홈런을 맞은 투수의 와인드업을 흉내내며 음울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텅 빈 덕아웃에서는 야구의 영혼이 담배껌을 씹는 소리가 쓸쓸히 들려왔다 달리던 말에서 내려 뒤늦은 영혼의 당도를 기다리는 체로키 인디안처럼 야구의 영혼은 불꺼진 스코어보드 위에 걸터앉아 잊고 있던 1992년의 전력투구를 회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외야수의 글러브가 놓친 파울볼처럼 불구의 시간들이 펜스 밑에 처박히며 쌓여갔다. 그새 나는 한 차례 짧고 단단한 바람을 맞는다 그게 야구의 영혼인 줄도 모르고 야구연감에 기록된 역대 가장 절망적인 대진표를 열광의 시즌이 끝난 그 해 1992년 텅 빈 청춘의 기억 속에 옮겨 적고 있었다. 귀에게 그러므로 귀는 내가 한참 간지러운 것이다. 미안하다, 땅 속 괴근처럼 비대해진 의식과잉의 귓밥을 달고 다니는 귀에게 시종 부기가 빠지지 않는 슬픔을 매단 귀에게 한 실패한 혁명가가 젊은 시절 몰고 다니던 고물 오토바이의 사이드카처럼 작고 귀엽고 그러나 늘 텅 빈 귀에게 내 구부정한 오독의 목소리를 제법 알아듣는 늙은 귀에게 구불구불 협곡 속에 내 부끄러운 가족력을 숨겨준 귀에게 혹한 위를 떠도는 새떼들의 차가운 울음소리를 삼키는 귀에게 구순구개열처럼 찢어진 별들의 신음을 알아듣는 귀에게 입 마냥 소리내어 울지 않는 귀에게 다만 듣는 귀에게 두해거리 감나무의 조울증 조울증에 걸린 엄마는 울기가 찾아올 때마다 술을 마셨다. 가을이 오기 전부터 청록의 술병색 감잎들이 뚝뚝 떨어지더니 힘겹게 가지에 매달린 설익은 감들이 엄마의 먹먹한 눈빛처럼 검푸르게 속으로 짓물러가고 있었다. 마루 밑에 술병들의 울음소릴 들으며 잠이 들 즈음 짓무른 감이 떨어지며 호되게 이파리를 내리치는 소리에 섞여 엄마의 울음소리가 지구의 뒤편에서 아득히 들려오곤 했다. 두해거리를 끝낸 감나무에선 몇 개의 감들만 붉은 열대어처럼 조용히 익어갔다. 난산의 가을이었다. 상강을 지낸 감잎들이 바람에 부산을 떨자 엄마의 조증이 시작되었다. 바깥출입이 금지된 우리는 깨진 경대 아래 뜯겨진 엄마의 머리칼을 주워 헤아리며 시간을 보냈다. 방바닥의 먼지를 손날로 훑어 모으던 엄마의 쇄골 사이로 떨어져 뭉개진 홍시 같은 엄마의 젖무덤이 보였다. 엄마의 손날에 눌려 뭉쳐진 먼지보다 더 숨 막히는 적막, 두해거리를 끝낸 감나무에 과대망상으로 부어오른 감들이 몇 아직 매달려 있을 때였다. 혈색 없는 가을 하늘은 너무 높고 엄마는 마당귀 수도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손을 비벼 씻었다. 차라리 엄마가 술을 드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지만 과대망상처럼 우리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부어 있는 엄마의 전두엽 같은 감잎들이 검붉게 낙엽져 버린 불임의 겨울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대관람차 위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기 전의 일이었지 퍼레이드를 떠난 고적대의 노랫소리가 고적하게 울려 퍼지고 습관적인 낙차와 무목적적인 가속과 텅빈 주행거리가 카라멜향처럼 달콤하게 피어오르던 오후였지 부딪고 할퀴던 성난 범퍼카들이 적의를 잃고 서로의 찢어진 귓바퀴에 대고 노래하는 머언 먼 먼치킨들의 나라에는 마법에 걸린 겁쟁이 대관람차와 영지의 변방을 지키는 병든 목마들 그리고 심장을 잃어버린 롤러코스터와 오래 전 함대에서 낙오한 바이킹배 한 척이 살고 있었지 그러니 도로시 이젠 네가 무지갯빛 오즈로 모두를 데려가 줘야겠어 구정물 가득한 해자 위를 떠도는 아기 오리배들도 함께 3차원 레이저쇼가 펼쳐지기 전 그래서 마침내 풀도 나무도 온통 회색빛 야간개장도 없이 연중무휴로 춥고 바람부는 쓸쓸한 캔자스로 데려가 줘야겠어 지독한 회오리바람이 다시 불어올지라도 퍼레이드를 떠난 고적대의 행렬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라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설비쟁이 늘 아버지는 귓방망이를 날렸다네 포수 글러브만해진 아버지의 손바닥은 홈으로 들어오는 상대편 주자에게 악의적인 태그를 날리듯 연식구처럼 부드럽게 살이 오른 내 슬픈 청춘의 뺨때기를 찍어댔다네 반지하 사글세방 내리막 계단에 앉아 골프채로 맞는다는 친구 녀석을 생각하며 골프채로 맞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우 이빨의 강박을 온몸에 각인하는 껌처럼 질겅질겅 질겅질겅 인생을 음유하기 시작했다네 빨래줄에 매달렸던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바람에 날려 어깨 위로 떨어졌다네 후줄근히 늘어난 러닝셔츠의 어깨끈 앞에서 맞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흘렀다네 늘어진 러닝셔츠의 어깨끈을 튕기며 애초부터 조율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생의 불안한 코드에 맞춰 질겅질겅 목가풍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네 삶아도 지워지지 않던 러닝셔츠의 누런 목때처럼 나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 검은 비 외 4편 박 승 출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었다 하늘에선 검은 비가 내렸고 우산을 펼쳐 든 사람들은 그 검은 막 속에서 평화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딩 외벽을 타고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하수구로 흘러들고 사람들은 젖지 않으려 높고 딱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도시의 경계를 막 넘어 온 바람들만 길을 잃고 아무데나 툭툭 머리를 들이받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고 젖은 머리칼을 흔들 때마다 창백해진 하얀 골수가 검게 흘러내렸다 단지 시간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오래된 성벽 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잠이 들었고, 대화를 나누지도 책장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간혹 검은 구름이 걷히면 외투 속에서 상한 날개를 하나씩 꺼내든 사람들이 지상을 날기 위해 푸드득거리고 있었고 도시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그 다음 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내 몸이 검게 물들어가는 걸 속수무책 바라보고 있었다 미궁 바람이 불어도 거리는 좀체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걸음은 도시 안에서 떠돌고 누군가 옥상 난간 끝에서 하늘을 향해 날았지만 끝내 날개는 펴지지 않았고 붉은 흔적만 딱딱한 바닥위에 홀로 선명했다, 그렇게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자주 단단한 뼈들을 들이받았고 놀란 스키드마크 위를 다시 차들이 질주했다 병명을 손 안에 하나씩 받아든 사람들이 약국에서 사온 알약을 한 움쿰 길 위로 쏟아냈고 약에 취한 가로수들이 비틀대며 누런 잎들을 떨어내기도 했다 강 건너편에 닿지 못하는 흐린 시계는 푸른 외곽을 한 뼘도 보지 못했고 경계에는 늘 안개가 무슨 비밀처럼 피어올랐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력을 뜯어내면 힘없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날짜들 죽은 시간들의 썩은 냄새가 거리마다 가득했다 두 눈이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늘 한곳으로 모이지 못하는 분산된 시선들 자고나면 도시는 간판을 새로 내다 걸었고 사람들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검은 유리 창가에 앉아 태연히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정류장 풍경 허기진 가로등이 비릿한 어둠의 촉수를 핥으며 빛을 내고 있었다 자라처럼 낡은 목도리 속에 얼굴을 파묻은 사내가 오지 않는 버스의 뒷덜미를 노려보고 있었고 검버섯이 꽃처럼 핀 초췌한 사내가 어색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먼 이방인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예보도 없이 머리위로 무거운 비를 뿌리며 지나갔고 커다랗고 딱딱한 바퀴가 길 위로 매연자국을 길고 검게 새기며 지나간 후 사람 잃은 빈 정류장이 사막의 선인장처럼 쓸쓸한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총천연색 고정된 웃음을 제 안에 가둔 전단지가 바닥을 훑으며 더러워지고 있었고 상점의 불빛들이 서둘러 문을 닫아걸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왔다가 젖은 어둠만 소복이 쌓아놓고 사라지는 바람들 아직 완전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찢어진 현수막을 흔들며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은행나무에서는 덜 익은 시간들이 길 바깥쪽 바닥으로 떨어진 채 쓸쓸히 명상에 들고 있었다, 버스는 쫓기듯 늘 시간에 뒤처져서 도착했고 길 잃은 영혼들은 어디에서도 끝내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했다 그림자놀이 어둠이 밤의 배후에서 서성일 때, 낮선 그림자 하나가 골목 모퉁이로 스며들었다. 군데군데 웅덩이에 고인 어둠 위로 달빛이 무심히 지나갔다. 깨진 가등의 불빛 사이로 번득이는 날카로운 손잡이가 허공을 향해 부드럽게 그어지는 순간, 맞은 편 철제문 위로는 창문이 굳게 닫히고 있었고 텔레비전 속 단막극의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빗줄기 속 뱉어지지 않는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내장 드러낸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추락하던 허망한 세월 하나, 벽을 짚듯 기억을 더듬는 흐린 눈동자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바닥을 뒹구는 어둠 속에서 빗물에 처연히 씻겨진 붉은 사내의 기억들이 검은 하수구 속으로 천천히 유기되는 깊은 자정, 은밀한 등 뒤로 취한 듯 흔들며 지나가는 맑은 발자국소리를 따라 소리도 흔적도 없이 찍힌 발자국을 지우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또 다시 골목 속으로 유유히 스며들고 있었다. 바람의 시원 바람을 따라 나섰던 적이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지문을 쫓아 숲의 안쪽 영역까지 기웃거린 적 있다. 그 때마다 경계에 피어있는 꽃들의 향기가 허공에 금을 그었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들판은 침묵했고 사위는 조용했다. 그 때 나는 바람 부는 언덕 한 쪽, 길 잃은 고아처럼 서서 세상 모든 삶과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후 숲을 벗어나 지평선 너머 사람의 마을까지 바람의 시원을 찾는 행보는 고독했다. 어디든 바람의 시원이었고 시원을 찾는 눈은 아름답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풍경은 변함없었다.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은 증거가 되지 못했다. 폭풍우 지나간 웅덩이마다 물이 고여 썩었고 바람은 폐허 위를 날고 허물어지는 신의 유적들이 시간을 버리기도 했다. 먼지 이는 바람을 따라 그림자를 쫓는 무리들만이 배후에서 집을 지었고 눈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장님이었다. 추악한 이면의 끝을 들여다보며 내 오랜 방황도 끝이 났지만 바람은 여전히 지구 위를 날며 비명을 남기고 무지개가 피어나는 곳에서도 비밀은 늘 금기였다. 그렇게 어디서든 끝없이 바람은 불어오고 바람은 불어 갔지만 바람의 시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 작품론 “침묵의 경계에 선 시” 신 현 락 (시인 · 본지 부주간) 신인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나는 신인이라는 말이 좋다. 문자 그대로 새로운 사람이니 낡은 사람이라는 말보다 얼마나 좋은가. 시가 늘 새로워야 하듯이 시인은 늘 신인이어야 한다. 시가 새롭다는 것은 소재나 형식의 문제만이 아니다. 소재가 새롭다고 그 시가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직도 시의 근처에도 못 간 것이다. 진부한 소재가 새롭게 쓰이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시의 형식적인 실험을 새로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내용과의 유기적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시적인 효과만 노리는 시는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시의 새로움은 시인의 인식(세계관)의 문제이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대개 ‘표현의 새로움’이라는 것은 내용의 필연성과 결부될 때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새롭게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까닭은 새로움의 이면에 위험과 실패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성시인들의 작품은 불량품이 별로 없는 반면에 새로움 또한 별로 없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실패는 당연히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비록 실패라는 판정이 내렸다고 해도 그 실패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앞에 초보운전 표식을 붙인 차를 보게 된다. 그 문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신도 언젠가는 초보일 때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누구나 신인이었을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의 달인인 양 허세를 떠는 낡은 시인들이 없지 않다. 낡은 시인이 시인의 자격이 없듯이 시에는 달인이 있을 수 없다. 시의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매우 오랜 세월 수련을 필요로 하지만 시는 기능 이상의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신인이라도 한 시대를 풍미하며 후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에게 등단의 선후배는 있어도 시에는 선후배가 없다. 그러므로 신인의 작품을 읽는 행위는 마치 초보운전자의 뒤를 쫓아가는 것과 같아서 약간의 긴장감을 유발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즐겁다. 언제 대형 사고가 터질지 짐작이 되지 않는, 대단한 작품이 나의 느슨한 시의 안목에 브레이크를 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 나에게 즐거움을 선물해온 신인은 장수철, 박승출 시인이다. 1. 숨겨주는 귀 - 장수철의 시 나는 메일로 받은 원고를 프린트하여 막 집어들었을 때 풍겨나오는 문자의 향기가 좋다. 장수철 시인이 외야석에 앉아서 ‘야구의 영혼’을 느끼듯이 나는 가지런한 시의 활자에게 시인의 영혼을 느낀다. 여기에서 내가 시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직 활자뿐이다. 그 사이에 아무런 개입이 없는 것이 나에게는 홀가분하다. 장수철 시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 개인적이라는 것이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부분까지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생각해보니 아직 내 손전화에는 그의 전화번호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장수철 시인이 알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사실이 좋다. 사심 없이 그의 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린트의 순서가 역순으로 나와서 그의 시편 중 끝에 위치한 「야구의 영혼」을 먼저 보았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아니다. 야구에 관해 시를 썼다고 그 시인이 야구를 좋아한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다. 여하튼 나로서는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이다. 외야석에 앉으면 야구의 영혼이 느껴졌다 1992년의 모든 시즌이 끝난 홈구장의 외야석에 앉아 나는 시즌 첫홈런을 맞은 투수의 와인드업을 흉내내며 음울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 「야구의 영혼」 부분 나의 시선은 ‘외야석’이라는 공간과 ‘1992년’이라는 시간에 끌린다. 야구연감을 찾아서 그해의 시즌 우승팀이 어느 팀인지, ‘가장 절망적인 대진표’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이 시와 별 상관이 없는 듯하여 그만 둔다. 시적 화자가 앉은 ‘외야석’이 나에게는 의미 있게 보인다. 그것도 ‘모든 시즌이 끝난 홈구장의 외야석’이다. 그의 홈구장이 어디인지 그의 이력을 추적해보아야 알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시즌이 끝난 뒤에 왜 시적 화자가 텅 빈 외야석에 앉아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외야석’이라는 공간은 마치 감시탑처럼 야구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중심에서 약간 소외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화자는 ‘야구의 영혼이 담배껌을 씹는 소리’를 듣고 ‘불구의 시간들이/ 펜스 밑에 처박히며 쌓여’가는 모습을 본다. 가끔 ‘음울한 휘파람을 불’면서 이렇듯 지나간 목록들을 회상하는 사이에 화자는 ‘한 차례 짧고 단단한 바람을’을 맞았고, 뒤이어 ‘그게 야구의 영혼인 줄도’ 몰랐다고 진술한다. 그 해가 ‘1992’년이고 화자는 그 시기를 ‘텅 빈 청춘의 기억’이라고 명명한다. 시인의 생애사에서 1992년이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이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다. 혹시 실연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년도가 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였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외야석은 ‘야구의 영혼’을 지켜보는 고독한 장소이며 ‘담배껌을 씹는 소리’, ‘펜스 밑 처박힌 파울볼’ 등은 전력을 다하여 공을 던지지만 홈런을 맞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청춘의 상징적 이미지이다. 청춘은 열정과 절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시즌이 끝난 외야석처럼 결국 그 시간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야구의 영혼을 닮은 것이겠다. 그러나 시인은 허무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기억 속에 옮겨 적’으며 ‘음울한 휘파람’을 부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시쓰기는 아마도 그런 행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빨래줄에 매달렸던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바람에 날려 어깨 위로 떨어졌다네 후줄근히 늘어난 러닝셔츠의 어깨끈 앞에서 맞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흘렀다네 늘어진 러닝셔츠의 어깨끈을 튕기며 애초부터 조율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생의 불안한 코드에 맞춰 질겅질겅 목가풍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네 삶아도 지워지지 않던 러닝셔츠의 누런 목때처럼 나는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부분 인용한 시의 앞부분에는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있다. 그 압축의 내용에는 시인이 부끄러워할 만한 가족사, 특히 아버지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다. 시인은 아버지의 직업을 ‘설비쟁이’라고 부르며 아버지를 ‘늘 귓방망이를 날’리는 존재로 진술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에 대한 어린 시절 시인의 판단을 드러낸다. 시인의 아버지는 ‘슬픈 청춘의 뺨때기’를 찍어대듯이 패는 폭력적인 아버지이다. 또한 매우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이다. 아마 시인에게 이 부분은 더 압축하고 싶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작 풀고 싶은 이야기는 인용한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생의 불안한 코드에 맞춰’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러닝셔츠’ 때문이다. 아버지와 시인의 생처럼 ‘후줄근히 늘어난 러닝셔츠의 어깨끈’의 존재론적인 겹침은 시인으로 하여금 ‘맞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것은 조지해리슨이 주역의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보았던 ‘gently weeps’와 의미론적인 겹침을 함으로써 시인에게 생의 존재론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한다. 시인에게 ‘삶아도 지워지지 않던 러닝셔츠의 누런 목때’는 실존적인 진실이며 ‘목가풍의 노래’는 미학적 진실이다. 그 사이에 시인의 시쓰기와 음악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장수철 시인에게 시쓰기는 가난과 폭력에 억압되어 있는 기억을 노래로 승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 비약적인 면이 있음을 지적해 주고 싶다. 조지해리슨이 주역을 펼쳐서 처음 본 단어를 가지고 곡을 짓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처럼 아버지의 어깨끈이 헐렁한 와이셔츠가 시인의 어깨에 떨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필연과 우연이 좀더 세밀하게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번에 보내온 다섯 편의 시중에서 가족사에 관한 중요한 시가 또 한 편 들어있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장수철 시인에게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상강을 지낸 감잎들이 바람에 부산을 떨자 엄마의 조증이 시작되었다. 바깥출입이 금지된 우리는 깨진 경대 아래 뜯겨진 엄마의 머리칼을 주워 헤아리며 시간을 보냈다. 방바닥의 먼지를 손날로 훑어 모으던 엄마의 쇄골 사이로 떨어져 뭉개진 홍시 같은 엄마의 젖무덤이 보였다. 엄마의 손날에 눌려 뭉쳐진 먼지보다 더 숨 막히는 적막, 두해거리를 끝낸 감나무에 과대망상으로 부어오른 감들이 몇 아직 매달려 있을 때였다. 혈색 없는 가을 하늘은 너무 높고 엄마는 마당귀 수도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손을 비벼 씻었다. 차라리 엄마가 술을 드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지만 과대망상처럼 우리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부어 있는 엄마의 전두엽 같은 감잎들이 검붉게 낙엽져 버린 불임의 겨울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 「두해거리 감나무의 조울증」 부분 시인의 가계도에서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엄마의 조증이 시작되면’ 어린 시인과 형제들은 바깥출입이 금지된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데 엄마의 병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어린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뜯겨진 엄마의 머리카락을 주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다. 거기에 ‘엄마의 쇄골’ 사이로 보이는 ‘젖무덤’과 ‘손날에 뭉쳐진 먼지’는 적막감을 더한다. 그 적막감을 견디기 어려워 화자는 ‘차라리 엄마가 술을 드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 너무나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과 형제를 발견하게 된다. 식물에게 해거리는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선택한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그것은 늘 같은 장소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식물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한 해를 쉬면서 다음 해의 왕성한 번식을 기약하는 것이 해거리의 근원적인 법칙이다.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해거리를 한다. 그러나 장수철 시인의 감나무로 상징되는 어머니의 해거리는 두 해에 걸쳐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산의 가을’이어서 ‘불임의 겨울은 그렇게’ 올 수밖에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해거리가 세 해 네 해에 걸쳐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인식인가. 나는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 장수철 시인의 얼굴을 떠 올려본다. 물론 시의 화자와 시인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으나 적어도 이런 체험에 있어서 가상적인 화자를 내세울 까닭이 없는 것이기에 이것은 시인의 근원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집에 없다가 가끔 나타나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조울증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그 끔찍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을 어린 시인에게 집이란 무엇이었을까. 고향이란 또 무엇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러니 도로시 이젠 네가 무지갯빛 오즈로 모두를 데려가 줘야겠어 구정물 가득한 해자 위를 떠도는 아기 오리배들도 함께 3차원 레이저쇼가 펼쳐지기 전 그래서 마침내 풀도 나무도 온통 회색빛 야간개장도 없이 연중무휴로 춥고 바람부는 쓸쓸한 캔자스로 데려가 줘야겠어 지독한 회오리바람이 다시 불어올지라도 퍼레이드를 떠난 고적대의 행렬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라도 - 「대관람차 위에서」 부분 위대한 마법사인 오즈는 그가 내준 과업을 무사히 마친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에게 결핍된 것들을 채워준다. 몸만 있는 허수아비에게는 뇌를, 마음이 없는 양철나무꾼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겁이 많은 사자에게는 용기를 준다. 그러나 도로시의 집으로 가고 싶은 소원은 들어주지 못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지식을 쌓는 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갖는 일, 그리고 용기를 갖는 일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그러니 도로시// … 쓸쓸한 캔자스로 데려가 주어야겠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집과 고향에서 비록 다시 회오리바람을 맞고 고적대의 행렬을 다시 볼 수 없을지라도 꿈을 찾아 헤매는 존재들의 마지막 거처는 그곳뿐인 것이다. 비록 ‘춥고 바람부는’ 캔자스이지만 시인에게 집/ 고향과 오즈는 동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는 내가 한참 간지러운 것이다. 미안하다, (…중략…) 그러나 늘 텅 빈 귀에게 내 구부정한 오독의 목소리를 제법 알아듣는 늙은 귀에게 구불구불 협곡 속에 내 부끄러운 가족력을 숨겨준 귀에게 혹한 위를 떠도는 새떼들의 차가운 울음소리를 삼키는 귀에게 구순구개열처럼 찢어진 별들의 신음을 알아듣는 귀에게 입마냥 소리내어 울지 않는 귀에게 다만 듣는 귀에게 - 「귀에게」 부분 언어의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책상과 의자의 기능과 구조의 차이에서 책상과 의자의 의미가 발생한다. 언어는 그러한 차이의 관계에서 의미의 구체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 귀는 입과의 관계에서 의미가 분명해진다. 시의 귀는 ‘오독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귀이며 ‘입마냥 소리내어 울지 않는’ 존재이다. 다만 ‘듣는 귀’이므로 화자는 귀에게 미안하고 ‘구불구불 협곡 속에 부끄러운 가족력을 숨겨준’ 은신처이기에 고마운 것이다. ‘별들의 신음을 알아듣는’ 청력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이 진술이 허황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입은 가족력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의 귀는 가족의 아픔을 잘 듣고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견자이며 동시에 청자이다.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의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철안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별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말을 하기 이전에 잘 들어야 하는 자이다. 스스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자는 시인 될 자격이 부족한 자이다. 장수철 시인은 잘 보고 잘 듣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사물의 아날로지에 바탕을 둔 언어적 감각이 수련하고 투명하다. 매우 어두운 과거를, 과거에 얽매어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무엇으로 치환하고 변용하지만 자신을 넘어선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수철 시인의 시는 적어도 ‘목가풍’의 한가한 노래는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시인이 견자이며 청자라는 말은 동시에 시인은 말하는 자인 동시에 침묵하는 자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말해야 할 것과 침묵해야 할 것을 구별하는 일은 단순히 습작만으로 터득되는 게 아니다. 어떤 시인은 평생 그 차이를 모르고 시를 쓰다가 죽는다. 내가 보기에 장수철 시인은, 장수철 시인의 입과 귀는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앞으로 장수철 시인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그 입안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말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귀안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장수철의 시를 들여다보았으나 아직도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말하지 못 하겠다. 그의 시는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굳이 전화로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시는 자체로 충분히 자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빈 여백을 채우는 일까지 시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에 대한 읽기를 마치고 박승출 시인의 작품으로 넘어가는 내 귀가 한참 간지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2. 경계에 선 시각 - 박승출의 시 개인의 체험을 주관적으로 진술한다는 점에서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고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 우리는 시적 화자와 시인(혹은 함축적 화자)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의 고백은 시인의 고백이며 그런 만큼 진실하다고 믿는다. 가령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었다는 구절을 읽을 때 독자는 시적 화자와 시인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승출 시가 설정한 진술의 주체는 이제 막 도시로 입성한 시골 출신의 청년이다.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었다 하늘에선 검은 비가 내렸고 우산을 펼쳐 든 사람들은 그 검은 막 속에서 평화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딩 외벽을 타고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하수구로 흘러들고 사람들은 젖지 않으려 높고 딱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도시의 경계를 막 넘어 온 바람들만 길을 잃고 아무데나 툭툭 머리를 들이받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고 젖은 머리칼을 흔들 때마다 창백해진 하얀 골수가 검게 흘러내렸다 단지 시간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오래된 성벽 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잠이 들었고, 대화를 나누지도 책장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간혹 검은 구름이 걷히면 외투 속에서 상한 날개를 하나씩 꺼내든 사람들이 지상을 날기 위해 푸드득거리고 있었고 도시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그 다음 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내 몸이 검게 물들어가는 걸 속수무책 바라보고 있었다 - 「검은 비」 전문 시의 화자가 도시의 낯선 공간에서 처음 본 풍경은 그로테스크하다. 그가 처음 본 것은 검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다. 도시에 처음 들어왔다는 진술에서 그 전에 살던 화자의 주거공간이 도시의 반대편, 변두리나 시골이었음을 암시받는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골에서 도시로 전입해온 이주민이 느낀 문화적 충격을 진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검은 비’는 시골과 도시의 문화적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의 중심적 이미지이다. 검은 비는 일반적으로 비가 가지고 있는 물로서의 생명성이나 정화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검은 것의 상징적 의미는 죽음이다- 사람들은 ‘우산을 펼쳐 들고’ 막을 친다. 그런데 그런 막 속에서 사람들은 ‘평화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화자에겐 영 낯선 것이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중 가장 근원적인 요소의 하나가 개인적인 특질, 쉽게 말해 개성적인 감각이다. 생각은 언제나 감각 이후에 따라오면서 그 시차를 점검하고 다시 그 감각에 대한 정리를 시도하게 마련이다. 그가 처음 본 ‘검은 비’의 감각은 이후 검은 막, 검은 액체의 하수구, 젖은 머리칼, 창백해진 하얀 골수, 검은 구름 등 죽음의 의식으로 확장되어 간다. 검은 비와 대립되는 것은 평화롭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검은 비와 상관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 같지만 화자가 보기에 그들도 검은 비의 영지에 종속되어 있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검은 막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검은 비에 젖지 않으려고 딱딱한 구두를 신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스스로 ‘오래된 성벽’에 자신들을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 검은 비의 공간 안에서 바람만이 -시인은 바람을 개인적 상징으로 쓰고 있다- 길을 잃는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쳐놓은 막 속에 갇혀 ‘잠이 들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 소통 부재의 결과에 이르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도 ’간혹 검은 구름이 걷히면 외투 속에서/ 상한 날개를 하나씩 꺼내든 사람들이/ 지상을 날기 위해 푸드득거리‘는 노력을 하지만 비상에는 이르지 못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라보는 일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몸이 검게 물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화자는 도시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에 속한 사람도 아닌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와 자연, 나와 너의 경계에 스스로의 위치를 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연의 법칙이 더 이상 생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도시의 공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시인의 어둡고 비극적인 의식을 자연과 도시/ 비와 사람들의 대립을 통해 보여준다. 소통의 부재는 자연과 도시의 대립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발생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 나는 내심 ‘검게 물들어 가는’ 자신의 몸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으나 아쉽게도 나머지 시편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진술은 주로 도시의 황폐하고 분열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거리는 좀체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걸음은 도시 안에서 떠돌고 누군가 옥상 난간 끝에서 하늘을 향해 날았지만 끝내 날개는 펴지지 않았고 붉은 흔적만 딱딱한 바닥위에 홀로 선명했다, 그렇게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자주 단단한 뼈들을 들이받았고 놀란 스키드마크 위를 다시 차들이 질주했다 병명을 손 안에 하나씩 받아든 사람들이 약국에서 사온 알약을 한 움쿰 길 위로 쏟아냈고 약에 취한 가로수들이 비틀대며 누런 잎들을 떨어내기도 했다 강 건너편에 닿지 못하는 흐린 시계는 푸른 외곽을 한 뼘도 보지 못했고 경계에는 늘 안개가 무슨 비밀처럼 피어올랐다 - 「미궁」 부분 도시 안을 향한 시선에 걸린 것들은 자살하는 사람들, 중앙선침범 사고, 약에 취한 사람들, 가로수들이다. 도시적 공간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마도 ‘놀란 스키드마크 위를 다시 차들이 질주’하는 비인간적 풍경이리라. 이러한 비인간화의 궁극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는데 죽음의 이미지는 도시의 밖 -아마 그것은 자연이리라-을 향한 시선마저 차단하고 만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푸른 외곽을 한 뼘도’ 보지 못 하는 그의 ‘시계’에서 피어나는 안개는 도시 사람들의 ‘분산된 시선’ 즉 분산된 의식과 고립된 처지를 상징한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고 서로 홀로 있는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검은 유리 창가에 앉아 태연히 커피를’ 마신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들은 좀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경계에는 늘 안개가 비밀처럼’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그 안에 갇혀 있다. 박승출 시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그렇게 갇힌 자로서의 인간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음 시의 경우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있는 공간을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 잃은 빈 정류장이 사막의 선인장처럼 쓸쓸한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총천연색 고정된 웃음을 제 안에 가둔 전단지가 바닥을 훑으며 더러워지고 있었고 상점의 불빛들이 서둘러 문을 닫아걸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왔다가 젖은 어둠만 소복이 쌓아놓고 사라지는 바람들 아직 완전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찢어진 현수막을 흔들며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은행나무에서는 덜 익은 시간들이 길 바깥쪽 바닥으로 떨어진 채 쓸쓸히 명상에 들고 있었다, 버스는 쫓기듯 늘 시간에 뒤쳐져서 도착했고 길 잃은 영혼들은 어디에서도 끝내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했다 - 「정류장 풍경」 부분 사람이 떠나간 빈 정류장에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의 웃음을 가둔 전단지와 상점들의 불빛이 사라진 뒤 ‘먼지를 일으키며 왔다가 젖은 어둠’의 공간 속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길, 그리고 바깥쪽 바닥으로 떨어진 채 명상에 든 은행나무 등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만드는 정류장의 풍경에서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서사적 여유로움을 찾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버스마저 인간처럼 시간에 쫓기듯이 도착하고 떠나간다. 이 황량하고 폐허적인 공간에서 인간이나 사물이나 모두 타율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도시적 공간에서 갇힌 존재들은 타율적인 존재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심화된다. 어둠이 밤의 배후에서 서성일 때, 낮선 그림자 하나가 골목 모퉁이로 스며들었다. 군데군데 웅덩이에 고인 어둠위로 달빛이 무심히 지나갔다. 깨진 가등의 불빛 사이로 번득이는 날카로운 손잡이가 허공을 향해 부드럽게 그어지는 순간, 맞은 편 철제문 위로는 창문이 굳게 닫히고 있었고 텔레비전 속 단막극의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빗줄기속 뱉어지지 않는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내장 드러낸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추락하던 허망한 세월 하나, 벽을 짚듯 기억을 더듬는 흐린 눈동자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바닥을 뒹구는 어둠 속에서 빗물에 처연히 씻겨진 붉은 사내의 기억들이 검은 하수구속으로 천천히 유기되는 깊은 자정, 은밀한 등 뒤로 취한 듯 흔들며 지나가는 맑은 발자국소리를 따라 소리도 흔적도 없이 찍힌 발자국을 지우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또 다시 골목 속으로 유유히 스며들고 있었다. - 「그림자 놀이」 전문 아이들의 그림자밟기 놀이는 대개 해가 떠 있는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시에서는 도시의 골목에서, 그것도 ‘어둠이 밤의 배후에서 서성일 때’ 이루어진다. 그 밤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달빛 덕분이겠지만 그 달빛마저 ‘웅덩이에 고인 어둠 위로 무심히’ 지나가고 낯선 그림자에 의해 ‘날카로운 손잡이가 허공을 향해’ 부드럽게 그어진다. 무슨 사건이 난 것이겠으나 ‘맞은 편 철제문 위로는 창문이 굳게 닫’힌다. 그들이 살고 있는 ‘텔레비전 속 단막극의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골목길은 가장 비인간적인 그림자 놀이터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놀이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 동참은 자율이 아니라 타율이며 인간의 가장 어두운 의식으로의 도피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의 어조는 매우 냉정하지만 이렇듯 비인간화가 극에 다른 놀이터를 견딜 수가 없어서 비/자연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 빗줄기마저 그 사건의 흔적을 ‘검은 하수구속으로’ 유기하는데 일조할 뿐이며 다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속으로’ 스며드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박승출의 시는 최승호, 김혜순, 장정일 등이 걸었던 문명비판시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도시적 공간과 도시인의 삶의 관계를 「그림자 놀이」만큼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흔하지 않다. 도시적 공간은 분열되어 있고 도시인의 삶은 단절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 흔한 자연적 서정이나 감상 따위는 발붙일 곳이 없다. 나는 아직 박승출 시인이 다른 하나의 시선, ‘푸른 외곽’의 세계, 자아의 순수성이나 자연을 통한 상실된 질서의 회복과 우주의 총체성에 대한 비전을 포기한 것인지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없다. 총체성에 대한 포기, 그 길은 정말 멀고 먼 길이어서 보통 심장을 가진 사람은 갈 수가 없다. 그 길을 예전에 기형도 시인이 갔으나 그의 경우는 박승출 시인과는 다르다. 기형도 시에는 -그의 작품 「숲으로 된 성벽」을 보라- 상실된 세계에 대한 갈망과 비전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풍경은 변함없었다.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은 증거가 되지 못했다. 폭풍우 지나간 웅덩이마다 물이 고여 썩었고 바람은 폐허 위를 날고 허물어지는 신의 유적들이 시간을 버리기도 했다. 먼지 이는 바람을 따라 그림자를 쫒는 무리들만이 배후에서 집을 지었고 눈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장님이었다. 추악한 이면의 끝을 들여다보며 내 오랜 방황도 끝이 났지만 바람은 여전히 지구 위를 날며 비명을 남기고 무지개가 피어나는 곳에서도 비밀은 늘 금기였다. 그렇게 어디서든 끝없이 바람은 불어오고 바람은 불어 갔지만 바람의 시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 「바람의 시원」 부분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지만 한편으로 신전을 짓기도 한다. 인간에게 내재한 신성을 가장 극명하게 추구하는 존재는 수도자이기 보다는 예술가이다. 신전에서 기도하는 자는 수도승이지만 신전을 건축하고 꾸미는 자는 예술가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아우라는 그 신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어법을 빌면 ‘신의 유적들이 시간을 버리는’ 것과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신전의 조각을 들고 박물관을 꾸미거나 미술사 책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모두 ‘바람을 따라 그림자를 쫓는 무리들이 배후에서 짓는’ 집이어서 그들의 눈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장님’일 뿐이다. ‘바람의 시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선언적 진술은 상실된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총체성에 대한 회복을 포기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오래된 사원’은 부재하거나 폐허일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경계에 선 박승출 시인이 어디로 갈 것인지 짐작이 가능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가 좀더 다양한 시각과 진술방법을 모색할 지점 또한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문명비판과 도시적 공간의 분열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인간화의 현상을 고발하는 시가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90년대 이후 우리의 시에서 이러한 공간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시의 미학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도 그 중 한 부분다. 나는 그가 경계에서 문명의 안과 밖, 도시와 자연, 나와 너의 대립적인 세계를 오래 바라보는 자세를 견지했을 때 그의 감각은 훨씬 풍요로운 이미지들을 그의 시 속에 불러오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그가 경계에서 검게 물든 자기의 몸, 도시의 불모성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육체성이 담긴 목소리를 정직하게 안개 밖으로 드러내기를 기대한다. 그렇지 못하게 될 때 자칫 그의 시는 관념의 늪에 빠져 긴 침묵에 들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분열적인 세계를 찾아가던 존재들이 너무나 일찍 자신의 언어에 함몰되어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정리하자.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지시적인 언술이 끼어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이 단순히 시에 대한 감상이나 해석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던 까닭이다. 시평에 관한 글들이 복잡하고 질긴 생각의 끈들을 체계적으로 단순화시키는 작업임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오독 또한 그래서 발생하는 것.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오독도 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한 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시적인 언술을 썼다고 해서 그 길을 그대로 따를 시인들이 아님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외야석에서 단물이 다 빠진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지난 시간을 사유하는 장수철 시인과 도시의 거리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박승출 시인과의 거리를 측량할 수 있는 감각을 나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기에 두 시인을 비교하여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아날로지에 바탕을 둔 서정적인 언어로 개인적인 체험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장수철 시인이 공을 들이고 있는 반면에 박승출 시인은 분열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 혹은 개인을 넘어선 세계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적어두겠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두 시인의 시적 화자가 모두 성장의 모티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의 서사는 신인들이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자기 정체성의 탐구와 관련이 깊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시는 모두 자아와 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 그들의 시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진화할지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기로 한다. 선택은 오로지 시인의 몫이다. 다만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해도 가끔은 자기가 선 자리를 점검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시는 뛰어야 할 코스와 거리가 정해져 있는 마라톤경주와 다르다. 자기의 길은 자기가 선택하며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한 것이 시의 길이다. 한 편의 시는 그것이 시작인 동시에 끝인 것처럼 시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세계의 시작이고 끝인 것이다. 사실 내가 신인의 작품에게 기대하는 것은 세계의 시작이고 끝인 새로운 존재의 모습이었음을 부기하며 글을 마친다. ◆ 신현락 시인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 저서로 『한국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shinpoet@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