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호우 , 큰비, 폭우에 관한 시모음 6)
폭우 속에서 /김관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다변(多辯)에 목 말라오는 요즘
사람이 부쩍 그리워
창가, 바람 스치는 나무에
빗소리 그 흐느낌 부럽다
카페 유리창엔
세찬 빗줄기
빨라진 물살
흔들리는 나무
날개 젖은 물새
음악 흐르는 강변
못내 그리운 한 사람
기억 한 자락 움켜쥔 채로
은은한 커피 향에 추락하느니
물살 거스르는 물고기이고 싶다
폭우 /조경선
토담집 처마 밑 발자국이 깎여 나간다
거미가 쳐놓은 사다리를 삼켜버리고
바람은 방향을 찾지 못해 문을 후려친다
빗물이 꼬리를 세워 흙의 비밀을 파고들 때
실족한 오른발은 붉은 피를 파먹는다
한 계절 낱낱이 파헤쳐진 헛소문부터 살냄새까지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그 사이 당신이라는 좌절이 쏟아진다
걸음에 묻어 있던 흙냄새가 허공에서 갈라진다
폭우 /해련 류금선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
저리도 통곡일까
제미움이 쌓인
황량한 슬픔
바람에 찢기는
숨구멍마다
소스라치는 비명.
장대비 내립니다 /양재건
꼭두새벽부터 장대비 내립니다
이렇게 하면 속 시원하냐 하며
으스대듯 내립니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강바닥을 위해
시름의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는 환자들을 위해
너희들 울음 쌓느라 애쓰고 애썼다며
으스대며 장대비 시원하게 내립니다.
하나에도 벅차고 지키기 힘든 사랑도
장대비 같이 와~하며 몰려와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장대비도 이래서 더욱 좋습니다.*
*김수영의 '여름밤'에서 변용
장댓비 /은파 오애숙
누가 내 속 알아
가슴 저며 멍울 만든
그 상흔 내 던져 버리라고
하늘 창문 활짝 열어젖혔는가
누가 내 마음 알아
하루 종일 속 시원히
하늘 우러르며 통곡하라
폭포수 쏟아부으며 서 있는가
누가 내 속 알아
심연 저 밑 수미 져 아린
한 맺힌 사연의 응어리 하나 씩
빗줄기에 버무려서 보내라고 하는가
누가 날 위로하려
실컷 울음보 터트려서
종일 장댓비에 흘려보내라고
창문가 통곡의 벽을 두드리고 있는가
장대비 내리던 날 /박언지
배냇골 가는 길
800고지
운무에게 내어준
산허리에 장대비
후미진 계곡과 숲을
출렁이는 바다를 만든다
바람에 부서지는 적락운운
빗물 사이로
떠돌던
소나기의 회한인가
산꼭대기의 물상을 지운다
숲을 헤집고 길을 찾는
계곡물은
산허리를 껴안으며
수심을 모르는 바다가 된다
바다는 산사에서
가부좌 하고
오랫동안 염주를 돌리는
할머니의 회심곡이 된다
장대비 /이재환
떠돌이
바람 소리
나무를 흔들어 대고
하늘엔
먹구름 몰려오더니
인상을 쓴다
짓궂은
먹구름 바람 따라
소나기 심술을 부린다
조용하던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어
신음을 한다.
폭우 /문저온
죽순은 1에서 2를 꺼낸다
2에서 3을, 3에서 4를, 드디어 18에서 19를 꺼낸다
간밤 폭우 속
부릅뜬 기록원의 너덜너덜한 눈알
순은 19에서 18을 꺼낸다 18 속 17, 17 속 마침내
1을 꺼낸다
우후의 죽순은 직립한 뱀처럼 버틴다
성기를 뽑아들고
쩔쩔 매는
기록원의 너덜너덜한 눈금
너는 0에서 1을 꺼낸다 너는 0에서 10을 꺼낸다 우리는 다시 0에서,
죽순은 치솟고
꼭대기는 꼭대기
꼭대기는 꼭대기
밖에 없다
한 다발 장대비 /조말선
한 다발의 장대비가 배달되었다
밑동이 바싹 잘린 장대비 머리에 구름을 매단 장대비 구름은 활짝 피어 있었다
포장을 하지 않은 장대비는 노란 리본에 질끈 묶여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꼬리를 잘라버렸다
뿌리째 보낸 비에 내가 다 젖을까봐?
그는 한번도 비를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
비는 바깥에 두는 것이 좋아, 그는 활짝 핀 구름만 보고 버리라 한다
비는 오래 맞을 것이 못 된다고 한다
나는 한 다발의 장대비를 궁리했다
꽃병에 꽂아도 보았다가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구름은 점점 허물어졌다
구름은 점점 병색을 띠었다
한번 잘린 구름은 뜬구름이 되었다
한번 잘린 장대비는 쏟아지고 없었다
나는 노란 리본에 질끈 묶여 있었다
장대비 /은파 오애숙
하늘도 내 맘 알아 온종일 시원하게
하늘창 화짝 열고 통곡하라 쏟아붓네
수미져 아린 마음의 깊은 심연 아는지
한 맺힌 희로애락 응어리 하나하나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해 버무리어
곰삭힌 빗줄기속에 흘리어 버리라네
심연의 모든 것들 울음보 터트려서
날 위해 위로하려 온종일 비내는 가
세월의 강줄기 따라 빗속에 보내련다
장대비 /남연우
물로 만든 죽창들이 쏟아집니다
먹구름 뒤에 참호를 파놓은 그대가
일제히 수직 관통상을 입힙니다
뇌우가 거처하는 하늘 아래
숨을 곳이라곤, 허허벌판
무작정 뛰다가 허우적 걷다가
비닐우산을 잃어버린 머리카락 끝에
슬픔의 촉이 뾰족한 빗방울들이
습한 습성을 파쇄하는 소리
그대 창가에도 들리나요
하룻밤 새 장대높이뛰기 한
우후죽순들을 바라보나요
백련이 오소소한, 나의 여름은
연잎을 스쳐 간 장대비가 부러집니다
한차례 잔물결이 일렁입니다
폭우 /이도연
그런 날을 보지 못했다
천지가 개벽한다는 단어 앞에 어둠의 세상이 요동치며 비바람을 몰았다
푸른 날이 선 칼날을 휘두르는 헤파이스토스*의 불꽃은 장엄하고 커서 표현할 수 없는 카오스를 연출했으며 원죄의 근원을 더듬어 올리는 기도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크게 떠도 낯선 세상의 풍경 앞에 심장이 졸아들었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점의 불빛들도 눈을 감았다
어둠을 쓸고 가는 물줄기는 놀라 흔들리는 가로등 밑에서 오렌지 빛 물 입자를 튕겨내며 비산하고 생성하며 소멸하고 있었다
창에 고여 있는 어둠의 명암에 이방인의 얼굴이 머물다 낯선 표정으로 웃으며
희미한 시선 아래 이내 빗방울로 흘러내린다
비와 바람의 조화와 수자폰 저음과 심벌즈의 날카로운 소리의 영혼이 천둥과 번개로 서로를 밀고 당기며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순간
짧은 내 생의 중심은 초점 없이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장엄하고 우렁차게 흔들리는 지축의 공포를 밀어내기 위한 노력은 소멸하는 한줄기 가여운 눈물일 뿐이었다
맑게 갠 하늘
천지창조의 빛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제를 올린다
폭우가 지난 아침의 잔해가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에 널브러져 있어도
치유의 아침은 오리라 긍정의 믿음과 신념은 언제나 옳다.
*헤파이스토스의 : 그리스 로마신화의 대장장이, 불의 신
폭우 지난 /신철규
나는 지은 죄와 지을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분명한 신에게
빗줄기의 저항 때문에,
노면을 가득 메운 빗물의 저항 때문에,
핸들이 이리저리 꺾인다
지워진 차선 위에서 차는 비틀거리고
빗소리가, 비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차 안을, 메뚜기 떼처럼, 가득 메웠다
내 가슴을 메뜨기들이 뜯어 먹고 있다
뻑뻑한 눈
비틀거리는 비
폭풍우를 뚫고 가는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몸부림처럼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찬 숨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분명한 신
너무나 많은 숨
이미 울고 있었지만 울고 싶었다
이미 살아 있었지만 살고 싶었다
이미 죽었지만 죽고 싶었다
운전석 천장에 물방울이 맺힌다
추위에 몸이 떨린다
컴컴한 방, 손전등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비밀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도둑처럼 앞으로 전진
나는 다시 신을 잊었다
폭우 /유희경
아이들은 산딸기를 따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풀숲에서 구두 한 짝을 발견했다
지난여름 물빛 다발로 쏟아지던 큰비가 벗어둔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깔깔 웃었다
깔깔 웃던 그중 하나가 구두를 신었다
그중 하나가 산딸기를 쏟았다
그중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빨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귀신처럼, 지난 비들이 쏟아진다
하나가 달리자 나머지도 달아났다
구두를 버려두고
붉고 시큼한 맛이었다
장 대 비 /高松 황영칠
그대 소식 전하는
긴급 전보가 왔다고
장대비가 창문을
밤새 두드렸습니다
끝내 못 들은 척
애써 외면하고 말았더니
당신이 쏟아낸 눈물로
온 세상이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랑아
창문 열고 소식 차마 묻지 못한 까닭은
그대 마음에 폭풍이 다시 휘몰아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보름달 밤 초가지붕 위 박꽃처럼
환한 얼굴로 하얀 이 드러내고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 가슴의 상처가 먹구름이 되어
다시 몰려올까 걱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대여
당신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참지 못한 내 눈물 보가 터지면
고이 잠든 당신의 창밖에도
또 한 번
장대비가 쏟아지겠지요
하지만 내 가슴이 너무 아픈 것은
쏟아지는 내 눈물 홍수에
당신의 고운 사랑
영원히 떠내려 가버릴까
그것이 더 두렵습니다.